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백만장자 왕관 없는 월가의 왕 바루크의 인생이야기를 비롯한 페이지2의 투자고전 시리즈 7권,

아모레퍼시픽 전시의 소장품 리스트,

민희진이 큐레이션한 무비랜드 영화 5편

밀리의 서재와 OTT의 수많은 콘텐츠


를 어제 오늘 보면서

꿈이 뒤늦게 이루어진다는 것과, 지식의 민주화와 고급화는 함께 진행된다는 것을 생각해보았다.


라면 끓일 때 불을 올리고 물이 보글보글 끓을 때까지 시간이 필요하다. 전자레인지에 돌려먹는 즉석 레토르트 식품이라해도 30초에서 1분은 필요하다. 먼저 의욕이 시냅스 사이를 빛처럼 내달리고 현실에서 구현은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자아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꿈도 시간이 필요하다. 꿈을 꾼 시점에 이루어지지 않고 한소끔 시간이 지나야한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할머니는 소녀시절 밥과 고기를 배불리 먹고 등 따시게 잤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달에 빌지만 그 바램은 할머니의 소녀시절이 아니라 20년이 지나 중년시절에 이루어진다. 꼬르륵 소리가 나는 시절에는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다.


그 할머니의 딸인, 엄마의 꿈은 물질적 풍요가 아니라 배우고 성장하고 단단하고 안정된 지위를 갖는 것이다. 옷도 필요하다. 제복이든 제대로 만든 옷이든 나를 특별하게 보이게 해주는 의복이 필요하다. 베이비붐 시절에 사람이 너무 많아 태산의 티끌만도 못한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기 위해서다.


이렇게 꿈은 늘 결핍이라는 토양에서 탄생한다. 학창시절엔 상장 하나만 받아도, 옷 하나 새로 사입어도 기분이 좋다. 자신의 마음이 향하는 구체적 대상이 나이가 들어서는 인증서, 자격증, 트로피, 핸드백, 악세서리, S/S신상으로 변한다.


또한, 할머니와 엄마가 같은 나이대에 같은 꿈을 꾸는 것은 아니다. 이미 자신에게 주어진 것은 꿈 꿀 필요가 없기 때문에 엄마는 할머니처럼 밥상에 미련이 있지 않다. 할머니가 어렸을 땐 형편없는 판자집에서 꾸질꾸질한 옷을 입은 온 가족이 다같이 모여 조밥에 건더기 없는 된장국으로 끼니를 때웠다. 나이 들고 형편이 나아진 다음엔 시장에서 제철 재료를 장봐와 3시간 들여 수라상을 차리지만 엄마는 전화를 걸어 밖에서 먹고 갈게! 하고 무심히 말한다, 할머니는, 얘! 너 생일 이라고 너 어렸을 떄 좋아하는 반찬 차렸.... 하지만, 응! 엄마 고마워 내일 먹을게! 하고 엄마는 말을 자른다. 모처럼 산 예쁜 옷을 입고 이런저런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나는 이런 대단한 일을 해서 인정받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자리가 맨날 보는, 늘 항상 거기있을 것이라고 무심하게 믿고 있는 가족과의 오붓한 식사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엄마도 딸은 이해할 수 없다. 나 때는 탐구만 11과목을 했는데 왜 쟤는 세네과목도 못해서 저렇게 우는 소리를 하는건지. 밖에서 친구들과 싸울 수도 있고 선생님한테 혼날 수도 있고 자기도 대들면 되는 것인데 왜 남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일일히 반응하는지, SNS에 올린 게시물 하나로 왜 저렇게 불안해하고 전전긍긍해하는지.딸에겐 할머니와 엄마 두 세대의 꿈이 다 주어졌다. 번듯한 아파트에 냉난방이 다 갖춰져 더워서 잠을 못 이룬 적도, 추워서 떨면서 새벽을 맞이한 적도 없다. 다른 가족 구성원이 거의 집착적으로 장을 보아오는 덕분에 냉장고가 비워진 모습은 태어나서부터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마치 냉장고를 여는 순간 식재료와 신제품이 게임의 몹처럼 자동적으로 리젠되는 듯이 느껴질 정도다. 물질적 풍요는 이미 부여받은 것이다. 사회적 지위에 목이 마른 엄마 덕분에 차, 학벌, 평판 다 갖췄다. 엄마의 극성으로 인해 좋은 학군지의 나름 괜찮은 학교를 어떻게든 다녔다. 그 결과 밖에 나가면 사람들이 자신의 무엇이든 알아본다. 엄마는 사람 만나는게 그렇게 좋은걸까. 딸은 잘 모르겠다. 어머 이번에 새로 나온 OO 아니예요? OO가 이번에 OO를 갔다면서요? 축하해요! 이런 류의 대화를 하느라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를 지경이다. 딸은 지겹다. 할머니는 NPC처럼 아무 반응 없이 지켜볼 뿐이다. 이미 소녀시절 원하는 것은 갖췄고 자신의 딸의 꿈은 의미가 별로 없는 것이 집안에 굴러댕기는 휴양지 토템 같은 여행지 굿즈 같다. 딱히 쓸데는 없는데 여행지 가서 으레 사오는 게 좋은 것 같아 고가에 집어 온 필요없는 물건.


