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되어버린 남자
알폰스 슈바이거르트 지음, 남문희 옮김, 무슨 그림 / 비채 / 2009년 10월
절판


男兒須讀五車書[남아수독오거서],韋編三絶[위편삼절],晝耕夜讀[주경야독],汗牛充棟[한우충동]...
우리에게는 유독 책에 관련한 성어들이 많다. 시험기간이 되면 혹여나 시험에 나올까 무서워 머리를 싸매고 외워야 했던 성어들, 그 안에 유독 책에 관한 것들이 많았던 것은 왜일까? 아마도 책 속에서 지혜를 찾고 그 안에서 스스로를 찾아가는 과정을 스스로 배워가길 바라는 책의 중요성을 그렇게 조금씩 깨달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어서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어느 누군가의 말처럼 세월을 따라잡는 가장 좋은 가르침은 바로 책 속에 있으니 말이다.

책으로 상징되는 남자. 단 한 권의 책에 사로잡히다.
어느 날, 비를리라는 이름의 한 남자가 벼룩시장의 노점을 돌아다니다 한 사람의 죽음을 맞딱드린다. 그저 어느 노점 앞에서 갑작스럽게 삶을 마감한 한 사람. 그리고 그 죽음이 벌어진 그 자리에는 주인을 알 수 없는 한 권의 책이 남아있다. 비블리는 사건이 일어난 장소에 주인 없이 남겨진 책을 보고 겉잡을 수 없는 욕심에 사로잡히게 된다. 왜 아니겠는가, 어딘지 모르게 신비한 책. 게다가 비블리는 책을 읽고 모으는 것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애서가로 유명한데 말이다. 그는 정당한 값을 지불하고 책을 가져올 길이 모호해지자 급기야 자신의 욕심을 감당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책을 훔치기까지 한다. 그저 그 신비하게만 보이는 책을 가져오기만 하면 되는 일이다.

단 한 권의 책, 그리고 다른 모든 책
비블리는 그 책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오자 바로 그 책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시간이 가는줄도 모르고, 자신이 어디에 있는 지도 모르는채로 말이다. 그리고 그 책에 대한 그의 집착이 시작된다. 오로지 단 한 권 그 책이면 되는 것이다. 책이라는 이름으로 주변인들에게 기억되는 비블리가 책에 빠진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지만 정말 놀라운 일은 이제부터이다. 단 한 권의 바로 그 책에 빠진 비블리는 이제 다른 책들을 혐오하기 싫어한다. 그 오랜 시간과 노력을 들여 모아왔던 수 많은 장서들을 보이만해도 짜증이 나는 대상으로 느끼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동안 자신이 모아온 책들을 헐값에 팔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 자신은 매일 밤 악몽에 시달린다. 악몽으로도 모자라 몸의 이상을 느끼기를 반복하고 병원을 들낙거리던 비블리. 그는 그렇게 고통에 신음하다 어느날 비명과 함께 책이 되어버린다.

책이 되어 버린 남자. 책으로 사람들을 바라보다.
비블리는 그렇게 책이 된다. 그리고 그는 책으로서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책에 관련한 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치며 책으로서의 삶을 살아간다. 책을 잘라내는 도서관장부터, 수 많은 책에게 사형을 집행한 비평가, 그리고 책 수집가까지.. 그는 책이 되어버린채로 다른 책들처럼, 책이기에 거쳐야할 책으로서의 운명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저 책을 하나의 사물로 보고 책에 대해서만 생각했던 예전의 비블리가 아닌, 자신이 모으고 사랑했던 책의 입장에서 책을 다루는 사람들을 관찰하게 된 비블리. 그는 책이 된 삶을 통해 사람들에게 책에게 정말 가치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혹은 책의 가치를 바르게 알아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하는 가를 말하려하는 것이다.

