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제 나온 신간 <모두를 위한 키워드 미술사> 읽었다. 알라딘에는 상품이 안 올라왔고 아직 교보에서만 판매 중이다.
책은 쉽게 쓰여져 중고등학생과 학부생, 일반인이 읽기에 적합하다. 미대, 미술사 계통으로 관심있는 고등학생에게 읽히고 스무 가지 주제 중 하나를 골라 더 조사해 발표시키고 한 학기 독서록과 세특에 쓰기에 적합하다. 학부 교양강의의 필독도서로 전면에 내세우기에는 학술성이 부족해 곤란하지만 참고도서로 올리면 이제 배우기 시작하는 20대들의 눈높이에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뱅크시와 반구대 암각화, 원근법과 가상현실, 점묘법과 픽셀, 책가도와 세잔 등 과거와 현대를 종횡무진오가며 흥미를 북돋는다. 특히 2-3부는 기존 대중서에 없던 내용이라 반갑다. 장소특정적 미술, 역사와 기억, 공공장소 등 최근 중요해지는 주제와 비엔날레, 컬렉터, 도슨트, 인플루언서 등 미술의 외연인 시장과 구조를 다루었다. p199부근의 내용은 모두 적절하다. 편파적이지 않고 균형있는 시각으로 주제를 다루되 마케터의 관점에서신선한 워딩을 사용해 글이 통통 튀는 맛이 있다. 새로 리뉴얼된 맛집의 신메뉴를 맛보는 느낌이다.
내용상 여러 좋은 점에도 불구하고 다소 아쉬운 부분이 없지 않다. 이는 스무 가지에 포함되었으면 좋았을텐데 사정에 의해 누락된 부분으로 아마 추후에 2편이 나온다면 고려됨직할 내용이다. 내용의 스코프가 국공립미술관을 읽기 위한 것인지 아트페어나 현대작가의 전시의 이해를 도모하기 위함인지 불분명하다. 후반부는 저자의 백그라운드인 SNS채널과 인플루언서를 지향하다 끝을 맺었다.
예컨대 장식과 공예, 문자와 이미지와 미드저니, AI와 윤리, 퀴어성, 몸-바디올로지, 여성, 식물의 사생활, 환경과 생태, 국제정세와 인권, 이민과 디아스포라 등 최근 전시에서 많이 보이는 주제는 없고 그렇다고 전통회화를 이해하기 위한 양식설명도 결여되어 있다(물론 이 부분을 터치하는 교양서는 차고 넘친다). 하여, 이건 어떤 시대의 양식일까? 하는 물음도 답한다는 것이 책의 단순한 메시지라는(p232-233)의 의도는 설득력을 잃는다.
"조용히" "단순히" 같은 GPT가 써 준 문구를 사용해(혹은 GPT가 많이 써서 오염되어 버린 표현을 사용해) 책의 적실성과 인간미를 다소 잃은 것은 별개의 이야기다.
가장 아쉬운 점은 프롤로그, 에필로그의 등의 다소 편협한 카피다. 개인적으로 현대미술이 난해하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에 의해 현대미술에 대한 스테레오타입이 재생산된다고 생각한다. 현대미술이 난해한 부분이 있으면 쉽게 설명하면 될 일이다. 그런데 그 주변에서 주제가 어렵다고 외치며 변죽을 울리면 그 누구에도 득이 없다. 심지어 현대미술보다 콰트로첸토나 중세미술이 훨씬 언어적 문화적 허들이 높아 더 난해한데도 불구하고. 또한, 미술이 콧대 높아 보인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는데 책 띠지에서 콧대 높아 보이던 미술, 이라는 워딩을 쓰는 것도 아쉽다. 이런 워딩은 개인적 불편함에 그치지 않고 책이 어떠한 독자를 타겟팅하고 있는지 불분명하다는 점으로 이어진다.
프롤로그에는 이런 표현이 있다.
수많은 작가의 이름과 연도를 외우는 일은 .. 미로 속에 들어가는 입구(p5), 입시나 시험을 위한 박제된 정보를 수집하는 방식에 익숙해진 탓에(p6), 미술사의 지도를 통째로 외우라고(p7), 정답을 맞히기 위해 시험지를 푸는 학생이 아니라(p8)
여기서 한국입시사회의 문제와 미대, 미술사 전공생의 학습방식을 정교하게 분별해야한다. 위는 암기 위주 한국 입시의 문제이지 미술사의 문제가 아니며, 일반인이 미술사를 열심히 공부한 경우는 매우 드물다. 따라서 "모두를 위한" 이라며 대중서를 표방하는 책에서 쓰기에는 부적절하다. 그리고 때에 따라 암기는 전문성을 위해 필수적인 작업으로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다.
한국 입시에서 미술사 연표를 외우지 않는다. 미술사학과도 수학을 잘해서 들어가는 것이지 미술사를 잘해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쉽게 말해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외워서 미술관련 전공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삼각함수와 미적분 문제를 잘 풀고 생기부 관리해서 입학하는 것이다.
일반인들도 취미로 배우는 이상 미술사의 박제된 연표를 외우거나 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책에 존재하는 하나의 정리되 도표와 이미지일 뿐이다. 그런데 특히 국사(한국사)에서 이해 없는 암기를 해왔던 탓에 미술사 연표를 보면 자동적으로 치가 떨리는 듯하다.
아울러 전공생이라고 할지라도 영미권, 프랑스, 이탈리아의 미술사학과에서 배우는 정도로 제대로 외우지 않는다. 수업마다 아주 최소한도로 100작품의 캡션은 외운다. 심지어 미국 고등학생이 보는 수능격의 AP 미술사에서도 과정 전체에 걸쳐 최소 250 작품에 대해 작가, 작품, 양식/재료, 연도를 암기하도록 한다. 마치 언어를 배울 때 필요한 기본어휘와 같다. 최소 2천 단어를 외우지 않고 한 언어를 배울 수 있을까? 아무리 창의성을 강조한다 하더라도 최소한의 지식 없이는 무분별한 자유로 귀결될 뿐이다. 미술사 연표는 암기를 위함이 아니라 알고 있는 내용을 시각화한 인포그래픽으로서 지적 가이드의 기능을 한다. 비판의 대상은 아니다.
나아가 미술사의 지도를 통째로 외우는 것은 전문성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다. 책에서 말하는 다정한 목소리의 도슨트나 인플루언서가 내용 설명을 하다가 피카소가 기원전 몇 세기 사람이었지? 앤디 워홀이 태어난 중국에서는.. 하는 말이 나온다면 그 전문성을 의심받을 것이다. 전문가는 자신이 다루는 지식에 대해 윤리적인 책임을 져야한다. 통역사가 다양한 뉘앙스 중 가장 정확한 표현 하나를 골라 외우고 출력하듯이.
그런데 일단 한국 입시에서 일반학생들도, 미대나 미술사학을 지망하는 학생들도 책에서 말하는 암기와 박제된 정보를 한 경우도 없거니와, 미술에 대해 알아볼까? 하며 이 책을 손에 쥘 일반인은 더욱 더 그런 경우가 없고, 심지어 구미의 학생들에 비하면 국내 전공생의 암기량과 공부량이 현저히 부족한데도 이런 표현을 쓰는 것은 여러모로 제한적이고 아쉽다. 한국 입시의 폐해를 미술사에 덧씌워서 책이 암기를 강요하지 않는다고 어필하기 위해 느슨하게 말한 것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