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는 생각할 수 있을까?

앨런 튜링이라는 사람은 이 문제에 답할 수 있기를 희망하면서 테스트(일명 튜링 테스트)를 개발했다.
테스트에서 인간 심사위원이 두 실체(인간과 컴퓨터)와 각각 대화해 보고 둘 사이를 구별할 수 없다면 컴퓨터는 테스트에 합격한 것으로 간주되어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 보편 컴퓨터를 구상했던 알랜 튜링

튜링은 다른 많은 컴퓨터 선구자들과 마찬가지로 생각하는 기계를 만드는 데 관심을 가졌고, 범용 계산이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튜링은 이 가상의 구조물을 ‘보편 기계’라고 불렀는데, 당시까지만 해도 ‘컴퓨터’라는 말이 ‘계산하는 사람’을 뜻했기 때문이다.
튜링 기계가 무엇인지 설명하기 위해, 두루마리 종이에다 계산을 하는 수학자를 생각하자. 두루마리가 무한히 길어서 쓸 곳이 모자랄 걱정은 없다고 하자. 튜링은 영리한 수학자가 할 수 있는 계산은 어떤 것이든, 멍청하지만 세심한 사무원의 규칙에 따라 두루마리에 정보를 읽고 쓰기만 하면 풀 수 있다는 것을 보였다. 사실 그는 사람인 사무원을 유한 상태 기계로 바꿀 수 있다고 한다.

참 재밌는 것은 생각하는 기계와 기계처럼 재깍거리는 사람이다. 스피노자는 사람이 반자동 기계와 같아서 하나의 행동을 입력하고 나면 합리적인 이유가 있어도 좀처럼 바꾸지 않는다. 내 은사님이 화선지를 사는 곳은 거리가 먼 A라는 가게였는데, B라는 가게가 오픈해 가깝고 싸게 물품을 구입할 수 있음에도 화선지만은 꼭 A라는 가게만 썼다고 한다.

도전하는 컴퓨터의 이야기는 무수히 많이 영화로 만들어 졌다. 터미네이터 시리즈가 그렇고, AI나 아이로봇 같은 것이 생각하는 기계를 보며 만든 작품이다.

그나저나 튜링의 컴퓨터 대회는 아직도 하고 있을까?
1991년부터 케임브리지 행동발달 연구센터는 해마다 콘테스트를 개최해 왔다. 인간의 대화와 가장 근접한 대화를 한 컴퓨터에게는 2천 달러가, 인간의 대화와 구별이 안 가는 대화를 한 컴퓨터에게는 2만5천달러가 주어진다.


※ 위 글은 드림위버(다른출판사)와 사이언스북을 참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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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란 말은 어른들에게나 학생들에게 꽤나 낯설게 다가온다. 그 말 자체가 거창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돌이켜 보면 매일 매일의 삶이 철학적 사유 속에서 흘러간다. 학생들의 생각을 이끌어 주는 부모의 사유도, 세상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가치 판단도 따지고 보면 철학의 바탕에서 나온 일들이다.

그렇듯 철학은 한 꺼풀만 벗겨보면 우리들의 일상과 매우 친숙한 것이다. 다만 그것에 관한 질문을 비비꼬게 하기 때문에 어렵게 느낄 뿐이다. 사실 일상적으로 믿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한 반성적인 물음이 철학이라면, 우리들의 삶 자체가 가히 철학이다.

잭 보웬의 〈드림 위버〉는 열 네 살의 중학생 이안과 꿈속 '몽학선생(蒙學先生)' 간의 질문과 대답을 통해 철학적 사유를 얻게 한다. 구름 하나에 구름 하나를 더하면 구름은 몇 개가 될 것인지를 비롯해, 천국에도 악이 있을지, 테레사 수녀가 이타적인 사람인지를 묻는 등 총 14장의 구성과 함께, 고대로부터 오늘날까지 철학사를 장식한 153명의 철학적 잠언들도 적절하게 배치해 주고 있다.

