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연히 추수한 세렌디피티는 조선 후기 문신 이운영(李運永, 1722~1794)이 쓴 야담집 영미편이다.
문집 번역의 어려움에 부들부들 떨며 분노하는 친구의 글에 책 나오면 읽겠다고 했더니 이미 나온 책을 추천해주어서 바로 구매하긴 했는데 목차를 보니 너무 재밌을 것 같아 현기증이 나서 도저히 주말 배송을 기다릴 수 없었다.
요모조모 찾아보니 단행본은 고전번역학 박사논문의 72페이지 이하를 편집한 듯하여 공식적으로 알려져 있는 해적루트 riss를 순항해 다운받아 프린트해서 읽었다. 아이 꿀잼이어라
300년 후 한반도인이 조상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법조문, 수능문제집, 한글 공문서만 읽는다면 이해에 한계가 있을 것이다. 오히려 블라인드 같은 커뮤니티나 스레드의 매일의 일화와 유머와 촌철살인에서 그 시대 풍속을 더 읽어낼 수 있지 않을까? 조선 야담을 읽는다는 건 그런 것이다.
남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이토록 재밌는 에피소드를 수고를 들여서 번역했는데 사람들이 너무 모른다. 게다가 경이로운 한문실력이다. 역시 삼천배를 경험한 이는 뒷심이 강하다. 번역자는 복 많이 받으소서!
상권 과거시험 34꼭지 중 나는 특히
1번 거벽을 통해 합격한 소년
6번 두 응시생의 눈치 싸움
31번 기녀의 편지 한 통
이 재밌었다.
6번의 일화는
서울 응시생이 시험관에게 뇌물을 얌냠 먹여서 가장 마지막에 제출한 시험지를 합격시키기로 잘 합의봤는데
지방 응시생이 어 이놈 봐라 다 썼는데도 꾸물 대는거 보니까 뭐가 있네 하고 버팅기다 제출시간은 다가오고 밤이 늦자
서울애랑 지방애랑 짜증나서 토목공이야 학질놈아 하고 투닥거리다가 결국 서로 시험지 바꿔들고 달려서 내기로 한다.
그러니까 남의 시험지를 들고 있는 내가 젖먹던 힘을 다해 빨리 달려서 먼저 내야지 내 시험지를 들고 있는 상대가 늦게 내서 내 시험지가 원하는대로 최말축에 내게 되는 셈
그런데 지방응시생이 자빠져서 서울응시생의 답안지는 젖고.. 푸하하!
이런 일화를 읽으면 옛날 사람의
삶이 오늘날과 그리 다르지 않구나 하는 친숙함을 느끼게 된다
31번의 이야기는
제술은 강한데 경전 외는 것는 약한 응시생이
시험전 점사를 보고 점쟁이가 알려주는대로 외웠다가
6개 그대로 다 나와서 앗싸 하고 있었는데
한 문제가 잘 안 풀리자 끙끙대다 똥간 허락 받고 감독관 군졸과 함께 갔는데
하필 그 군졸이 자기가 옛날에 책방에서 일할 때 살던 지역출신이라 통성명하던 중
엉엉 보고 싶어요 정말 그리워요 하는 정분나눈 기녀의 애절한 편지를 전해받고 감상에 잠시 젖던 중
감독관이 응시생에게 종이를 건내는 장면에
치팅한다고 생각한 총 시험감독이 (그러니까 똥간은 오픈되어 있고 그걸 보고 있던 거다)
소리치자 놀라서 편지를 황급히 밤톨로 만들어 씹어 먹으니
감독관이 이전 시험문제지를 인정안하고 바꿔서 보게했는데
공교롭게 점쟁이가 일러준 문제라서
일필휘지로 작성해서 합격했다는 일화다
이런 야담을 읽으면 조선사람들이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고 살아 숨쉬는 인물로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