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짐승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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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글자, 또 한 글자...
참으로 오랜만에 눈으로 글자들을 꾹꾹 눌러가며 읽어내려갔다. 한 단어, 한 단어에 실린 그 알 수 없는 의미들을 행여나 보고도 깨닫지 못할까봐.. 그렇게 공을 들여 오랜 시간을 글자들 속을 헤매이고도, 글자 속에 숨어 있는 공포와 좌절들을 미쳐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쳐버릴까봐.. 책 속에서, 시간 속에서 사라지게 해 버릴까봐 순간순간 긴장을 늦추지도 못했다. 그리고 그렇게 한 장, 한 장을 넘기며, 눈으로 읽어 넘긴 단어들이 쌓여갈수록 어렴풋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 시대라는 무게와 시대 속에 녹아있던 억압이라는 단어가, 그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얼마나 단단히 묶어, 조일 수 있는 거대한 힘인지를.. 그 힘 아래 깔려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참담한 심정으로, 스스로를 무기력하게 단련시키며 그 힘들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어렴풋하게 느껴지는 그 고통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힘이 들었다.

<마음짐승>이라는 알 수 없는 제목의 이 책들 속에는.. 그렇게 눈으로 글자 하나 하나를 눌러 읽어가며 담아낸 힘겨움이 책 장의 무게로는 측정되어 질 수 없을만큼 가득하게 담겨 있었다. 과연 내가 이렇게 글자를 읽는 것만으로 그들의 그 시간들을.. 모든 것들이 상실되어 하나도 가질 수 없었던 그 시대의 고통들을 지나가버리는 것이 괜찮은 것인지 수 없는 의문을 가져야했을 만큼 말이다.
 

 

<마음짐승>은 작가인 헤르타 뮐러의 자전적 이야기라는 배경을 가지고 시작한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헤르타 뮐러의 생을 둘러싸고 있는 그녀의 청년기에 대해 알아야 한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녀가 살아온 시대를 떠올리며 한 글자 한 글자를 따라가야 한다. 독재와 억압. 공포와 가난이라 불리우는 수 없이 많은 시대의 고통들을 온 몸으로 겪으며 살아온 한 시대의 증거물이기도 한 그녀 자신의 이야기는, 그래서 단순히 개인의 이야기를 넘어 한 나라의, 그리고 그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의 공유된 기억이기도 할 것이다.

또, <마음짐승>은 모든 사람들이 가난을 얼굴에 심고 살아가는 곳에서 전쟁이 끝났음에도 전쟁 속에 남겨져, 여전히 초록 자켓만을 입어야 했던, 전쟁의 피로 얼룩진 부모세대의 고통과 어두움의 그림자가 여전히 존재하는 가운데 그들 자신도 그 고통의 일부를 물려받아야만 했던,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을 그저 받아들이는것으로 지나가려 하지 않았던 그 다음 세대를 살아간 젊음들의 몸부림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헤르타 뮐러는 <마음짐승>으로 자신의 과거와 함께 그 시대의 젊음들 앞에 놓여있던 공포에 눌린 무기력함과, 그럼에도 놓을 수 없었던 희망이라는 선택지 앞의 갈등을 써내려가고 있었다.
 

 

 고향을 떠나온 책 속의 그녀는, 작은 네모 안에서 함께 살아가다, 네모 안의 더 작은 네모의 벽장 속에서 목숨을 끊은 같은 방의 롤라를 통해 개인을 인정하지 않는 전체 속의 개인이 얼마나 무기력하고 갸냘픈지를 눈으로 보고 억압의 공포와 두려움을 배워나간다. 그리고 롤라와 함께 보낸 시간들을 기억하는 것으로 그녀를 존재시키려 하지만 그것마저도 허락되지 못한다. 벽장 속에 목을 맨 롤라는 그저 없어진 무엇일 뿐인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사라져간 누군가를 기억하기 위해 간직한 공책 한권도 허락되지 않은 세상, 그저 얇은 스타킹과 마스카라가 들어있을 뿐인 트렁크 하나도 온전히 보전할 수 없는 세상에서 그녀는 머리카락 한 올처럼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위태로움을 느끼며 살아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듯, 그녀는 롤라의 죽음과 그 죽음의 무가치함을 보며,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는다. 누군가는 빨간 머리카락을, 누군가는 갈색 머리카락을 지니듯, 그 모두가 다른 이들이지만, 그저 모두 머리카락이라는 한 가지 단어만을 허락받은 세상에 살고 있기에 그녀는 그렇게 자신에 대한 의문을 쌓아가고 있었으리라.