어떠한가? 천국에도 악이 존재하는 것일까? 보통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들은 이 질문에 대해 생뚱맞다고 할 수 있다. 천국에는 거짓도 불의도 악도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와 같은 질문을 던지는 것은 그것의 반대 사유를 통해 선으로 귀결시키려는 까닭일 것이다.

이른바 그 어떤 곳이든 악이 없다면 나쁜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고, 고통도 없다면 실질적으로 선이라는 것도 없을 것이라고 단정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악이 있어야 인간은 더 많은 선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견해 때문에 그와 같은 사유를 가져온 것이다. 물론 그 질문에 대한 명쾌한 해답은 제시해 주지 않는다. 다만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부분만 언급할 뿐이다.



한편 잭 보웬은 테레사 수녀의 선한 행동에 대해서도 색다른 평가를 내리고 있다. 이른바 테레사 수녀의 선한 행동이 이기적인 성취감에 비롯된 일이라는 사유이다. 그것은 그녀의 죽음 이후에 얻는 정신적인 불멸성이 그녀를 빛내게 하기 때문이요, 전 세계적인 추앙과 앙망을 받는 일도 그것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이타적인 것처럼 보이는 그녀의 선한 일들이 이기적인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된 일이라는 견해이다.

너는 테레사 수녀가 왜 어려운 사람들을 도왔다고 생각하니? 비참함을 느끼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행복학 위해서일까? 다른 사람을 돕고 나서 얼마나 성취감을 느끼는지 생각해 봐. 그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는 고귀한 감정일 거야. 그리고 게다가 그녀는 다른 사람의 인정을 계속 받아. 너도 알다시피 사람들이 자선 사업이나 단체에 기부할 때 그들의 이름은 다른 사람에게 거명되지. 너는 그들이 왜 그런 활동을 했다고 생각하지?(395쪽)

그렇지만 그녀의 선한 행동이 과연 사후에 얻게 될 불멸성이나 세계적인 추앙 때문에 행한 일었을까? 그것 자체가 과연 인간의 이기적인 욕망의 근원에서 비롯된 일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까? 사실 그녀의 선한 행동은 사후에 얻게 될 평가나 명예보다도 현실 속의 아픔을 안고 있는 어린 아이들을 더 돌보고픈 마음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이 책의 꿈속에 등장하는 늙은 노인은 어찌 보면 진정한 철학의 사유를 일깨워주기 위한 '몽학선생'에 해당될 것이다. '몽학선생'이란 성경 속 바울이 이야기한 것으로, 당대의 유대주의 율법으로는 인간과 세상의 참됨과 진리를 바르게 깨우칠 수 없음을 밝힌 것이다.

그렇듯 이 책 속에서 나누는 이안과 노인의 대화는 그 자체가 명쾌한 해답을 제시하는 바가 아니다. 오히려 둘 사이의 끊임없는 대답과 사유를 통해 인간과 세상의 참됨과 진리를 하나씩 파헤쳐갈 수 있도록 돕는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더 깊은 철학적 사유로 이끄는 '몽학선생'이라 할 수 있다.
 


posted by littlech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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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어렵다. 아무리 쉽게 풀어쓴 대중서라고 해도 철학책을 읽는 일은 늘 어렵다. 언어철학이니, 인식론이니, 과학철학이니 하는 것들은 그 이름만으로도 버겁다. 따라서 나에게 철학은 철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의 몫이었다. 내 몫이 아니었다. 그 무거운 짐을 내가 짊어지겠다고 자원할 까닭이 없었다. 철학과는 무관하게 살다가 가끔 누군가가 내놓은 재미있고 쉬운(?) 철학책을 읽으면 그만이었다. 철학은 일종의 심심풀이 혹은 지적 허영심을 채워줄 대상이었던 셈이다.

