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산아트랩 전시 2025

고요손, 김유자, 노송희, 장다은, 장영해

2025.1.22.—3.8.




1. 종로5가 근처 두산갤러리. 지하철 접근성이 좋다. 역에서 3분 거리다.



2. 전시장은 1층에 있다. 누군가에게는 에계 이것밖에 없어? 하겠지만 누군가에게는 오래 곱씹을 인사이트가 있는 현대 예술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3. 고요손 작가는 계단에 앉거나 무릎을 만져보거나 조각 안에 폭신 몸을 묻게하는 작품을 만들었다. 와서 만져보면 무릎 조각에 열선이 들어가 따뜻하다 못해 뜨겁고, 인큐베이터 같은 작품에서는 공간 속에 몸을 파 묻고 자장가 같은 음성을 들을 수 있다.





지금 용인 기흥역 부근 백남준아트센터에서도 고요손 작가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거기서는 이동형 벤치의자 같은데 앉아서 감상할 수 있게 했다. 관객 참여형 작품이다.


4. 두산 갤러리에서 작년 9월에는 유신애 작가의 파생적 메시아를 했고 작년 7월에는 큐레이터 워크숍을 했는데 다 흥미로웠다. 두산갤러리 전시의 선명한 기획이 있다. 형식과 내용, 실재와 허구, 작품과 관람객, 외부와 내부에 대한 경계를 넘으며 관객으로 하여금 메타적 인지를 자각하게끔 한다. 대체로 정답을 제시하기 보다 질문을 던지는 작품을 자유롭게 관람하게 하여 사고를 확장할 수 있게 한다.


5. 이번 전시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노송희의 영상작업이다. Best Television is Noh Television이라는 제목의 15분짜리 단채널 영상이다. 두산갤러리의 전시장을 3D 모델링하여, 들어가는 문이 나가는 문이 되는 무한 순환 구조의 분더카머(Wunderkammer)를 구현했다. 2022년 시립미술관 때와 비슷하게 전시의 아카이빙에 대해 질문하는 영상작업으로 보이지만, 이번 전시를 위해 4분할 3D 모델링 공간과 카메라워크를 넣었다. 2025년작이다. 



무한 순환의 공간을 네 개의 섹션으로 나누어 각기 다른 테마를 배치하고, 독일 고고학 자료에서 출발해 서울시립미술관 초대 관장의 이야기를 거쳐, 아카이빙과 전시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작품은 텍스트 기반이지만 감각적인 현대 음악이 몰입감을 극대화한다. 특정 장면에서는 영화 <버드맨>의 드럼 사운드를 연상시키는 리듬감이 돋보인다. 




스크린 속, 스크린 속, 또 다른 스크린.


스크린이 반복되는 구조는 무한 후퇴(infinite regression)이라는 인식론 정당화 문제를 떠올리게 한다. 세상이 코끼리 위에 있고, 그 코끼리는 거북이 위에 있고 그 거북이는 또 다른 거북이 위에 있는 식으로 거울의 방에서처럼 계속 이어지는 이미지를 생각해보자. 어떤 믿음이 정당화되려며 또 다른 믿음에 기초해야하고, 다시 이 믿음으 또 하나의 정당화된 믿음이 필요하기 때문에 무한히 후퇴하는 것이다.


아카이빙도 하다보며 끊임없이 자료가 나오고, 그 아카이빙의 소스를 찾고, 다시 그 소스의 원안을 찾게 된다. 자료의 근거를 추적하면 추적할수록 무한히 후퇴하게 되는 존재론적 질문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한 것 같다.


자료의 소스의, 소스의 소스의, 소스의 소스의 소스...



작품 속에는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학과 현시원의 박사학위 논문 검은색 책으로 3D 모델링 되어서 서가에 꼽혀져 있다. 눈여겨보고 있다가 집에 와서 찾아봤다. 논문의 요지는 전시 도면이 단순한 전시 기획 도구가 아니라, 전시 만들기와 기록을 포함하는 매개체라는 것이다. 아울러 전시 동선과 도면의 관계를 고민하면서 전시 동선의 형식적 특성을 분석한다. 이를 통해 전시 도면이 단순한 과거의 기록물이 아니라 새로운 전시 창작을 추동하는 확장적 매개체로 기능한다고 주장한다.


