탐욕스러운 돌봄 - 잘 키우려 할수록 나빠지는 불행에 대하여
신성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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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요커 엊그제 올라온 26년 봄 문화 프리뷰 기사에서 TV, 연극, 댄스, 영화, 전시 등에 대해 소개했다. 이중 내가 관심있는 영화와 미술전시를 읽다가 표현이 인상깊어서 가져와 설명한다. 솔직히 뉴요커 정갈한 문단에 감각적이고 뉘앙스가 풍부하면서 응축적이 표현 정말 잘써서 읽으면서 짜증난다 너무 질투햇!


출처 : https://www.newyorker.com/culture/goings-on/spring-culture-preview-2026


1. 미술분야 봄시즌 기대전시

뉴욕 멧 라파엘, 뉴뮤지엄 재개관 뉴휴먼전(히토슈타이얼 막스에른스트), 모마 프리다디에고전, 뒤샹전, 모마 5주년 중견작가 단체전(53명), 휘트니 비엔날레를 꼽았다.


좋은 표현

서두에서 : "This spring is an exciting season for acolytes of contemporary art, because two of New York’s most important recurring survey shows will align, giving viewers a chance to engage with a broad swath of new work."

올봄은 현대미술의 열성 추종자들에게 무척이나 설레는 계절이다. 뉴욕에서 가장 중요한 정기 기획전 두 개가 같은 시기에 맞물려 열리기에 관람객들은 방대한 범위의 신작을 폭넓게 접할 기회를 얻게 되기 때문이다.


1) a broad swath of NY

스웨스는 낫을 한 번 휙 휘둘러 베어나간 한 줄기 자리를 말하는데 뉴욕의 구역화된 거리를 시각화면서 넓은 영역이라는 의미를 전달한다. 뉴욕 여러 곳, 광범위한 뉴욕시가지에서, 정도로 풀 수 있는 말이다. 깔끔하고 괜찮은 표현.


2) acolytes of contemporary art 현대미술 다니는 사람, 열성추종자

학생, 제자 동의어로 pupil도 있고 disciple도 있는데 디사이플은 약간 그리스도적 느낌의 사도다. 한편 애콜라이트는 일본 zen이나 스타워즈와 언급되는 경우가 많고 명상적이고 동양적인 분위기를 풍겨 미술전시를 조용하지만 열정적으로 보는 사람을 수식하기 좋은 표현이다. 스승 관계를 함축할 수도 있어 열성 추종자+문하생의 느낌. 이정재가 스타워즈 시리즈 출연했을 때도 제목이 애콜라이트였다.


3) recurring survey shows는 명사구로 반복되는(리커링) 서베이 쇼(개괄, 개설하며 폭넓게 조망하는 전시)라는 뜻이다. 뒤에 will이라는 조동사(modal verb)가 나왔으므로 동사일리가 없다. 한 세트의 명사구다. 주기적으로 돌아오고 반복 개최되는 정기 동향전 정도의 의미다.


다른 단락에서

3) 뉴욕 멧에서 하는 라파엘전은 일생일대의 기회(once-in-a-generation opportunity)라고 하는데 문단을 깔끔하게 It’s worth braving the crowds for this one(인파를 무릅쓰고라도, 사람이 붐비는걸 감수하고라도 볼 가치가 있다)라고 맺었다.


brave는 형용사로서 용감하다, 지만, 동사로서는 위험이나 불쾌함을 무릅쓰다, 감수하다라는 뜻이고 brave the snow(눈보라를 맞서다) 같은 식으로 쓰인다. 영문학에서 종종 등장하는 진짜 글맛 있는 표현이다.



2. 영화분야 올봄 기대작


“The Devil Wears Prada 2” (May 1) boasts many of the same actors from the first installment—including Meryl Streep, Anne Hathaway, Emily Blunt, and Stanley Tucci—along with new ones, such as Simone Ashley, in a comedy about a fashion magazine’s efforts to cope with new media.

5월 1일 개봉하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패션 잡지사가 뉴미디어 환경에 적응하려 애쓰는 과정을 그린 코미디로, 1편에 출연했던 훌륭한 배우들(나열 생략, 다들 아는 이름들이므로)을 대거 재등장시키면서 시몬 애슐리 같은 새로운 배우들도 등장시킨다.(문장 순서 재조정)


여기서 boast는 뽐내다, 자랑하다가 일차적인 어의고, 나아가 자랑할 만한 무언가를 갖고 있다, 라고 푸는데 문맥에 따라 탄력적으로 번역한다.


