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미술관 - 마침내 우리는 서로의 뒷모습이 된다 아무튼 시리즈 80
이유리 지음 / 제철소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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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고, 제철소, 코난북스 세 출판사가 번갈아가며 펴내는 순환출판 에세이집 아무튼 시리즈 80번째로 <아무튼 미술관>이 나왔다. (순환출판은 내가 그냥 쓴 말이다)


46판(B6)보다 다소 작아 손에 아담하게 들어오는 비규격 판형에 200쪽 가량의 분량으로, 커피챗이나 술자리하면서 오손도손 들려 줄 저자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담긴 책이라 읽기 쉬워 그동안 나온 책은 대부분 다 읽었다. 요조의 <떡볶이(25)>, 김겨울의 <피아노(48)>천선란의 <디지몬(67)>, 김초엽의 <SF게임(69)>, 은유의 <인터뷰(75)>도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진 저자가 쓴, 가독성 좋은 이 시리즈를 대표할 수 있을 법한 책이다.


SNS친구 중에 이 책을 좋아할 사람이 많을 것 같다. 전시 돌아다니다가 생각한 단상을 포스팅해 인연을 맺은 사이버 공간에 미술관 탐방에 대한 개인적 에세이를 쓸만한 글감을 지닌 사람들이(사람 맞죠?) 많다. 언뜻 떠올려봐도 10명 이상 생각난다.(구체적 호명은 생략)


가정 폭력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었던 어린 시절 미술이 어떻게 위안을 주었는지로부터 책의 첫 운을 뗀 후 자신의 어린 시절 나이와 거의 비슷한 아이를 가진 엄마가 되어 천경자실의 <생태> 앞에서 마음을 다 잡으며 붓을 거둔다. "아이였던 나는 유리조각 사이를 조심스럽게 걸어나와 미술의 세계로 도망쳤고 어른이 된 나는 반복되는 일상에서 나를 구하기 위해 다시 미술관으로 들어갔다"(p174)


비자 문제로 캐나다 어학연수가 실패하고 우연히 발을 디딘 영국 어학연수에서 미술관 방문 삼매경에 빠진 저자는 미대생도 미술사 전공생도 아니지만 교양 있는 일반인으로서, 또 기자로서, 단행본 출간 작가로서 미술에 대한 진한 플라토닉한 사랑을 이어나간다.


저자는 영국 서펀타인 갤러리에서 불편한 작품을 보고 나와 호숫가에서 상념에 빠지기도 하고 인도네시아 발리로 여행을 떠났다가 미술관의 존재론적 가치에 대해 생각해보기도 하고 지금은 재개발로 없어지 부산 미남역 근처 옛 부산백화점을 추억하며


<기록사진>과 <델프트 풍경>의 의미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을 잇기도 한다. 가장 특이했던 일화는 어머니의 이름과 미술관의 제목없는 작품을 연관지은 "무제"(p99-104)인데 봉준호 감독이 오스카 국제영화상 수상시 재인용한 마틴 스코세지 감독의 말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를 상기시킨다.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공립 미술관의 메이저 전시나 글로벌 화랑에 소속된 유명 작가의 값비싼 작품에 대한 글은 많으나 루프나 프로젝트 사루비아 같은 대안공간을 언급한 대중적인 글은 적었던 것 같다. 하지만 과연 어떤 전시가 인상 깊었는지 구체적인 언급은 빠져서 다소 아쉬웠다.


저자는 미술관을 맹목적으로 찬양하지 않는다. 뮤지엄 레그 같은 장기간 관람에 따른 체력 소모뿐 아니라 어려운 전문 학술 용어로 점철된 큐레이터 노트에 대해 비판하기도 한다. 특히 영어 번역투의 현대미술이나 도자기의 한자명 같은 경우다.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한 비전공자 입장에서 미술관에 입장하는 일반인이


느낄 감정적 허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이다. 국중박의 국보170호 백자청화매조죽문유개호나 "파편화된 시퀀스를 따라 정동의 감쇠를" 같은 문장을 지적한다(p149) 차라리 영어로 읽는 게 낫겠다고 말하면서도 영어도 어렵다고 인정한다. 어려운 전문용어가 아예 불필요한 것은 아니고 학술적 비평적 의미가 있다고 서술하면서도 쉬운 해설은 대중의 접근성을 높인다고 지적하면서 전문용어를 순화한 케이스를 언급한다.