책의 진정한 가치.
많은 사람들이 책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물론 그 안에는 나도 포함되리라.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책을 대하는 태도에는 조금씩의 차이를 보이는 것 같다. 그저 책을 모으는 것이 좋아 사서 모으는 사람도 있고, 단 한번의 인상으로 책을 판단하고 다시는 꺼내보지 않는 사람도 있으며, 책 한 권에 수 많은 생각을 담아 자신만의 책으로 만드는 사람도 있다. 물론 책을 아예 읽지 않은 사람도 있고 말이다. 책에 대한 개인의 태도는, 사실 옳다 그르다를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일테다. 어떤 방식으로 책을 대하든지, 그 자체가 누군가에게 해악을 키치거나, 이득을 주는 일은 아니니 말이다. 그래서 책이 되어버린 남자는 책을 대하는 옳은 방법을 혹은 그른 방법을 지적하려 하는 이야기라고는 할 수 없다. 단지, 책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가치, 그리고 그 책에 부여할 수 있는 자신만의 추억들이 존재할때, 그 가치가 그렇지 않은 가치보다는 더 높지 않겠느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책을 좋아한다고 하여, 책이 되어버릴 필요는 없다. 하지만 책과 함께 잠시 공감을 이룰 필요는 있지 않을까? 책이 되어버리기 전에 책의 가치를 알아보려면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르가니스트
로버트 슈나이더 지음, 안문영 옮김 / 북스토리 / 2006년 7월
절판


시대를 초월해 한 분야의 장인이나 천재로 기억되는 사람들. 그들의 인생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그저 그들이 기억되는 그대로 그들에게는 단지 그들의 재능만 존재했던 것일까? 누군가의 말처럼 천재나 위인은 하늘이 내려주는 것이라면, 하늘은 그들이 천재나 위인으로 기억되도록 하기 위해 그들에게 남들과 다른 재능 이외에 또 무엇을 허락했던 것일까? 축복받은 재능, 단지 그것만으로는 기억될 수 없는 이름, 천재, 그리고 시대의 위인. 그들이 가졌던 재능이외의 축복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책을 만났다.

모두가 외면하는 아이, 부모의 눈마저도 그 아이를 외면하다.
<오르가니스트>는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남들과는 달랐던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엘리아스라는 이름의 이 아이는 태어나는 순간에도 다른 아이들처럼 울지 않았고, 마침내 그 목소리를 찾았을때는 끔찍한 소리를 내었으며 눈빛은 흉측한 누런빛이 되어버린다. 누구도 사랑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볼 수 없을만큼 기형적으로 변해버린 아이. 그 아이는 모두에게 허락된 단 하나의 축복인 부모의 사랑에게도 외면당하고, 그의 부모는 그 아이를 숨기기에 급급한다. 그저 숨겨두고 남들에게 보이면 창피한, 고개 돌려 바라보는 것으로도 모욕당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그들의 보기흉한 흠집으로 여긴 것이다. 아이는 그래서 아주 어린 시절부터 외로움에 방치된다.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외로움에 던져진 아이. 그래서 엘리아스는 무엇도 자신있게 할 수 없고, 어떤것도 시도할 수 없는 무기력과 공포에 남게 된다.

천재성을 발휘할 기회를 가지지 못한 원치 않던 재능
<오르가니스트>의 엘리아스에 대해 책은 어느 순간부터 그의 재능을 말하기 시작한다. 남들이 듣지 못한 것들을 듣고, 남들이 하지 못하는 소리를 내는 아이. 그리고 운명적인 오르간과의 만남을 말이다. 비극적 천재의 모습을 그린 많은 이야기들에서는 한번쯤 천재들이 천재로서 재능을 드러내는 순간을 그린다. 그의 인생이 비극으로 끝을 맺을 지언정, 그가 천재임을 세상의 모든 이가 아는 단 한순을 통해, 그런 천재가 존재했음을 알리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오르가니스트>의 엘리아스는 재능이 그려지는 순간부터 그의 본격적인 비극이 시작된다. 어린 시절부터 외로움으로 시작된 그의 인생은 그가 재능을 발하려는 그 순간에도 철저한 외로움과 시지 그리고 그를 이해하려 하지 않는 주변의 사람들로 철저하게 고립되어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사랑도 할 수 없었던 불쌍한 한 사람.
엘리아스는 다른 비극적 최후의 천재들이 그랬던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다. 하지만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그의 죽음은 다른 비극적 천재들의 이야기와는 비슷하지만 조금은 다른 뒤틀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외로움으로 시작한 그의 인생에 마지막으로 붙잡을 수 있었던 누군가의 사랑. 그 사랑은 그에게 절대적인 존재가 되고 때문에 그 사랑에 대한 그의 집착이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원인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천재도, 재능도, 모두가 사랑을 앞서지는 못한다.
<오르가니스트>는 여러모로 이미 영화로 만들어져 유명해진 작품 <향수>와 유사한 구조를 지닌다. 조금의 관심도 받지 못한채 버려지다시피 한 유년시절. 그리고 그 안에 숨겨진 남다른 재능, 그 재능으로도 마지막에는 구제받지 못한 한 사람의 인생. 그리고 죽음이라는 구조 말이다. 하지만 향수가 주인공인 그루누이의 재능에 초점을 맞춰 그의 마지막을 재능을 펼치고자한 욕망의 결과로 결부시킨것과는 다르게 <오르가니스트>의 엘리아스는 그 죽음을 사랑이라는 그의 전 인생을 걸쳐 한번도 가지지 못한 인간을 향한 마음의 결과로 받아들인다. 사랑받지 못했음에 사랑을 받기 위해 혹은 사랑을 하기 위해 자신의 재능도 목숨도 모두 내던진 것이다. <오르가니스트>는 재능을 펼치고자 했던 인간의 욕망을 그린 것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인간의 가장 기본에 가까운 본능이 외면당한 자는 재능도 능력도 의미가 없음을, 그리고 그래서 그가 사람임을 그리고자 한 것은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에버모어 이모탈 시리즈 1
앨리슨 노엘 지음, 김경순 옮김 / 북폴리오 / 2009년 12월
절판