시즌1에 출연한 훌륭한 배우들을 자랑하다, 라고 직역하기보다 더 적절하게 풀 수도 있다.


1편 배우들이 훌륭하다, 자랑할만하다라는 점을 관형격으로 수식하고

boast.. from을 살려 재기용, 대거 재등장하다라는 용언으로 바꾼다. 이렇게 하는게 좋을 것 같아서 위처럼 바꾸었다.


이때, first installment는 1차 납입금, 할부금 1회차 정도의 뜻인데

첫 번째 영화first film나 시즌1이라고 밋밋하게 쓰지 않고 시리즈 프랜차이즈의 연속성을 의미하면서 영화업계의 상업성을 표현했다.재밌고 적절하다.


3. 뉴요커에서 언급한 봄시즌 영화 기대작품 중에 중동 지역 작품이 많다. 정치적 문제도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 들어올까? 깐느 경쟁분야 출품작은 가능할 수도.


아랍어와 현대 히브리어가 음성으로 들리는 영화다. 같은 아랍어라도 ㅈ를 ㄱ로 발음하는 이집트 구어와 20세기 초 팔레스타인을 배경으로 단아한 영국억양과 요르단쪽 레반트 구어(샴 암미야)가 공존하는 작품은 귀 밝은 이에게 달리 들린다.


1) 엘시시 이집트 대통령 전기영화 Eagles of the Republic (4월 17일)

 - 굿뉴스 느낌. 감독은 스웨덴인 Tarik Saleh. Abdel Fattah El-Sisi에 대한 바이오에픽.


https://youtu.be/fdCVRcZ4x4c


2) 이스라엘 텔아비브 작곡가 겸 뮤지션이 가자지구 점령에 대한 찬양가를 의뢰받은 스토리의 풍자영화 Yes (3월 27일) Nadav Lapid 감독.

 - 풍자극이 아니었으면 제작, 개봉이 어려웠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궁금해서 트레일러를 보니 EDM이 들리는데 지난 2023년 하마스가 이스라엘 남부 노바 음악축제를 기습해 납치해 간 사건이 떠오른다.

https://youtu.be/-1onUOERhXo?si=HoRI3PsITZEC_3Tk


3) 1936년 영국점령시기 팔레스타인의 한 마을에 유럽에서 온 유대인 난민이 도착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Palnestine 36 (3월 20일) Annemarie Jacir 감독. 역사드라마.

 - 웅장한 오케스트라 배경의 다키스트 아워같은 영국시대극, 현대역사물 좋아한다면 좋아할지도

https://www.youtube.com/watch?v=wWtwnae_5UI


4. 서브스턴스때문인지 바디호러도 인기를 끈다.

The fraught bonds of parents and children get a varied workout. Julia Ducournau’s “Alpha” (March 27) is a body-horror drama about a teen-age girl (Mélissa Boros) who, as a result of a tattoo, may have contracted a mysterious disease that her mother (Golshifteh Farahani), a doctor, treats. 

귀찮아 번역 생략. 


중세와 달리 아무도 신체훼손하지 않고 안전한 집에서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현대에 바디호러 픽션을 본다.

유복한 금수저 작가가 끔찍한 그림을 그리고 찢어지게 가난한 작가가 아름다운 판타지를 그리는 것과 비슷하다.


5.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 원작기반 애니메이션 (5월 1일)도 눈에 띈다. Andy Serkis 감독.


동물로 은유해서 느슨하고 얕게 미국정치를 풍자하는 시의적절한 영화다. 영화개봉시점의 정치현실을 풍자하는 촌철살인 애니다.


