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노, 군상, 1982, 1984, 한지에 먹, 대전 이응노미술관



이응노의 아들 이융세는 대전 이응노 미술관에 상영되고 있는 다큐멘터리에서 아버지가 파리에서 본 볼쇼이 발레단의 군무에서 착안하여 <군상>을 그렸다고 하였다. 평화와 항쟁이라는 의미부여는 부차적이다. 작가의 먹선은 이미 자유롭다.

예술가는 의미를 모르고 작업할 뿐이다. 대중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사회적, 역사적으로 어떤 함의가 담길지 모른채 한 순간의 아이디어에 영감을 받아 만들고 싶은 것을 만든다.

먹선으로 단순화된 인물들은 개별성을 지우고도 강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서로 닮았지만 결코 동일하지 않다. 반복적인 형상은 복제나 복종이 아니라 리듬과 생명의 흐름이다. 그리하여 사람을 그리는 대신 함께 있음의 상태를 기록한다. 구도와 형태가 아니라 여백과 선의 관계만으로 감정을 환기시키는 이응노의 작업은 프랑스 예술계가 추상미술이자 캘리그라피로서 동양서예를 수용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평화와 항쟁이라는 부가적 함의는 차후에 부여된 것이다. 한지 위의 인물들은 정치적 군중처럼 묘사되지 않는다. 구호도 없고 리더도 없다. 붓질은 구체적인 형체와 독특한 색감 없이도 하나 하나로서 존재하게한다. 자아를 지운 이러한 추상은 고용한 다중성으로서 인간 집합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이응노는 러시아 사회주의적 문화에서 발아한 볼쇼이 군무에 영감을 받아 <군상>을 창작하였으나 고요한 붓질로 매스게임 같은 일사불란한 집단의 기계성과 익명성을 여백의 미라는 한국의 미니멀리즘으로 번역했다.

<군상>의 인물들 사이사이 남은 자리에 리듬감이 느껴진다. 존재의 흔적만을 반복하게 하여 존재와 부재 사이를 사유하게 만드는 리듬이다. 사람을 그리지 않고 사람의 자리를 그린다.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 정밀하게 사물을 그리기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관계와 간격을 감각하는 방식으로 보는 이의 사고를 낯설게 만든다. 그리하여 시선의 관습을 전복하며 회화의 경계를 유연하게 확장시킨다. 이러한 발상의 전환은 서양적 사유체계에 대한 저항이자 조선 서화에 기반한 시적 제안이다. 스트로크로 구성된 회화가 도달할 수 있는 지점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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