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ng, Seoul

Wang You : Blame the Blazing Sun

Curator: Sun Dongdong

2.7 - 3.15. 2025


왕유: 쨍쨍 내려쬐는 태양을 탓하기



1. 베이징, 홍콩, 방콕, 서울, 싱가폴에 지점이 있는 탕 컨템포러리 아트 센터다. 압구정로데오역 근처 한류문화의 거리라고 말하지만 한류는 없고 샤넬, 루이비통 같은 유명 브랜드가 입점해 있는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앞에는 김리아 갤러리가 있고, 근처에는 에스파스 루이비통 서울이나 한솥도시락 밑 한솥아트센터도 있으니 같이 방문할만하다.




2. 돈이 많은 국제 유명 화랑은 이미 들어갈 때부터 향기가 다르다. Tang과 Perrotin이 대표적이다. 부유한 자들은 향기에 민감하기 때문이다. 가난에서는 특유의 냄새가 난다. 영화 <기생충>에서도 후반부 살인의 원인은 냄새에 대한 부유층의 자연스러운 거부감에 분노했기 때문이었다. 백화점도 1층에 향수 등의 매장이 입점해서 향기를 관리한다. 교보문고도  The Scent of Page라는 자신만의 디퓨저 브랜드를 런칭했다. 백화점보다는 중산층이 더 자주가는 몰의 경우에 입점해 있는 Lush도 향기로 사람들의 관심을 이끈다. 향기가 그 브랜드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만든다.




3. 홍콩에서 David Zwirner, White Cube, GDM을 가봤고 Perrotin은 가보지 못했는데 하필이만 가는 날이 쉬는 날이었다. 목요일이었나.

작년 여름 기준으로 Opera Gallery는 폐업했었다. 인포메이션에 물어보니 "was here, now not"이라고 했다. 

옛날에는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요라는 뜻의 以前有 现在没有了 거의 중국어를 그대로 번역한 것 같은 영어였다.

너무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이렇게 말해서 주어 없이 사용하는 영어를 나도 써야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3. 중국어로는 당대 당인 예술 중심이라고 쓰여있다.


현대가 modern, 당대는 해당하는 시대 곧, 오늘날이라는 뜻이다. con(같이) temp(시간)을 호흡하는 contemporary는 20세기의 특정 시간을 일컫는 modern이랑 섞어 쓸 수 없다.

모던도 그 시기에는 컨템포러리였지만 그것도 지나간 시대가 되었다. 

르네상스든 모던이든 아르누보든 그 이름이야 무엇이 되었든 그 시대 젊은 세대는 부모님 세대와는 다르다는 의미에서 새로운 시대를 개창하지만 자식세대가 올라오면 고리타분하게 되는 것이다.


SES와 HOT와 서태지는 90년대에는 매우 파격적이고 세련된 것이지만 지금은 클래식이 되었고

쩐다, ㅎㅇ와 같은 말을 쓰는 세대는 이제 이모삼촌 세대가 되었으며 조카들은 그런 표현이 너무 촌스럽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히피도 어떤 의미에서는 그 시대에 박제되어 있어 디지털 네이티브에게는 과거의 유산처럼 느껴진다. 역사속에 나오는 무언가로. 


당대는 항상 새롭고, 새로운만큼 연약하고 자기 증명에 집착하고 마음이 급하고 혈기왕성하지만 당대가 자신에게 무언가 이름을 붙이는 순간 그 이후의 후-당대에게는 낡은 것이 되어버린다.


당인은 당나라 사람이라는 뜻인데, 아주 큰 의미에서 중국계, 화교와 아시아인을 다 포괄하고자 이런 표현을 쓴 것 같다.


우리는 센터라고 쓰지만 중국은 중심이라고 쓴다. 센터의 단어적 의미가 중심이 맞다. 그러나 우리말에서 뷰티센터를 미용중심이라고 말하거나 파이낸스 센터를 금융중심이라고 말하면 한자 특유의 올드한 고전적인 느낌을 준다. 전통 유학, 한자, 고전, 조선왕조의 흐름이 끊기고 일본을 거쳐 미국이 들어왔기 때문에 언어 속에 한자, 일본어, 영어가 섞이고 그중 가장 나중에 영향을 준 영어가 가장 세련된 느낌을 주는 것이다.




