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애스터의 네 번째 장편영화 <에딩턴(2025)> 보았다. 칸에서 1.4점, iMDB에서 6.6점, 제작비 2500만불의 반도 거두지 못한 처참한 성적에 수입배급사에서 정식상영을 결정하지 않았다. 며칠 전 vod로 풀렸다는 말을 듣고 왓차에서 결제해서 보았다.


전작과 달리 공포라기보다 현실 미국사회를 풍자하는 서부극에 가깝다. 최근에 접한(심지어 바로 어제 접한) 도서, 영화와 묘한 연관성이 있었다. 줄거리는 밝히지 않는다. 영화를 스포 없이 다른 작품에 비유하자면 세르지오 리오네+시라트+어쩔수가없다+마니아(책)+부고니아+소년의시간에 아리 애스터식 터치가 들었갔다.


세르지오 리오네의 스파게티 웨스턴 3부작을 대표로 하는 서부극의 황량한 뉴멕시코 사막을 배경으로 서부극처럼 개인적 원한이 악순환이 되는 구조인데 보다 매운 맛이다.


영화의 뒷 부분의 폭사는 시라트급 충격이 있고 EDM은 없다. (현재 개봉 중인 <시라트>의 홍보문구는 서브스턴스급 충격이라고 하지만, 더? 아직도 더? 같은 크례센도형 바디호러보다는 순간 놀람+서스펜스가 압권인 촉각적 EDM의 영화다)


박찬욱 감독의 <어쩔수가없다>처럼 작업쳐서 누명씌워 범죄를 덮는데 우연히 상황이 자신에게 유리에게 돌아가는 정황이 있다. 물론 박찬욱처럼 유쾌하게 끝나지는 않고, 아리 애스터식 무겁고 눌러 앉은 음산함이 없지 않다.


영화는 21년 언저리 코로나 바이러스 락다운 때 강제적 거리두기와 마스크 착용, 음모론 유투브, BLM운동을 둘러싼 모든 정치적 혼란을 그리는데, 이는 라이오넬 슈라이버의 책 <마니아>에서 비판하는 미국사회의 풍경과 닮았다. 저자처럼 대체 근과거를 상상했든, 감독처럼 가상의 미국도시를 다루었든, 이야기는 얼마든지 현실이 될 수 있고 부분적으로는 이미 겪은 엉망진창의 미국현실을 다룬다.


백인하류층에 SNS로 퍼진 음모론하면 제시 플레먼스가 연기한,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부고니아>다. 어른 없는 가정과 교육 없는 학교에서 답을 얻지 못했는데 쇼츠나 릴스가 세상에 대한 간단하고 강력한 설명을 제공한다. 소속감을 제공해주는 공동체에 공유되는 반복되는 짧은 슬로건과 해시태그가 이 말에 공감만하면 우리 편이 된다는 인스턴트 정답을 제공한다.


영화에서 BLM 집회에 참가하는 청소년들은 <소년의 시간>에서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며 정체성을 형성하는 청소년들에게 SNS가 먼저 쉬운 아이덴티티 프레임을 제공하며 깨어 있고 진실을 아는 소수의 정의로운 자라고 명명하며 좋아요로 즉각적 보상이 강화된 심리구조를 만드는 과정을 보여준다.


논쟁에서 이겼다는 쾌감이 도덕적 우월감과 결합되고, 화낼수록 디지털 공동체의 보상이 커지며, 더 급진적인 태도를 보일 수록 주목도가 높아진다. 너는 속지 않았고 오직 너만 진실을 봤다는 메시지가 정서적 앵커를 제공한다. 이 모두 불안과 무력감을 겪으며 피해의식과 권위의식이 뒤섞인 복잡한 아버지 캐릭터의 우당탕탕 땜빵식 해결이 아이들의 상태를 악화시킨다.