누군가는 지겹고 지루하다 이야기 할지도 모르지만 사람들에게는 영원히 버리지 못한는 무엇인가가 늘 있다. 그리고 그렇게 영원히 버리지 못하는 무엇인가는, 많은 것들이 빠르게 바뀌고 사라지는 세상에서도 여전히 살아남아 사람들을 위로하고 혹은 그들을 다시 살아가게 만드는 사라지지 않는 힘을 발휘한다. 수 많은 영화와 음악이 그것들을 기리고, 원하고, 꿈꾸는 이유는 아마도 그것이 지루하고 지겹더라도 그것이 있어야만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바로 사랑말이다.

그 무엇도 신기하지 않은 한 소녀의 이야기.
<에버모어>의 주인공은 한 소녀이다. 사고로 모든 가족들을 잃었으나 자신만이 살아남은, 그리고 그 사고로 인해 가족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남들에게는 말조차 하지 못할 희안한 능력을 얻어버린, 그리고 그 능력으로 인해 자꾸만 숨어들어가게 되는 그런 소녀말이다. <에버모어>의 주인공 에버는 가족을 잃고 혼수상태를 헤매이다 깨어난다. 그리고 그 때부터 그녀의 삶은 전과는 달라지게 된다. 물론 가족을 잃은 사고 하나만으로도 그녀의 삶에 일어난 변화가 설명될 수 있겠지만 그보다 현재의 그녀를 더욱 힘들게 하는 것은 그녀가 사고 이후 얻은 이상한 능력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의 기운을 보여주는 오라를 선명히 보고 죽은 사람들을 볼 수 있으며 타인의 생각을 읽는 능력. 그래서 그녀는 그 누구와도 100% 진실한 관계를 맺지 못한다.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상대를 대할 수 밖에 없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그녀는 너무도 많은 것들을 알게 되기 때문에 말이다. 그래서 그녀는 점점 자신을 바깥과 격리시키고 온전한 소통을 할 수 없게 되어간다.

