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아트센터

랜덤 액세스 프로젝트 4.0

2025. 2. 20.—2025. 6. 29.



1. 미술관 박물관이 곁에 여러 개 있을 경우 전시를 묶어서 갈 수 있어서 편리하다.

용인 기흥역-상갈역 사이에 있는 경기도박물관과 백남준아트센터는 좋은 예시다.

전자는 역사, 후자는 현대예술테마로 주제도 상호보완적이어서 같이 들리기에 좋다.


클러스터 효과가 있는 것이다. 미술관이나 박물관이 한 지역에 모여 있을 경우 상호작용을 통해 경쟁력을 높이고 시너지 효과가 창출된다. 소비자(관람객)도 이에 따른 이득을 얻을 수 있다. 두 곳을 나누어 방문할 필요없으니 교통비도 시간도 절감되고, 다른 테마를 다루니 다양한 니즈를 만족할 수 있다.


미술관과 박물관이 한 지역에 모이면 방문객이 많아지고, 상업적, 문화적 교류가 활발해진다. 관람객들로 거리가 북적여서 늘 소비자가 있으니 주변 서비스산업에 미치는 효과가 크다. 안국, 북촌처럼 수십 개의 화랑이 밀집해있을 경우 한 번에 다 방문할 수 없어 관람객 입장에서는 과다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기흥처럼 중간 규모 이상의 전시장이 상호보완적 테마로 두 개 있는 경우는 적절한 것 같다. 물론 안국, 북촌에 있는 모든 화랑을 다 방문할 목적으로 데이트나 나들이를 하는 것은 아니겠다. 반면 너무 외딴 곳에 한 곳만 있는 경우는 자주 가기엔 곤란한 측면이 있다.



2. 1층은 일어나 2024년이야 전시, 2층은 랜덤 액세스 프로젝트다. 1층 전시는 여러 번 와서 봤다.


백남준만큼 세계적으로 인지도가 있고, 국공립미술관에 개별작품이 여러 소장되어 있으며, 단독으로 이름을 따서 만든 미술관도 있는 예술가가 또 있나 싶다. 언뜻 생각해보면 제주에 김창열 미술관이 있고 양주에 장욱진이 있고 무안오승우미술관, 김세중미술관, 콜렉터의 이름을 딴 광주시립하정웅미술관, 제주유동룡(이타미준)미술관, 서보미술공간 등등이 있는데 백남준만큼의 임팩트는 아닌 것 같다. 그만큼 백남준이 다가올 정보통신시대를 화려하고 강렬하게 예고했었다. 너무 빨리 시대를 앞서가서 뒤따라오는 사람들을 기다리다가 지쳐버린 예술가다.


RM이 롱런해서 소장작품 모아서 하정웅이나 이건희처럼 해주면 좋겠다. 이름도 백남준과 비슷한 김남준이다. 2050년 개관할 김남준아트센터를 기대한다. RM이 좋아할 것 같은 또 다른 작품은 고 권훈칠이다. 개인전도 안했고 오래 은둔하며서 작업만 해서 사람들이 거의 모르는 작가인데, 그의 드로잉에는 경쾌한 경건함이 배어있다. 




3. 1층 전시에는 백남준의 작품들이 있다. 지나가며 생각난 김에 백남준의 시대정신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해보자.


나는 그가 정치학자 베네딕트 앤더슨(Benedict Anderson)나 동남아시아연구자 통차이 위니차쿨(Thongchai Winichakul)과 비슷한 결에서 이해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셋은 미디어가 한 집단의 정체성을 어떻게 형성하는지를 탐구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앤더슨의 유명한 책, 상상된 공동체는 미디어 소비라는 공유된 경험을 통해 국가가 사회적으로 구성된다고 주장했다. 1983년의 책이다. 신문을 읽는 사람이 자기와 같은 신문을 읽는 사람들을 보면서 상상된 세계를 확인한다. 농촌 사회에서 다른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문화와 관습이 다른 사람인 반면, 근대사회에서 같은 신문을 읽는 사람들끼리는 아무리 공간이 다르더라도 일정한 동질감을 느끼고, 그러한 공통된 감각이 하나의 공동체라는 상상을 낳는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독립신문 1호에서, 원산, 서울, 인천 등지의 도시가 등장하는데 신문을 읽는 사람들 모두가 이 같은 신문을 저 다른 도시에서도 읽고 있구나! 하면서 같은 공동체성을 느꼈을 것이다. 이것이 상상된 공동체이다.