극단주의 정치 시대다. 이런 숨막히는 시대야말로 마치 왕정의 광대처럼, 은유와 해학이 넘치는 풍자극이 조명받는다고 생각한다. 현실도 너무 각박하고 사람들이 양극화되어 싸우는데 픽션에서 마저 첨예한 문제를 다루고 싶지 않은데 그렇다고 너무 판타지로 현실도피하고 싶지 않다. 뜨거운 머리를 식혀주며 해학으로 웃게해주고 위트로 긴장을 풀어주면서 약간의 교훈을 남기는 이솝우화 형식이 마치 더위 먹은 자에게 찬물을 촥 끼얹어주는 것 같아, 앞으로 이 뜨거운 병오년과 뜨거운 기후변화의 시대와 뜨거운 화9운의 시대에 필요한 것이라 생각하다. 그래서 지난 포스팅에서 장항준 감독이 3.1 운동 배경으로 웰컴투동막골 풍의 영화를 만들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https://youtu.be/g8wLmj9SiKM?si=uWLTo5l6H4mdytX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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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칸 문서 추천을 받아 조금 넘겨가며 빠르게 읽어보았는데 AI 환경파괴 이슈가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인용참고)


문득 데이터센터는 AI의 수도원같다고 퍼뜩 느꼈다. 오늘의 아무말 대잔치가 시작될런가보다. 뭐가 비슷한가. 수도원에서는 인간이 기도하고 데이터센터에서는 기계가 연산한다. 침묵 속에. 끊임없이 반복해서 작동한다. AI의 litany연도는 기계음이며, 기도서는 깃허브라. 현실 속에 드러나 보이지 않으나 세계를 지배한다.


문서 자체의 성격도 생각해본다. AI 진단서라는 외피를 입었으나 해석학적 주권은 신학에 있다고 일갈하는 선언서처럼 보인다. 윤리학적 권력문서라고 할 수 있을까


안티쿠아 노바문서 3항에서 AI가 공공 광장에서 진리의 위기(crisis of truth)를 만들 잠재적 위험성을 지적한다. 으레 인공지능을 거짓말하는 기계로 생각하지만 정확히는 의미를 무한히 재조합해 양산하는 장치라고 생각한다. 하늘에 닿고자 증식하는 고대의 바벨탑의 컨템포러리 버전이다. 



로고스의 조화로 구성된 코스모스가 실리콘과 코드의 유니온, 즉 물질과 논리의 조합으로 환원되어 그 안에는 사랑의 의지가 결여된다. 번개를 맞고서도 인간의 욕망은 사그라들지 않았고 여전히 선악과를 따먹도록 유혹한 뱀이 살아 있다.


그래서 AI가 실제로 위협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교회의 해석권이다. 문서는 인간과 지능을 정의하는 권한이 여전히 교회 공동체에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존재론 경쟁 끝에 AI가 지능이라는 단어를 점유하고 지능을 참칭하게 되면 인간의 본질을 데이터와 확률이 규정하게 되고 통계와 알고리즘으로 지능을 판단하게 된다.


신학이 인공지능을 컨트롤하지 못한다면 진리는 계시가 아니라 확률로 전락할 것이다. 권위는 전통이 아니라 알고리즘 신뢰도로 판명될 것이다.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아니라 플랫폼으로 변모할 것이다. 주인의식을 지닌 관리자로 호명된 존엄한 인간이 기생적 소비자가 된다. 그래서 이 문서의 행간을 읽으면 AI가 신학의 경쟁자로서 경계되는 게 보인다.


AI는 인간을 대체할까? 생성형 인공지능은 인간의 노동이 갖는 의미를 탈각시킬까 AI는 인간을 소외시킬까? 혹은 도리어 인간의 오랜 욕망과 교만을 드러내는 거울은 아닐런지. 


이미 지니고 있지 않은 것은 드러날 수 없다. 인간에게 전능에 대한 부적절한 질투, 예측 가능성이라는 불가능한 욕심, 통제 욕망이라는 불경한 속마음이 없다면 AI가 이를 기술적으로 구현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AI를 통해 비로소 만천하에 낱낱히 드러난 것은 사람의 본질과 추악함 그 자체다. 그 결과 자신 안에 내재된 신적 속성을 고양시키지 않은 채, 열화된 버전만 반복적이고 충동적으로 현현된다.


그러나 희망은 있다. 성스러움은 이미 세속 안에 배태되어 있는 바... 한 줄기가 빛이 영원한 어둠을 밝히고, 한 줌의 소금이 거대한 바다의 속성을 유지하듯, 단 하나의 사랑이 무한증식하는 거짓의 회오리를 잠재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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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번이 인상적이네요 current AI models and the hardware required to support them consume vast amounts of energy and water, significantly contributing to CO2 emissions and straining resources.

