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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찰이 2일 저녁 서울 명동에서 촛불집회 1주년 기념행사 참가자들로 추정되는 시민들을 연행하고 있다. (사진 : 한겨레21)


민주주의는 '겸손' 없이는 무용지물이다

합법적인 선거에 의해서 선출된 정부에 대해서 반론을 제기하고,
그 방법이 다소 격렬하다면 반정부투쟁이라 할 수 있을까?
저항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그것을 들어줄 정부를 근본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이다.
정부를 완전히 불신한다면 행동조차 하지 않을 것이고,
별도의 정부를 구성하려 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반정부'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항상 정부에 대해서 웃는 얼굴로 고분고분 따라야 한다면 선거를 치를 것 없이,
전두환이나 박정희가 했던 것처럼 체육관에서 대통령을 뽑으면 될 것이다.

그리고 민주주의라는 말이 몹시도 폭력적으로 쓰이는 부분에 대해서 좀더 근본적으로 고민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대검찰청 노환균 공안부장이 지난 토요일 대전에서 열린 민주노총 주도 전국노동자대회에서 폭력시위를 벌인 사람들을 엄벌하겠다고 어제 밝히며  “불법과 폭력을 통해 의사를 관철하려는 시도는 민주주의의 근간을 뒤흔드는 행위”라고 말했다. 그 자가 말한 민주주의라는 것은 힘을 가진 특정한 사람들의 소유권으로 전락한다.

민주주의란 근본적으로 '겸손' 없이는 존립할 수 없다. 민주주의가 항상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지 않아야 '소수의견'이 빛을 볼 수 있다. 민주주의는 '다수결'이라는 특징이 지나치게 강조되는 바람에 진정한 의미를 오해하고 있다.



민주주의의 최초 입안자들은 '다수의 폭력'을 항상 경계했다

민중을 뜻하는 그리스어 mo와 힘을 뜻하는 croto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민주주의(democracy)는 민중이 자신의 이익을 대변할 대표를 선출하는 정부체제를 말한다.
이론상으로, 민주주의는 민중에게 목소리를 준다. 하지만 이것은 민중이 자신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문제와 다수가 다른 사람을 희생하여 자신의 이익을 얻게 되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영국의 역사학자 액튼 경은 다수가 성공하는 것은 종종 무력이나 속임수를 통해서라고 주장하면서 민주주의는 '다수의 폭력'이라고 말한다.

민주주의에 공헌한 철학자나 지성인들은 민주주의의 위험성과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결함이나 불완전성을 걱정했다. 민주주의가 꽃피우기 위해서는 이런 선현들의 우려를 항상 잊지 말고 품어야 한다. 마치 민주주의가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완성된 구조물이라고 생각하는 동시에 민주주의는 산산이 조각나고 만다.

"신이라는 민중이 있다면 그들의 정부는 민주적일지도 모른다. 인간에게 정부는 그렇게 완벽하지 않다." - 루소

"민주주의는 집단적인 지혜에 대한 슬픈 믿음이다." - H.L..멩켄

"민주주의는 다른 모든 것을 제외하더라도 가장 나쁜 정부이다." - 윈스턴 처칠

※ 위 글은 다른 출판사의 <드림위버>를 참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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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정성의 원리는 겉으로는 단순해 보이지만 양자역학보다 훨씬 발전된 개념입니다.
이 이론은 움직이는 입자의 위치와 속도를 동시에 측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를 알기 위해서 다른 하나에 영향을 주어야 하죠. 기본적으로 과학자들은 원인과 결과의 메키니즘 밖에서 작용하는 입자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죠. 뉴턴의 역학도 모든 입자에 적용되지는 않았습니다.

현대물리학 이론은 입자가 공간의 특정 점을 차지할 확률을 알 수 있습니다. 1930년대 슈뢰딩거 방정식이 널리 받아들여졌는데, 슈뢰딩거는 입자의 위치는 확률함수로서만 표현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양자물리학으로는 입자의 위치를 결정할 수도 예측할 수도 없습니다.

물리학자 폴 데이비스는 “양자 극미세계에서 에너지는 자연발생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형태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타났다 사라진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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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자유는 자신의 욕구는 알고 있지만 그 욕구가 어떻게 결정되는지 모르고 있는 아기와 같습니다. 그래서 만약 인간의 자유의지가 제한돼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다면 인간 훨씬 더 자유로울 수 있겠죠. 어디까지가 자유이고 어디까지가 그렇지 않다면 자유를 보다 경제적으로 누릴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말 아닐까요.

철학소설 <드림위버>에서는 팬케이크의 예가 나왔네요. 주인공의 외할머니가 이렇게 말했군요.

네가 이성에만 의존했다면 너는 아직도 접시만을 바라보며 앉아 있어야 할 거야. 하지만 너는 팬케이크를 먹는 것이 굶어 죽는 것보다는 더 낫다고 생각했어.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합리적인 선택이지.

