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을 나오려고 하는데 내가 모르는 영화라 비디오드롬에 대한 정보를 접하고 다시 돌아가 한 번 더 빌려봤다. 1시간 반 가량의 캐나다 SF 공포영화다. 비디오에 중독된 자의 환각증세를 통해 보는 것만 실재한다는 인식론을 다룬다는 점에서 매체기술의 철학으로 읽을 수 있다.


<서브스턴스>처럼 장기가 터지고 신체가 훼손되는 바디호러가 있어서 공포영화다. 주인공 맥스의 환각증세를 시각화하며 녹화된 테이프를 배 속에 밀어넣어 사람을 프로그램으로 조종한다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한 장면은 스토리를 위해 필요했다. 그런데 마지막에 콘벡스가 터져죽는 장면은 굳이 필요했을까 싶다. 


얼개는 대충 이렇다. 토론토의 소규모 방송국 시빅티비(CIVIC-TV) 사장 맥스는 포르노 같은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프로그램을 통해 시청률을 끌어올리는 인물이다. 처음에 일본 게이샤 누드영상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맥스는 할란이라는 정보통신 기술자가 수시한 정체불명의 해적방송 비디오드롬을 접한다. 배경설명과 스토리도 없이 그저 알몸의 여자를 고문하는 영상을 tv의 미래라고 확신하며 출처를 궁금해하다. 할란은 수신 지연시간을 볼 때 말레이시아가 아니라 피츠버그라고 말해준다. 한편 연인관계가 된 SM(가학적) 성향의 라디오 진행자 니키도(담뱃불로 자기 유방을 지진다) 비디오드롬에 홀려 촬영지로 향한 후 실종되고 만다. 영상을 배후를 쫓던 맥스는 미디어 이론가 브라이언 오블리비언의 사상에 경도된다. 오블리비언은 텔레비전이 현실을 대체할 것이며 비디오드롬은 북미인의 정신을 장악하기 위한 전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비디오신호는 시청자의 뇌에 종양tumor과 환각을 유발하는 무기라는 것이다. 오블리비언의 자택으로 간 맥스는 딸 비앙카를 통해 이미 오블리비언이 죽었다는 말을 듣는다. 비디오드롬에 노출된 맥스는(유투브 쇼츠나 ai slop을 보는 오늘날 사람을 환기시키는듯) 점차 환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다. 이제 이 부분에서 바디호러가 등장하기 시작해 맥스는 자기 창자 속에 권총을 집어넣고 자기 팔이 무기와 융합되는 기괴한 변형을 겪는다. 그러다 우연히 걸려 온 전화를 받는데 비디오드롬을 유포한 콘벡스가 만나자느 이야기다. 기술자 할란을 통해 의도적으로 접근해 실험체로 사용했다고 말한다. 비디오드롬을 이용해 사회를 정화하려는 거대 기업의 도구로 조종당하는 운명으로 전락해 자기 동료를 죽이게 된다. 클라이맥스에 이르러 맥스는 오블리비언의 딸 비앙카에 의해 재프로그래밍되어 거대미디어 기업의 횡포에 맞서고 콘벡스 총수를 총기와 융합된 팔로 쏘아 죽인다. 엔딩에서 맥스는 기존의 육체를 버리고 새로운 단계의 존재로 나아가라는 메시지를 듣고 long live the new flesh! 새로운 살이여 영원하라(삶아니고 살, 즉 몸-신체)라는 선언과 함께 스스로를 파괴하는 자살을 택하는데 이 역시 프로그래밍된 것을 따른 것이라는 은유가 모호하게 깔려있다.


미술적으로는 허파 호흡하는듯한 유기체 비디오, 텐트 같이 부풀어오르고 단백질 촉감의 TV장, 주황색으로 내부에서 발광하는 에일리언형 환각기계같은 소품 디자인이 인상적이다.


철학적으로는 극단적인 인식론을 음미해볼 수 있는 플롯이다. 주인공은 자극적인 해적판 비디오영상을 보다가 환각을 본다. 자신의 지각 범위에 인식되지만 실재하지 않은 니키를 본다.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다(esse est percipi)라는 명제로 유명한 조지 버클리가 생각난다. 그의 말마따나, 인식되는 것만이 실재다.


세계는 자아의 능동적 설정에 의해 성립한다고 생각한 피히테에 의하면 외부세계는 자아가 자기 한계를 설정하면서 발생한 산물이다. 이런 주장에 기대 토크쇼에 나온 미디어학자 오블리비언의 말을 이해해볼 수 있다.


오블리비언의 말은 각본이 좋아서 번역해본다.


텔레비전 화면은 정신의 눈에 해당하는 망막이다.

(The television screen is the retina of the mind's eye.)


그러므로 텔레비전 화면은 뇌의 물리적 구조의 일부이다.

(Therefore, the television screen is part of the physical structure of the brain.)


그러므로 텔레비전 화면에 나타나는 모든 것은 그것을 보는 이들에게 가공되지 않은 원초적 경험으로 출현한다.

(Therefore, whatever appears on the television screen emerges as raw experience for those who watch it.)


그러므로 텔레비전이 곧 현실이며, 현실은 텔레비전보다 덜하다.

(Therefore, television is reality, and reality is less than television.)


오블리비언의 스펠링으 O'Blivion으로 O'Brian 같은 평범한 성처럼 되어있으나 어포스트로피만 빼면 영단어 망각이라는 철자와 같다. 그는 이미 죽었기에 미리 녹화된 테이프로만 존재한다. 토크쇼에서 패널과 대화가 아니라 독백만 하는 까닭이다.


인식된 현상만 분석하는 현상학의 후설이나 실재도 인정하면서 인식의 한계를 규정한 칸트는 실재는 인식 없이는 무의미라고 말한 버클리나 실재라는 말 자체가 불필요하다고 주장한 피히테에 비하면 중도적인 입장을 취한다. 물론 버클리나 피히테도 내 의식만 확실하다는 극단적인 유아론자(솔립시스트)들과 비교하면 양반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