  이 책은 철학책이다. 수많은 철학자가 등장하고, 수많은 철학적 논쟁을 다루고 있다. 당연히 쉽지 않다. 이것이 나의 잘못인가? 아니면 철학의 잘못인가? 그도 아니면 이 책을 쓴 사람의 잘못인가? 아마도 쉬운 철학만을 찾은 내 잘못일 게다. 세상에 쉬운 철학이란 것이 있기나 할까?


잘은 모르지만 철학이 처음부터 삶과 유리된 어렵고 골치아픈 학문의 영역은 아니었을 것 같다. 그 옛날, 철학이 곧 삶이고 삶이 곧 철학이던 시절이 있었을 듯 싶다. 물론 지금도 철학은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다. 성장과 분배의 문제, 자유와 평등의 문제, 경제와 환경의 문제, 법과 인권의 문제가 모두 철학의 영역이다. 철학이 다루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철학적 논점들이 어디서 왔는지는 관심이 없다. 누군가 그렇게 말하면 그런가 보다 한다. 또 누군가 그렇지 않다고 말하면 그렇지 않은가 보다 한다. 어차피 철학은 나의 일이 아니라, 그들의 일이었다.

  이 책을 보니, 철학은 모든 것을 다루되 익숙하지 않은 방법으로 다루는 것 같다. 모든 것을 다루기에 철학은 버겁고, 익숙하지 않음때문에 철학은 어렵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내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들에 기어이 '왜 그것이 당연한가'라고 묻고야 마는 것이 철학이었다. 그리고 왜 그것이 당연한 것인지 기어이 답을 하고야 마는 것이 또 철학이었다. 철학은 아마도 나처럼 매사가 대충대충인 사람을 용납하지 않을 것 같다.

청소년 철학소설 <드림위버>의  주인공 이안을 따라 철학여행을 하고나니 철학에 대한 호기심이 커진만큼 두려움도 커졌다. 마치 편안하고 익숙한 일상에서 떠나야 여행의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할까? 여행은 설레는 일이지만, 일상에서 벗어나는 일은 쉽지 않은 결단을 요구하는 것처럼 말이다. 세상이 어수선하다는 핑계로 자꾸 편한 것만 찾게 된다. 익숙하지 않은 것, 낯선 것은 귀찮고 불편해서 싫다. 그러나 이안과의 여행을 통해 깨달았다. 내가 찾는 것들, 내가 원하는 것들은 대개 익숙하지 않은 길에 놓여 있다는 것을. 이제는 익숙하지 않은 길에도 눈을 돌려보려 한다.



posted by 낙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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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우석 문제는 현재진행형이다
- 과학윤리와 과학자윤리로 보는 우리나라의 과학 문제

황우석 스캔들은 전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밝혀지지 않은 사실이 있다. <지식의 대융합>의 저자 이인식 씨에 의하면 참여정부 시절 국내 유명한 과학자들이 비밀리에 스웨덴까지 갔다.
황우석 박사를 노벨생물학상에 수여해달라고 로비를 하기 위해 정부가 지원하는 대규모 로비단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 사실은 황우석 스캔들 이후 오랫동안 묻혀 있었다. 그들은 이름만 대면 알 만한 과학자들이며 보통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사실에 대해서 아무도 고백하는 사람이 없다. 과학의 영광은 앞다퉈 보도하고 밝히지만, 어두운 면은 스스로를 가리는 것이다.
이것은 과학철학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과학자 자신'의 문제다.


▲ 토머스 쿤은 시대흐름에 따라 과학의 성과가 쌓이는 사고방식에 대해서 거부했다.  