4. 위의 이런 얼굴들은 정말 당대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교육 잘 받고 부유한 집에서 국제적으로 교육받을 듯한 당대 중국인의 얼굴이다. 국제학교를 가면 많이 보인다. 



5. 아래 이 작품은 근육표현이 역동적이면서 세밀하다.


6. 예를 들어 어깨, 등과 같은 부분이다.




이에 대한 답은 저자의 약력에 연극학교 출신이라는 데서 찾았다.


7. 아래 그림의 눈썹과 코의 이런 물결 무늬는 에르곤 쉴레도 생각나고 18세기 네덜란드 그림이 많이 생각난다.



8. 얼굴에서 보이는 이런 붓질은 벡터적 방향성이 있다. 뉴스에서 보이는 대류현상과 닮았다.




그래서 나는 이 그림을 이렇게 표현해보기로 했다. 언어적 실험이다.


이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의도적인 벡터적 방향성을 지닌 것처럼 보이는 붓질의 역동적인 특성에 즉시 감탄하게 된다. 

작가의 제스처 획은 단순히 형태를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각 표식에 방향성이 담긴 것처럼 움직임을 암시한다.

이는 마치 기상 현상에서 관찰되는 대류를 연상시키는 거의 유동적인 역동성을 부여하는 듯하다.

이러한 획의 상호 작용은 이미지가 정적인 실체가 아닌 움직임과 힘의 합류점으로 나타나는 유기적 난류를 만들어낸다.

이 접근 방식은 형상화와 추상화의 경계를 허물 뿐만 아니라 더 깊은 현상학적 몰입을 불러일으켜 관람자가 초상화를 고정된 표현이 아닌 진화하는 운동적 존재로 인식하도록 유도한다.




그리고 다시 그림을 자세히 보면 재밌게 보이지 않은가?
영어로도 써보자.

이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 의도적인 벡터적 방향성을 지닌 것처럼 보이는 / 붓질의 역동적인 특성에 즉시 감탄하게 된다. 

Upon close examination of the painting, / one is immediately struck by the dynamic quality of its brushwork, /which appears to possess a deliberate vectorial orientation.
- "의도적인~보이는" 관형격은 which 이하 수식어구로 빼면 좋음

작가의 제스처 획은 단순히 형태를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각 표식에 방향성이 담긴 것처럼 / 움직임을 암시한다.

The artist’s gestural strokes do not merely define form / but rather suggest movement, / as if each mark were imbued with directional intent. 
- 마찬가지로 ~처럼도 뒤에 as if로 많이 빼면 좋다. as if나 as though 같은 표현은 Harry Potter 읽다가 많이 봤고, 그 이후 영미문학표현에 떡볶이에 달걀마냥 너무 많이 등장하는 것을 발견했다.

이는 마치 기상 현상에서 관찰되는 대류를 연상시키는 / 거의 유동적인 역동성을 부여하는 듯하다.

This lends the composition an almost fluidic dynamism, reminiscent of the convective currents observed in meteorological phenomena. 
- "이는 ~ 부여하는 듯하다" = this lends. 라고 먼저 주어 술어 묶어두고 쓰면 된다.

이러한 획의 상호 작용은 / 이미지가 정적인 실체가 아닌 / 움직임과 힘의 합류점으로 나타나는 / 유기적 난류를 만들어낸다.

The interplay of these strokes generates a sense of organic turbulence, wherein the visage emerges not as a static entity but as a confluence of motion and force. 
- 마찬가지로 상호작용은 난류를 만들어낸다 라고 진주어 술어 묶어두고 문장을 쓰면 잘 써진다.
- stroke나 brushstroke나 gestural stroke나 brushwork나 같은 말이다. 영어권 화자는 동의어를 좋아하고 우리말처럼 반복하는 것을 극혐한다.

