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단상

전시장에서 사진 찍는 것은 책에 줄 긋는 것과 같다.


새로 접한 사람이 지식정보를 탐닉하는 환희 속에 무엇이 좋은지 무엇을 걸러야할지 무엇은 다시 접할 수 있을지 구분할 수 없는 상태에서 행복 도파민이 뇌 속에 분비되어 시간 안에 아무 것이나 저장하기 위해 이것저것 담는 것이다.


마트에서 카트에 쇼핑리스트보다 더 많이 주섬주섬 담는 것과 같다.

쿠팡이나 쓱 앱에 들어갔다가 광고에 홀려 장바구니에 물품이 많아지는 것과 같다.


남녀노소 관계 없다.

미술관에 다녀본 적 없이 평생 관계없는 일을 하고 은퇴한 후 유럽여행 갔다가 으레 간다는 미술관에 들어가서 벼락을 맞고 미술에 관심이 생겨 60대에 다니기도 한다.

유년시절부터 수학과학만 파고 전형적인 영재-과고-과기대 등 이과 기숙학교 테크트리를 타다가 문과 여친을 만나서 미술관 방문을 시작하기도 한다.

애 기르느라 정신 없다가 고등학교 졸업시키고 여유가 생겨서 다니기 시작한 동호회, 모임, 문화센터에서 은우엄마 손에 이끌려 미술관에 드나들기도 한다.

반드시 미대, 미학, 미술사 전공생만 미술관에 오지 않고 반드시 학생이나 전공자만 발길하는 것이 아니다. 

여러 종류의 사람이 자신의 생애주기의 여러 타이밍에 여러 계기에 의해 내방한다.


책도 마찬가지다. 다양한 사람이 다양한 책을 다양한 시점에 다양한 이유로 읽는다.


이때 신규진입자는 자신의 마음을 앗아간 작품에 몰두한 나머지 저장 강박을 느낀다.

지금 안 보면 어떡하지 지금 읽지 않으면 어떡하지


도서관 책은 공용이라 침 묻히고 줄 치면 안된다는 것은 상식이다.

줄을 치고 싶다면 자기가 구매해서 개인 소유가 된 책에 얼마든지 하면 된다.


문제는 미술관의 그림인데 개인 소유가 안된다. 도록은 다소 비싼 편이고 때론 저작권 문제로 촬영이 안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디지털 카메라로 저장하는게 최선이다. 기본 원칙은 촬영 금지였다. 2010년대 어느 순간인가 촬영 금지가 서서히 풀리기 시작하더니 촬영이 문화로 자리잡았다. 인스타 게시용으로 입구에서 대형 광고 패널 앞에서 사진 촬영을 넘어 전시장 안에서도 스마트폰 촬영이 일반적이 되었다. 촬영 제지는 자연스러운 권리 행사를 막는 방해요소처럼 느껴지고 촬영 금지하는 곳은 발길을 하지 않아 SNS에 바이럴이 안되니 그냥 허용한다. 이제는 둑이 무너진 것마냥 뒤로 돌아갈 수 없다. 비가역적이다. 스마트폰 촬영은 다반사고 일상적이다.


그런데 정말 집에 돌아가 그 사진을 다시 보는가? 라는 생각을 해 볼 필요가 있다.


마치 책에 어지럽게 줄 친 부분들을 다시 읽는가? 라는 질문과 같다.


차라리 책을 읽을 때 정말 핵심적인 부분만 줄을 치면 어떨까

개인 노트에 필기를 하면서 내 생각을 더 추가해보면 어떨까


이를 그림에 적용해보면

전시장에서 정말 괜찮은 그림 1%만 찍는다.

전시장에서 봤던 마음에 드는 그림 정보를 필기장에 적어놨다가 도록이나 인터넷에서 찾아 보고 더 생각해본다.

이렇게 이어질 수 있다.


물론 정말 많이 오래 다녀보고 스스로 깨쳐야하는 부분이다.


어차피 그렇게 많이 찍어도 다시 안 본다는 것을 말이다.

많이 찍으면 찍을수록 안 본다는 것도

다시 못 보는 귀한 그림도 쉽게 갈 수 없는 외국미술관도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 또 접할 수 있다는 것도

몇 년 만 지나면 카메라 해상도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옛날에 그렇게 폐관시간 전에 달려가 허겁지겁 찍었던 사진의 화질이 구리게 느껴진다는 것도 말이다.

(캠코더 테이프 시대를 생각해보자 그렇게 멀지 않은 옛날이다

또, 20핀 단자, USB잭, C타입으로 충전단자가 변해간 걸 생각해보자)

그렇게 해탈이 기다린다.


왜냐하면 체험은 사건이며 사건이란 일일히 기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몰에 물드는 바다의 그 한 순간을

바람이 불 때 휘날리는 깃발을, 

바라보고 마음에 담는 것으로 족하지

사진이나 영상으로 기록하면 촬영에 집중하느라 스크린만 바라보게 되고 아우라를 느끼지 못한다.

남에게 보여줄 집착에 사로잡혀 순간을 온전히 나의 것으로 만들지 못한다.


어차피 내일 다시 해는 지고 바람은 언제든지 다시 불기 마련이며

책은 또 읽을 수 있고 그림도 없어지지 않고 언젠가 또 볼 기회가 있으나

일단 어떤 시기에 어떤 책 한 권은 미친듯이 줄을 그으며 읽으며

어떤 시기에 어떤 전시에서 모든 그림을 미친듯이 다 찍는다


누구나 뉴비 때는 아직 체험 시간의 절대량이 적으므로

비어있는 곳간에 저장하느라 마음이 급급해서 계속 줄을 긋고 계속 셔터를 누른다.

학창시절 수학초심자 때 연립방정식 문제를 풀어야하고 정수론을 이해야하며 코사인법칙을 외워야하듯이

독서나 전시의 경우도 신규진입자는 걸어나가야할 어떤 트랙이 있다.

만능 저장강박에서 관심사 분야확장에서 전국과 전세계 미술관 탐방에서 비교번역까지 머나먼 여정이다.

한 사람 한 사람 개인이 밟아야하는 머나먼 구도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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