이전 세대의 소원은 증여되지 않고 세대 간 욕망은 단절된다. 딸의 꿈은 할머니의 물질적 풍요나 엄마의 사회적 안정이 아니다. 그 모든 것으로부터 속박되지 않을 자유를 원한다. 할머니의 집은 넓다. 어머니의 자리는 단단하다. 그렇지만 딸에게 중요한 것은 넓은 집과 단단한 포지션으로부터 떠나는 것이다. 할머니는 축적했고 어머니는 정착했으나 딸은 그 물질적이고 추상적인 단단함으로부터 유동해 흘러가길 바란다.결핍에서 시작한 할머니의 소원이 이루어져 이제 물질이 넘치나 손주세대에게 풍요는 짐이 되었고 베이비붐의 인파 속에 인정투쟁하며 존재론적 고민을 하던 어머니의 소원이 이루어져 지위가 고착되자 제도적 안정은 속박이 되었다. 딸은 날렵한 탈출구를 찾는다. 할머니는 고체를 완성했고 엄마는 액체를 완성했으되 딸은 소유나 지위를 원하지 않고 언제든 접속하고 언제든 이탈할 수 있는 기체가 되어 자신을 규정하는 수많은 유무형의 압박으로부터 탈주하려한다. 할머니와 엄마는 꿈에도 몰랐다. 자신의 소원이 딸에게 억제가 되었음을. 할머니, 엄마, 딸 모두 어린 시절의 꿈은 다른 환경에서 배태되었다. 같은 나이대에 같은 꿈을 꾸지 않았고 자신의 꿈이 비로소 이루어진 시점에 다음 세대는 다른 꿈을 꾸었다. 심지어 자기의 꿈은 세월이 지나 유통기한이 지났다.


내가 원했을 시점에 그것이 이루어졌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내가 기도할 때 바로 응답되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런 가상의 세대사 이야기를 생각해 본까닭은 소원의 착상 시점과 구현 시점이 다르다는 생각 때문이다.


책 영화 미술 금융 등 모든 종류의 지식정보는 시간이 지나며 대중화되고 엔트로피가 증가한다.


너무 사골처럼 우려먹은 사례이긴 하지만 이만큼 전형적인 사례도 없다. 책의 민주화 말이다. 중세 유럽에서 필사본을 독점하던, 라틴어 교육을 받은 성직자 집단의 사례. 이들이 보유하던 지식은 거의 냉동상태라고 생각될 정도로 극히 압축되고 질서화되었다. 유통되는 정보는 적고 일주일에 한 번 미사 시간에 알 수 없는 고대의 언어로 말해지며 강론은 짧았기에 해석 권력이 엘리트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민중에게 유의미한 제도적 교육은 제공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구텐베르크 인쇄술 발명 이후 텍스트가 폭발적으로 복제되면서 해석 주체가 분산되기 시작한다. 가능한 해석의 미시 상태가 급증하는 것이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단일했던 성서 텍스트가 수많은 독자에게 열리고 서로 다른 해석이 경쟁한다. 개신교의 탄생 배경이다.오늘날 화폐가치로 수억원을 호가할만큼 귀한 필사본이 대량인쇄된 일은 자연상태에서 희소하게 존재하는 탄소결정체인 다이아몬드를 HPHT나 CVD의 방식으로 산업적으로 합성 제작이 가능해진 것과 닮은 사례다. 그런데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모두가 최소한 문화적으로도 제도적으로도 기독교였던 유럽대륙에서 모두가 아는 그 전형적인 성서를 단단한 방탄유리 케이스에 쌓인 성스럽고 유일한 지위에서 갈고리로 끄집어내어 인민들에게 주었다는 것은 어떤 상징적인 사례였다.


어? 이게 가능하네? 그 성서가 가능했다고? 너도 알고 나도 알고 저 멀리 언덕배기(burg부르그)에 사는 동네 머저리 슈바인학센씨도 아는 그 성경을?