이것은 과학의 바깥의 모습이다. 그 내용으로 들어가면 과학의 실체에 대해서 알 수 있다.
단적으로 말해 우리는 과학과 진리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뉴턴의 의론과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모두 과학에 속하지만 둘 다 진리일 수는 없으며 오히려 둘 가 거짓일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이것은 칼 포퍼의 말이다.
과학자들은충분한 실험이 언제 충분할지 객관적으로 결정한다지만, 그것은 단지 '객관주의자'라고 생각하는 주관주의적 결정일 뿐이다. 실험결과가 축적되고 성과가 쌓일 수록 우리의 과학이 발전된다는 착각은 토머스쿤에 의해서 거부된다.
토머스쿤은 이론과 자료가 축적되면서 진보한다는 개념을 거부하고 과학 발전의 평화적 시기는 폭력적인 지식 혁명에 의해서 종결될 막간극에 불과하다고 했다. 축적적 사고가 아니라 비축적적 사고이며, 패러다임이 교체할 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패러다임은 그 시대의 관습과 사고방식을 지배하는 흐름이기 때문에 쉽게 교체되지 않는다. 교양이 있고 지적이며, 과학적 지식이 있는 사람일수록 가장 성공한 사람들일수록 가장 근본적인 선입견을 바꾸지 못하기 때문이다.

간단히 이야기했지만, 황우석 문제는 우리에게 과학의 윤리와 과학자의 윤리라는 두 질문을 동시에 던져준다.
황우석 연구실에서는 그 흔한 실험노트도 제대로 마련돼 있지 않았다. 그리고 불리한 정보는 철저히 차단시킴으로써 스스로 과학자의 윤리를 저버린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결국 과학에 대한 일반 대중 저변이 발전해야만 과학이 발전할 수 있다. 하나만 덧붙이자면, 우리나라의 과학 저널리즘은 '제로'(0)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학계의 내부고발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 위 내용은 <드림위버>(다른출판사) 제3장 <과학> 편과 이인식 선생의 르네21강연 내용을 참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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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출처 :  www.korblog.com/


예전에는 철학이라는 것은 특별한 사람만이 하는 '학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철학이 굉장히 중요하며 꼭 필요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마도 시선을 밖으로 돌리고 살다가 드디어 내 안으로 돌리기 시작했을 때가 아니었나 싶다. 무조건 다른 철학자가 연구해 놓은 이론이니 방법을 외우는 것이 철학이라고 생각하다가 그게 아님을 알았을 때는 얼마나 허탈하던지.

아이에게는 내 전철을 밟게 하고 싶지 않아서 철학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하곤 한다. 그러면 아이가 묻는다. 철학이 도대체 뭐냐고. 그렇게 이야기하면 솔직히 뭐라고 이야기해 줘야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그냥 살아가는 것, 주변의 것에 대해 호기심을 갖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라고 얼버무린다. 하지만 뭔가 부족하다. 아이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럴 때 이 책을 준다면 명쾌한 해답이 될 것 같다. 철학이란 고차원적인 것을 고민하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사람만이 향유하는 것도 아닌, 내가 살아가는 곳에서 생각하는 것의 일부라는 것을 이안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알 수 있다. 삶을 좀 더 깊고 풍요롭게 해 주는 철학의 묘미를 만날 수 있는 기회였다.

특히 꿈인지 현실인지 모호한 곳에서 만나는 모든 것을 의심하고 깊이 생각하는 이안을 보면 그동안 우리는 너무 안일하게 눈에 보이는 것만 믿으며 살았던 것은 아닐까하는 회의와 함께 이안의 부모처럼 항상 토론하고 내재적인 가치를 이끌어낼 줄 아는 그런 부모가 과연 있을까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마지막에 가면 그 모든 것에 대한 의문이 풀린다. 그러면서 다시 한번 감탄한다. 어떻게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갈 생각을 했을까. 아, 그래서 '소설로 읽는다'는 표현을 했구나. 이렇게 책을 덮는 순간까지 꿈과 현실의 중간에서 방황하며 철학적 사고를 하게 된다. 두께에 놀라 과연 딸이 이 책을 집어들까 걱정되긴 하지만 꼭 한 번에 다 읽어야 하는 책은 아닌 만큼 시간 날 때마다 조금씩 읽어보도록 권해야겠다.



posted by 봄햇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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