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요커 이번 주 기사 중에 이 주말 에세이가 가장 재밌었다.
스무살에 가짜 이야기로 영국 입국하기라는 제목에 여행기인가 아무 생각없이 클릭했다가 흡사 탈북자 수기의 지하철검문을 방불케하는 밀입국 이야기의 긴장과 몰입감에 빨려 들듯이 끝까지 읽었다.
검문소 경찰이 경계하며 관찰하는 표정의 studied expression, 심장이 철렁했다는 극도의 긴장감을 보여주는 heart in throat, 두려워도 태연한 척한다는 put on a brave face, 주변의 상황에 무심한 일반 영국인과 자신의 처지를 대조하며 일상 속의 정치, 정체성문제를 드러내는 sat among oblivious Brits, 심장이 갈비뼈를 두드리듯 뛰었다는 my heart hammering agaist my ribs 같이 문학적이고 좋은 영어 표현은 덤이다. 특히 상대의 표정에서 아무 것도 읽을 수 없었다는 he gave nothing away와 내 안에서 뭔가 무너져 내렸다는
I felt sth give away inside me에 같은 give away가 있는데 같은 구동사가 다른 식으로 해석되어 글맛을 한층 증진시킨다.
과거의 저자는 대충 이런 상황이다. 알바니아 남부 피에르 출신인데 생존을 위해 국경을 넘을 때마다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정체성을 조금씩 바꿔야한다.
그렇게 국경을 넘는 과정에서 타인의 아이덴티티를 빌리며 국가적, 민족적, 문화적, 사회적 정체성을 잃는다. 매번 통하지 않고 거짓이 탄로나고 거짓을 고백하면서도 그 사이 만난 다양한 사람들의 친절을 통해 새로운 자신을 만들어간다. 나는 어디 사람인가? 나의 소속은 어디인가? 보다 더 중요한건 나는 누구이며 지금 나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이 더 중요하게 다가온다. 이는 기원이나 존재론이라는 고정적 가치보다 지금-여기의 행위가 중요하다는 통찰로 이어질 수 있다. 롤랑바르트의 작가의 죽음 이후 새로 태어난 퍼포먼스와 플레이의 가능성이다. 무언가를 한다는 게 중요하다는.
저자가
영국에 들어가는 과정은 참 쉽지 않았다. 알바니아 이주민으로는 망명심사를 받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파리의 알바니아인들에게 들은 풍문을 바탕으로 코소보 전쟁에서 가족과 함께 알바니아로 피신한 17세 코소보 난민으로 자기 서사를 재구성한다. 심지어 그 전에 그리스에서 까페 등에서 알바하면서 그리스어는 배웠는데 그리스어를 쓸 수는 없다. 다 청소년 때의 난리통이다. 어느 나라에서는 영어학원에서 독해문제를 풀고 디베이트를 훈련하는데 누군가는 생존을 위해 영어를 픽업하고 페이크 서사를 암송한다. 식민지시기 독립열사가 조선에 태어나 상하이조계지를 거쳐 구미에 갔을 때도 이런 기분이려나.
알바니아인 → 그리스 체류 이주민 → 유럽을 이동하는 불법 이주자 →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넘어가는 코소보 난민으로 변신하는 과정은 일견 사기극인 듯하면서도 그렇게만 국한시킬 수 없다.
코스모폴리탄이지만 투자자산을 바탕으로 비즈니스석에 탑승해 글로벌 호텔에 체류하는 부유한 자가 아니라 생존기반이 부족한 하층 코스모폴리탄이다.
코소보인의 고통을 빌려 자신의 생존을 확보하지만, 그 이야기를 반복해서 말하는 동안 자신 역시 몰랐던 그들의 고통과 불안, 그리고 소속의 문제를 내면화한다. 그러면서 저자는 고정된 출생지나 부여된 국적이 아니라 국경마다 살아남기 위해 새롭게 만들어내는 서사가 정체성을 만든다는 자각에 이른다.
https://www.newyorker.com/culture/the-weekend-ess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