좋아요 클릭 한 번으로 촉발되는 전기 신호가 해저 케이블 왔다갔다하면서 바다 온도를 올린다는 책이 생각났어요














질서 있는 사랑을 말한 아우구스티누스라면 기계의 창조세계를 소모보다 중요한 건 인간이 무엇을 더 사랑하는가에 있다 했을지 모르겠어요 우리는 진리를 사랑하는걸까요 아님 속도와 편리를 사랑하는걸까요 AI의 환경파괴문제는 기술문제라기보다 마음의 지향성과 사랑의 질서가 왜곡된 증상일지도요 그러다보며 정보를 자연보다 더 실재적인 것으로 여기게 될지도요


https://www.vatican.va/roman_curia/congregations/cfaith/documents/rc_ddf_doc_20250128_antiqua-et-nova_en.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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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북서울시립미술관 2층 유휴공간 헤르츠앤도우 작가의 지구울림 앰비언스가 좋았다면


Trent Reznor & Atticus Ross도 좋아할 것 같다

나도 방금 알게 됨


2. 그리고 오늘에서야 알게되었는데 이들이 만든 음악은 이런 게 있었다! 와우


영화 챌린저스 둠칫둠칫

https://www.youtube.com/watch?v=63k6AfvLsso


디즈니 소울의 에피파니 앰비언스

https://www.youtube.com/watch?v=vbBVrfkFe2I


영화 소셜네트워크 (여기서 56:30 부근은 다프트 펑크의 트론이 생각난다)

https://www.youtube.com/watch?v=uUnOL6T3FN0


3. KFC 투움바 켄치밥 괜찮다. 광고로 같이 떠서 갑자기 생각남.


안 매운 고추장 버터 볶음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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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아킴 트리에 감독의 센티멘탈 밸류 보았다. 감독의 두 번째 장편에서 젊은 레나테 레인스베를 등용해 이전 작품으로 여우주연상, 이번 작품으로 심사위원상을 받으며 번갈아가며 동반 깐느입성했다.

영화는 아버지와 딸의 화해, 자매간 우정, 감독과 배우로서 전문가의 고독을 연극무대와 스크린의 관계 속에 녹여낸다. 가족의 굴레에 고통받고 책임의 무게를 어릴 때부터 견뎌 와야했던 K-장녀 이야기를 북유럽 디자인 세팅에, 느릿한 테이크가 특징인 인디영화의 문법에 계승한 것 같기도 하다.

지지난 주에 개봉하고 바로 본 다음 대중교통에서 끄적인 글을 계속 스레드 임시저장본에 묵혀두었는데 이러다간 정말 글을 마무리하지 못하겠구나 싶어서, 빨래 시간이 조금 뜬 김에 얼개만 마무리해 본다. 앨페닝이 분한 레이첼 캐릭터가 체호프같다 생각했고 책을 재독해서 더 좋은 글을 쓰려고 했다가 계속 묵혀두고 있다. 늘 이런 식이다. 국보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도 몇 천 자 쓴 노트가 석화되었다

영화는 극장에서 메데이아의 고전연극무대 시작해 넷플 현대가족극 촬영지로 수미쌍관을 맺는다. 가족 관계도 연극치료의 일환이고, 서로가 서로의 입장에서 배역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네모지고 각진 시각적 프레임을 매체적 특징으로 하는 연극무대와 스크린에 서려있는 애증어린 관계가 읽히기도 한다.

헨릭 입센을 닮은 긴장어린 실내극, 안톤 체호프 모티프의 주변적 캐릭터, 스웨덴의 거장 잉마르 베르만이 잘 구사했던 의도된 신학적 침묵 같은 레퍼런스가 오슬로의 차디찬 공기와 과묵한 스칸디나비안의 얼굴을 통해 전해진다. 감독은 가족이라는 사적제도를 해체하면서 해부학자의 냉정함과 정서적 유대감을 유지하는 불가능한 묘기를 선보인다.

노년의 영화감독 구스타브 보르그를 연기한 스카스가드(Stellan Skarsgård)는 마블에선 천문학자, 듄에선 냉정하고 뚱뚱한 귀족(여기서 인사이트를 얻었나?), 캐리비안의 해적에선 저승귀 선원을 연기했다. 이번 작품에선 명성과 실패, 즉 페임과 페일류어를 얼굴에 드러낸다. 경력은 화려하나 가정은 처참하다. 공적 자아는 단단하지만 사적 자아는 균열되었다. 아버지로서 상합하고자 하나 딸은 이해할 수 없다. 왜 이제와서 돌아온 것인지 설명을 원하나, 그냥 각본을 읽어보라는 이해할 수 없는 말만 한다. 서로 욕망이 미끄러지는 순간이다. 얼굴을 마주하는데 말은 어긋난다. 조준경을 벗어나 잘못 발사된 말들이 난사될 뻔하다, 감정이 응결되고 설명은 침묵으로 전환된다.

