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촌 스페이스 윌링앤달링에서 이세준전-(-6.8)을
성북 우손갤러리에서 최병소전(-6.21)을 하고 있다
이세준은 작년 송은미술대상을 받았던, 풍경이 아닌 형광색의 풍경화를 그리는 작가고
최병소는 성능경, 박서보와 함께 언급되는 한국 60-70년대 실험미술기의 원로작가다. 연필로 종이나 신문 위에 거의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반복해서 그린 노동집약적 작품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두 전시다 사람이 별로 없다.
SNS에 많이 언급되지 않아 전시를 하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
전시된 작품도 오래 시간을 두고 감상할만큼 작가의 다양한 아이디어를 여럿 보여주기보다
대표적 테마 하나를 모티프로 한 작품 다수가 걸려있다.
모처럼 시간을 들여 멀리까지 와서 휙 보고 나가는 사람도 많은 듯하다
한 예술가가 불과 작년에는 신문, 잡지, 기사, 소셜미디어 등 여러 매체에서 다루어질 정도로 유명해졌다가 같은 작품이 다음 해에는 대중의 뇌리에서 잊혀진다는 아이러니에 대해 생각해본다. 같은 모티프로 충실하게
매일의 그림노동을 하고 있는 작가가 어느 해에는 원로작가로 인구에 회자되고 어는 해에는 존재가 망각되는 아이러니에 대해 생각해본다.
뿐만 아니라 뮤지션, 배우, 영화감독, 만화가 모두 마찬가지
같은 작가와 작품인데 시절에 따라 반응의 뜨거움이 다르다.
사람들은 생애주기에 따라 청년기에는 좋아했던 작품이 노년기에는 싫증나기도 한다. 처음 접할 때는 별로였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더더욱 좋아지는 작품도 있다. 브랜딩이 잘된 전시, 모두가 보았다고 하는 작품, 베스트셀러는 나도 질세라 가서 보기도 한다. 작가가 천착하고 있는 주제가 너무 시대를 앞서나갔다고 평가받기도, 너무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트렌드에 맞춰서 변주해야할지, 아니면 지속해야할지 고민이 되는 순간이 작가에게는 자주 찾아온다. 특히 바이럴을 잘 타서 유명세를 쉽게 얻은 동료나 후배를 보면 자신의 작업이 의미없다고 형편없다고 생각하게되기까지 한다.
바이럴이 바이럴을 낳는 것은 말콤 글래드웰이 말한 부익부 빈익빈 마태복음 효과다. 베스트셀러가 베스트셀러를 낳는다. 좋은 학벌이 또 좋은 학벌을 낳고, 첫 커리어의 시작이 대기업이면 더 승진해서 올라가며, 유명화랑에서 전시를 시작하면 계속 협업요청이 줄을 잇는다. 그 컨텐츠와는 크게 상관없다. 아름다운 외면과 세련된 형식이 피상적 소비에 더 적절하다. 어차피 사람들은 시간을 두고 진중하게 내용까지 들여다볼 시간이 없다. 특히나 내일이면 휘발되는 SNS 트렌드라면 더더욱.
학자는 오랜 연구와 독서를 거쳐 책을 힘들게 써서 100부를 파는 것이 고작이고, 역자는 원문장과 오래 씨름하여 2차창작을 하지만 1000부를 파는 것이 고작이지만, 이미 유명한 셀레브리티나 정치인은 대필작가를 통해 책을 꾸며 10만부 20만부씩 판다. 출판사로서도 20억 40억 벌 기회를 놓칠 수 없을 터. 유익하고 좋은 책보다 쉽게 팔리는 책이 더 이득인 법이다. 호재를 놓칠쏘냐. 문제는 이 대중의 관심을 정확히 파악하고 트렌드에 접속하는 게 운의 영역이라는 점이다. 완벽한 예측은 힘들다. 대중이 왜 이 키워드에 관심을 갖는지 경향성은 알아도 다음 주제까지 파악하긴 힘들다. 기획자가 트렌드를 예측해서 한 발 앞서나가도 풍선을 누르면 다른 부분이 튀어나오는 것처럼 다른 트렌드가 나오기도 한다. 이것은 주식투자도 마찬가지.
만드는 자, 작가는 대중과 나 사이에서 어떻게 밸런스를 맞춰야하는가? 시대와 나는 유리되야하는가 아니면 호흡해야하는가? 널뛰기하는 대중의 관심을 컨트롤할 수 있는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는가? 혹은 지속적으로 기관과 커뮤니케이션하며 언론노출을 생활화해서 퍼스널브랜딩을 유지해야하는가?
아일랜드 독립운동을 공로로 76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코리건과 윌리엄스의 엇갈린 행보를 유념해보자. 상금을 전액 기부하고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진 코리건과는 달리 윌리엄스는 상금을 축재의 수단으로 삼고 사업가와 결혼했으며 역사적 운동을 브랜딩화해서 세계를 돌아다니며 강연을 하고 유명인사를 만나 교류해 평화운동의 상징을 팔았다. 높은 위치에너지인 명예가 돈이라는 운동에너지로 바뀔 수 있다는 점을 잘 포착한 영리한 행보이자 아일랜드 독립운동의 중요성에 대해 지속적으로 환기시켰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역사적 사건은 반복할 수 없기에 이미 지나간 사건에 대해 언급하는 것과 매일 새롭게 무언가를 다시 만드는 것은 같지 않다. 창작자는 무에서 유를 만들어야하기에 만드는 과정 자체를 사랑해야한다. 브랜딩에만 집중하게 되면 새로운 것이 없는 사람으로 낙인찍히기 십상이다. 다시 돌아오지 않는 역사의 한 시기를 재탕하고 우려먹어야하는 윌리엄스와는 사정이 다르다.




이세준과 최병소의 공통점은 그림 그리는 과정에 집중한다는 점이다. 그림 노동 자체를 좋아한다고 했다. 나무의 셀룰로오스 화학구조가 붕괴될정도로 흑연으로 같은 스트로크를 반복하는 과정에는 일종의 숭고함마저 배어있다. 누가 알아주든 주지않든 삶 속에서 지난한 노동을 반복해야한다. 사각사각, 흑연으로 그 표면이 반들반들 새까맣게 될 때까지 스케치해야하다. 형광색과 파스텔톤을 섞어 존재하지 않으나 있을 법한 오브제를 창조해 자신의 세계를 캔버스에 펼쳐내야한다. 매일, 그리고 매일. 왜냐하면 포착할 수 없는 트렌드와는 달리 만드는 자의 하루는 포착할 수 있기 때문이며, 그 하루의 루틴을 잡아 쟁취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인지할 수 있고 운용할 수 있는 것에만 집중하기. 그러다가 운에 의해 트렌드와 맞아떨어질 날이 올 수도 오지 않을 수도 있지만 노동하는 매일이 주는 삶의 행복은 나 자신만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