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르틴 청담에 다녀왔다. 이제 판교만 가면 된다.
추천받은 레몬 머랭 케이크가 유리 진열대에 있었다. 눈에 띈 하얀 머랭을 잠깐 응시하고 그 쫀쫀한 점성을 만들기 위해 거품기로 머랭을 치는 이두박근의 노동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았다. 레시피의 기획안을 구현하기 위해 조심스레 달달함과 저항감과 고소함을 섬세하게 컨트롤하고 있는 포르르 퍼지는 설탕과 톡 쏘는 레몬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점원은 구매를 재촉하지 않았다. 문득 정신을 차리니 레몬 머랭크림이 내 입 앞에 서서 노크하고 있었다. 웃으면서 방문을 허락했다. 경쾌한 듯하면서 허무하고 부드러운 듯 단단한, 응집과 융해의 양극 사이에 춤추는 질감이 느껴진다.
노릇노릇하고 보드랍고 달빛 같은 구름 한 조각. 입에 넣은 케잌을 묵언수행하는 스님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천천히 씹었다. 공수래 공수거이도다, 머랭은 나보다 먼저 사라졌고 레몬 커드잼이 찰나 머뭇거리다 이내 혀 밑으로 스며들어, 산미는 열반에 이르러 산화된다.
어딘가에서 재즈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 크림에서 느껴지는 레몬 제스트에서 레몬 커드로 이어지는 흐름이 마치 Cm7에서 Fm7로 이어지는 듯하다.
물결처럼 다가오는 맛의 윤슬이 있다. 혀끝에 닿을 때 레몬의 산미가 잎새 흔들 듯 살랑하고 지나간다. 이후 쫀득한 머랭이 미풍처럼 가볍고 첫눈처럼 맑게 지나간다. 되직하여 잠시 저항하다가 이내 인체 온도에 의해 사르르 무너진다. 시작은 창대하였으되 끝은 미약하니, 흰눈처럼 소리없이 녹아내린다. 그 사이로 약간의 레몬 제스트가 킥을 날린다. 코코아 같은 묵직한 바디감의 달콤함이라기보다는 따사로운 자연광에 빛나는 유리병 속의 설탕 결정이 미뢰 위에서 살포시 녹아내리는 인상이다.
그 다음 시퀀스로 그 아래 케이크 시트에 누운 레몬 커드잼이 킬링 멜로디로 감각의 중심을 겨냥한다. 매트리스같이 부드럽고 보잉보잉 탄성있는 케이크 질감 사이에서 과일 상태의 눈을 찌르는듯한 예리한 산미의 향기가 한꺼풀 무뎌진다.
혀를 츄릅하고 감아 돌며 구운 케이크 사이에서 상큼함의 무게중심을 잡는다. 새콤이와 달콤이가 팽팽히 줄다리기하는 긴장감이 느껴진다. 달지 않은 화사한 태양빛 같기도, 잘 익은 유자껍질의 인터미션 같기도 하다. 혀끝에 닿는 순간, 산뜻한 감로수 한 방울이 뺨을 톡하고 건드리는 듯 깜짝 놀란다. 이것은 열반와 구원의 순간.
청화백자의 푸른 빛이 감도는 유백색처럼 형광노랑빛이 감도는 하얀 귤빛의 머랭. 남해 초가집 볕 든 방 한쪽 누런 나무둥치 마룻바닥처럼 따뜻하고 담아하다. 살며시 씹히는 고운 탄수화물 입자들이 혀 위에서 도르르 구른다. 시트는 암석지층이나 나이테처럼 고르게 분포하고 있다.
조각을 먹으며 잠시잠깐 세상의 쓴맛을 잊는다. 마음이 말랑말랑해지고 숨결은 포근해진다. 추억 속 옛 할머니 손맛도 아니고 웅장한 유럽여행의 특별함도 아닌 그저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나의 일상에서 막 태어난 한순간의 봄, 그리고 혀 위에 잠시 피어나는 트렌디한 팝송, 혹은 입속을 반짝 채우는 가벼운 산책코스, 아니면 나날의 쓸쓸한 틈새를 살며시 어루만지는 자연어린 햇살 한 줌.
레몬 머랭 케이크를 음미하며 나는 생각했다. 인생이란 어쩌면 이런 맛일지도 모른다고. 눈과 혀에서 찰나의 자극을 주고 금방 사라지지만 사라지기 전엔 확실히 실존한다는. 한 입이 끝날 때마다 스스로에게 되뇌인다. "조금 더 천천히 먹을 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