누구나 한번쯤 그리는 상상속의 남자.
그런 에버의 주변에 어느날 대단히 눈길을 끄는 남자가 나타난다. 데이먼이라는 이름의 이 남자 아이는 모두가 바라볼만큼의 뛰어난 외모를 가진 이른바 킹카. 학교의 많은 여학생들이 그를 바라보며 애정어린 눈길을 보내고, 심지어는 에버의 친한 친구들 중에서도 데이먼을 찜했다는 아이가 있을만큼 그는 학교의 스타가 된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데이먼은 처음부터 에버에게 눈에 띄는 친밀감을 표시하기 시작한다. 그저 눈길이 가는 남자아이인줄 알았던 데이먼이 에버에게 접근할 수록 에버는 무엇인지 모를 감정에 휩싸이고 데이먼이 다른 아이들과는 다르게 에버의 능력으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신비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된다. 타인의 모든것을 손쉽게 알 수 있는 에버에게 아무것도 알 수 없는 데이먼은 처음부터 강력하고 신비한 매력을 가진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트와일라잇을 닮은 환상적인 사랑 이야기.
<에버모어>는 여러모로 한창 인기를 끌고 있는 트와일라잇을 연상시킨다.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이가 에드워드라는 남자 뱀파이어이고, 그럼에도 에드워드가 아무것도 알아차릴 수 없는 신비한 매력을 가진 여자가 벨라라는 남녀의 설정만이 살짝 바뀌었을 뿐이니 말이다. <에버모어>에서 모든 것을 알아차리는 능력은 여자인 에버에게 있고 그 능력 바깥의 신비로운 존재는 남자인 데이먼에게 있다는 설정. 어딘지 너무 낯이 익지 않은가..그 외에도 뱀파이어인 에드워드 대신 불사의 존재인 데이먼이라는 설정 역시 어딘지 모르게 트와일라잇과 너무나 유사한 구조를 이룬다. 그리고 그들 간의 헌신적인 사랑이라든지 무엇도 멈추게 할 수 없는 아름다운 사랑등의 이야기 구조 역시 지극히 소녀적이고 감성이 풍부했던 트와일라잇의 그것과 너무나 닮아있음을 읽어본 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을 정도이다.

그럼에도 아름다운 소녀의 사랑이야기.
물론 이런 이유로 <에버모어>의 소재에 참신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를 들게 된다면 사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하지만 트와일라잇과 조금은 다른 이야기가 섞여 있음도 분명히 해야하지 않을까? 트와일라잇이 에드워드와 벨라의 사랑이야기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에버모어는 조금 더 주변을 돌아본다. 그녀의 죽은 여동생 라일라의 영혼이 그녀를 돌보고, 그녀가 구석으로 자신을 몰아갈때 자신과 같은 공간에서 외로움을 느끼며 조카를 돌보고 있는 이모의 모습도 존재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데이먼이라는 존재를 통해 에버라는 상처받은 어린 소녀가 점점 세상으로 발을 내딛는 모습은 그저 두 사람만의 사랑으로 모든 것을 집중시켜 이야기 하는 트와일라잇의 그것과는 조금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으니 에버모어라는 이야기만의 매력은 분명히 존재한다고 하겠다. <에버모어>는 미국 드라마 판권이 체결되었다고도 하니 조만간 미드 열풍이 불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도 <에버모어>라는 이름의 드라마를 만날 수 있으리라 기대해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번 주말엔 무슨 영화를 볼까?> 12월 2주

많은 영화에서 뛰어난 연기력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배우의 자리를 확고히 하는 남자 제이미폭스,
그저 예쁘게 생긴 미모를 자랑하는 꽃미남은 아니지만 특유의 카리스마와 남성적인 매력으로 언제나 존재감을 보이는 배우 제라드 버틀러.
이번주에는 우리가 기억하는 두 배우의 모습에서 조금은 다른 모습으로 변신한 이들의 공동작이 개봉했다.
바로 가족을 잃은 한 남자의 처절한 복수를 그린 영화 모범시민이다.

모범시민 - [개봉일] 09.12.10





평온한 가정을 꾸리고 있는 남자 클라이드의 집에 어느날 괴한들이 들이닥친다. 범인들은 곧 잡히게 되지만 계속되는 수사들 사이로 범인들이 명백히 저지른 죄목들이 증명될 길들이 하나씩 사라지고, 검사인 닉은 그들이 풀려나 패소하는 것을 막기 위해 범인들과 거래를 한다. 그리고 마침내 클라이드의 가정을 파괴한 범인들 중 한명은 사형이 집행되지만 나머지 한명은 3년이라는 비교적 가벼운 감옥살이만을 하도록 판결이 난다. 가족을 모무 잃은 클라이드를 현실을 인정할 수 없다는 눈으로 닉을 바라보고, 10년이 지나 클라이드의 가정을 뒤흔든 범인들 중 한명의 사형이 집행된다. 그러나 고통없이 집행되는 사형과는 달리 이날 이 범인은 엄청난 고통을 느끼며 목숨을 잃게 되고, 언론은 사형이 살인이 되었다며 떠들썩하게 떠든다. 한술 더 떠 형을 마치고 출소한 남은 한명의 범인에게도 엄청난 복수가 뒤따르는데, 닉은 클라이드가 연루되었음을 알고 그를 잡아들인다. 하지만 클라이드의 복수는 그저 자신의 가정을 뒤흔든 범인이 아니라 범인들을 향해 정당한 형을 집행해주지 못한 법을 향하기 시작하는데...


