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spar David Friedrich, Wanderer above the Sea of Fog, circa 1818, Hamburger Kunsthalle. 정선1676-1759, 정선필 인왕제색도, 1751, 국립중앙박물관.
가끔 생각하곤 한다. 서양은 렘브란트의 강렬한 키아로스쿠라 기법이 부각되는 회화처럼 어둠을 빛이 없는 상태로 그리고, 동양은 산수화에서 보듯 어둠을 비어 있는 상태로 그리는 경우가 많다고.
서양의 어둠을 빛의 결여로, 동양은 허적 공허 즉 결여와 부재 그 자체로 보는 것 같다. 검은 먹의 농담을 운용하는 데서 오는 감각적 차이일까
으레 어둠을 걷는 사람이 질문이 많다. 왜 나는 이곳에 있는가. 왜 아직도 이 어둠을 지나고 있는가. 왜 난 이 길을 걷고 있는가. 나아갈 길의 유무와 행선지보다 먼저 지금-여기에 있는 이유와 발을 옮겨야 할 당위성을 찾는다.
빛 속에서는 방향을 묻지만 어둠 속에서는 존재를 묻는다. 그런 의미에서 어둠은 빛의 부재를 넘어목적의 부재다. 햇볕 따스한 곳에서 밝음을 누리는 자는 어디로 갈까? 를 궁금해하지만 칠흙같은 밤 속에서 방황하는 자는 한치 앞을 볼 수 없기에 왜 가야 하는가? 를 물을 수 밖에 없다.
그런데 방향은 나침반이 알려주지만 이유는 아무도 대신 알려주지 못한다. 어둠에 던져져 자신과 독대하는 질문은 모두와,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자기 자신만의 물음이다. 고통의 미로와 시련의 사막은 공간의 문제가 아니라 의미의 문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빛을 희망의 은유로 사용하는 유럽회화에서 밝고 하얀데 방황하는 모습의 프리드리히의 그림은 특이하다. 동양적 명상성마저 느껴진다. 등을 돌린 이는 안개에 가려진 아직 보이지 않는 세계, 풍경, 반경을 보면서 동시에 자신이 앞으로 걸어가야만하는 이유를 보고 있는 듯하다.
빛이 질문을 중단시킨다. 환한 대낮에는 성큼성큼 걸어나가면서 사유란걸 사실상 하지않는다. 반대로 어둠은 시야를 빼앗는 대신 내면을 확대한다. 존재론적 질문은 어둠을 걷는 자의특권이다
역설적으로 어둠은 길을 감추며, 감춤으로써 비로소 질문을 드러내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어둠 때문에 방황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하기 위해 어둠을 필요로 하는 건지도
그렇다면 어둠은, 시련은 인간을 시험하는 장애물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에게 자신을 해석하게끔하여 스스로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는 발판이다
빛 아래에선 외부 풍경이 육안에 들어올 것이다. 반면 어둠에선 의식이 오롯이 자신의 내면과 그림자를 응시한다. 그래서 방황은 공간의 사건이 아니라 해석의 사건이다. 걸음은 이동이 아니라 사유이며 배회는 실패가 아니라 자기관찰과해석의 오래된 형식이다
길을 잃어서 존재를 묻는 것이 아니다. 존재를 묻게 되는 순간 비로소 길이 어둠으로 변한다. 깊은 어둠은 천문박명 이전 빛이 없는 시간대에 있는게 아니라 왜라는 질문 앞에서 더 이상 빌릴 수 있는 대답이 남아 있지 않은 순간에 있다. 길을 잃고 책을 편다. 목적지를 찾는데 도착하면 끝나지 않고 설령도착해도 질문이 생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