논문 읽기에 바쁜 큐레이터 지망생이 이 책의 독자가 아닐 것이기에 저자의 주장은 책을 집어든 자로부터 긍정적 반응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실제로 대부분 사람들이 읽기 어려운 해설을 패스하고 관람하는 것도 사실이고 전문가도 자신의 어휘가 대중과 유리되어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또한 그런 형태의 글쓰기가 아니면 비평을 할 수 없다는 본질적 한계와 함께.


다만 이것은 쉬운 해설로 영원히 해결할 수 없고, 특히 한국어만의 문제일 수 있다는 점은 언급할 필요가 있다.


저자의 생각이 다 일리가 있기에 더더욱 근본적인 이유를 생각해봐야한다.



해설의 접근성 문제는 최근 들어 이해하기 쉬운 해설을 제공하며 많이 완화가 되고 있다. 아마 일본 미술관의 선례를 도입한 것이 아닌가 싶다. 언젠가부터 일본미술관에서 저출산시대에 대중이 쉽게 미술관에 올 수 있도록 이전에는 없던 이해하기 쉬운 해설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반대로 전문가들의 반발도 무시할 수 없다. 으레 몇 개 국어에 능통한 미술사학자들은 용어 이해가 그렇게 어렵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한자가 어렵다고 도자기명을 순우리말로 변환한다면 같은 용어를 공유하는 동아시아학계와 소통을 잃을 것이다. 이미 청자 상감운학문 매병(靑磁 象嵌雲鶴文 梅甁)이라 고려시대부터 써오던 용어를 한자교육이 미비한 시대가 되었다고 마음대로 바꿀 수 없다. 사료와 전거를 읽을 수 없게 된다. 비슷한 사례로 예컨대 칸트철학의 어려운 용어를 해체하고 순우리말로 바꾸자는 운동도 과거에 있었으나 학계의 반응은 냉담했다. 


차라리 용어 해설을 제공하는 것이 나을 수 있는데 대규모 예산과 전문가들이 대거 투입되어야하는 작업이라 개인이 하기는 어렵다. 안그래도 펀딩이 적어 인문학자들은 명맥만 유지하며 각기분투하고 있는 실정이다.


용어는 그렇다 치더라도 외국학술서 번역투의 문장은 어떠할까? 이 부분은 쉬운 해설을 제공하면 괜찮을까? 효과는 부분적이라고 생각한다.


일단 왜 그런지 부터 살펴보자. 일단 어려운 해설은 번역투라고 생각할 때 번역투가 왜 나왔는지 원인을 생각해보자. 그 이유는 과학적이고 우수한 언어체계인 한글의 범용성에 힘입어 음차한 외국어에 조사를 붙여 번역하기 쉬운 까닭이다. 번역투가 난무할 수 있는 이유는 한글이 그것을 허용했기 때문이다고 나는 생각한다. 번역투가 많은 이유는 그것이 한국어 안에서 가능했기 때문이다. 번역투라는 초벌직역의 단계가 불가능한 언어도 많다. 그런 경우 어떤 권위 있는 학자가 감수한 번역본 이전에는 지식이 유통될 수 없다. 


다른 나라에서는 외국어가 안 되는 개개인이 자체적으로 텍스트를 이해할 수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높은 교육열과 서구화 덕분에 한국인이 영어를 잘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본은 영어가 필수가 아니다. 영어가 원오브댐, 즉 외국어 중 하나로 이해된다. 필리핀은 영어회화는 잘 하지만 인구 전체의 교육수준은 한국보다는 떨어지는 편이다. 무엇보다 한국의 수능영어독해처럼 어려운 텍스트 읽기에 대해 대부분 인구가 교육받지 않았다. 한국의 우수한 교육열과 광범위한 영어교육 덕분에 초벌번역 수준의 거친 해설이 시중에 돌아다닌다.


