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화역 아르코에서 지금 열리고 있는 드리프팅 스테이션 전시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 중 하나는 장은만 작가의 달팽이 파라다이스 영상작품이다.


장은만, 〈달팽이 파라다이스 3부작:항해 시작 혹은 마지막 장〉, 비디오 14:35, 2021


영상은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감독의 영화에서처럼 한밤의 열대에서 대왕달팽이를 잡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폴리네시아계로 보이는 까무잡잡한 피부를 지닌 대만 원주민 청년이 옷 뜨개질, 채소 다듬기, 장작 떼기 같은 가사노동을 하는 가운데 노동요로서 살짝 살짝 중국어가 섞인 원주민어로 노래를 부른다. 중국어는 지명과 고유명사에서 드러난다. 알파벳으로 음차를 했는데 e가 '으'로 들린다. 알파벳 중에서 e가 가장 음성학적으로 문제다. 아, 이, 에이, 으 등 전세계인이 e하나에 수많은 음을 결합시키고 있다. 영국법처럼 체계가 없는 케이스를 관습에 의거해 분류할 수는 있으나 인도나 방글라데시의 출퇴근길처럼 통제가 안될 정도로 그 가짓수가 다양하다.


노래는 동아프리카의 대왕달팽이가 마다가스카르, 스리랑카, 말레이시아, 싱가폴을 거쳐 1933년 일본 군인들에 의해 당시 식민지였던 대만에 10개가 도착했다는 내러티브를 구체적으로 읊는다.


식용목적으로 들어온 대왕달팽이가 천적이 없는 열대환경에서, 호주의 토끼처럼 기하급수적으로 번식하고 백랑payrang이라고 부르는 한족이 가난했을 때는 원주민처럼 달팽이를 주워다가 요리해 먹었지만 부자가 되니 점액이 꺼려져서 안 먹게 되었다고 말하는 얼개의 내용이 이어진다. 원주민의 관점에서 노래한 역사를 채록한 기억의 정치학이다. 일본제국이라는 외삽된 소수의 지배층이나 전후 한족이라는 또 다른 내생 지배엘리트가 만든 단선적 서사가 아니다.


작가는 달팽이를 주제로 생태, 식민-피식민의 위계, 원주민 소수자 기억을 구술전통으로 복원한다. 달팽이의 로지스틱스를 통해 아프리카와 대만 원주민 문화를 상상의 차원에서 결합한다. 리듬감 있는 노래에 흔들리는 노동하는 몸에 가사는 민속적, 인류학적으로 풍부해 특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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