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 이왈종 미술관 상설전에 다녀왔다. 원래 관심이 없었지만 빛의 벙커에서 이머시브 미디어로 만든 이왈종 그림은 매력적이어서 다녀왔다.
그림 자체는 장욱진 구도에 박수근 판화 질감을 짬뽕하고 현대적 원색 색감을 추가한 것 같지만, 작가의 께 세라 세라의 자유로운 태도와 서귀포의 전경과 함께 전시경험이 풍성하다. 될 대로 되라!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인생 그냥 즐기면서 살자!라는 말을 태평양 방향의 밤섬이 내려다보이는 루프탑에서 보고 있으면 정말 그렇게 사는게 맞겠구나 하고 설득된다.
동양의 하와이안이 한국의 하와이 같은 곳에서 일몰과 함께 늙어간다.

그런데 나는 이전에 모 미술관에서 전통 미술을 사랑하는 원로분이 이 작가에 대해 예술가가 아니라고 혹평을 하는 것을 들은 적 있다. 그 말을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내가 작품을 보는 시각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 주체적 수긍이 중요하다. 이런 생각도 있고 저런 생각도 있을 수 있다.
무엇이 예술이고 아닌가에 대해서는 사람 마다 자기 판단이 있는데 그런 정체성과 편가르기가 예술과 정치가 맞닿는 지점이다. 남의 판단과 그 생각 프로세스 자체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되 나의 판단은 내가 내리는 것이다.
또한 그때 그 분노의 외침을 들으며 나이가 들어도 호오, 애증, 원한 관계는 계속 되는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한 번 싫어하면 계속 싫어하고, 한 번 아니라고 생각하면 계속 아니라고 여기게 될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 점에서 인생은 자신을 매우 사랑하는 사람들과 내가 매우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이고 나를 미워하고 내가 미워하는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불특정 다수에게 적당히 알려지고 대충 사랑받고 극렬히 미움받기 보다
확실한 소수에게 정확히 알려지고 선명히 사랑받고 애매하게 미움받는게 낫다.
그런 맥락에서 오히려 나의 작업과 지향이 선명하지 않은 것이 문제다.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다면 소수의 취향 공동체를 제대로 만족시키기 위해 분투해야한다.
아마 모든 작가가 세상에 자기를 내보일 때 전전긍긍할 것 같다. 뮤지션이 곡을 발표했을 때 사람들이 좋아할까? 조마조마하고 마음 졸이다가 콩알만해질지도. 화가도 감독도 이런 그림을 그렸을 때 이런 영화를 찍었을 때 대중이 어떻게 반응할까? 아슬아슬한 마음으로 작품을 세상에 내놓을 것이다. 그리고 반응은 무조건 둘 중 하나다. 좋은 반응과 나쁜 반응. 읽게 되는 글도 장단점으로 구성되어 있고, 전해지는 말도 칭찬과 비판의 양 날개로 난다.
그러나 칭찬과 비판은 에너지의 방향만 다를 뿐, 결국 남의 말이다. 칭찬은 긍정 에너지 비판은 부정 에너지, 양극 음극만 다르며 모두 외부에서 들어오는 자극에 불과하다. 칭찬만 받고 싶지만 당연히 비판과 부정적 평가가 따라오기 마련. 본질은 내가 컨트롤할 수 없는 남의 생각이니, +방향이든 -방향이든 일희일비하지 자기가 해야할 것을 하나씩 차근차근 해나아갸하는 것이다.
그래서 누구는 이왈종을 너무 싫어하고 누구는 이왈종을 정말 좋아하는데, 실제 벌어지는 일은 이왈종은 작업을 계속 했고 자기 이름을 딴 미술관이 있고 여전히 작업이 최신 매체를 입어 사람들에게 보여져서 결과물이 있고 커리어가 지속된다 것이다. 그러니 하는 것이 안 하는 것보다 낫다. 무엇으로 기억되고 어떻게 판단될지는 세상이 정할 것이다.

사진은 지금 다녀온 것이 아니라 이전에 다녀온 사진이다. 최하나 작가가 작년 옛 국립극단 자리에서 했던 아시아프에 출품했다고 해서 사진 찾다가 그 당시 사진이 눈에 띄여서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