모든 외국어를 의미를 감안해 한역해야하는 중국어의 사정을 생각해보자. 일본어는 번역이라는 진입과정에서 전문가 군이 출동해서 한 가지 정의를 내리고 그 의미를 배설한다. 이는 일본어 단행본, 해설서나 신문에 보면 항상 여백에 글로서리가 있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에 비하면 한국에서는 번역청 같은 공신력 있는 기관이 용어를 정착시키지 않고 어쩐지 각자도생으로 알아서 번역하는 것 같다. 특히 계약직 큐레이터들이 그렇다. 학예사들이 그런 어려운 해설을 쓴 이유는 시간과 예산에 쫓기기도 하거니와 매뉴얼이 없는 상황에서 자기 스스로 최선을 다해 번역해야만 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현대예술 같이 정해진 판본이 없는 경우엔 더더욱. 학문적 트레이닝을 받을 때 영어논문을 최대한 정확하게 직역으로 이해하도록 교육받고 올바른 한국어로 다듬는 교육은 전무했던 이유도 물론 감안해야한다. 알아서 책 많이 읽고 알아서 번역하다가 우연한 기회로 성공하는 메시아문화의 일환이다.


이런 언어, 학계, 대학원 트레이닝, 노동상황 여러가지 복합적 요인이 결부되고 상황타개를 위한 추가적인 자금이 요원하기에 쉬운 해설을 체계적으로 제공하는 것은 어려울 것 같다. 무한 루프에 빠졌다. 여기에 대중의 인문학적 이해가 계속 줄어들고 교육 인력은 부족하다면  더더욱 개선은 어려워질 것이다. 전문가는 엄청 타협해서 쉬운 해설을 써놨는데 대중이 이해하지 못한다면? 학계는 애초에 쓰던 전문용어로 하던대로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쉬운 해설의 본질적 한계도 있다. 현대예술이야 그럴 수 있으나 불교미술은 불교용어를, 그리스도교 미술은 그리스도교 교리를 차용해야하는데 그 인접분야의 용어를 바꿀 수 없다.


이래저래 어렵다. 전문가와 대중 사이를 널뛰기하며 착하고 쉽게 잘 설명해주는 교육자가 사실 더 필요하다. 또한 사람들은 해설 없이도 충분히 풍요로운 미술관 경험을 할 수 있다. 인상주의 미술사에 대해 얼마나 딥하게 알아야 인상주의 미술을 감상할 수 있을까? 연구와 감상은 분리해야하지 않을까? 해설 없이도 충분히 감상할 수 있는 이들이 있다. 전문영역은 전문가에게 맡기고 더 알고 싶은 개인의 지적 욕구는 좋은 책과 해설을 통해 승화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나라 사람은 참 똑똑해서 전공자가 아니지만 전공수준의 지식을 지니게 된 이도 많다. 저자의 말마따나 남성관객만 많던 오래 전과 비교해 여자 혼자 혼미(혼미술관)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면(p68) AI 번역을 통해 각자 수준에 맞추 쉬운 해설을 접하다가 경량문명의 일당백 개인이 되지 않을까? 적절한 해설을 보급해주어 개인적 배움을 제고할 증강 에이전트가 많이 생겼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전공자 뺨치는 혼미족이 출현해 학예사를 두려움에 떨게 할지도 모르겠다. 미술관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여러 단행본을 낸 저자처럼 말이다.


각설하고, 이외에 또 특이한 부분은 원주 뮤지엄산에 대한 개인적인 호오다. 충분히 가능한 해석이다. 오히려 나는 원주 뮤지엄산에 대한 긍정적인 찬양밖에 읽어보지 않았다. 따라서 부정적 미감과 환경문제와 엮은 저자의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몰랐던 작품도 알게 되었는데 뉴멘포유즈의 <테이프 서울> 같은 경우다.


빠져들듯한 묘한 기분이 드는 미술관에서 망부석처럼 서서 서로의 뒷모습만 보며 관람하는 이들이 공감할 이야기가 많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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