하나의 모델이 성립되니 아랫 단계에서 다종다양한 텍스트가 더 많이 풀렸다. 포스터부터 잡지식 출판이 후속으로 따라온다. 이전에는 질량이 낮은 언어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지식이 문자화된다. 이렇게 여러 지식이 퍼질수록 전체적인 엔트로피가 증가한다. 그러다가 한 번 제대로 마음 먹고 이 모든 지식정보를 한 데 모은 백과사전을 만들어내 지식을 정렬한다. 정보를 품평하고 옥석을 가리는 자가 중요해진다. 사서와 교사의 탄생이 시작된다. 홍수가 나면 물은 많은데 정작 마실 물은 없듯이, 지식이 많아지면 정작 어떤 지식이 쓰레기고 어떤 지식이 유용한지 모르기에 따로 큐레이션하며 광석 속에 보석을 일러내는 자의 역할이 대두된다.


이것이 구텐베르크 인쇄혁명에서 보이는 지식의 민주화가 반복되는 과정이다. 복제 비용이 떨어지고, 유통 채널이 열리고, 지식이 대중에게 주어지고, 양질의 정보를 섭취한 대중의 수준증가가 유발한 수요증가로 인해 지식이 다변화되고, 너무 많은 정보를 다시 분류하고 정제한다. 그러니까 지식이 너무 많으면 더러운 진흙탕 같은 슬롭 중에 양질의 정보를 발굴할 감정사가 등장해 알고리즘, 큐레이션, 해석력을 통해 로컬한 질서를 다시 만들어낸다는 것이다.v너무 영화가 많으니 영화를 요약해주거나 분석해주는 사람이 각광받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작업을 하는 사람은 가장 창의적인 사람이다. 이 최종 작업을 받아먹기만 하는 사람은 가장 비창의적인 사람이다. 큐레이션 능력, 해석 권위를 외주한 것이다.


이 모든 의식의 흐름의 첫 발상은 OTT의 영화리스트와 민희진의 큐레이션 5편 인스타에서 착안되었다. 옛날에는 영화를 볼 채널이 없었다. 이제는 너무 많다. 그리고 어떤 유명한 누가 좋다고 말하는 5편 영화에 사람들이 크게 반응한다. 봉준호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넷플 다큐 노란문시네필다이어리에서 세기말에 영화광이자 감독지망생이었던 초창기 봉준호가 비디오테이프에 다 녹화해 일일이 라벨을 붙이며 수집했던 일화를 소개했다.


1980년대는 어떤 외국 영화를 아는 사람도 없었고 주한프랑스문화원 같은데를 가야 보았다. 미술전시장에서 읽었던 내용이다. 정보의 존재를 아는게 실력이었다. 알 수 없는 외국 인명과 고유명사를 입으로 줄줄 읊는 것이 지적 권위와 등치되었다. 2000년대 봉준호는 영화 테이프 모으고 아카이빙했다. 실제로 그것을 보거나 볼 채널, 수단을 가지고 있어야했다. 2020년에는 OTT에 정보가 싹 다 정리되어있다. 20년전, 40년전에는 아무도 몰랐을 비하인드 스토리나 사생활 정보까지 나무위키에 싹 다 정리되었다. 이제 볼 콘텐츠가 너무 많다. 이제 갓 태어난, 갓 성년이 된 사람들은 더하다. 전문가들이 40년간 보았던 책 영화를 다 봐야한다. 그 압도적인 지식의 무게에 짓눌린다. 영화를 하루 3편씩 365일을 쉬지 않고 보아도(이는 매우 매우 힘든 일이다. 공적 관계를 다 포기해야한다) 8년을 봐야 겨우 이동진이 보았다는 만 편에 근접한다. 앞서 출발한 거북이를 쫓아 달려가는 제논의 역설처럼


이제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된 초심자, 학생이 그렇게 사회와 단절되어 밀도 높은 8년을 보내면 이동진은 놀고 있지 않고 다시 8천 편을 보게 될 것이다. 왜 앞서 말했던 예시에서 딸이 이 사회의 법도로부터 탈출하고 싶은지 알 수 있다. 조부모와 부모가 평생을 걸쳐 이룩한 상징계가 너무 거대해 숨을 쉴 수가 없다.


정보나 자원이 희소한 특권에서 과잉에 가까운 보편으로 이동하는 패턴에 대해 횡설수설 말해보았다. 기술 발달의 이슈이기도 하고 권력과 접근성의 재편성의 이슈이기도 하다.


