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태원 뉴스프링 프로젝트에 다녀왔다.
오종부터 강임윤까지, 깔끔하고 정갈하면서 아우라가 돋보이는 공통분모를 생각해볼 때 뉴스프링이 원하는 일관적 취향이 있다고 느낀다.
사진의 발명으로 인해 회화는 더이상 사물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지 않고 창의적 조형을 강조하는 큐비즘이나 색채의 기운생동을 추구하는 야수파 등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나갔다. 회화만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제 디지털 시대를 만나 회화는 이진법 기호로 쉬이 복제되어 해저 케이블을 따라 전세계로 빠르게 유통될 수 있지만, 그럼에도 어떤 그림은 전시장 안에 배치되어 관객과 대면할 때의 현장감을 대체할 수 없다. 어떤 회화는 아우라와 앰비언스가 압도적이다. 까닭에, 발품을 팔아 그림을 직접 보러가야 한다. 최근에는 퐁피두 큐비즘, 서울시립 유영국이 그랬고 뉴스프링의 강임윤도 그러했다.
색채가 클리나멘처럼 서로를 산뜻하게 스치고 지나가며 남겨진 기운의 궤적과 운치의 흔적, 혹은 운동의 자취를 이탈리아 삼베천이 머금는다. 어떤 상서로운 기운이 캔버스 너머로 전해진다.
장막 위의 색채는 노랑도 빨강도 아닌, 그보다 더 구체적인 이름을 갖는다. 그림 앞에서만 느껴지는 새근새근 숨쉬는 정동의 고유명사다. 황금빛으로 번지는 카드뮴 옐로 라이트의 평원이 보이고, 퀴나크리돈 마젠타의 유영이 사르륵, 연분홍 안개를 헤치고 초서의 획처럼 나아간다. 단종 유배지 청령포의 강을 닮은 곡선은 마치 용과 뱀이 서로 다투는 듯하고 그 언저리로 이응노적인 필획이 반쯤 잠에서 깨어나 꾸물꾸물, 유야무야, 그러나 기기묘묘하게 의도적인 움직임으로 화면을 횡단한다.
세이프그린이니, 비리디언이니 청람색이니 하며 파르르 떠는 식물의 고요가 스며들어 있다. 세룰리언 변조를 그러쥐고 춘몽의 미풍이 불어온다.
유목적 황색, 과수원적 침묵, 수채화의 조수, 연기의 과육. 재현하지 않는다면 그로 인해 전달하고 싶은 것이 있다. 회화와 독대한 자들에게만 허용된 명상이다. 대개 사물을 설명하지 않는 회화는 사물 이전의 감각을
소환하기 때문이다. 저마다 다른 것을 느끼는 바, 무엇인가 피어나는 듯하면서도 끝내 꽃이 되지 않고, 무엇인가 날아오르는 듯하면서도 새의 형상을 거부하는 광경을 보게 될 것이다. 마치 장자가 나비를 꿈꾸고도 아직 깨어나지 못한 듯.
놀랍게도 색채가 수학적인 공간분할을 따라 구획된 것도 아닌데 절묘하게 그라데이션되어 있어 철썩철썩 부딪히지 않는다. 대신 사각사각, 후우우, 사르르 흩어지며 느슨하게 무엇을 탄생시킨다. 추상회화의 오래된 질문을 다시 꺼낸다. 무엇을 그렸는가?, 가 아니라 무엇이 막 생성되려 하는가?
그리하여 이미지의 왕국보다 기운의 왕국이 되리라. 기능은 형태를 따르나 형식은 감각을 따른다. 감각이 먼저 피어나고 형식이 늦게 도착한다. 보는 이는 어느새 옛 선조들의 서화감상을 답습해 색채의 기후 사이를 산책한다.
그러다 고즈넉한 봄날 창호지 너머로 스며드는 살가운 새벽빛의 숨결이 아련하고도 유장한 어미품 같은 지리산 육산맥을 어화둥둥 넘어 온 것임을 깨닫게 되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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