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가 1862년에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을 2달 반 동안  여행하고 자기가 편집장으로 있는 월간지 브레미야에 게재한 짧은 여행에세이 "여름 인상에 대한 겨울 노트" 읽었다. 숏츠 같이 짧은 단편이다.


영어 번역본은 세련된 에세이인데 러시아어는 말 추임새를 그대로 활용해 말 더듬는 구어체 느낌도 다 표현되어 있어 유투브 강연이나 만담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든다.


저자는 이렇게 묻는다. 왜 우리는 유럽을 이렇게까지 사랑하고 그럼에도 끝내 유럽이 되지 못하는건가?


19세기의 유럽을 정치사회적으로 분석할 점도 많지만, 그런 어려운 이슈보다 오히려 여행자가 한 곳에 정착해서 모든 것을 볼 수 없는 휘발성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본다. 우리는 얼마나 오래, 얼마나 자주 여행해야 한 곳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내가 보고 듣고 느낀 것이 확실한가? 그리고 다 적어낼 수 있을까? 또한 한 사람의 사회문화적 위치와 감정에서 벗어나 객관적으로 대상을 서술할 수 있을까?


그저 도스토예프스키가 150년 전에 쓴 이 에세이을 통해 절절히 느낀 단 하나의 교훈이 있다면 여행의 진실은 대상이 아니라 관찰자의 상태에 있다는 점이다. 여행기는 있는 그대로의 묘사가 아니라 관찰된 시각, 관찰자가 위치한 공간에서, 관찰자의 심리상태에 따라 관찰자가 지각한 것을 정박시키는 것일 뿐이다. 어떤 의미에서 여행기는 매 년 재발명, 재각성되어야하는지도 모르겠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반복해서 유럽여행을 하는 동안 너무 많이 움직였고 너무 빨리 봤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자신의 인상 자체가 신뢰할 수 없다고 쓴다. 그렇게 주절대던 그는 여행의 의미를 기록의 사실성이 아니라 자기 노출로 바꾼다. 여행유투버의 철학적 효시라고 할 만하다.


틀릴 것을 알면서도 쓴다. 이미 틀릴 수밖에 없는 조건을 공개한다. 유럽을 본 것이 아니라, 몸 상태와 자기 기분과 궃은 날씨와 문화적 자존심과 국적에서 비롯된 불편한 감정이 섞여 오해했다고 자신의 상태를 폭로한다. 흥미롭다. 베를린을 싫어한 이유는 간 질환과 피로 때문이었다. 드레스덴 여성을 혐오한 이유는 자신의 황달 증세 때문이었다. 쾰른 대성당을 얕잡아본 건 다리 통행세에 긁힌 러시아적 자존심이 연유다. 진보된 기술로 건설된 근대적 다리에서 패배한 제국의 부끄러움과 기술 문명 앞에서의 굴욕, 러시아의 지연된 근대화에 대한 아쉬움을 모두 드러내는 것이다.


그래서 서구권(특히 프랑스)를 비판하는 대목은 되려 열등감의 표출 같고 숭배하는 대목은 자기혐오의 세련되었으나 숨겨진 형태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예컨대 15년 전에 만난 벨린스키와 차아다예프를 언급하면서 러시아적인 분노를 품고 있었다고 한다.



도시 풍광과 정경 묘사보다 1인칭 관찰자로서 자신의 상태(간질환, 혀의 색, 피로감,기분)와 의식의 흐름이 지배적이라는 점에서 일반적인 여행기가 아니라 컨디션 로그라고 해야할 듯하다. 주관적인 윤리에 의해 쓰여진 관찰자적 생리, 정념의 표출이라고 표현해야할 성 싶다. 


그런 의미에서 도스토예프스키가 묘사한 유럽은 장소가 아니라 러시아의 거울상이다. 유럽을 보러 갔지만 결국 러시아만 보았다. 한국인도 인천공항으로 숱하게 외국으로 나가지만 한국만 보고 오는 것처럼 말이다.  외국에 나가 거울만 보다온다. 거울 앞에서 치장하고, 스마트폰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며, 디지털 거울에 물어본다. 내가 이쁜 거 맞냐고.


아울러 그가 런던에서 세인트폴 대성당을 안 보았다고 하는 말은 수사로 끝날 말은 아니다. 사실 500야드 밖에서 본 듯하기도하고, 라고 중얼대며 말을 이어나갔을 때는 육안으로 봤다는 사실관계보다는 보고 싶지만 보지 않았다, 생트뻬쪠르부르그성당과 Saint Paul을 공유하지만 비교되어서 안 봤다, 라는 말일 것이다.


이런 서술은 일본 작가 나쓰메 소세키의 문명론의 개략이나 오에 겐자부로의 체험형 에세이와도 비슷한 문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나는 어쩔 수 없이 때때로 거짓을 말하게 된다"라고 말할 때는 부주의한 관찰자, 불성실한 기록자라고 체념하거나 겸양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론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여행자는 보아도 본 것이 아니고 본 것은 왜곡되며 그 왜곡을 자각하는 순간조차 또 왜곡된다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를 드러낸다.


신체 상태가 심리로, 감각적 병리가 일반 감정화되는 서술의 방식이 흥미롭다. 예컨대 베를린에 대한 첫인상에 대해 그는 신맛의 느낌(sour impression, кислое) 즉 속 쓰려서 위장이 안좋은 기분나쁜 기분을 주었다고 표현한다. 그리고 이유를 attack of liver로 번역된 страдающий печенью(간을 앓고 있는)로 끌고 간다.


즉 그의 미적 판단은 장기 상태의 부산물이었다. 이런 자신의 감각과 연관된 병리상태는 желтый, усталый, изломанный(황달, 피로, 부서진듯한, yellow, tired, and exhausted)로 이어지며 신맛-간질환-황달-피로-부서지고 기능을 잃은 육체로까지 연결된다.

영어는 다음 링크에

https://almabooks.com/wp-content/uploads/2021/11/Winter-Notes-Extract.pdf

러시아어는 다음 링크에 있다

https://ilibrary.ru/text/66/p.1/index.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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