모범시민은 평범한 가정을 꾸리고 있던 한 남자가 괴한들에 의해 가정을 잃고 복수를 위해 오랜 시간을 준비하여 차근차근 그 복수를 진행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잔인하고 무엇보다 고통스럽게 범인들을 향한 복수를 진행한 남자. 하지만 그 남자의 분노는 그저 자신의 가정을 엉망으로 만든 범인들만을 노리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정의를 집행하지 않은 법과 사회를 향하게 된다. 법이라는 구조화된 제도안에서 그 틈을 공략하면 얼마든지 진실을 외면하고 거래가 가능하다는 것. 정의를 위해 만들어졌으나 때로는 정의를 외면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하기도 한다는 점에 분노한 클라이드는 스스로 그 법의 모순을 보여주는 범죄자가 되기로 결심하는 것이다. 가족을 잃은 가장이 가족을 지키지 못한 무력감에 빠져 마지막 가족을 위한 보상으로 사회의 모순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 그것이 바로 클라이드의 가족에 대한 사죄이자 보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영화적인 재미를 따지자면 그 누군가는 재미가 있다 없다고 간단하게 마무리하고 말아버릴지 모를 영화이지만.. 가족을 잃은 가장의 상실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값을 제대로 치루게 하지 못한 법이라는 구멍난 제도를 되새김질하게 한다는 의미를 본다면 분명 가슴아프고 고민에 빠지게 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게다가 한동안 음악을 주제로 한 영화들에서만 주로 얼굴을 볼 수 있었던 제이미폭스의 모습과 그 굵은 인상 마디마디마다 처절한 고통과 분노를 끼워넣은듯한 제라드버틀러의 인상깊은 모습을 볼 수 있으니 영화만으로도 꽤 즐거운 가치가 있다.

찰스레이의 생을 영화로 만든 영화 레이로 수많은 상을 수상하고 드림걸즈나 솔로이스트등의 여러 음악영화에서 자신의 뛰어난 음악인으로서의 재능까지 보여준 제이미폭스와 300과 어글리트루스에서 때로는 와일드하고 때론 유쾌한 자신만의 선 굵은 인상을 남긴 제라드 버틀러가 출연한다. 




데이비드 게일 - [개봉일] 03,03,21
 



 

 대학의 교수인 데이비드 게일은 사형제도를 반대하는 데스워치라는 이름의 단체에 소속된 단원이다.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고 그 안에서 나름의 행복한 생활을 누렸지만 어느날 자신이 가르치던 한 학생을 성폭행한 혐의를 받게 되고 이후 그가 누리던 수 많은 혜택과 행복들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학생들의 존경도, 가족의 사랑도 사라진 그의 주변에 남은 것은 데스워치의 단원인 콘스탄스 뿐이다. 그의 곁에 마지막으로 남은 동료 콘스탄스는 그러나 백혈병이라는 병을 얻게 되고 그마저도 성폭행을 당한 후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게 된다. 이 사건을 수사하던 경찰은 데이비드가 과거에 성폭행으로 기소되었던 사실을 떠올려 그를 용의자로 지목하고 콘스탄스의 몸에서 그의 정액을 발견하는 것으로 그의 범죄를 확정된 사실로 받아들이게 한다. 그리고 그는 사형을 언도 받는다.




