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경리의 토지를 읽기 시작했다. 한 권당 약 460쪽에 20권세트다. 표현이 정말 훌륭하다.

쓸쓸하고 안쓰럽고 엄숙한 잔해 위를 검시(시체 검사)하듯 맴돌던 바람은 어느 서슬엔가 사람들 마음에 부딪쳐와서 서러운 추억의 현을 건드려주기도 한다.
마을 뒷산 잡목 숲과 오도마니 홀로 솟은 묏등이 누릿누릿 시들 것이다.
육각등이 뿌윰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달은 산마루에서 떨어져나왔다. 아직은 붉지만 머지않아 창백해질 것이다. 희번덕이는 섬진강 저켠은 전라도 땅, 이켠은 경상도 땅, 너그럽게 그어진 능선은 확실한 육곽을 드러낸다.
뒷편에 어휘풀이가 따로 베풀어져있으나 그 양이 충분치않다. 한 페이지당 하나꼴로 당대에서만 썼던 사투리, 축약표현, 고맥락 문화어휘, 작가 특유의 수식어, 의태어, 의성어 등이 등장한다. 물론 한국어 네이티브라면 글로서리가 없어도 어느정도 이해하면서 페이지를 휘리릭 넘길 수 있다. 한국인이 누릴 수 있는 축복이다. 한 페이지를 한 시간에 읽어야했을지도 모른다. 사전에서도 정확하지 않거나 없는 어휘도 있었을 것이다. 문학학술지,학위논문을 읽어야 비로소 이해하게 되는 표현도 있을 수 있다. 그게 우리가 아마 그리스로마고전이나 Norton Anthology 영문학이나 중세문학을 읽을 때 느끼는 기분일지도 모르겠다.

사람의 뇌는 한정적이다. 무한정 정보를 다 저장할 수 없다. 설령 저장하더라도 출력되는 것은 제한적이다. 잠깐 친구 만나 이야기를 할 때 한정된 시간에 자기가 지금까지 읽고 듣고 생각한 수많은 정보를 다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선생도 수업 시간에 모든 정보를 우르르 쏟아내지 않는다. 출력은 한계가 있다.
그러한 점에서 한 세대가 습득하고 저장하고 유통할 수 있는 픽션의 범위도 제한적이라고 생각한다. 7-90년대에는 이런 두꺼운 벽돌책을 읽었다. 이제는 읽지 않는다. 00년대 들어 영화와 드라마로 바뀌고 파리의 연인들 같은 드라마와 사극, 블록버스터를 본다. 이제는 OTT시대다.
그 시대와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을 이해하려면 그 스토리를 읽어한다. 귀여니 소설 원작의 늑대의 유혹 영화에서 강동원의 레전드 우산 등장신, 마블 엔드게임의 나는 아이언맨이다, 오겜의 나는 사람이 아니야 말이야 등등. 어떤 밈은 다수가 그 스토리를 향유했기 때문에 나오는 문화적 키치다. 그 축약된 표현을 알려면 몇 십시간 들여 전체를 습득해야한다. 당시 사람들은 여유시간에 다 했던 것들이다. 어렵다기보다 시간이 걸린다
책, 영화, 만화 등 매체를 막론하고 세대별 픽션 베스트셀러 변천사를 통해 그 시대가 많이 읽은 스토리를 일별할 수 있다. 다행히도 한 세대가 향유했던 스토리의 양이 무한정은 아니다.
20세기 중후반의 사람들의 심상은 한국문학으로 가늠해볼 수 있다. 한국영화도 물론 있었으나 그 영향력이 지금처럼 강한 것은 안다. 토지를 읽는 이유는 20세기 중후반 마음의 풍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나는 아직 태백산맥, 화산도 같은 장편문학도 아직 읽지 못했다. 읽어야할 책 투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