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는 것만 정확히 말하는 지혜,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인정하는 용기, 알 수 없는 것은 전문가에게 맡기는 현명함이 필요하다.


지식에는 명료함을, 무지에는 솔직함을, 불확실성에는 위임을.


물론 교사로서 과거의 나도 이런 원칙을 완전히 지킨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모르는 걸 물어보는 아이들 앞에서 순간 당황해서 얼버무리다가 잘못 설명했던 적도 있다. 하지만 최소한 수업 끝나고 더 찾아보고 틀린 사실에 대해서는 정정했다. 오타나 고증오류, 정의를 잘못 베푼 것까지.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렇지는 않다. 안 그래도 격무에 시달리는데 내 쉴 시간이 없어진다. 하지만 모르는 걸 물어보는 다음 세대에게 그런 건 몰라도 돼! 하고 윽박질러 이제 막 움튼 호기심의 씨앗을 잘라내는 것은 소리없는 윤리적 살인과 같다고 생각했다. 음 나도 모르겠지만 내가 한 번 찾아보고 다음 번에 알려줘도 될까 라고 말하고 시간을 쏟는게 더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렇게 하지 않으면 얼마든지 다른 소스에서도 얻을 수 있는, 검증이 다 끝난 일반적인 이야기, 무균처리가 끝난 무색무취의 정보만 말하게 될 뿐이라, 나 자신의 발전도 없거니와 남들도 듣지 않는다. 신라 다음에는 고려야. 고려 다음에는 조선이지. 미국은 북반구에 있어. 사람은 DNA로 이루어져있고. 1+1=2고, 물의 분자식은 H20야. 


그런데 이제 막 논의 중인 생생한 정보는 묘지 마냥 거의 죽은 듯한 종이 더미에서 찾아내야해서 시간과 돈이 많이 든다. 대개 내가 찾아야하는 팩트는 그 분야 전문연구원이 생산한 정보를 뒤져야했는데, 대개 읽기 어려운 문체로 쓴 조회수 높지 않은 논문, 남들이 잘 보지 않고 팔리지 않는 비싼 책에 수록되어있으며(민속원이나 루틀리지), 내가 찾는 그 한 문구는 수많은 다른 정보 중에 뒤섞여있어 5만원 어치 500페이지 짜리 책 한 페이지 하단의 각주에 있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러니 그냥 쉬고 말지. 하지만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았고, 애써 품을 들여 제대로 된 앎을 추구하려고 했으며, 그렇게 살지 않으려는 몸부림의 결과, 결국 지지부진한 커리큘럼에 갖힌 교육이 아닌 깊이와 너비를 동시에 지닌 단행본을 쓰려는 집필의 삶으로 성큼성큼 나아가게 되었다. 그러한 삶은 한 분야의 전문가들을 사숙하고 존중하는 삶이기도 하다. 삶을 바쳐 일구어낸 그들의 업적을 제대로 인용하고, 그들도 모르는 것은 나도 모른다고 당당히 고백하고, 그들이 모르는 것에 대해서 나의 개인적 생각으로 따지지 않는다. 왜냐, 밥먹고 그것만 하는 사람의 삶은 존중받아야하기 때문이다. 모든 이에게 동일한 시간이 부여되는데 더 일찍 시작해 같은 단위시간당 더 많은 사료를 본 이와 나는 같을 수 없다. 설령 일부 시기에 내가 더 많은 정보를 섭취했을지라도, 평생에 걸쳐 그것을 한 사람의 감식안과 인사이트는 비교할 수 없다. 


(그러나 전문성과 인격을 별개이기에 지식을 존중한다는 것이 인간적으로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은 분명히 밝힌다)


2. 전문적으로 지식을 다루는 자는 장기간 세밀한 분야에 대한 엄격한 트레이닝을 받아 광범위한 자료 중에서 미세한 디테일을 선별한다. 그 지난한 시간과 노고와 박봉의 결과는 예를 들어 반고흐의 생전 최후 작품이 우베르 쉬르 우아즈 언덕이랄지, 어떤 한자는 A사료, B사료, C사료 필체가 다른데 그 이유는 무엇이며 이 미세한 획에서 시간상의 변화가 보이지만 한 사람의 것이 맞다랄지 하는 것이다. 