영화를 보는 내내 레이첼이 과연 서사에서 필요한 캐릭터였는지 고민했다. 어차피 엔딩에서 같은 시공간을 살아왔어도, 동생에겐 언니가 있어서 엄마 역할을 해주었다는 결론으로 이어질 것이라면 레이첼은 왜 필요했을까? 각본에 흥분하다가 이 감정을 살릴 수 없을 것이라 비관해 제풀에 지쳐 때이른 퇴장을 하는 레이첼. 체호프에서 많이 보이는 주변적 캐릭터로 설명이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레이첼은 가족을 파괴하는게 않니다. 되려, 집의 크랙으로 상징되는 이미 균열이 가 있는 가족관계를 더 선명하게 보이도록 하는 조연이다. 레이첼은 메인 네러티브의 사건을 폭발시키기보다 침묵을 증폭시킨다. 누가 누구를 필요로 하는지, 누가 누구를 대체할 수 있는지, 그리고 사랑이 어디까지 연기 가능한지, 등등 관객이 으레 품을만한 질문이 레이첼을 통해 또렷해진다.

비노르웨이인 외국배우로 영화제에서 잠깐 만난 관계이기에 직업적으로도 관계적으로도 혹은 국가적으로도 외부자다. 그런데 아버지 구스타브와 두 딸이 기억과 원망, (할머니 자살로 상징되는) 세대를 잇는 상처의 악순환 속에 갖혀 소리없는 절규를 지르는 가운데 레이첼이 아무런 정서적 채무가 없는 자로 등장했다가 기존 부녀관계를 강화하고 퇴장한다.

제목으로 비유하면 정서적 가치가 없는 자가 등장해 기존 딸들에 대한 정서적 가치를 환기한다는 것이다. 마치 어머니 유품 정리할 때 동생에게 아무런 감정적 가치가 없는 화분을 언급하니 언니가 냉큼 낚아채서 의미를 부여하는 것과 같다. 레이첼이 계속 좁히지 못한 거리감은 역설적으로 부녀가 스스로 보지 못하는 균열을 또렷하게 드러낸다. 드라마투르기적으로 읽으면 체홒프 소설의 방문자를 닮았다. 이미 고정된 듯 보이던 인물간의 관계성을 재배열한다. 은밀하지만 결정적으로, 확실하게.

구스타브가 딸 노라를 염두에 두고 화해의 제스처 일환으로 각본을 썼다. 어렸을 때 차녀는 연극무대에 올려준 적이 없는데 장녀는 그렇게 해주지 못했고 직업도 연극배우 아닌가. 겸사겸사 좋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딸은 제안을 거부한다. 그래서 쿨하게 수긍하고 레이첼로 배우교체를 시도하나, 딸은 대체불가능하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창작물로서 연기자는 대체할 수 있으나 가족은 대체할 수 없다. 따라서 자신의 가족사를 토대로 쓴 극본의 딸도 레이첼로 치환할 수 없다. 레이첼은 이런 치환가능성이라는 불편한 질문을 전면화하는 캐릭터다.

이 포인트가 영화의 핵심적인 메시지인 이유는, 만약 다른 여성이 딸을 연기할 수 있다면 사과와 화해 역시 진정성 없이 연출가능한 장면에 불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레이첼은 가족간 화해를 교체 가능한 캐스팅의 문제가 아님을 드러낸다.

유일무이한 모녀관계에서 벌어진 사건과 그에 수반되는 감정, 그리고 그 집에 살았던 선조의 계보가 있는 역사성을 경계선 위에 서있는 주변적 인물이 얼마나 대리할 수 있을까? 실제 상처를 공유 않았는데 상처가 있던 것처럼 연기할 수 있는 존재는 얼마나 나약한가? 가족의 고통이 예술로 가공될 때 이것이 온전한 치유가 될 수 있을까? 최소한 유의미한 전유라도 될 수 있을까?