데이비느 게일은 개봉한지 꽤 오래된 영화이다 그리고 나는 이 영화를 극장이 아닌 집에서 보았다. 케이블 채널 어딘가에서 하는 이 영화를 보면서 내가 받았던 충격은 상당히 강력한 것이었는데, 그도 그럴것이 사형제도를 반대하던 단체의 회원인 두명의 대학교수가 그들이 주장하는 사형제반대라는 것이 왜 타당한가를 밝혀내는 일련의 과정들이 너무도 처절하고 공포스러울 지경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사람이 신념이라는 거대한 믿음앞에 자신의 목숨을 버릴 수 있다는 것은 어찌보면 그 자체로 존경받을만한 것이겠지만 이 영화가 그 과정들을 보여주는 모습은 조금은 잔인하다 싶을만큼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랄까? 이미 죽을 목숨인 백혈병 환자 콘스탄스와 자신이 범죄자가 아님에도 사형당할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스스로 사형대에 서는 데이비드의 모습은 사실 정의를 위한 순교(이건 영화내의 표현이다.)라기 보다는 광기에 가까워 보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저럴수도 있구나.."라는 치밀한 내용의 전개는 충격적이면서도 동시에 생각할 여지를 주기에 충분했던 영화이기도 하다.

스스로의 목숨을 담보로 사형제 폐지를 주장한 데이비드 게일 역에는 반전 전문 배우 케빈 스페이시가 그가 무죄임에도 죽음을 선택했다는 것을 깨닫고 그를 살리기 위해 뛰는 여인은 케이트 웬슬렛이 맡았다.




레인 메이커 - [개봉일] 98.08.29





이제 법대를 막 졸업하고 사회에 발을 내딛을 준비를 하는 루디, 그는 어느날 보험회사를 상대로한 사건의 변호를 맡게 된다. 피고를 백혈병에 걸린 아들을 둔 어머니로 원고는 거대 보험회사인 그레이트 베네핏이다. 한 개인이 거대한 보험회사를 상대로 낸 이 소송은 누가 보아도 이길 확률이 거의 없어보이지만 설상가상으로 이 사건에 연관한 모든 증인들이 사라지기까지 한다. 소송을 준비하는 동안 백혈병에 걸린 도니와 친구로서의 관계가지 형성하게 된 루디는 거대한 조직인 그레이트 베네핏을 상대로 친구를 위한 처절한 변호를 준비하는데..

레인메이커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한번쯤 고개를 돌리게 되는 조직과 개인관의 불평등한 관계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는 영화이다. 개인 대 개인에서도 서로 균형이 맡지 않는 사회에서 조직과 개인의 관계는 그 차이를 더하게 되는데 이런 공정치 못한 관계에서는 대부분 늘 힘없는 개인에게 모든 책임과 피해가 돌아가게 마련인 사회.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는 사회의 진실인 부분을 백혈병에 걸린 도니와 이 질병에 관해 보험료를 지불해야하는 거대 보험회사 그레이트 베네핏을 통해 볼 수 있는 것이다. 레인메이커는 부조리한 그러나 그것이 존재하고 있는 사회의 어두운 진실과 거기에 맞서야만 하는 단 한명의 젊은 법조인을 들어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을 진행시킨다. 힘의 관계를 따지자면 단연 기우는 이 싸움.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에 언제나 기다리고 있는 정의라는 마음이 골리앗을 이기는 다윗으로 모습을 드러내길 바라며 이 영화를 본다면 거기에서 즐거움과 희망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사건을 담당하게 되는 젊은 변호사 루디역에는 맷 데이먼이 그를 도와 사건의 조사를 돕는 덱 역에는 언제나 즐거운 배우 데니 드비토가 출연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싱글맨
크리스토퍼 이셔우드 지음, 조동섭 옮김 / 그책 / 2009년 11월
구판절판


누군가가 나에게 살아가며 겪는 일 중 가장 힘든 일이 무엇일것 같냐고 물어온다면 나는 아마 누군가를 잃는 일이 가장 힘든 일이 아니겠냐고 대답할 것이다. 사람을 잃는 일은 때로는 다툼으로, 때로는 오해로, 때로는 실연으로, 때로는 죽음으로 언제나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가장 평범한 공포이기도 하지만 언제나 맞딱드리는 그 순간마다 숨을 멎게 하고 생각을 멈추게 하는 가장 어렵고도 두려운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장 힘든 일은,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어느날 갑자기 닥치는 사랑했던 누군가의 죽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여전히 그 누군가를 아끼고 사랑하며 애태우는 마음을 간직한채로, 시간도 공간도 아닌 저너머의 어딘가로 사라져 영원히 이별을 해야하는 상실. 그것보다 더한 힘겨움이 과연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한 남자의 하루
<싱글맨>은 바로 사랑하는 사람을 어느날 갑자기 잃게 된 한 남자의 하루를 그린 이야기이다. 58세의 대학교수 조지, 그는 사랑하는 연인 짐을 예고되지 않은 불시의 교통사고로 인해 잃은 상실감에 젖은 남자이다. 조지와 짐은 동성의 연인이었고 사고가 있기 얼마전 그들만의 새로운 세상과 미래를 꿈꾸며 아름다운 계획을 세우던 행복한 연인이기도 했다. 그런 그들에게 예기치 않은 사고가 가져다 준 이별은 한 남자를 무기력의 구석으로 몰고간다. 매일 스스로의 존재조차 인식하고 싶지 않을만큼 생의 의지가 사라진 노년을 향하는 한 남자. 하지만 사랑하는 연인을 따라 죽을 수는 없기에 그의 생을 연장해야만 하는 그 남자의 하루에는 그래서 세상을 향한 분노와 그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신을 향한 냉소가 담겨있다.