몇 가지 흥미로운 점이 있다. 현시원의 논문과 노송희의 영상작품은 형식과 내용에서 불가분의 관계를 이루고 있다. 실현되지 않은 도면 역시 하나의 도면이라는 점(p.105)과, 재전시는 관람객의 경험을 포함하며 과거 전시의 완벽한 재현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지적(p.113)이 노송희 작가의 영상 작품 속 멘트와 겹쳐 들린다. 더불어, 노송희 작가는 2022년 SeMa 피칭 작업의 프레임을 일부 사용하면서도 2025년 두산갤러리에서 이를 포함해 더 나아가 재구성했는데, 이는 작가가 기반으로 삼은 논문의 주장을 영상 속 멘트로 구현했다는 점에서 내적인 연관성을 갖는다. 동시에, 그러한 작업을 실현했다는 외적인 측면에서도 논문이 말하는 재전시의 기획과 맞닿아 있다. 논문의 의도를 영상이 구현하고, 영상이 논문의 구절을 멘트로도, 논문의 주장을 작품 생산 자체로도 구현했다는 말이다. 이로 인해 작품의 형식과 내용의 경계가 흐려지며, 작품 자체이자 동시에 그 작품의 현현(顯現)처럼 느껴진다.


다른 비유를 들자면, 그림을 그리는 사람을 그리는 그림을 보면서 마치 그 자체가 예술을 바라보는 관객으로서의 역할을 상기시키는 베르히트의 소격효과를 느낀다는 뜻이다. 이러한 그림을 보면 일상적인 상황을 예술적 관점으로 새롭게 인식하게끔한다. 우리가 보고 있는 그림이 단순히 그림 그리는 장면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우리가 예술을 보고 있다는 자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전시 기획의 내외부를 질문하는 작품을 보면 작품과 전시 전체의 구조, 형식과 내용, 작품과 관객의 관계에 대해 한 차원 높은 곳에서 생각해볼 수 있게 된다. 


또 흥미로운 점은 논문의 마지막 부분(187쪽)에서 현시원이 노송희에게 논문 전체를 공유하며, 이를 바탕으로 영상 작업을 제작해달라고 요청했다는 점이다. 그 결과 탄생한 Dia:grams는 연구자가 다룬 9개의 전시를 시청각 랩의 3D 공간 안에서 영상의 시공간으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논문에 따르면 노송희는 단순한 재현을 넘어 사운드와 카메라 움직임을 활용하여 전시 자체를 새로운 시각적 경험으로 변환했다. 이 작업은 전시를 아카이빙하는 방식이 페이퍼, 전자자료, 실제 작품이라는 다양한 형태로 확장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노송희의 작업은 과거 전시를 답습하고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기존의 서사를 해체하고 재구성해 새로운 시각적 문법을 부여한다. 두산갤러리라는 물질적 실체를 영상 속 3D 전시공간으로 전유하면서, 공간과 화면, 전시와 작품 간의 관계를 새롭게 재조명한다. 디지털 영상 매체 안에 무한한 공간을 만들고, 영상의 끝과 시작이 불분명하게 하고(참고문헌을 통해 지각할 수 있으나 2번 나와서 의도적으로 경계를 흐리게 했다) 무한히 아래로 추락시키는 게 아니라 순환하게 만든다. 음악 덕분에 더더욱 시작과 끝점이 잘 자각이 안되고, 순환의 고리 속에 들어가게 된다. 


Best Television is Noh Television! 앞으로 활동이 기대되는 작가다. 유럽쪽에서 더 좋아할 듯하다. 덕분에 종로에서 효창공원으로 이전한 시청각 전시공간도 방문해보게된 계기가 됐다.