유전(2018), 미드소마(2019), 보이즈어프레이드(2023) 같은 아리 애스터의 이전 작품과는 달리 <에딩턴>은 개인의 트라우마와 가족 구조를 부각하지 않고 집단의 도덕과 사회의 확신에 대해 초점을 맞춘다. 그래서 언뜻 애스터 영화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살인의 추억>이 봉준호식 범죄드라마, <설국열차>가 봉준호식 SF, <데드돈다이>가 짐자무시식 좀비물, <오직사랑하는이들만이살아남는다>가 짐자무시식 뱀파이어물인 것처럼 장르영화를 만들어도 감독의 터치가 들어가기 마련이다. 심지어 감독이 데뷔작으로 생각했던 영화인데 여러 제약조건 속에 <유전>이 먼저 개봉해 감독 스스로는 허명을 얻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일단 애스터 영화에서 보이는 연출적 공통점은 있다. 기괴한 인형 소품도 등장하고 화면 전환하며 빛의 반사를 활용했다. 차가 선인장에 부딪히며 프레임 둘레로 선인장군이 등장하며 2000년대 할리우드식 카메라 돌리아웃을 활용한다.


무엇보다 아리 애스터는 후반에 강하다. 그의 영화는 끝까지 봐야하는 이유다. 마지막 30분에 사건이 증폭되면서 오히려 의미가 닫히는 게, 마치 깔끔하게 매운 고추기름 같다.


애스터 영화는 으레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 처음에 불안은 개인의 문제처럼 보인다. 무력한 주인공은 고뇌하고 주변 인물에게 침범당한다. 그러다가 점점 구조문제가 드러난다. 그리고 화룡점정으로 후반부에서 탈출구 없다는 점이 확정된다. 그래서 보는 이에게 해결되었다는 카타르시스를 주지 않는다. 초반의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다. 질서도 복원되지 않는다. 주인공은 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처음에 믿었던 모든 것이 아스라이 사라지는 느낌이다. 그리고 저항했던 주인공이 이 세계의 일부가 되면서 빠져나올 수 없는 공포의 구조적 수렁에 갖힌 기분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사회풍자 서부극도 이전 세 장편영화의 축 늘어진 음산한 공포와 가족 트라우마만 없다뿐 아리 애스터식 터치가 잔뜩 들어가있다.


대부분 다른 감독은 복선을 회수하면서 스토리를 닫는다. 비밀이 드디어 폭로되고 악의 정체가 드러나며 처음 갈등을 촉발한 문제상황이 해결된다. 마치 야구경기에서 홈그라운드에 돌아오듯 주인공은 집에 돌아오며 마무리 된다. 쿠키로 스케일이 확장하며 속편이나 다음 시즌에 대한 예고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리 애스터는 다르다. 관객에게 정보를 차근차근 하나씩 주면서 이해를 빌드업하다가 기존 정보를 재배열해서 의미를 폭발시킨다. 우리는 위기 속에서 얼마나 빨리 서로를 악마로 만들 수 있는가... 위기 상황에서 인간은 얼마나 빨리 도덕적 확신을 폭력으로 바꾸는가...


영화를 보는 관객이 뇌내회로를 돌리면서 계속 쌓아온 해석이 다 맞고 이제 되돌릴 수 없고 너도 이 무서운 사태의 공범이야, 하면서 동참시킨다. 연루된 관객은 감독의 스토리에서 벗어날 수 없고 무서운 현실의 빌딩블록이 된다. 그래서 초자연적 현상이나 악마 숭배도 없는데 SNS공간에 마을광장이 침범당한 이 이야기가 오싹해지는 것이다.


위 사진은 셰리프로서 시장출마하는 연설을 담은 쇼트다. 감독은 의도적으로 실제 모습을 블러처리하고, 카메라에 초점을 맞추었다. 오늘날 우리는 숨 쉬는 신체가 아니라 SNS에 등장하는 가상의 모습만이 진짜라는 감독의 메시지다. 자신을 재료로 하되 자신이 아닌 이 디지털 아이덴티티는 동그란 조명과 카메라의 사각 프레임 속에 이중으로 갖혀있어 의미심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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