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첫여름

1. 할머니에게도 사랑이 있다는 메시지의 영화로, 캐스팅도 적절하고 잘 정돈된 대사의 완급 조절이 좋다. 특히 <만추> <룩백> <애프터썬>을 생각나게 하는 여운있는 엔딩이 좋다. 화려한 댄스복을 빨아 베란다에 널며 담배를 피는 허진 배우의 등을 롱샷으로 길게 잡았다.
2. 작중 캬바레에 등장하는 못잊어는 엔카에서 비롯된 트로트인데 할머니의 세대의 EDM이다. 괜히 (구)뉴진스NJZ의 아버지 250이 이박사의 뽕을 연구한게 아니다. 둠칫둠칫
3. 얼굴이 샤프하고 눈이 부리부리한데 몸은 고행 중의 싯다르타를 상기시킬 정도로 가녀리게 마른 허진 배우는 하대하는 가부장적 남편의 똥오줌을 치우는 뒷바라지에 지쳤다.
그녀의 마음을 달뜨게할 남자친구 역으로 눈웃음이 배시시한 정인기배우는 찰떡 같은 캐스팅이다. (그의 배역 스펙트럼은 매우 넓어서 보통 경찰팀장, 국장, 국과수 요원 같은 배역으로 익숙하지만 "누님" 하는 짧게 춤추는 장면임에도 영화의 방향성과 잘 어울렸다)
이들의 마음이 오가는 장면을 발장난으로 은유한 연출도 좋았다.
"그 사람이 해주니까 동하더라"와 "성미가.." 라는 대사는 참 잘썼다. 그 나이대 할머니가 쓸 법한 낱말이다.
영화의 핵심이 되는 대사는 "네 아빠가 하니까 너무 아팠다 한 번도 좋다고 생각한 적 없다. 이건 결혼이 아니라 강간이었다"이다. 딸은 이 말에 분노를 하는데 이 말을 긍정한다면 자신의 출생은 강간으로 인한 비극적 출생이 되기 때문이다. 이어서 펀치 라인으로 "너는 바람나서 이혼이라도 해봤지 나는 평생 버텼고 이혼 해 본적도 없다"이다. 딸은 이에 대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4. 허진 배우가 최근 몇 년 간 출연한 작품을 예를 들어 캄보디아계 프랑스인 감독 데이비 추의 입양아의 정체성 탐험을 다룬 리턴투서울(2022)가 있고, 딸에 대하여(2023)가 있다. (작년 소방관(2024)에서도 조연이었다는데 다이나믹하고 급박한 전개가 특징인 영화라 어디서 나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공교롭게도 첫여름과 비슷한 테마의 작품이다. 가부장제에서 책임을 감내하는 나이든 여성과 바뀌지 않는 관습과 제도 속에서 대를 이어서 상속되는 비극에 대한 이야기다.
5. 같은 한국영화아카데미 출신이라도 남성 감독이 썼으면 이와 같은 흥행 혹은 평가를 받았을까? 깐느 최고 학생상을 받은 지금의 시기는 깐느가 열리는 프랑스의 담론과 무관하다고 볼 수는 없다. 프랑스인 지젤 펠리코가 혼수 상태에 빠진 자신을 강간한 범인 50명을 공개 법정에 세운 용기와 공로로 프랑스 최고 영예인 레지옹 도뇌르 훈장(5등급인 슈발리에(=기사) 훈장)을 받은 시기와 겹쳐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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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절한 타이밍에 이국적 상황에 보편적인 메시지를 풀어내서 수상했다. 상은 기본적으로 정치적이고 담론 유통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만약 5년 10년 앞서서 이런 영화를 만들었다면, 혹은 여성 감독이 여성 서사를 만드는 게 아니라 남학생 감독이 썼다면 전혀 다른 대우를 받았을지 모르는 일이다. 일단 할머니가 자기와 사이즈가 비슷한 브래지어를 결혼을 앞 둔 손녀에게 준는 애틋한 마음의 연출을 생각해내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 장면으로 인해 손녀딸의 결혼식이 아니라 죽은 댄스파트너 남친의 49재에 가는 마음의 애절함이 더 설명된다)
남성 감독이 개인적 서사를 사회 구조와 엮어서 풀어낼 수 있는 이야기가 따로 있다. 그리고 어떠한 이야기는 유통되는 사회적 상황에 따라 받는 대우가 달라진다. 오스카, 깐느 수상작을 보면 그때 그 시기의 사람들의 마음을 일부 반영한다. 그런 의미에서 스토리는 정치적이다. 사회가 스토리를 만들고 스토리는 사회를 반영하는 것이며, 수상작은 그 시기 많은 혹은 어떤 사람들의 마음을 대표할 수 있는 이야기다.
6. 분장도 적절하고 대사와 장면을 연출의 리듬이 좋다. 마지막 휠체어 꺼내는 신이 다소 길고 엉켜있다. 계단 내려갈 때 "어이" 한 번 더 나왔으면 더 좋았겠다.
7. 영화 크레딧에 보니 대부분 영화아카데미가 있는 부산 지역에서 촬영했다. 각본이 중요하다는 방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