뉴욕타임즈 기사에 대한 블로그 참조

https://blog.aladin.co.kr/797104119/16391192


(미술사박사와 학예사의 전문성이 존중받아야하는 이유다. 미세한 한 분야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진다... 유럽사도 자국사연구는 어렵다. 장기간의 훈련을 요한다. 해외에 대중화된 유럽사는 유럽 내부에서 연구하는 자국사에 비하면 열화된, 다운그레이드된 버전이다. 로컬 입맛에 개량된 음식과 같다... 제대로 유럽에서 유럽사를 하려면 어마무시한 디테일을 습득해야한다.)


3. 비전문가 입장에서는 황당한 결론일 것이다. 돈낭비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숭고한 일이다. 존중받아야할 일이다.


한창 코로나 시기에 디지털 인문학이 유행했을 때 인문학자들도 시각화 도구를 사용해야 한다는 세미나가 우후죽순있었다. 그런데 그런 세미나 말미에서 늘 지나가는 말로 언급되는 것은 보기에 멋져보이는 비주얼라이제이션도 결국 뒤에서 프로그램이 읽을 수 있도록 로데이타를 데이터크리닝을 하는 엄청난 인력이 수반되어야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조선시대에 맹자를 많이 읽었다는 것. 와우 정말 놀라운 일이야! 오호! 이런 신박한 결과라니! 이러한 세기의 발견을 위해 펀딩이 필요했더거군요!


누군가는 이런 시시하고 뻔한 결과에 예산이 들어가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학문 특성이 응용, 유용, 미래가치, 채산성 같은 납작한 단어로 규정할 수 없는 분야다. 애초에 인문학은 없던 기술을 발명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일을 제대로 정리하기 위한 학문이기 때문이다


몰랐던 옛 지식을 제대로 정리하는 고증학적 방법론이 바탕이고, 따라서 미래먹거리를 위한 희대의 신기술과는 관계가 별로 없다. 돈을 많이 타갈 뿐 돈을 만들어내는대도 잼병이다.


앞서 말했던 시각화의 초창기 성과는 미비했을지 모르겠지만 그런 연구가 쌓이면 단어의 사용 용례 코퍼스, 문집의 상호 참조 같은 그동안 개인이 하기 어려웠던 시각화까지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처음의 형편없는 성과에서 잠재성을 발견하고 펀딩이 지속되어야 가능한 프로젝트다.


4. 인문학의 난관은 장기간의 엄격한 트레이닝, 개인적 희생과 고통, 시스템의 불합리, 자신의 가난, 외부의 예산부족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자칭 재야의 고수도 빌런이다.


특히 고대학, 고대문자 계통의 학문에는 재야의 외곬수들이 강단 학자들을 비판하며 자기의 맹목적인 노력에 스스로 인증서를 발부하는 경우가 많다. 한문은 독학으로 족보 연구한 재야의 어르신의 공격을 받고, 히브리어의 구약학은 사이비의 공격을 받는다.


그러나 아무리 학계에 여러 문제가 있다고 해도 교차 검증 시스템이 존재해 정화작용이 이루어진다. 자기 생각이 맞다고 피어 리뷰가 안되는 블로그나 검증 안된 출판사에서 나온 글은 훨씬 더 문제가 많다.


물론 그렇다고 무조건 대학에서만 인문학을 소유해야하며 외부에서는 전문적 트레이닝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대학구성원이 포함된 프로그램이나 공식교육기관도 있고 얼마든지 다양한 방식으로 협업하고 대화하면서 공부의 길을 이어가는 사람이 있다. 공부하는 장소는 큰 문제가 아니다. 공부에 대한 태도가 문제다.


재야의 고수의 가장 큰 문제는 상아탑 외곽에서 공부했다는게 아니라, 내 말이 맞다고 잘못된 사료를 가지고 오는 데 있고, 크리틱이 없는 곳에서 너무 오래 자기 논리를 구축한 나머지 옳고그름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데 있다. 그리고 이것은 학문에 대한 기본적 태도이기에 이 부분을 결여한 학내 구성원이 있다면 역시 동일하게 적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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