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도가니> 보고 황동혁은 이상일과 무엇이 다른지 생각해보았다. 이창동과는 비극의 구조가 어떻게 다른지도. <힌드의목소리> 이후 문학적 비극의 계보에 대한 생각을 다듬고 있다.


<남한산성>에서는 예조판서 김상헌(김윤식 분)이 근왕군을 애타게 찾고, <도가니>에서는 무진인권운동센터 간사 서유진(정유미 분)이 사태 해결을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간절한 기도는 응답되지 않고 서늘한 비극으로 끝난다. <오징어 게임>의 결말과 같다. 사사키 아타루는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라는 책을 썼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고통 속에도 어딘가 열려 있는 구원의 가능성이 있다. 시련을 겪는 사람의 의지가 닫힌 구조 속에서의 소진되지만 인간이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더 이상 변명할 수 없는 비극으로 매듭지어진다. 이상일이 도스토예프스키에 가깝다. 혹은 <주홍글씨>의 호손에. 낙인 찍힌 여성이 정상적이 삶을 향한 의지를 보이고 사회적 응시를 견디다가 내적 재구성을 하고 제한적으로 회복한다.


이상일은 일반적인 영화가 이미 1시간 반으로 끝날 지점에서 30분을 더 추가해 복선을 모두 회수하고 캐릭터를 하나씩 다 정리해준다. <유랑의 달> <악인> <분노> 모두 그렇다. 심지어 희극인 <식스티나인> <스크랩 헤븐>

<훌라걸스>도 이미 디즈니식 기승전결에서는 끝났을 지점에서 무대가 끝난 뒤 남겨진 사람들의 비화, 갈등의 해결을 다 다루어주고 슬레이트를 친다.


까닭은 도스토예프스키적 비극은 최종적으로 차갑게 응결된 고체가 아니라 지각에 덮힌 끓고 있는 맨틀이기 때문이다. 고통은 목적 없이 존재하지 않고 변형을 위한 압력처럼 기능한다. 서늘함 속의 불꽃, 즉 희망의 불씨를 남긴다. <악인>이나 <분노>에서 고백, 신앙, 광기, 눈물, 참담함이 소용돌이치지만 어느 캐릭터 하나는 살아남기에 인간에 대한 환멸이 회복 불가능하다고 제안하지 않는다. <유랑의달>에서도 구설수의 폭격을 맞은 폐허 속에서도 주인공 둘은 살아간다. 냉험한 현실 속에서도 폭발하는 마음의 레짐이 있다. 같은 방식으로 식어 있는 듯한 형식이지만 이상일이 남겨두는 감정을 끝까지 채집해 제거해버린 자는 황동혁이다.


이상일에 비하면 황동혁은 훨씬 더 차가워 소포클레스나 하디를 닮았다. <오이디푸스왕>이나 <메데이아>에서 스토리의 중추는 문제해결을 위한 노력이 파멸의 조건이라는 점이다. 모를 때는 문제가 없다. 무지보다 진실에 도달했을 때 캐릭터가 붕괴된다. 구원의 여지가 없다. 인식이 곧 형벌이기 때문이다.


이상일이 개인에 집중하는 정치학자라면 황동혁은 구조에 초점을 맞추는 사회학자다. 시스템의 잘못된 청사진, 미비한 설계를 드러내는데 힘쓴다.


비극이라면 당연히 카프카, 카뮈, 베케트도 생각이 나지만 이들은 무력하다. 이상일과 황동혁의 캐릭터들은 훨씬 더 능동적이고 성실한 사람들이다. 사태 해결을 위해 분투하는 열띤 개인들이 있다. 그러나 가녀린 개인의 시도는 구조에 의해 무효화되고 도덕적 복권은 이루어지지 않은 채 결말이 대부분 죽음으로 냉혹하게 닫힌다. 최근에 보았던 <힌드의 목소리>와 같다. 테스에서도 토마스 하디가 정상적인 삶을 회복하려고 부단히 애쓰지만 세계가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노력은 도덕적으로 옳지만, 구원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반면 부조리의 알베르 카뮈는 의미를 거부하거나 끝내 발견하지 못한 채 네러티브가 끝난다. 건조한 사무엘 베케트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음을 비극의 시간으로 다룬다. 프란츠 카프카의 죄는 설명되지 않고 시스템은 끝내 도달할 수 없게 짜여져있다. 무엇보다 구조, 형식이 판결의 현현이다. 황동혁은 재판정까지 연출해 판결을 통해 해결을 보려한다. 카프카처럼 공백으로 남겨두지 않는다.


이상일, 호손은 옳게 살면 의미는 바뀐다는 일말의 여지를 남겨두는 반면

황동혁, 하디는 옳게 살아도 소용없다라고 말하는 것 같다. 세계는 원래 잔인한가? 인간의 노력이 무력한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런 암담한 픽션을 왜 시청할까? 영화의 의의는 무엇일까? 비극이 바로 세계의 진실이기 때문이다. 도가니, 힌드의 목소리, 남한산성, 분노 모두 실화 기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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