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소설>의 경계를 넘나든다는 것은 위험하다. 철학은 개념으로 말하고, 문학은 이미지로 말하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두 가지 모두 잃기 십상이다. 두 영역의 문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철학 소설이나, 철학적인 내용을 전달하려는 소설들은 이 문법적 거부감을 극복하지 못하고 대부분 실패했다. 하지만 철학의 개념을 보존하면서도 소설의 이미지를 창조할 수 있다면 두 가지를 모두 갖출 수 있다.

<드림위버>(다른)는 소설로 읽는 철학책이다. 이 책의 놀라운 점은 소설적인 특징을 철학적인 특징에 묘하게 결합시켰다는 점이다. 소설에서 가장 다루기 힘든 것 중의 하나가 ‘상황설정’인데, 철학사를 다양한 소설적 상황으로 볼 수 있어서 의미가 분명히 들어왔다. 많은 철학자를 등장시키지만, 주인공은 자신의 세계로 철학자들을 이해하고 현실에서 만나는 일상적인 상황 속에서 철학사를 온전히 재현해 낸다.

특히 <드림위버>가 창조했다고까지 할 수 있는 재미있는 장치는 ‘꿈’과 ‘현실’의 토론이라는 형식이다. 주인공은 꿈속에서 만난 노인을 통해서 회의주의와 역설이라는 난감한 상황을 맞지만, 현실에서는 엄마아빠와의 토론을 통해 온건하고도 현실적인 관점을 회복하게 된다.



예컨대 모래더미에서 모래 알갱이 하나를 아무리 여러 번 빼도 그것은 더미라고 결론내릴 수밖에 없다는 노인의 명제에 대해서, 현실의 아버지는 '모호한 언어'를 가지고 반박한다. 즉 단어가 아무것도 배제하지 않고 모든 것을 포함한다면 결국에는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하게 된다는 주장이다. (398쪽)

이 꿈과 현실의 토론이라는 과정은 정반합이라는 변증법의 모양을 이룬다.





▲ 1만개의 모래알갱이로 이루어진 모래더미가 있다고 했을 때, 여기서 1개의 알갱이를 뺀다고 해도 모래더미가 없어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1개씩, 1만번 반복해서 모래알갱이를 줄여간다면 어느 새 모래더미는 형체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이 때 '더미'란 모호한 용어로 명확한 개념을 설명하기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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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로 읽는 철학책 <드림위버>는 우리의 일상과 밀접한 문제들에 대해서 철학적으로 이해하는 훈련을 시켜주는 책입니다.
이 책의 취지에 맞게 우리 생활과 밀접한 문제에 대해서 철학토론을 전개하려고 합니다.
책을 읽고 시사에 밝으신 분들이 시사 쟁점을 두고 토론글을 올리면 이에 대한 수긍이나 반박을 해주시면 됩니다.
때로는 필자의 글이 공격적이고 거칠다고 하더라도 페이스를 잃지 말고 논리적인 반박과 재반박을 해주시거나 긍정논거를 통해서 필자의 주장을 강화시켜 주시기 바랍니다. - 편집자주


이명박 정부가 추구하는 바는 두 가지입니다. 바로 '작고' '강한' 정부입니다.
작은 정부라는 것은 민영화와 규제철폐, 감세 등 신자유주의적인 특징들을 갖추고 있습니다. 당연히 서민들의 복지를 베어내 부자와 강자들에게 나누어주는 정치형태가 나타납니다.
그러면 당연히 반발이 생깁니다. 이럴 때 나오는 것이 '강한' 정부입니다. 한마디로 데모에 적절히 대응하고 강력하게 처벌할 수 있어야 정부가 유지되는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보았을 때 '작고'와 '강한'은 형용모순이 됩니다. 큰 정부가 강하고 작은 정부는 약하다는 게 상식인데 말 자체가 모순을 가지고 있는 것이죠. 실제로 이명박 정부는 작은 정부가 아닙니다. 재벌기업이 정부에 연합해 이루어지는 대연합 중에서도 대연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작은 정부라면 스스로를 지켜내기 어렵겠죠.
용산참사나 촛불시위에 대한 탄압, 언론에 대한 탄압 등 최근의 정부의 '무서운 모습'을 보면서 이것을 제1주제로 잡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럼 토론을 감상하시죠.


