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상반기에 갔던 서예전시 중 좋았던 곳은 강원도 인제군 여초 김응현 서예관, S2A, 그리고 김가진 전시였다. 김가진 전시는 서초동 예술의전당 서예미술관과 용인 기흥 백남준 아트센터 옆 경기도박물관 두 곳에서 보았다.


동농 김가진(1846~1922)은 조선시대에 태어나 개항기와 개화기를 거쳐 임시정부의 큰 어른으로서 서양 열강 사이에서 근대외교관으로 말년을 보냈다. 한자문화권에서 서양 근대 사회를 약간 맛본 인물로 국한문과 일본어와 중국어와 서양어를 다 경험한 당시로서는 희소한 글로벌하고 초국적 인물이다. 독립문 현판도 그의 글씨다. 그의 서찰 관련 포스팅을 하나 하기 전에 맛보기로 하나 올린다.



사진1은 논어 자로(13)에 나오는 구절인데 몽양 여운형 선생의 글씨다. (하늘색) 향이 세 번 나오는데 뒤의 두 번은 축약해 썼다. (노란색) 미가는 초서라서 훈련되지 않은 눈에는 쉽지 않다. 사진2와 3의 김가진의 未 필적이 두 개를 보면 획순이 짐작된다. 손에 각인된 서체에는


개인의 고유한 인격이 담겼고 지성인들은 모두 서로의 글씨를 분별할 수 있던 시절이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에세이는 개인의 지적 임프린트 같은 것이었는데 어느 순간 GPT가 등장하며 대량생산물이 되었다.


한국이건 유럽이건 미국이건 에세이대회나 대학수업에 페이퍼를 제출할 때 그 작성물은 제출자 고유의 것이라는 어떤 합의가 있었고 베껴내거나 대리로 작성했을 경우 기본적 약속을 깨뜨린 것으로 간주해 제재를 가했는데 이제는 GPT로 인해 글쓴이의 판별이 쉽지 않다.


무엇보다 에세이를 통한 교양인 배양이라는 대학교육의 이념 자체가 도전받게 되었다.


되려 반대로 AI를 뛰어넘어 폭넓은 지식과 자신만의 문체를 가진 이가 독점하게 될 때가 올 것이다. 부동산 시장도 빅테크 기업도 가상화폐도 인터넷 기업도 이 모든 경우에서 돈이 풀리고 정보가 민주화되면 반드시 양극화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적당히 화이트칼라의 하급노동을 자동화하는 에이전트 AI를 뛰어넘어 더 거대하고 양질의 정보를 생산할 수 있는 일부에게 모두의 관심이 쏠릴 것이다. 그러니까 작가가 될 거라면 과거처럼 수십 년 갈고 닦아 일생에 한 번 문집을 출판하거나 일년에 한 번 있는 신춘문예에 출판하는 게 아니라 광범위한 주제로 읽을 만한 글을 끊임없이 생산해야한다는 뜻이다. 이에 더해 전에 없던 깊이 있는 지식을 더 많이 제공해야한다.


옛날에는 마을마다 있던, 영화 <이니셰린의 밴시>같은 적당히 악기를 다루는 음유시인이 모두 사라지고 축음기가 배경음악의 수요를 대체하고 더 실력있는 뮤지션을 위한 무대는 TV가 제공하게 되었다. 그리고 청자가 더이상 자국어로만 음악을 듣지 않게 되어 시장이 글로벌하게 확대된 것이 현재 상황이다. 자국어로 몇 십 몇 백명의 사람들을 위해 노래하던 동네 음악가에서 수 억명의 글로벌 팬덤을 가진 초대형 뮤지션까지의 여정은 신문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중앙정부나 국제정세의 뉴스를 지역주민에게 적당히 전해주는 동네신문은 모두 폐간되고 전국규모의 일간지로 통폐합되며 지역신문은 지부로 바뀌었다가 인터넷으로 전세계 신문을 섭취할 수 있게 되고AP같이 신문사를 위한 신문사도 생기는데 구글 번역기와 GPT의 발달로 인해서 다른 국가 신문마저 읽을 수 있게 된 세상까지 왔다. 


한국어는 한반도 독자만 가정하지만, 예컨대 스페인어를 쓰는 복수의 국가가 있는 남미의 경우나 뉴질랜드 영어화자가 영국이나 미국 신문을 읽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무슨 말인지 이해할 것이다. 기사를 읽는 문자 소비자는 지역신문의 그저그저런 기사를 읽지 않고 소수의 우량 신문사의 신문을 읽을 것이라는 말이다. 경제나 국제정세에 대한 제대로 된 분석기사를 원하는 한국인 일부도 한국신문에 국한되지 않고, 또한 번역에이전트에 기대지 않고 GPT를 통해 바로 NYT나 가디언이나 르몽드디플로마티크를 읽고 코스모폴리탄이 될 것이다. 


그 징조는 최준영이나 김지윤이나 타일러나 삼프로티비나 해담경제연구소와 박정호의 유투브에서 감지할 수 있다. 대개 투자자들이 글로벌 뉴스에 민감하고, 이들을 위해 한국어로 생산된 자료에는 없는 외국신문의 정보를 자신의 시각으로 재가공해 판매하는 지식의 도매상들이다. 


돌아와서, 김가진 선생의 글씨는 전체적으로 호방한 기운이 느껴진다. 여기에서도 노란색 하이라이트된 사진1 여운형의 未와 사진2,3의 김가진의 그것이 다르다.


근대 유럽에 라틴어 기반의 편지공화국이 있어 영프독, 스웨덴인 모두 라틴어로 교류하고 과학의 발견과 문학에 대한 생각을 논할 수 있었다면, 한자문화권에는 에도통신사, 북학파의 열하일기에서 보이듯 한문 서예 필담에 기반한 동아시아 문예공화국이 있어 정갈한 차를 마시며 문자의 향기과 선현의 가르침을 논할 수 있었다.


경전의 레퍼런스를 미리 알지 못했다면 사진1의 보라색 2번째 善은 도저히 읽을 수 없었을 것이다. 전공자의 전문성을 존경해야하는 이유다. 한 가지 분야를 계속 하는 사람들의 감식안은 따라잡을 수 없다. 모두에게 주어진 공평한 시간 속에서 한 분야만 파고든 이의 경험적 지식은 훌륭하다. 그런 이들이 가지런히 베푼 설명과 해설, 그리고 새로 발굴하는 자료를 통해 몰랐던 과거의 사실을 더 선명한 해상도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과거인물의 이념이 무엇이고 오늘날 정치적으로 어떻게 활용될 수 있는가는 큰 관심이 없다. 그 인물이 소중히 생각했던 것, 즉 그의 본질적 생각을 문자로 톺아보는 것이 더 흥미롭다.


이래서 서예전시를 보러가면 모든 해설과 자구를 맞춰보느라 몇 시간이 걸리나 서서 읽는 책과 진배없어 큰 배움이 된다.


다음은 논어 자로 해당 구절 해석


자공문왈 향인개호지 하여

자공이 물었다. 동네사람들이 대부분 그를 좋아한다면 어떻습니까?


자왈 미가야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옳지 않다.


향인개오지 하여

동네사람들이 대부분 그를 미워한다면 어떻습니까? 라고 묻자

 - 여기서 惡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이기에 악이 아니라 오로 읽어야한다


자왈 미가야 불여 향인지선자호기 기불선자오지

공자께서 답하시기를 옳지 않다. 동네 사람 중에 선한 사람들이 그를 좋아하고 그중 선하지 않은 사람이 그를 미워하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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