한 국가의 가장 작은 구성원이 모든 도시의 사람을 실제로 알고 지내지 않지만, 같은 나라 사람이라는 수평적인 동지애를 느낄 수 있는 이유는 국가가 상상되었기 때문이다. 매일 같은 시간에 신문을 읽는 습관도 의례가 되어 공동체 감각을 강화한다. 매일 같은 시간에 신문을 읽는 의례적 행위는 불특정 다수의 동시적 경험을 만들어 낸다. 나아가 서로 다른 지역에 사는 독자를 공유된 시간적 틀 속에 결속시킨다. 앤더슨은 이러한 신문 읽기의 의례적 행위가 종교적 성찬과 비슷하다고 하였고, 물리적으로 분리된 개인들이 집단적 현실에 참여하는 방식이라고 하였다.


국가를 실재하지 않는데도, 사람들의 상상을 통해 실재하는 것처럼 느끼게 만들면서, 신문과 인쇄 자본주의는 민족주의가 번성할 수 있는 기술적 수단을 제공했다. 이 상상된 공동체 개념은 미디어가 집단 정체성을 형성하는 방식을 이해하는 데 이바지하고, 위니차쿨의 연구와 백남준의 작품에서도 같은 주제의식을 공유한다.


위니차쿨은 앤더슨의 논의를 바탕으로 신문에서 더 나아가 지도를 사용하고 지리적 신체geo-body개념을 주장했다. 지도적 표현이 태국의 국가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어떻게 기여했는지를 보여주면서 이 개념을 확장했다. 백남준은 통신과 미디어 기술을 활용하여 글로벌 연결성을 탐구하며, 국가 경계를 넘어선 공동체의 확장된 비전을 제시했다. 


위니차쿨의 지리적 신체는 지도를 통해 태국의 영토 경계 시각화가 국가 의식을 형성했다는 것이다. 서구식 지도 제작이 도입되기 전에는 시암의 정치적 공간은 유동적이었으며 조공 관계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근대적 지도의 채택과 함께, 시암의 지도층은 국가를 명확한 경계를 가진 독립된 영토적 실체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위니차쿨은 지도가 지리적 현실의 수동적반영이 아니라 생각했고, 지도가 갖는 국가 공간의 범위를 상상하는 능동적 역할에 주목했다. 이러한 지도적 상상력은 태국 정부가 주권을 행사하고, 식민주의적 침략에 대응하며, 국가 정체성을 강화할 수 있도록 했다. 앤더슨이 신문을 통해 동시성을 강조했듯, 지도도 시각적 도구로도 기능한다. 지도를 보는 사람들이 다양한 지역을 단일한 국가적 실체로 통합해서 이해할 수 있도록 했고, 태국이라는 상상된 공동체를 물리적으로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앤더슨의 초기 논의에서 결여되어있던 시각화 도구인 지도를 더해야 백남준의 시대감각을 더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백남준은 앤더슨과 위니차쿨의 논의를 통신 기술의 영역으로 확장한 인물로 볼 수 있다. 미디어는 매개체이고 그 대상은 기술발전에 따라 시대마다 변한다. 앤더슨에게는 신문이 중요했고, 위니차쿨은 지도에 주목했다. 백남준의 미디어는 텔레비전과 위성 기술이었다. 


백남준의 위성TV를 사용한 작품들은 한 국가를 넘어 다수의 국가가 새로운 형태의 상상된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는지 실험했다. 굿 모닝, 미스터 오웰(Good Morning, Mr. Orwell) (1984)에서 백남주은 전자 미디어가 지리적, 정치적 장벽을 초월하여 글로벌하게 연결된 문화를 구축할 수 있음을 예견했다. 그의 유명한 말 중에 음극선관(cathode ray tube)은 캔버스를 대체할 것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텔레비전과 통신이 예술적 표현과 사회적 상호작용을 재정의할 것이라는 그의 생각을 반영한 것이다. 앤더슨이 한 국가 내부의 민족주의에 초점을 맞춘 반면, 백남준은 공유된 경험의 개념을 행성적, 지구적 규모로 확장했다. 뉴욕과 서울을 연결한 그의 위성 방송은 국경을 초월한 가상 공동체의 형성을 시사한다. 오늘날의 글로벌 디지털 문화의 전조로 볼 수 있다.


앤더슨과 위니차쿨과 백남준 모두 미디어 테크놀로지가 어떻게 집단 정체성 형성에 미치는지 연구한 사상가다. 민족-국가라는 상상된 집단 정체성은 본질적인 실체가 아니라, 변화하는 미디어 환경에 의해 형성된 인식적 구성물임을 시사했다. 앤더슨은 인쇄 자본주의가 동기화된 독서 습관을 통해 국가적 의식을 생성하는 방식을 분석했다. 위니차쿨은 지도적 표현이 국가를 지리적 신체로 형상화하는 방식을 설명했다. 백남준은 통신 기술을 활용하여 새로운 형태의 글로벌 공동체라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시대정신을 예견하면서 둘의 논의를 한층 더 발전시켰다. 앤더슨과 위니차쿨이 매개된 정체성의 과거와 현재를 국가단위로 설명하는 데 그쳤다면, 백남준은 미디어가 국경을 초월하여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초국가적 미래를 소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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