단지 한 가닥 머리카락이 아닌, 다른 사람과 다른 바로 나의 머리카락을 끝없이 소망하고, 그 머리카락으로 다른 사람과는 다른 나를 증명하고자 했던 그녀와 그녀의 친구들의 바람을 시대의 어둠은 단 한마디 비명도 허락하지 않고, 그저 꿀꺽 삼겨버릴 뿐이다. 빨간머리는 빨간머리로.. 갈색머리는 갈색머리로.. 검은 머리는 검은 머리로 대체될 뿐인 세상이기에..

모두 다 조용히...침묵의 불편함을 삼키고 조용히..

이 도시와 저 도시는 그저 위치만 다를 뿐, 그저 모두 같은 도시이듯이.. 너희도 그저 사람일 뿐. 누군가가 사라지면, 다른 누군가가 자리를 메꾸기만 하면 되는.. 너희는 그저 사람. 이름도, 나이도, 머리카락의 색도 상관없이.. 그저 너희는 한 덩어리의 사람 뭉치라고 말하는 세상 속에서 사람들이 자신을 찾는 방법은 어쩌면 기억되지도 못할 죽음으로 자신을 내던지는 바로 그 단 한 순간의 선택에만 존재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어쩌면 롤라의 죽음 속에서 이미 깨닫지 않았을까? 그녀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내 자신이 나 자체로 존재할 수 있는 순간은 바로 죽음 뿐이라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롤라처럼 죽음을 선택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죽음을 선택한 찰라의 바로 그 순간에는 자신이 존재할 수 있었을지라도.. 죽음 후에는 다시 내가 될 수 없는 곳에 살고 있음을 롤라의 죽음을 통해 또 확인했을 테니 말이다. 그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그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는 롤라의 죽음으로 그녀는 그녀가 살고 있는 그 세상에서는 영원한 "나"는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지도 모른다.
 

 

책 속의 그녀와 그녀의 친구들은,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얻고, 그들에게 주어진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끝없이 갈등하고 고민한다. 모든 것들이 상실된 세상에서, 나를 말하는 것에 대한 댓가는 그들이 상상했던 것보다 더욱 크고, 그들을 끝없이 좌절하고 고통스러워하며, 또 다른 세상을 끝없이 갈망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망명이라는 단어를 선택한다.

그녀는 망명했고, 그녀의 친구도 망명했다.
책 속에서 그들은 그들을 눌러왔던 억압과 고통의 이름이 된 자신들의 나라를 벗어나고야 만다.
이제 드디어 나를 말할 수 있는 세상.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고통스럽다.
그들이 떠나온 세상은 그들에게 사형을 언도하고, 나를 말할 수 없는 세상에서 말로써 죽음을 강요당한 그들에게, 새로운 세상은 그들이 떠나온 세상 속에 남겨진 그들을 물어온다. 이미 죽어버린 자신을 요구하는 새로운 세상은, 어쩌면 그들에게 '너의 존재는 원래 없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망명한 그녀의 친구를 죽음을 선택한다. 그는 어쩌면 원래의 내가 죽었듯, 나는 죽어야 한다고 것은 아니었을까?

시대는 그렇게 그 젊음들에게 끝없는 고통을 강요했다.
<마음짐승>은 그래서 그들을 고통으로 몰아가고, 죽음으로 몰아간다.