이 접근 방식은 / 형상화와 추상화의 경계를 허물 뿐만 아니라 더 깊은 현상학적 몰입을 불러일으켜 / 관람자가 초상화를 고정된 표현이 아닌 진화하는 운동적 존재로 인식하도록 유도한다.
Such an approach not only dissolves the boundary between figuration and abstraction but also evokes a deeper phenomenological engagement, compelling the viewer to perceive the portrait as an evolving, kinetic presence rather than a fixed representation.
-이런 표현도 많이 써보면 써봄직하다. 한국말에서 하고 싶은 말은 용언 두 개에 있다. 불러일으키고 유도하는 것. 이 접근 방식은 몰입을 불러일으키고 인식하도록 유도한다는 게 핵심적인 말. 하나는 ving이하로 빼면 된다.
Such an approach evokes an engagement, compelling O to perceive. 그 다음 붙이면 된다. 뿐 아니라 같은 건 not only but also와 같은 정형적 구문이 있다.


대충 완성본은 이렇게.
Upon close examination of the painting, one is immediately struck by the dynamic quality of its brushwork, which appears to possess a deliberate vectorial orientation. The artist’s gestural strokes do not merely define form but rather suggest movement, as if each mark were imbued with directional intent. This lends the composition an almost fluidic dynamism, reminiscent of the convective currents observed in meteorological phenomena. The interplay of these strokes generates a sense of organic turbulence, wherein the visage emerges not as a static entity but as a confluence of motion and force. Such an approach not only dissolves the boundary between figuration and abstraction but also evokes a deeper phenomenological engagement, compelling the viewer to perceive the portrait as an evolving, kinetic presence rather than a fixed representation.


9. 왕유 작가와 순동동과의 인터뷰가 수록된 도록이 있었다. 그중 그림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부분이 있다.





큐레이터: 아마 춤의 근육 기억과 작가님의 그림이 어느 순간 겹쳐질 수도 있죠.

작가: 그런 것 같다고 생각해요. 풀린 몸은 풀린 상념을 가져다줄 수도 있죠. 몸의 고통이 당신을 힘들게 만들기도 하고 그림의 어려움을 막아내기도 하는 것 같아요.


여기서 풀린 몸과 풀린 상념의 舒展shuzhan은 물리적으로 말하면 스트레칭되고 이완되고 펴진 것이고, 추상적으로 말하면 쾌적하고 편안하다는 뜻이다. 그러니 스트레칭된 몸이 마음도 편안하게 만든다는 뜻인데, 심지어 이 표현은 공간이나 물성이 넓다는 뜻도 되기 때문에 이 쾌적하고 넓은 전시장에 거대한 사이즈의 캔버스로 그린 널찍한 그림이라는 확장해서 해석 가능하다.


어린아이처럼 투정부리고 쌩떼를 쓰며 말썽부린다는 矫情 jiaoqing은 표준어에서 약간 비껴간 방언적 표현이다. (작가는 하얼빈 태생) 너를 힘들게 만든다라고 표현했는데, 고통이 어린아이처럼 근육에 계속 꼬장부린다는 정도의 의미이다.


그런데 그것이 징징거리는 육체의 고통이 왜 그림의 곤란을 막아내고 하는가


춤을 출 때 근육이 긴장되며 아픔을 느껴야하듯 육체적인 동작을 하는 사람은 신체적 고통이 수반되는데, 그림을 그릴 때 느끼는 추상적인 의미의 어려움艰难jiannan, 혹은 곤란함을 잊게 해준다는 뜻인 것 같다. 붓 동작 자체에 집중하다보면, 외부적인 부분은 별로 어려워지지 않는다 약간 이런 뜻으로 나는 해석했다.


전시의 타이틀인 blazing sun도 쨍쨍 내려쬐는 태양으로 육체적 고통을 상징하는데 그 단어의 두음의 라임을 맞춰 b-b로 탓한다고 blame이라고 한 것도 약간 그런 맥락에서 아티스트로서 필연적인 육체의 고통에 대한 어쩔 수 없는 인정과 내키지 않는 수용같은 것을 말하는 듯 하다.



그녀는 즐거워서 웃고 있는가? 타오르는 태양에 괴로워하고 있는가? 쾌락에 소리 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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