다시 요약해보자면 책도 성직자만 필사본을 가지고 있다가 점차 민주주의화되고 대중화되고 성서해석에 따라 교파가 갈리고 학설이 갈리고 이단도 생기는데 정작 성서를 꼬박 앉아 전권을 다 읽은 사람은 신학생 중에서도 꼽을 정도이며 대개 우선순위에 따라 중요한 구절만 따로 떼어 큐레이션한다. 설교하기 좋은 구절인 신약은 더 많이 유통되고 법령인 레위기 신명기는 인구에 잘 회자되지 않는다. 지적생산성이 적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상징성 있는 유명한 아이템의 대량복제가 가능하다고 여겨지면 그 아랫단계에서 수많은 다양한 변주가 후속으로 따라온다. 이는 여러 소재에 적용해 상상해볼 수 있다.


먼저 음악. 유명 연주자에게 인건비를 주고 집에 초빙할 수 있는 부자만이 음악을 향유할 수 있었다. 유럽 저택에 현악 4중주만 그런 것은 아니고 조선시대에서 부잣집댁만이 명창과 고수를 초빙했다. 그리고 축음기와 음반을 집에 보유한 사람만이 음악을 소유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다음 카세트 테이프와 MP3가 등장하면서 소리가 전자화되어 복제가 더욱 간편해졌다. 이젠 Spotify나 유투브뮤직 같은 스트리밍 플랫폼이 사실상 모두의 음악 아카이브처럼 기능한다. 전형적 음악뿐 아니라 음악이 아닌 형태의 현대음악, 앰비언스, 소리, 녹음도 확산된다. 이전엔 소장품이던 음악은 이젠 보관하고 소유물품이 아니라 접속가능한 스테이터스 같이 변모했다. 그러니 이젠 어떤 음악을 들을지 어떤 음악이 좋은지 알려주고 큐레이션하는 


안목있는 자, 혹은 성공하고 유명한 사람이 좋다고 하는 것만 체리피킹해서 듣는다. 지식정보가 많고 여러 사회활동이 뺏기는 시간이 많기에, 여가시간은 적고 할 것은 많기 때문이라는 게 하나의 이유고, 두 번째는 아까 이동진 사례처럼 진입 시점이 늦은 초심자들은 전세대가 수십 년 나이테처럼 누적한 지식을 따라잡기 버겁기 때문이다. 오늘 당장 몇 개 보고 당장의 효과가 있으려면 선별해준 것만 봐야한다. 모든 관객이 켄 로치나 트뤼포, 스콜세지 같은 생산성 높은 감독의 몇 십 편 전작을 다 볼 수 없다. 그러니 한 두 편만 보고 감독의 특징을 전반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다이제스트형 파이널 모의고사형 강의가 각광을 받게 되는 것이다.


책, 영화, 음악이 아니라 다른 아이템에도 생각해보자.


지도와 지리 정보도 비슷한 면이 있어보인다. 예전에는 국가기관이나 군대가 정밀 지도와 위성 정보 작성 및 액세스 권한을 독점했다. 


지금은 무료로 네이버 지도, 구글 맵, 바이두 지도에 접속할 수 있다. 김정호는 대동여지도를 가내수공업처럼 혼자서 만들다가 국가정보 유출 의심받고 잡혀들어가 옥초를 당했을 정도인데 이제 더 정밀하고 입체적이 지도가 모두의 손안에 들려져있다. 길을 아는 것이 권력이던 시대에서 길 찾기가 지식이 되고, 길찾기에 맛집정보, 연관데이터까지 모두 하나의 종합 인터페이스가 된다.


금융투자도 마찬가지. 과거엔 정보 접근권과 정보의 속도가 수익이었다. 전쟁발발 소식을 미리 접해 금융시장에서 떼돈을 번 메디치가의 사례는 너무 유명하다. 거래소 브로커, 전화선, 팩스, 거의 정보전을 연상케할 정도다. 아직도 일본은 노무라 증권 등등 증권소에 현장방문하고 수많은 종이서류를 작성행 금융거래가 되는데 한국은 모바일 트레이딩 앱 덕분에 나스닥 주식마저 개인이 스크롤과 클릭 한 방에 투자할 수 있어 서학개미가 우글우글하다. 


