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 갤러리 실버팁에 다녀왔다. 개인적으로 큐레이션이 좋다고 생각하는 ina12.24의 관심을 받은 곳이다. 팔로워는 적은데 다 일당백이다. 팔로워숫자에 허수가 있으며 현생을 온당히 반영하지 않는 것일테다


위치는 금호 언덕길에 있다. 3호선 금호의 역사구조가 조금 특이한데 계단으로 올라가지 않고 입구로 연결된 구조가 있다. 한국의 경사지대를 반영한 것으로 아래 내리막길에 연결된 입구다. 금호동의 사회지리적 배경도 인상깊지만 갤러리와는 관계가 없으니 패스


막 오픈한 갤러리의 첫 전시 제목은 <0+3-3=0>이다. 당연한 말이고 특이한 것이 없는 항등식이다. 그러나 무를 상징하는 0에서 식이 시작한다는 점에 주목해야한다. 굳이 쓰지 않아도 될 0에서 시작했다. 시작하는 자는 아무 것도 없는 무에서 유를 만든다는 의미일 수 있다. 또한 0은 절대적인 공허가 아니라 무언가가 들어올 수 있는 자리, 즉 가능성의 자리라고 이해해볼 수 있다. 그런 0에 3이 들어왔다가 다시 빠져나간다


사실 대수적으로 분석하면 이 항등식은 자명한 자기동형성을 표현한 것이다. 좌변과 우변이 당연히 같다는 말이다.

0은 덧셈에 대한 항등원이고 a+(-a)=0은 가역성을 표현하는데, 이 좌변과 우변은 곧 자기 정체성이 그대로 보존되는 것이니, 불변성과 자가동일성을 표현한 것이다.


식을 함수적으로 바꾸면 입력과 출력을 전혀 변형하지 않는 단순하고 핵심 함수구조가 보인다.

f(x)=x+3-3=x다.

즉, f(x)=x와 같다.

그러므로 f(x)=x는 모든 ∈R에 대해 f(x)=x를 만족하는 함수로 변형이 없는 연산구조다.

수학적으로는 항등식, 자기동형성, 불변성, 자기 정체성 보존, 자가동일성이라는 열쇠어를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런데 수학적으로 <0+3-3=0>이라는 단순한 식의 계산상 결과는 없음일지 몰라도 예술적으로 말하면 그 안에 담긴 과정, 변화와 흔적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는 점을 읽어낼 수 있다.

결국 0을 말하고자 하면 0+0=0라고 쓸 수 있을 것을,

혹은 그냥 0이라고 하면 되는 것을 그 과정을 보는 이에게 보여줬다는 점에 주목해보자.


그럼 두 식 모두 결과는 0이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서사가 담겨 있다. 무엇이 보일까?


물리적으로는 아무것도 없지만 그 자리는 이미 한 번 채워졌던 자리다. 경험된 무 또는 지나간 존재의 그림자다. 0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이지만 주어진 식은 무언가 일어났다가 사라졌다. 아무 것도 없는 상태(0)에서 아무 것도 없는 또 다른 상태(0)가 더해진 게 아니라 어떤 감정, 사람, 사건(3)을 받아들이고 다시 시간이 지나 그것을 떠나보낸다(-3)

그리고 다시 0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이 0은 처음의 0과는 분명 다르다.


경험된 0과 지나간 시간의 0. 즉 비어 있지만 비어 있지 않은 상태인 것이다. 여행 갔다 온 나는 같은 나이고, 여행에서의 순간과 경험은 내 눈 앞에 보이는 것이 아니지만 과연 없어지고 만 것일까? 사랑하고 이별한 후의 나에게 그 모든 순간은 아무 의미 없는 것일까?


무언가가 왔고 사라졌으나 변화의 과정은 분명히 존재했다. 그러므로 전시제목<0+3-3=0>은 지나간 존재의 시간을 보여준 것이고 휘발 이전에 분명히 존재했던 어떤 소멸된 존재와 배움의 과정 전체를 보여준 것이다.


전시장의 작품은 그 전시제목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을까? 흔적과 자국을 통해서 잔상을 보여줌으로써 아이디어를 구현하고 있다.

이준학, 바람구멍, 나무판 위 페이트, 2025

이주학, 반 쪽, 황동, 7.2x7cm, 2025


전시장 양쪽 벽을 마주하고 있는 나무판 위의 흰색 페인트 작업 <바람구멍>은 작게 새긴 자국 사이로 바람의 흔적을 보인다. 도자 위 유약을 발라 구운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는 둘둘 말려있던 카펫의 끄트머리에 보이는 반원형태처럼 살짝 말려감겨있는데 박물관에서 보이는 깨진 벽화같아보인다. 모서리의 벽에 실제 벽화를 그렸기도 하고 종이 위 먹지에 레진으로 그린 그림도 눈에 띈다. 황동으로 만든 설치품은 반 쪽이라고 한다.

이준학,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도자 위 유약, 2025


이준학, sweetom, 유화, 91x91cm, 2025.


<sweetom>이라는 이름의 유화는 보풀인 일어난듯, 페인트 가벽의 낙서인듯한 표면감에

쨍한 햇빛 아래의 선명한 녹색평원 위 동화같은 집이라기보다 아이가 끄적인 집 윤곽에 긁히고 구겨진 풍경처럼 보인다. 판타지보다는 더 판타지적이다. 모두 흩어질 것, 잔상, 흔적을 표현하고 있다.

이준학, 페이스트리, 도자, 2025

이준학, 세 개, 도자, 종이 위 먹지, 2025



0+0=0이었다면 그리는 자는 아무 것도 그릴 필요가 없다. 허무의 이론을 탐닉하는 자는 아무 일도 애써 할 필요가 없다. 지나간 세월의 굴곡과 아픔을 부정하며 우울한 자나 비극 앞에 체념하는 자는 0+3에서 머물러 있거나 0+3-3 다음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자기 자신의 시작점도 알고 사람이 몰고 온 사건과 그 사건 속 감정 세 가지에 얽힌 중간과정을 모두 포용한 후, 내일로 나아가는 자만이 0+3-3=0이라는 항등식을 도출할 수 있게 된다.


하여 전시 관람 전과 후의 나는 같지만 같지 않으며,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로되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가 다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 된다. 사람의 삶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의미가 있고 기억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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