이것은 뷔리당의 당나귀를 생각나게 합니다.
중세 철학자 장 뷔리당은 똑같은 건초더미 사이에 서 있는 당나귀 이야기를 재미있는 우화로 들려줍니다. 그 상황에서는 어느 것이든 아무거나 먹는 것이 합리적이지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할 근거를 찾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두 건초더미 사이에서 어느 것을 선택할지 합리적인 근거를 찾지 못한 당나귀는 망설이다가 결국에는 죽고 만다는 슬픈 이야기입니다.

우리도 그런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시험을 볼 때 답을 선택해 놓고 다시 망설이다가 결국 시험을 망치는 일도 있고, 쇼핑을 가서 오랫동안 물건을 고민하다가 쇼핑을 망치는 경우도 있죠. 물론 쇼핑 자체를 즐기는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지만.

그래서 가끔은 이성보다 직관이 더 쓸모가 있습니다. 파스칼이 이런 말을 했죠.
당장 죽을 위기에 있는 철학자에게 이성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고.



▲ 프랑스의 대표적인 모랄리스트 블레이즈 파스칼. 그는 인간이 비참하면서도 동시에 위대한 존재라고 말했다. 그리고 극단적인 상황 앞에서 인간의 무기력을 고발하는 수상록 <팡세>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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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로부터 공문 한 장을 받았습니다.
이번 제74차 청소년권장도서에 다른 출판사의 <드림위버>가 선정되었다는 낭보였습니다.

책따세나 간행물윤리위원회의 도서 선정방식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모르겠지만,
그 과정에 참여했던 분의 말씀을 들어보면
누리꾼들이 써 놓은 서평이나
그 책과 관련한 블로그 글과 그에 대한 반응이 판단의 중요한 척도가 된다고 합니다.

소설로 읽는 유쾌한 철학이야기인 <드림위버>를 읽고
30개가 넘는 글을 남겼습니다.
그 중에서는 반응이 폭발한 것도 있습니다.

철학은 자신을 돌아보겠다는 마음의 여유를 가진 사람에게만 마음을 여는 책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현대사회에서 철학책을 만나기란 쉽지 않습니다.
사치스럽다는 이야기를 듣기 십상이죠.
그래서 블로그의 글을 통해서 다가가기 쉽게 소개하고 정리를 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 때문이겠지만,
<드림위버>의 판매고도 나쁘지 않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앞으로 더 쉽고 재미있게 <드림위버>의 진가를 알리겠습니다.
성원해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려요~~



 

▲ <드림위버>는 이안이라는 소년이 꿈속에서 할아버지를 만나며 철학여행을 떠나고 토론을 벌이는 소설입니다. 소설의 형식을 온전하게 빌려왔는데 철학만이 보여주는 '토론'의 형식을 소설에 배합했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즉, 꿈속에서는 할아버지와 역설이나 허무 등 다소 극단적인 상황을 설정해서 토론하지만, 현실에서는 과학자와 사회학자 부모님과 함께 온건한 토론을 하기 때문입니다. 꿈과 현실의 토론이라는 재미있는 구도가 소설 전체에 흐르고 있어서 흥미로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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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천하>의 주인공은 지독한 구두쇠 영감입니다. 얼마나 구두쇠냐 하면 인력거를 타고 차비를 내야 하는데, 인력거 기사도 함께 탔다며 차비를 반만 내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구두쇠 할아버지 윤직원 영감에게도 천적이 있었으니 바로 손자였습니다. 손자는 윤직원 영감이 구두쇠인 것을 알고 필요한 돈을 두 배로 올려 부릅니다. 예컨대 등록금을 200만원이라고 속이면 100만원을 타낼 수 있는 이치입니다. <태평천하> 중 가장 재미있는 장면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하는 까닭은 바로 공간과 역설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공원에서 갑자기 소변이 마려워 멀리 보이는 화장실까지 가게 되었다고 했을 때 논리적으로 화장실까지 영영 도착하지 못합니다. 현재 위치로부터 화장실까지 가는 길은 무수한 지점의 연속으로 되어 있고, 우리들의 수명은 유한하기 때문에 결코 화장실까지 갈 수 없죠. 현실적으로는 말이 안 된다고 할 수 있지만 논리적으로는 틀리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가 가는 길에 중간지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중간지점에 도달할 때마다 새로운 길을 가야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A에서 B까지의 중간지점 H에 도달하자마자 H에서 B까지 또 반을 가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영원히 계속됩니다.

이 공간역설의 비유를 인생관에 멋지게 표현한 사람이 바로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입니다. 토인비는 “역설적이지만 중요하면서도 심오한 인생의 원칙은,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목표 그 자체가 아니라 목표 너머 좀더 야심에 찬 목표를 겨냥해야 한다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인생에 정해진 목표와 한계는 없습니다. 꿈을 크고 높게 가져야 하는 까달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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