유럽궁정의 만찬장에서만 입소문으로 주식정보와 기업가치를 논하던 시대도 있었고, 뉴욕 증시를 신문에서 읽던 시대도 있었는데 이제 차원이 다르다. 이전 세대의 소원은 다음 세대에 이루어졌고, 다음 세대는 다른 접근방식을 취한다. 그리고 이렇게 개개인이 시장에 직접 접근할 수 있자 정작 돈 벌리는 주식정보가 무엇인지 판별할 수 없다. 그걸 해주는 사람에게 몰린다.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유투브 채널 여러 개가 떠오르리라 생각한다.


성장기에는 사과가 없어서 못팔고 라면 사오라면 라면을 사오는 것이었는데, 성숙기에는 사과품종을 따지고 라면맛과 브랜드가 세분화된다. 수요>공급이던 시절에서 수요<공급이던 시절의 변화다. 이제 우위는 해석권이다. 정보제공이 아니라 해석과 알고리즘으로 옮겨간다.


교육도 같은 맥락이다. 아이비리그 등 명문학교에 입학해 물리적으로 교정에 접근해야만 배울 수 있던 강의를, 지금은 Khan, Coursera, Ted, YouTube에 널려 있다. 학습 콘텐츠 공급이 적던 시절에는 무엇이든 제공하는게 문제였고, 공급 과잉이면 퀄리티 신장으로 바뀌며, 공급 과잉이 너무 오래 지속되고 너무 많은 생애주기별 콘텐츠가 생겨 평생 다 배워도 다 배울 수 없을 정도로 정보가 많아지면, 이제 태도가 달라진다. 관건은 무엇을 배울까? 가 아니라 무엇을 안 배울까? 즉 unlearn이 된다. 무엇을 걸러낼 수 있을까? 걸러주는 큐레이터가 새로운 해석권을 획득한다. 옛날에는 학교를 보내는게 문제였다. 학교는 졸업하자, 졸업장은 필요하다, 같은 대사가 비행청소년을 다루는 2000년대 영화 드라마에 많이 나온다. 이후에는 시험에 합격을 시켜줄 수 있는 시간대비 생산성 높은 강의를 제공하는 학원이 난립한다.


 이전에도 학원의 초기모델은 있었지만 트렌드에 편승해 더욱 더 발전한다. 어디든 학교라는 일반명사만 졸업하든 시대가 아니라, 명문학교 특목고 강남학군지 학교가 중요하다. 일반명사이던 제품명에 브랜드와 특징명이 붙는 것과 같다. 포도를 먹고 싶다에서 사인머스켓 포도를 먹고 싶다, 호주 어디 산지에서 나온 사파이어 포도를 먹고 싶다로 바뀌듯, 학교를 졸업한다, 명문 학교를 졸업한다, 숙제는 적고 학원 갈 시간을 보장해주고 세특 잘 써주는 학교를 졸업한다, 정도로 관형격이 붙는다. 공립학교는 동사무소처럼 기본 자격 획득정도의 수단이다.


의학이나 사진 영상 모두 적용할 수 있다. 그런데 이제 마무리 질거다. 커피 한 잔 마시고 카페인에 기대 이렇게 아무말 대잔치 후루룩 쓰고 이제 화장실 갈 것이기 때문. 두보처럼 쓰고 퇴고는 없다. 게시 안 누르면 아마 날라갈 것이니까. 그렇게 몇 천 자 쓰고 날라간 글이 꽤 있다. 어쨌든, 의사도 과거엔 전문 정보를 독점했다. 


자격증 하나가 의사라는 일반명사의 권위를 제공하던 시절을 생각하면 상전벽해다. 정보가 WebMD나 각종 건강 데이터 앱을 통해 대중에게 풀려 있어 내 병은 내가 의사보다 더 잘 알아! 하는 암환자도 많다. 물론 정보의 완전한 민주화라기보다 책임의 일부가 개인에게 전가된 것이라 볼 수도 있다. 그럼 이제 큐레이션이 중요해진다. 의료여행


사진과 영상 제작도 극적인 변화를 겪었다. 필름, 암실, 현상기술이 필요했던 시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스마트폰 하나로 촬영 편집 배포를 할 수 있다. 무거운 촬영장비를 들고 아프리카와 정글을 다니던 내셔널 지오그래픽, 디스커버리 다큐제작자들에게 호소식일까? 이미지 생산이 엘리트 테크닉에서 일상 행위로 낙하했다. 테레비를 보면서 자랐던 세대가 커서 나도 테레비에 출연하고 싶고 나도 테레비 영상을 만들고 싶다고 생각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 일지도. 수용자에서 프로슈머가 되는 것이다. 여전히 정규직 PD 기성세대가 퇴장하지 않았는데 이 업계의 변화는 쏜살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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