<마음짐승>의 첫 장, 그 안의 첫 글자 부터 맨 마지막의 점 하나까지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공을 들여 읽어내려갔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그 글 안에 담긴 그들의 이야기를 어디까지 느꼈는지 장담할 수가 없을 것 같은 기분이다. 충분하다 할 수 있을 자유속에서도 더 많은 자유를 그리는 세상에 살고 있는 나에게 단 하나의 자유도 허락되지 않았으나, 그 사실을 입 밖으로 내보내는 것조차도, 떠올리는 것 마저도 허락되지 않은 그 삶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니 말이다. 그저 나는 글자들 위를 떠다니는 공포와 사라진 망명중에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목록 속에서 그 공포를 상상할 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이 원했던 하나에 대한 간절함은 그 공포 속에서 더욱 강한 존재로 다가온다.
헤르타 뮐러의 글 과 이야기 속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간절함.
시대와 국가라는 거대한 힘에 눌려 침묵했으나, 그 침묵속에 여전히 불편함으로 자리잡아 살아남은 그 간절함이 끝내는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는, 말을 한다고 해도 결코 우스워지지 않을 역사속에서 그 존재를 발할 것이다.

<마음짐승>은 어쩌면 공포와 두려움 속에 한 없이 웅크리고 있던, 그러나 분명 죽지 않고 살아숨쉬며 존재했던 침묵의 불편함이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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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Q84 3 - 10月-12月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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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개의 달은 중요하지 않다. 당신이 간절히 원한 것이 무엇인지가 중요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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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Q84 3 - 10月-12月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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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과 몽환이 뒤섞이며, 안과 바깥의 구분이 없이 끝없이 이어지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이어지던, 1Q84의 마지막 남은 3달간의 이야기가 내 손에 들려졌다. 나는 오로지 궁금했었다. 이 이야기의 끝이 어떻게 마무리가 될지, 진실인지 거짓인지조차 가늠할 수 없는 1Q84의 남은 3개월이 어떤 과연 결론을 짓게 될지 말이다. 하지만 이어질 듯 이어지지 않고, 끊어진 듯 끊어지지 않았던 이야기들이 점점 형체를 이루어가고, 하나 둘 빠진 퍼즐들이 채워지며 알아볼 수 있는 그림이 완성되어 갈수록, 도대체 이 이야기가 그리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만 생각했던 지극히 단순한 나의 1차원적인 궁금증은, 오히려 이상하게도 점점 잊혀져만 갔다.

그저 활자화된 1Q84의 세상에, 어느 새 나 또한 들어간 것처럼.. 아오마메와 덴고가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며 헤메이고 있는 1Q84년의 마지막 3개월을 나 역시도 그들처럼 헤메이게 될 뿐이었다. 여름이 막 지나고, 쌀쌀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지금처럼, 책 속에서도 나는 그들과 함께 가을을 맞고 겨울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2010년의 9월을 살고 있지만, 어느 새 1Q84년의 10월과 11월을, 그리고 12월을 살고 있는 듯 했다. 이 이야기가 어떤 결말을 맺을지는 이미 나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행복한 삶을 꿈꾸는 것처럼 1Q84년의 아오마메와 덴고에게도 행복한 삶이 찾아와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모든 이들이 그렇듯, 삶이 끝내는 무엇을 만들어낼지 모르고, 그저 무엇인가를 간절히 바람하는 마음, 그 하나만으로 생을 한걸음 한걸음 걸어가듯, 그들도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것이 삶을 살아가는 모두의 유일한 이유일테니 말이다. 

 

 

 

한 사람의 죽음으로 시작된 거대한 이야기. 1Q84라는 알 수 없는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그 세상의 이야기는 모든 것이 꽁꽁 얼어붙고, 차가운 바람을 피해 얼굴조차 들 수 없는 겨울을 지나, 만물이 소생한다는 봄에도, 뜨거운 태양이 작렬하는 여름에도, 그리고 다시 계절이 돌고돌아 가을을 넘어서는 이 이야기에서도 줄곧 얼어붙어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이야기를 이끄는 모든 인물들이 그 크기가 크던, 작던 자신만의 상처를 끌어안은채 꽁꽁 싸매고만 있다는 느낌. 그래서 앞으로 나서지도, 뒤로 물러서지도 않은채, 그저 1Q84라는 세상이 흘러가주기만을 바라는 것 같은 답답함을 끌어안고 모두들 버티고만 있는 것도 같았다. 결국에는 그런 그들의 그 두려움과 외로움들이 모여 1Q84라는 또 다른 거대한 세상을 만들어내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할만큼, 이 책의 주인공들은 세상으로 나오지 않은채 영원히 자신안으로만 침잠할것 같았다. 