제1주제 : 경찰의 강권 통치는 시민들의 '자유의지'를 속박하기 위한 수단이다.




▲ 엠네스티가 발표한 촛불집회 보고서에 들어간 삽화. 전경들이 시민들의 바로 앞에서 분사소화기를 난사하고 있다. 실명의 위험이 있을지도 모르는 아찔한 순간이다.


2008년 5월 수 십만의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섰다. 처음에는 집회 결사의 자유를 어느 정도 인정하는 듯 도로로 나서지 않으면, 시위군중에 물리력을 행사하려 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시위대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바리케이트가 등장하고, 물대포를 쏘기 시작했다. 시위대는 잡혀가는 것을 '닭장투어'라고 부르며 자랑스럽게 붙잡혀 갔다. 정당한 요구를 위한 희생을 당연히 받아들인 것이다.

소위 공권력은 이런 경우 시민 대중에게 어떤 것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들은 단순히 손피켓을 들고, 거리를 행진하는 순수한 사람들을 무조건 잡아갔다. 단순히 도로교통법 위반이나 집시법 위반이라면 간단한 조사 후 훈방하거나, 추후에 벌과금을 내게 하면 되는 것이지만, 특별한 이유 없이 48시간에 가까운 시간동안 가두었다. 또, 구체적인 증거 없이 시위대를 일반적으로 200만원이라는 과중한 벌금을 매겼다.

시위 주체측을 잡아도 해결될 것 같지 않은 시위는 이러한 공권력이 시민에게 일방적인 권한 행사를 하는 순간, 시민들의 시위 참가는 줄어들기 시작했다. 어쩌면 공권력의 승리이자, 한편으로는 권력에 의해 시민들의 '자유의지'가 훼손된 것이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스스로 자신의 행동을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다. 결국 자유의지로 자신들의 행동을 할 수 있다. 법이라는 형태로 규제는 가능하지만, 헌법은 자유의지를 보호하고 있다. 그럼에도 권력을 소유한 자들이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같은 법을 빌미로 권력행사를 행하는 순간 헌법상의 보호 항목인 시민들의 자유의지를 깰수 있다. 즉 정당성을 떠나 처벌이라는 물리적, 경제적 불이익은 자유 의지에 따른 행동을 제약한다. 행복추구권, 집회결사의 자유 등 우리의 자유의지에 따른 행동은 법을 집행하는 집단에 의해 왜곡된다.

우리는 왜 벌하는가
정부에 의한 처벌을 정당화하는 패러다임 두 개.
1. 공리주의: 다수의 이익을 위하여 유사한 범죄를 예방하고 사회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 처벌한다.
2. 응보주의 : 죄를 범해서 처벌할 만하기 때문에 처벌한다. p.372 <드림 위버>

이제 많은 사람들이 촛불을 이유로 재판에 계류 중이다. 야간 집회금지가 위헌판결이 나지 않는 한 선량한 시민들은 주장의 정당성이나 오히려 공권력으로부터 당한 부당한 대우(폭력, 부당한 유치, 과다한 벌과금)는 도외시 된 채, 벌금을 줄이기는 위해서는 법관의 선처(?)를 호소해야 할 상황이다.

지금 벌금을 줄이기 위해 법의 선처를 받을 것인지, 자신의 자유의지의 정당성을 주장할 것인지 정식재판을 청구한 사람들의 고민이다.

이렇게 공권력의 권력 남용은 시민들의 자유의지를 언제든지 훼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글은 청소년철학소설 <드림위버>의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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