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부터 저녁에는 가을의 선선한 바람이 조금씩 느껴진다

한낮 폭염의 폭격에 풀이 죽은 아스팔트에서는 아직 달궈진 열기가 느껴지지만

바람만큼은 저 멀리 북쪽 저기압 기단에서 불어 온 듯한 아련한 가을바람이다

가을에는 항상 이 시가 생각난다

2006년에 처음 접하고 종종 다시 찾아 감상하곤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PHxAodm1EF8


풍경의 깊이/김사인


바람 불고

키 낮은 풀들 파르르 떠는데

눈여겨보는 이 아무도 없다.


그 가녀린 것들의 생의

한순간의, 외로운 떨림들로 해서

우주의 저녁 한때가 비로소 저물어간다


그 떨림의 이쪽에서 저 쪽 사이,

그 순간의 처음과 끝 사이에는

무한히 늙은 옛날의 고요가, 아니면 아직 오지 않은

어느 시간에 속할 어린 고요가

보일 듯 말 듯 옅게 묻어 있는 것이며,


그 나른한 고요의 봄볕 속에서 나는

백년이나 이백년쯤

아니라면 석달 열흘쯤이라도 곤히 잠들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 석달이며 열흘이며 하는 이름만큼의

내 무한 곁으로

나비나 벌이나 별로 고울 것 없는 버러지들이

무심히 스쳐가기도 할 것인데.


그 적에 나는 꿈결엔 듯

그 작은 목숨들의 더듬이나 날개나 앳된 다리에 실려 온 낯익은 냄새가

어느 생에선가 한결 깊어진 그대의 눈빛인 걸 알아보게 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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