세상을 향해 쏟아내는 소외받은 자의 냉소
조니는 아침에 일어나 이웃인 스트렁크 가족을 바라보고, 출근길 차 속에서 세상을 바라보면서도 끝없이 세상을 향한 비아냥을 멈추지 않는다. 나와 너를 구분짓고 나와 같지 않은 너에게는 절대로 곁을 내어주지 않은 세상. 그래서 조지는 퀴어라는 단어로 규정된 자신의 성정체성으로 인해 세상에서 외면당한 소외감에 절망한다. 그리고 여기에 사랑하는 연인을 잃은 상실감이 더해져 세상을 향한 분노와 비난으로 변화한다. 강단에 서서 강의를 하는 순간에도 젊음 속에 홀로남은 자신의 노쇠한 몸을 절망하고 친구인 샬롯을 만나서도 이성의 유혹에 무감각할 수 있는 자신에 절망한다. 결국 그는 어떠한 곳에서도 안정을 찾지 못하고 그들과 다른 자신을 절감하며 홀로 방황한다.

나를 보아 달라는 절규.
그리고 그는 그날의 마지막에 자신의 제자인 케니를 술집에서 만난다. 케니는 말한다. "선생님이랑 제가 전혀 다르지 않다면, 서로 뭘 줄 수 있겠어요? 어떻게 친구가 될 수 있겠어요?"라고 말이다. 조지는 그날의 마지막에 케니의 한마디로 뭔지 모를 속삭임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 누구에게도 쏟아내지 못하던 자신을 젊고 어린 제자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쏟아내기 시작한다. 자신을 이해해줄 또 다른 누군가를 찾아낸 것 처럼 말이다.

<싱글맨>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늙어가는 한 교수의 하루를 참으로 차갑고 낮게 읊조린다. 조지는 자신을 받아주지 않는 듯한 세상을 향해 분노하고 비난하지만 결국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고 난 다음의 그 하루에도 그 세상속을 살아가고 있다. 자신을 받아주지 않았지만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 그래서 짐이 없는 하루하루는 조지에게 있어 그저 늙어가는 시간이며 외로움이 사무치는 힘겨움일 뿐이다. 그 누구와도 다시는 깊은 관계를 맺지 못하게 스스로를 몰아가는 조지의 모습은 그래서 아프고 힘에 겹다. <싱글맨>은 조지를 퀴어라는 단어로 설명되는 또 하나의 다른 부류로 구분한다. 그리고 그 선 바깥의 조지는 유일하게 자신을 이해하고 함께 걸어가던 짐을 잃음으로써 처절한 외로움과 극단적인 상실감을 맛보게 한다. 어딘가에 속하지 못한 자의 외로움. 그것이 얼마나 커다란 고통인가를 보여주려는 듯이 말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꼭 퀴어라는 특이한 단어로 구분되어진 외면당한 존재가 아닐지라도 세상은 누구에게나 곁을 주지 않는 것 같다. "세상은 어짜피 혼자 사는 것이다"식의 진부한 표현이 존재하는 것처럼 누군가를 잃고 누군가와 함께 하지 못한느 상실과 외로움은 우리들 누구나 겪는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그것을 이겨내는 건 결국 자기 자신의 몫이기도 하니까.. <싱글맨>이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그 외로움의 끝에 그래도 작은 탈출구가 있더라는, 바로 그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