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살을 인정하는 데 60년이 걸려..
▲ 1950년 9월1일 부산형무소 재소자들이 희생 현장으로 끌려가기 직전 트럭에 타고 있는 모습. 영국 보도사진작가 버트 하디가 촬영해 잡지에 게재했다. |진실화해위 제공
국가기관이 60년 만에 학살행위를 공식 시인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일 “1950년 7월부터 9월까지 부산·마산·진주형무소에 수감된 재소자와 민간인 중 최소 3400여명이 육군본부 정보국 CIC(방첩부대), 헌병대, 지역경찰, 형무관(교도관)에 의해 불법 희생됐으며 그 가운데 576명의 신원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전국 형무소 재소자 희생사건’은 제주 4·3사건과 여순사건 등으로 전국 형무소 20여곳에 수감 중이던 재소자들과 예비검속으로 구금된 국민보도연맹원 2만여명이 한국전쟁 발발 직후 군경에 의해 집단 학살된 사건이다.
이번에 진실화해위원회가 밝힌 구체적인 내역은 다음과 같다.
부산형무소 : 1950년 7월부터 9월까지 세 차례에 걸쳐 1500여명(희생자 대부분은 총살 당했으며 일부는 부산 오륙도 인근 바다에 산 채로 수장)
마산형무소 : 최소 717명
진주형무소 : 1200여명
이번에 밝혀진 희생자들은 대부분 육군형사법·국방경비법 등을 위반한 징역 3년 이하의 단기수들이었다.
정부가 낸 공식 기록은 아니지만 국회에서 2003년 통과된 <제주 4·3 사건 진상조사 보고서>에서는 제주4.3 당시 제주 인구 30만 명의 1/10인 약 3만 명이 죽은 것으로 보고되었는데 대부분은 학살된 것이다. 이 사건은 6.25 직전에 제주에서 일어난 일이다.
1980년대, 2000년대에도 학살은 수없이 일어나고 있다.
▲ 어린이를 포함한 청중들은 해맑게 웃고 있고, 시민들에게 맞아 죽은 좌파 여대생은 나무에 목이 졸려 반쯤 떠 있고, 그 사체를 의자로 무섭게 내리찍는 한 남자가 있다. 장면 하나하나가 충격적이다.
1976년 10월 6일 태국의 수도 방콕의 타마사트 대학에 결집한 좌파 학생과 주변에 모인 우파 세력이 충돌했을 당시 우파 세력은 경찰의 비호를 받으며 학생들을 참혹하게 학살했다. 그 때 사망자가 수십 명에 달했고 수 천 명이 구속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학생들을 학살한 사람들은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았다. 이것이 학살의 무서운 특징이다.
▲ 1982년 9월 16일 팔레스타인 난민촌에 3000명 이상 대규모 학살이 있었다. 이슬람교도인 팔레스타인 시민들에게 가장 모욕적인 방식으로 학대하기 위해 가슴에 십자가를 칼로 새기고 나서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끌고 갔다. 이들은 단 한 명도 되돌아오지 못했다.
1982년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당한 학살은 현대에 벌어진 가장 잔인하면서도 규모가 큰 학살행위다. 특히 제3국이나 후진국에서 의해서 이루어진 학살이 아니라 최선진국이 주도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제3세계, 후진국의 학살에는 미국이나 제국주의 국가가 관여돼 있지만 적어도 제국주의 국가들은 배후 조종하는 식으로 몸을 숨겼다.
하지만 팔레스타인의 사브라ㆍ샤틸라 학살사건에는 이스라엘이 사실상 주도한 것이 정설이다.
먼저 사브라ㆍ샤틸라 지역을 포위하고 밤에 조명탄을 쏘는 등 후방을 튼튼히 받쳐 준 것은 이스라엘의 직접적인 소행이다. 그리고 학살사건을 방조했다. 극우파 기독교 정파인 레바논의 팔랑헤당은 이스라엘이 깔아준 밥상 위에서 마음껏 학살 행위를 저질렀다. 이 사건은 현대 학살 사건이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유형을 총망라해주고 있다.
전쟁상황이 되면 적군에 의한 희생이 부각되는데 그보다 다 참담한 것은 바로 '말의 죽음'이다. 일본의 극우세력이나 미국의 네오콘은 전쟁 상황을 몹시 반긴다. 모든 논리를 뒤엎고 강경논리로 권력을 손아귀에 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극우파의 공통공식이다. 우리나라에도 이에 못지 않은 극우파들이 많다. 전쟁은 정적을 처단하는 '처리장'으로 되며, 국가주의를 한껏 퍼뜨리는 '마이크'로 이용되며, 전쟁물자를 잔뜩 만들어 팔아넘길 수 있는 '대목 장'이 된다. 이것이 현재에도 전쟁이 '상품성'을 가질 수 있는 이유다.
우리나라에서 위와 같은 학살사건이 다시 벌어질 수 있을까? 나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먼저 언론이 죽고 일방통행이 시작되면 국가주의와 충성이 강요되고 상대국과의 전쟁상황은 순식간에 만들어질 수 있다.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하기 전에 프랑스가 미처 대비를 하지 못한 것은 독일의 공격을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 이를 목격한 사람들과 역사가들에 의하면 '순식간'에 전쟁상황이 펼쳐졌다고 한다. 그래서 촉수가 예민한 사람들은 전쟁상황을 무척이나 걱정하고 있다.
학살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런 의미로 정부에서 학살 사건을 처음으로 시인했다는 것은 천만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