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렵고 답답한 현실에 고충을 느끼며 해외로 가면 좋겠다고 막연히 생각하는 시절이 누구나 있다.


사람들에겐 금전, 가족, 병환, 학업, 장애, 육아, 프로젝트, 대출 등 훌쩍 떠날 수 없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고 대개 론리플래닛이나 여행잡지, 다음여행자정보까페, 여행유투브를 보면서 아쉬운 마음을 달랜다.


아직 어깨 위에 책임이 적고 사회적으로 인정된 공식유예기간인 대학생 때 배낭여행, 졸업 후에는 워킹홀리데이이나 취업준비를 빙자한 어학연수 혹은 아예 유학이나 이민 등 여러 고난을 뚫고 결국 해외진출에 성공하기도 한다.


먼저 갔던 사람들을 부러워하면서 장밋빛 환상을 쌓아간다. 그러나 여행은 출국장까지만 즐겁고 그 이후엔 달콤한 노동이라고 누가 그랬던가(바로 내가). 상상만 하던 판타지월드에서 삶이 시작되는 순간 그동안 한 번도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부분까지 문제로 다가오기 시작한다


시차 기후 물갈이 적응 세금 은행 카드 인종차별 등등


인생살이는 본래 고단하고 삶은 부조리한 법


한 곳에서의 문제가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고 깔끔하게 해결되지는 않는다.

한국에서 돈이 없어서 사업을 못했다고 외국에 간다고 돈이 생기지 않고 오히려 더 고생을 할 수 있는데 혹여 가서 돈을 벌었다면 한국에서도 충분히 벌었을 수 있다. 사람, 기회 모든 점에서 적용되는 일인 것 같다.


그저 내가 감당가능한 고난이냐 이정도는 감수할 수 있느냐를 고민해봐야한다. 장강명 원작의 영화 <한국이 싫어서>의 주인공은 그런 대차대조표의 분석 끝에 떠난 것이다. 물론 주연배우 고아성은 한국의 삶에 만족하며 떠나고자 하는 생각을 해 본적도 없다고 말했지만 말이다.



누군가에게는 답답한 친척관계가 누군가에게는 친밀한 사람들의 따뜻한 교류일 수 있다.


누군가에게 명절 때 오지랖이 간섭이지만 누군가에게는 호의와 관심일 수 있다


현상 자체로 선악은 없고 대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적절하냐 부적절하냐만 있을 뿐이다


수족냉증으로 몸이 차게 태어난 이는 적도 부근 나라에서 살면 행복하지만

몸에 열이 많은 이는 환경자체가 고역이기에 반대로 아침 쌀쌀함에 벌벌 떠는 이가  일상생활을 힘들어하는 북반구에 살아야 하는 것처럼


또한 외국에서 인종차별을 당하면 한국에서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 억울함을 느낀다. 하지만 이는 공간의 문제가 아니라 잘못된 사람의 태도의 문제가 크다. 경우에 따라 어떤 나라와 어떤 지역에서는 부적절한 언사와 행동을 하는 사람이 더 많아서 좋지 않은 경험을 확률이 더 많을 수는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도 얼마든지 라이더들의 위험운전, 위협, 폭언, 칼치기, 갑질, 진상손님의 하대, 지하철 성추행 등을 당할 수 있기에 한국에서는 이런 일은 없었는데 한다면 이는 그동안 좋은 사람을 만나왔던 행운의 반증이다. 일면식도 없는 손님인 내게 따뜻하게 대해주는 편의점 알바생, 승무원, 가게 사장의 호의는 사실 당연하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칭챙총 하며 놀리는 사람을 만날 수도 있지만 처음 보는 외국인에게 미소로 환대를 베풀어주는 사람도 충분히 만날 수 있다.



공간을 바꾼다고 문제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든 사람 나름이다.


그러나 외국에서 겪은 어려움이 크게 느껴지는 이유는 정보 인식 정도의 차이에 있다고 생각한다.


말이 잘 안통하고 관습과 시스템이 익숙하지 않은 나라에서 부적절한 대우를 당하면 하소연할 사람도 없고 구제 방법도 익숙하지 않다. 선진국의 시스템이 잘 정비되어있을 것 같으나 생각보다 인맥으로 해결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그런 인적 네트워크에서 유리된 이방인은 불편함과 불합리함을 고스란히 감수한다. 한국같았으면 경찰에도 찾아가고 국민신문고에도 올릴 일들을 내 안에 꾹 묵혀서 상처와 한이 되는 경우도 빈번하다.


외국에 사는 한국인들치고 마음 아픈 경험 한 두 번 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있으랴


대개 그 하소연을 SNS에 풀고, 비슷한 경험을 한 영상, 보도 등에 댓글을 달지만 말끔하게 해소되지는 않는다. 가해자가 없는 상황에서 피해자끼리 모여 장터를 여는 것은 신내림 없는 굿판 같은 것이다.


누가 그랬지 사람으로 얻은 상처는 사람으로 해결해야한다고 (일단 나는 아님)




예컨대 인종차별로 인한 아픔이 해결되려면 셋 중 하나여야한다

가해자에게 진심어린 사과를 받거나

그 나라의 다른 어른 같은 사람으로부터 환대를 받거나

아니면 내가 어른이 되어 만나는 외국인에게 잘해주는 것이다

상처받은 치료자가 되는 것이다.


그래 나는 이런 이런 어렵고 아픈 일을 겪었어

그렇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거야

하면서

한국에 있는 다문화 이주민이나 어려움을 겪는 외국인에게 값없는 환대를 베풀어 주는 것이다


쉽지 않다 인격 수양이 필요한 일이다

잘해주려고 해도 으레 하아.. 그래 봤자지 뭐

나만큼 심하게 당한 사람이 어딨어

그리고 나한테 이득이 뭐가 있겠어 하며 머뭇거리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내가 외국에서 어려움을 겪고 한국어로 SNS에 올려 고민상담했듯이

한국에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자국어로 SNS에 올려 불편하고 억울한 경험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라는  공감에 이른다

하여 개별적인 사안을 큰 카테고리로 승화해서 메타적으로 사고하게 되고

공간이나 개인의 문제라는 케이스에 침몰된 나의 좁은 관점이

한 인간의 다른 인간에 대한 적대적 태도라는 범위로 넓어진다.


물론 매순간 발생하는 모든 문제를 개인이 대처할 수는 없다.


허나 한인들이 미국에서 받은 차별, 중국에서 한국유학생이 받은 학교폭력을 한국사람이 스리랑카 노동자 묶어서 괴롭히는 문제와 함께 한 테이블에 놓고 생각해볼 수 있게 되고

위안부 할머니들의 끔찍한 경험과 라이따이한, 코피노와 입양아의 인권문제를 더불어 논의할 수 있게 되며

멕시코 애니깽 노동자와 지적장애인 염전노동자의 사실상 감금문제를 엮어서


시공간을 월경해 다양한 스펙트럼의 이슈를 생각해 개별적 처방이 아닌 거시적 구조에 대해 인식할 수 있게 되니


인간이란 무엇이고 인간은 다른 인간에게 어떻게 대해야하며 왜 전쟁과 폭력은 없어지지 않는지와 같은 본질적인 질문을 통해 모두 함께 나은 방향으로 한 걸음씩 전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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