치유도 전유도 불가능하다고 느낀 레이첼은 울며 퇴장하고, 이때부터 스토리가 비로소 진전되고, 인물들은 진정한 화해를 향한 걸음을 뚜벅뚜벅 그러나 조심조심 걸어나간다.

초반에 차녀보다는 장녀와 부친의 충돌이 더 심각해보였다. 그래서 초반에는 관계가 이항대립적으로 보였는데, 레이첼이 등장함으로써 관계의 구도가 삼각구도로 확장했다. 

모녀간 정면충돌만으로는 고착될 법했던 감정선이 제3자의 등장으로 흔들린다. 다른 맥락에서 비유하면 로맨스소설에서 여주와 남주의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만들어주는 매오(매력적인 오답)으로서 주변인물이다. 레이첼을 거치며 쿨하지 못한 질투심, 허장허세, 무의미한 자존심, 서로간 직업적 야망, 갈마드는 인정욕이 상호교차해 부녀가 정말 닮았다고 느끼게 된다. 감정이 불안정하게 요동치기에 드라마가 살아 생동하는 듯 느껴진다.

요컨대 레이첼 캠프를 거쳐 사적 비극이 공적 행위로서 전환된다. 덕분에 작품은 화해서사를 낀 진부한 신파극이 아니라 친밀성이 어떻게 예술로 번역되는지를 진지하게 묻는 영화로 승화된다. 사건은 격렬하지 않고 프레임 안에 등장하는 희뿌연 먼지처럼 감정이 정체된 공간 안으로 스며든다. 일종의 미세한 교란이다. 보통 일반적 네러티브였다면 외부에서 도착한 인물이나 오랜만에 귀환한 인물이 등장해 변화를 추동하는데, 폭력적 전환은 일어나지 않고 대신, 기존에 있던 욕망과 좌절감을 가시화한다. 사건의 변화를 촉발하는 외부자가 아니라, 주변적 방문자인 이유는 레이첼이 등장함으로써 변화의 가능성을 암시하지만, 동시에 인물들이 얼마나 변화하기 어려운지를 역설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일반 모험서사에서 나오는 저기 보물이 있으니까 우리 떠나자, 혹은 느와르에서 등장하는 계획을 깨트리는 스파이가 아닌 것이다.

거의 빨래가 끝나가서 급마무리해야겠다.

정리하면 체호프적 방문자로서 레이첼은 이런 기능을 수행한다.

잠복된 감정의 촉발자

인물들이 애써 눌러온 감정을 표면으로 끌어 올리는 제자.

허영, 질투, 미련, 권태, 자기 기만을 매게하고, 노출하는 캐릭터

메인 인물이 스스로 구축해온 서사를 흔들고 허구성을 드러내는 존재

변화가 판타지적이면서 불가능하다고 제시하고 때맞춰 퇴장하는 자(그리고 감독은 후반부에 변화가 가능하다 보여주기에 화해가 숭고해진다.)

영화는 값싼 화해로 쉬이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후반부까지 최대한 버틴다.

아버지가 자식에게 남길 수 있는 상처를 냉정하게 직시하고 돌이키지 못하는 시간을 어설프게 소급하지 않으며 화해의 가능성을 낭만화하지 않는다. 시간이 허락하는 한 가능한 마지막 최선의 노동으로서 화해다. 이 화해 없이는 세대간 파국이 반복될 것이다

감독은 미장센을 보석세공인처럼 맑게 제련한다. 수정처럼 다듬어진 프레임은 감정을 과장하지 않고 배우들의 미세한 표정변화와 몸짓을 기다린다. 정교하게 조율된 대사는 정적이고 과시적이지 않다. 순간의 시선, 식탁 위에 놓인 손, 문을 닫는 속도 같은 사소한 제스처가 서사의 중력이 된다. 예술과 삶, 연극과 영화가 교차하듯 서로 감정과 역할도 교차한다. 관객은 관계의 복잡성과 감정의 깊이를 가랑비에 옷 젖듯 시간이 흘러 자각한다.

가족제도는 깨지기 쉬운데 또한 쉬이 끊어지지 않는다. 사실상 이미 깨졌는데 붙잡고 있다. 영화는 집이라는 무성명사를 주어로 시작했다. 균열된 집 속에 지속되는 보이지 않는 유대, 그 불편하고도 단단한 끈이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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