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단어는 으레 한 글자다. 너 꿈 밤 해 산 봄 비 그리고 합쳐서 봄비.


봄비가 사락사락 처마 끝을 더듬어 또르르 흐르는 오늘 가장 가기 좋은 곳은 부암동이다. 석파정에서는 김상유 화백의 민화풍의 그림이, 환기미술관에서는 김환기의 점선면이 나를 환대하며 맞아주기 때문이다. 이제 갓 관객을 맞이하기 시작한지 얼마 안된 따뜻하니 따스한 전시다. 학벌 배경 출신 재력 인종, 찾아오는 이의 그 어떤 경계를 구분하지 않고 품을 열어 모두를 맞이한다.


빗방울처럼 점이 둥근 파문을 만들며 끊어지는 듯 어느새 이어져 쌔근쌔근 맥동한다.


전통의 이름을 삿되게 부르지 않아도 분위기로 알 수 있는 어떤 고즈넉한 정서가 있다. 숨쉬듯 번지는 형태의 너울을 눈으로 흝는다. 단청색의 덧칠과 한지의 번짐 가운데 희미해지는 시간을 살펴본다.


살포시 앉은 은거 선사는 두 눈을 감고 무심히 호흡에 집중한다. 홍진과 번뇌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 소박하게 앉아 있는 자리 하나. 화폭의 아늑한 그곳은 높지도 낮지도 않으며 다투지도 물러서지도 않는다. 비가 와도 좋고 해가 떠도 좋다. 존재 자체로 아름다운 너와 함께라면 무엇이든 상관없다. 애쓰지 않아도 좋다.


꾸밈없는 선과 어눌한 붓과 곁을 내어주는 여백이 오래된 위로를 전한다. 아이가 그린 듯 서툰 그림이 다정하고 친밀하다. 해 그리고 산 셋. 물 그리고 나와 너. 붓질 하나, 붓질 둘, 연한 청록색 물띠가 화면 아래를 가로질러 나아가 물의 소리를 머금고 진하고 깊은 심연의 앰비언스를 만든다. 섦다. 마음 기운 날에 정처없이 방황하다 부암동에서 위안을 얻으리라. 서럽고 서러운 가운데 해학이 감칠 맛을 더한다.


유럽회화에서는 이렇게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이 없는데 중세회화도 이집트성각문자도 아니 것이 동방회화에서는 도무지 누군지 알 수 없다. 성인인가 아이인가.


심지어 산은 왜 저리도 무심히 둔덕처럼 솟았는가. 진중한 듯하면서도 어딘가 엉뚱엉뚱하고 싱긋싱긋 웃음이 난다. 이런 옛 그림 앞에 모두 무장해제된다. 감상에 가방끈도 선수지식도 필요 없다. 꼭 무엇을 알아야 할 것도 없고 무엇을 붙잡아야 할 것도 없다. 그저 보는 것으로 족하다. 그저 다만 거기에 색이 있고 형이 있고 내가 있고 그 사이를 흐르는 고요가 있다. 사각사각 빗소리와 함께. 괜찮으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좋다는 생각이 든다.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판단하려 들지 않는다. 저 멀리 과거로부터 심심한, 다시 말해 깊고 깊되 별 뜻 없는 마음을 띄운다.


환기미술관에서는 드로잉이 가장 좋았다. 그 원초적인 구성이 얼마나 다채로운지 알 수 있다. 걷는 명상이라 평을 갈음한다.


김상유 작품 150점 중 동판화 코너가 제일 좋았고 작업도구를 보니 더 흥미로웠다. 왜 작은지 알 수 있었고, 또한 작기에 그 안에 간결한 핵심을 꽉 차게 표현할 수 있었구나 싶었다.


환기미술관에선 파랑, 노랑, 종이색이 지배적이라면 석파정 서울 김상유에선 초록색이다. 특히 김상유의 초록색은 스크린 픽셀에서 다 느껴지지 않는, 직접 육안으로만 보이는 색감이 있다. 유화이기도 하고 수채화이기도 한 감각이다.


석파정 서울미술관

김상유 탄생 100주년 기념전 <쉽게 닳지 않는 사람> 4.1-8.17

https://www.instagram.com/p/DWvfdqRE2du/?utm_source=ig_web_copy_link&igsh=MzRlODBiNWFlZA==


환기미술관

<소장품전> 4.8-6.17

http://whankimuseum.org/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