7. 두산 갤러리가 글을 잘 쓴다. 노송희 작가 소개를 잘 읽어보자


https://www.doosanartcenter.com/ko/exhibit/1645


노송희는 유무형의 아카이브와 전시 공간을 재료로 삼아 이를 메타화한 영상을 제작한다. 작가는 자료의 본질을 면밀히 탐구하는 동시에 기존 서사에 고정된 장면을 해체하여 기억에 새로운 속도와 구조를 부여한다. 이번 전시의 작업 〈Best Television is Noh Television〉(2025)에서 그는 디지털 영상 매체가 제공하는 어디서든 감상이 가능한 접근성을 전복하고자 전시 공간과 화면 속 가상 공간 간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한다. 영상에서 작가는 두산갤러리 공간을 본인의 지난 작업들을 망라하는 새로운 가상 전시공간으로 전유한다. 영상은 전시장 입구를 시작으로 또 다른 가상의 전시 공간으로 이어지며, 곳곳에 배치된 〈진리는 가면의 진리다〉(2021), 〈Time Shifting Box〉(2022) 등 작가의 지난 영상과 2024년 시청각에서 열린 개인전 《Dizzy》의 기록물들을 경유한다. 실제와 가상의 두 공간이 맞물려 만들어내는 경험은 관객에게 이질적이면서도 하나의 통합된 세계로 다가오며,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노송희는 이를 통해 물리적 공간과 디지털 공간,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며 또 다른 방식의 아카이브 읽기를 제안한다.


8. 현재의 과거, 과거의 과거의, 과거의 과거의 과거의 과거...


9. 관계없는 이야기지만 문득 떠오르는 것은, 우리나라 성씨 중 한글 그대로 영어화했을 때 특이하거나 곤란하거나 흥미로운 성씨들이 있다. 노씨는 Mr. No(안돼), 옥씨는 Mr. Ok(다 돼), 문씨는 Mr. Moon(달님), 박씨는 공원에 사는 자(Mr. Park)처럼 보일 수 있다. 이외에도 서양에서는 원래 Lee라는 계열의 성씨가 있었고, 반지의 제왕의 사루만도 백인이지만 Lee씨다. Bong씨는 여과장치의 이름과 겹친다.


옛날에 노무현 대통령 시절, Mr. President No라고 하면 모든 사안에 반대하는 사람처럼 보일까 봐 노씨를 Roh로 표기하기도 했다. 현재도 노씨는 사람마다 Roh와 Noh로 구별하여 쓰는 경우가 있다. 최근에는 이름을 더욱 특별하게 보여주기 위해 Kim을 Keem으로 표기하는 작가도 있으며, 과거 이승만 대통령은 Lee가 아니라 Rhee로 적기도 했다.


이외에도 영어권에서 흥미롭거나 곤란한 성씨들이 있다. Ha(하)씨는 영어에서 웃음소리를 의미하므로 "Mr. Ha"는 "미스터 하하하"처럼 들릴 수 있다. Ham(함)은 "Ham"과 같아 돼지고기 햄을 연상시킬 수 있다. Seok(석)씨는 발음이 영어의 "suck"과 비슷해 오해를 살 가능성이 있다. Chu(추)씨는 "Mr. Chu"로 표기할 경우 영어의 "chew(씹다)"와 비슷하게 들릴 수 있는데, 실제로 Apink의 노래 《Mr. Chu》로 인해 더욱 주목받은 사례다. Bang(방)씨는 "Bang"으로 표기될 경우 총소리나 폭발음을 의미하거나 특정 속어적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다.


또한, 정씨의 경우도 문화권에 따라 곤란한 사례가 많다. 영어권에서는 J가 ‘ㅎ’처럼 발음되기도 하고, ‘ㅇ’처럼 들리기도 하기 때문. 따라서 Jung으로 쓰면 ‘훙’으로 읽히거나, 심리학자 칼 융(Carl Jung)처럼 발음될 수도 있다. 반면 Jeong으로 적으면 영어권에서 ‘헝’이나 ‘엉’처럼 들릴 수도 있어 정이라고 불러달라는 의도와는 다르게 읽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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