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 갤러리 세줄에 다녀왔다. 유리 통창의 크기로는 중견 갤러리 중에서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20걸음 정도 걸어야하는 폭의 거대한 통창에 서림 방지도 넣고 하려면 몇 억 정도 지불했을 것이다. 그것도 국내에는 공장이 없고 중국에 특별 주문해서 가져왔을지도 모르겠다. 이제 큰 가마가 없어 큰 도자기를 구울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북한산 중턱, 고도 높은 평창에서 내려다보이는 전경을 만끽할 수 있는 통창이다. 방문할 가치가 높다.

작년에는 김수자 개인전도 했고 New Blood 새 피라는 이름의 젊은 작가전도 꾸준히 하고 있다. 지금은 거대한 풍경 속에 작디 작은 인간을 그려 존재의 본질적 고독을 표현하는 손정기전을 하고 있다


보통 대형 그림은 소형 화폭을 확장한 것이다, 라는 게 일반적인 생각이다. 크기는 더 키우고 색채는 더 알록달록 다채롭게 하고 조형은 더 추가하고 더 큰 붓으로 거친 스트로크를 하면서 세필붓으로 섬세하게 보완한다. 그런데 이래서야

디지털 픽셀 크기 변환에 지나지 않는다. 어린이를 어른의 축소형으로 그린 중세회화와 다를 것이 없다. 몸은 작고 얼굴은 늙어 있어 어린이만의 묘사가 결여되어있다. 대형 작품은 정말 소형 그림의 거대 버전에 불과한가? 소형 페인팅은 대형 회화의 가성비 있는 선택에 지나지 않는가? 대형만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소형만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다시 말해, 어른은 어른 답게 어린이는 어린이 답게 그려야하지 않을까?

지난 겨울 마곡 스페이스K에서, 지금은 한남 바톤에서 개인전을 하고 있는 최민영처럼 소형화보다 대형화가 더 좋은 작가가 있다. (내일 별도 포스팅 예정) 손정기도 그렇다. 2층에는 양측 벽에 두 뼘 크기의 드로잉 10점 앞에 큰 페인팅 대여섯 점이 마주보고 있는데 대형 소형 둘 다 나름의 매력이 있다.


작가는 사람이 외롭게 걸어가고 있는 일관적 모티프에 배경와 오브제를 황량한 산, 울창한 숲, 침엽수 한 그루 혹은 여러 그루, 늘어진 그림자, 이강소 같은 스트로크감의 바람, 라푼젤처럼 높은 건물에 홀로 나있는 창, 정원의 다듬어진 나무, 눈밭의 발자국 등으로 묘사하고 구도를 대각선, 삼각형, 수직 수평을 조합한다. 과장된 크기의 자연, 인공물을 그리고 이에 대비해 1/30크기로 축약된 손톱만한 사람을 그려 주변 세계의 압도감과 그 안에서 외롭게 걸어가는 사람의 고독과 막막함을 그려냈다. 한 화면에 비어있는 공간을 많이 만들어 적막한 여백의 미을 부여하면서 산수화나 색면추상과는 달리 평면 레이어감을 피하기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깊이와 원근감이 느껴지게 했다. 유럽 회화식의 지평선을 기준으로 하는 원경과 근경이나 수학적 계산에 근거한 소실점을 일부 활용하면서 유럽 풍경화적인 느낌을 솜씨좋게 피했다. 정원의 끝에 꺾여있는 구도라든지 스키장 같은 설산의 언덕 라인과 그림자 대비라든지.


측면 위에서 내려다보는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구도, 즉 심시티샷 혹은 롤러코스터 타이쿤샷 같은 구도를 사용해 확장된 너비감을 주어 풍경의 깊이를 느낄 수 있게 한다. 다만 게임처럼 사람이 사물화, 아바타화되는 것은 아니다. 화면 안의 사람은 컨트롤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방랑하고 자신의 인생을 걷고 있는 구도자다.

손정기 작가는 대형화는 소형화를 느슨하게 확장하지 않고 대형화에서만 할 수 있는 여러가지 시도를 했다. 기존 모티프를 합치기도, 큰 크기에 들어갈 수 있는 오브제와 구도를 실험했다. 그 결과 대형화가 보는 맛이 더 좋다. 멀리서 보면 소형화와 비슷해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보는 시선의 위치와 각도에 따라 디테일이 다르다.


손정기, My Own Silence, Acrylic on canvas, 145.5x112.2cm, 2025, 갤러리 세줄 2층

기울어진 산의 우거진 숲, 지그재그 산맥 앞에 방풍림 같은 높은 침엽수 군락, 설산에 그레이계열의 미점준으로 박아넣은 원경의 나무, 모네의 수련처럼 물 위에 비친 그림자, 함께 걸어가며 대화하지 않는 두 사람과, 대각선 길의 엇갈림 등 여러가지 다채로운 접근방식이 확인된다. 사람보다 큰 대형화는 보는 시선, 위치, 각도, 초점에 따라 한 눈에 담기는 화면이 달라 마치 퀼트처럼 엮여있는 것처럼 느껴져 이리저리 뜯어보는 맛이 남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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