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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의 맛 - 피아노 조율사의 우리 국수 탐방기 ㅣ 피아노 조율사의 탐방기
조영권 지음, 이윤희 그림 / 린틴틴 / 2025년 12월
평점 :

여기에 한 평범한 피아노 조율사가 있다.
대개 매장에서 근무하다가 가끔 전국으로 출장을 나가길 어언 30년
"일주일 내내 꼼짝없이 매장에서 근무하고 나면 생각이 많아지고 불현듯 어디론가 떠나는 버릇이 있는(p78)" 그는 문을 열자마자 산책하러 튀어 달려나가는 보더콜리처럼 전국 각지의 맛집을 하나 둘씩 다니기 시작한다.
어느덧 맛집 정리 노트는 빼곡해지고 그 리스트를 아기자기한 일러스트와 함께 책으로 빚어 우리에게 선보인다. 삽화가는 이윤희, 조율사의 맛집 책 세 권을 모두 그려 이제는 그녀가 없으면 앙꼬 빠진 찐빵, 로다쥬 없는 마블 같다.
이번 책으 2018년에는 중국집, 2021년에는 경양식집, 이제 2025년에는 국수집 탐방기가 나왔다.
그래서 3년 주기로 기대하고 있어 2024년에 기다렸지만 1년이 늦었다.
3년마다 작품 하나씩을 내던 일본의 호소다 마모루 감독도 코로나때문인지 최신작은 1년이 늦어 25년에 나왔고
AI 활용에 대한 미국 작가조합의 반대로 인해 마블 신작도 개봉일정이 밀렸던 것과 같은 이치일까
소개하는 맛집과 저자의 삶의 방식과 책의 서술 스타일은 모두 일치한다. 담백하고 슴슴하다. 역대급, 전국유일, 충격적인, 압도적인 같은 오염된 마케팅 용어 범벅도 아니다. 반드시 가야하는, 기간지역한정, 지금 아니며 종료되는 같이 당위성으로 우리를 압박하지도 않는다.
미슐랭이나 블루리본, 푸딘코 같은 지도기반 전문 가이드도 있고, 망고플레이트나 일본의 타베로그 같은 실시간 맛집 평점 사이트도 있으며, 책으로는 진수씨 성찬씨를 주인공으로 하는 허영만의 전국 맛집 만화도 있는데 이 책은 무엇이 특별할까?
특별함이 없어서 특별하다. 수식어는 화려하나 결론은 없고 은유만 있고 정보는 없는 와인 시향투의 표현이 없다. 의도적으로 통제되지 않은 향의 공존이라느니, 잔향에는 아직 열리지 않은 편지 봉투의 가장자리 같은 긴장이라느니, 첫 노트에는 막 비가 그친 뒤의 오래된 도서관 마루 바닥에서 헤진 가죽 제본의 라틴어 서적을 읽는 것 같다느니. 적어도 노포에서 오늘의 식사를 하는데는 어울리지 않는 톤이다.
VIP가 대접받는 고가의 파인다이닝에서 얼마나 비싸고 희귀한 식재료를 얼마나 숙련된 테크닉으로 조리했는지, 호기심을 자극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백년맛집 타이틀을 붙인 로컬 식당을 홍보하는 것도 아니고, 비룡왕처럼 심봉사의 눈도 뜨게 하는 메뉴를 자랑스럽게 내어주는 곳을 다루는 것도 아니다. 책은 평범한 가운데 특별함을 표방한다. 이 책의 맛집 리스트를 도장깨기하듯 다닐 필요가 없다. 소개한 음식점은 물론 퀄리티 있는 메뉴가 있지만 충분히 대체가능한 곳이 있을 수 있을 것 같다.
평범한 하루에 약간은 다른 지역에서 약간은 다른 음식을 먹는 풍경이 인상적인 책이다. 비유하자면 캐릭터는 한국판 고독한 미식가이고 분위기는 리틀 포레스트풍의 책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묵묵히 노동하는 일상의 한 순간을 담아낸 이 책은 전문서비스를 제공하며 열심히 일한 하루의 끝에 적당한 식당을 찾아나가는 보통의 하루를 기록한 일기장이다.
피아노 조율에 대한 묘사는 특별함을 주되 과하지 않아 글 진행을 위한 좋은 에피타이저가 된다. 예컨대 "영창의 U121NFG, 잭 플랜지가 위펜에서 떨어져"(p42) 같은 전문 표현이 나오나 어렵지 않고 설령 이해하지 않아도 페이지를 넘기는데 아무 문제가 없다. 그리고 "소스테누토 페달"(p204)은 삽화로 시각화해서 보여주기도 한다.
또한 예컨대 "조율한 피아노의 현이 국수 같다"처럼 같은 이미지를 연결하다가 다음 장에서 바로 "배고프다"(p11-12)라고 하며 스피디하게 글이 이어지고
"멋들어진 피아노 곡의 전주곡처럼 김치와 매운 양념이 나왔다"(p13)고 담담히 표현하기도 하며
"뜬금없지만, 브라이들 테이프처럼 쉽게 끊어지지 않는 놀라운 걸 먹고 싶다 탱탱한 쫄면이라든가"(p91)라고 하며 나날의 우연을 어떻게 추수하는지 보여주기도 한다.
도란도란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 "분명 사입면인데"(p38) "몇 년 전에 영동 스낵카랑 콜롬버스 스낵카는 폐업한 걸로 아는데"(p39) 같이 오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정보가 흘러나온다.
그러나 먹는데 체할정도로 불필요한 음식 어원의 유래와 역사를 다루는 다른 맛집에 대한 책과는 달리 먹물의 언어가 없다. 먹는 동안에는 너무 많은 말을 하지 않는다. 질문은 하되 머리를 써야하는 답변은 제공하지 않아 우물우물 씹는 미각의 순간의 집중할 수 있다.
"팥은 전라남도 나주평야가 주산지인데 전라북도에서 팥칼국수가 유래된 까닭이 궁금하다"(p51)
"풀짜장이 뭘까? 밀가루 풀? 걸쭉한 짜장면일까?"(p66)
그런 TMI는 모르고, 설령 안다 하더라도 내뱉지 않는다. 먹는 순간의 신비에 온전히 취해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담이 없다. 과장된 화려함이나 현학적인 모습이 없어도 별 것 아닌 일상적인 하루에 깃든 경탄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식당을 알지만 특별히 단골도 아니고 위세를 부리지도 않는다. 1인분이 안되는 칡국수집에 가서 특별히 양해를 받아 먹기도 하고 분주한 점심시간에 혼자 자리를 차지할 수 없어 급히 먹기도 한다.
스낵카와 여인숙이라는 용어가 밀레니엄 이전의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아무 일 없는 하루의 끝에 맥주 한 잔 기울이며 맥락없는 뜬금포 이야기를 나누듯 글이 진행된다. 기정떡을 좋아하나(p223) 망개떡은 모르는(p76) 아내에 대한 이야기도 곁들여지고, 대학생이 된 딸에 대한 소소한 추억이 식탁에 반찬이 진설되듯 배경으로 깔리며, 부산맛집 여행을 함께 간 큰 딸이 으레 호기심 많은 청소년이 그렇듯 성인이 되기 전 술을 입에 대어 본 경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도 한다. 일쌍다반사에 소소한 대화주제다.
책의 마지막에 이르러 오래 전 제주 이호테우해변 스낵카에서 우연히 만나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던 대학생이 고객으로 연락해 다시 찾아주었을 때 모르는 사람이라고 담백하게 마무리하는 부분이 마치 <초속5센티미터>의 기찻길 엔딩이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