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환상 공동체 - 케이팝 시스템이 만들어낸 진짜보다 순정한 가짜의 세계
맹미선 지음 / 돌고래 / 2026년 9월
평점 :
한일 SF 작가 24명의 교환일기 중, 일본 작가 다바 가리의 글 중에 속마음을 전부 토해내면서 비평적인 역량을 갖는 작가가 있다고 했다(p219).
아마 케이팝 팬덤의 내부자로서 경험을 독자도 함께 하는 듯 생생하게 전달하면서도 무게감있는 학자를 적절하게 인용해 논의의 깊이를 확보하는 맹미선이 아닐까. 한 호흡에 책 끝까지 재미지게 읽었다.
책 마지막 부록의 연표로 보아 대략 07학번 부근(이때 상경했다고 했다), 80년대 후반생으로 추정이 되는데, 김대중 정부의 개방정책에 따라 중고등학생 시절 일본문화의 세례를 받고 이후 UCC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한국 팬문화가 발전한 궤적을 개인사와 함께 따라간다.
팬픽, 최애, 트친, 덕후, 입덕, 업자, 군백기, 빠순이, 사생팬 같은 어휘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미공포(미공개포토카드), 홈마(홈페이지 마스터)의 대포(큰 렌즈 카메라), 덕메(덕질 메이트), 올출과 올팬은 처음 들었다. 추구미가 서로 다른 홈마들이 찍은 아이돌 사진이 어떻게 몰입경험과 환상체험을 강화하는지 알려주는 p100이 단일 페이지로서는 가장 좋았다. 또, 팬으로서 콘서트장에 가는 모든 순간을 프랑스 리얼리즘 소설가마냥 핍진하게 묘사해 단편 영화 한 편을 보는 듯한 p202까지 6장 전체가 인상적이었다.
오늘은 한글날인데, 책에는 한글날이라는 가상의 그룹을 상정해 팬의 마음이 어떻게 조우하고 분기하는지를 가상의 시나리오로 서술한 부분도 흥미로웠다(p151-155).
대학원까지 공부해 가방 끈이 긴 이들이 학술장에서 섭렵한 이론으로 너무 머나먼 이국의 사회현상이 아닌 바로 자신을 둘러싼 일상과 자신의 핵심질문을 다룰 때 몰입감과 설득력이 높아진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싸매고 고민하고 항상 생각하는 현실의 이슈를, 그동안 이해하기 위해 씨름해왔던 인문서로 소화해내는 에세이는 언제라도 읽고 싶다. 그런 류의 비슷한 다른 책은 최근에 읽었던 서울대 종교학과 석박을 나온 목사 딸의 백팔 배였다.
중추는 자기 서사. 본인의 이야기가 먼저 유려하게 흘러 나오면서 곁가지로 대니얼 부어스틴의 이미지와 환상(p101), 미셸 마페졸리의 부족의 시대(p163), 하비 화이트하우스의 인간 본성의 역습(p170), 뒤르켐의 종교생활의 원초적 형태(p183)의 정갈한 문장이 깊이 있는 설명을 위해 덧붙여진다. 일연의 삼국유사, 단턴의 고양이 대학살, 버지니아 울프의 올랜도도 덤.
물론 케이팝과 인스타인증 사회문화를 진단할 때 18번으로 언급되는 상상의 공동체는 덤이다. 국문학과에서 활발히 유통되던 경성의 모더니즘 담론에서 과학기술학까지 공부한 내력이 면면히 드러난다.
팬의 일상만 이야기했다면 귀여니 소설이나 웹소설처럼 쉬이 휘발되는 글이 되었을지 모르는 일이다. 물론 모든 팬이 이렇게 인문학적 기반이 있는 것은 아니니까 아군(?) 내부에서도 소구력이 적을지 모르지만, 팬덤소비자가 아닌 다른 족속들에게는, 어떤 교양있고 신중한 독자들에게는 확실하게 어필할 것 같다. 적진(?) 내부 스파이로서의 성공적 무용담과 회고담을 듣는 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