하지만 다시 싸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을때, 아오마메가 유일하게 빛으로 기억하고 있던 순간에서 덴고라는 이름을 끄집어내었다. 그녀가 그를 다시 기억해내었다. 그녀가 그녀의 인생을 스스로 맺음하고자 했던 바로 그 극적인 순간에, 그녀는 기적처럼 그의 이름으로 자신의 목숨에 유예를 주었고, 덴고가 자신의 평생을 옭아맨 과거인 아버지를 떠나면서 멈추었던 아오마메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고 그녀에 대한 그리움을 다시 정면으로 마주하기로 한 순간부터 비로소 1Q84의 세상도 움직이는 세상이 되는 듯 했다. 비록 아오마메에게는 그를 찾아나설만한 자유가 없고, 그녀는 우연히 그를 그림자로만 보았을 뿐이지만, 비록 덴고는 그녀를 찾아나설 자유가 있었지만, 자신이 우연히 들른 놀이터의 미끄럼틀 뒤 어딘가에 그녀가 있었음을 알아차릴 수 없어 그녀를 그리워만 하고 있었지만, 그들이 서로를 떠올렸을때, 그리고 서로를 원하고 그리워하기 시작했을때 1Q84의 세상도 천천히 움직여 하늘에 떠 있는 두개의 달 역시 천천히 하나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끝없이 서로를 그리고 원했던 사람들. 아오마메와 덴고는 12월의 마지막 자락에 다시 하늘의 달이 하나인 세상에 새롭게 들어선다. 어떤 위험도 감수할 수 있을만큼 덴고를 그리워했던 아오마메의 덴고를 향한 움직임이 시작이 되어, 그 어떤 것도 가지지 않았지만, 단지 그녀를 잡을 수 있는 두 손만이 자유로울 수 있다면 충분한 덴고의 그리움이 힘이 되어, 1Q84의 세상을 다리 밑 비상구 어딘가에 남겨둔채로 말이다. 과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기에 오랜 시간을 과거로부터 도망치는데에만 혼신의 힘을 쏟아왔던 두 사람.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던 그들이 비로소 단 하나를 원했을때, 그들이 속했던 세상도 그들에게 움직임을 허락했던 것이다.

그들이 비상구를 통해 나온 세상이 1984년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두 개의 달이 떠 있는 1Q84의 세상은 아니지만, 하나의 달이 떠 있는 1Q84도 아니고, 1984도 아닌 또 다른 세상일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두 주인공인 아오마메와 덴고에게는 그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는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그들은 그들을 끝없이 쫓아오는 1Q84과 그들을 어둠 속으로 밀어넣었던 과거를 품은 세상에서 빠져나와 그들이 그토록 원하고 그리워했던 단 하나를 얻은채 겨울을 나고 새로운 시간과 새로운 세상을 허락받았으니 말이다.

1Q84는 그래서 그들이 남겨둔 비상구 아래의 1Q84에 남겨진 이야기들을 더 이상 하지 않는다. 지도자가 살해된 "선구"가 그 일들을 어떻게 마무리 했는지, '공기번데기'라는 이야기를 들고 왔던 후카에리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이었는지, 1Q84에 존재했던 리틀피플과 공기번데기가 어떤 존재였는지, 그 어떤 것도 더 이상 풀어주지 않는다. 마치 비상구 아래 1Q84의 세상은 이제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듯이 말이다. 아오마메와 덴고가 비상구 아래 1Q84의 세상을 벗어나 새로운 세상으로 건너왔으니 이제 그들에게 의미가 있는 것은 지금 그들의 머리에 단 하나의 달빛을 보내어 주고 있는 바로 그 세상일 뿐인 것이다. 마치 우리에게 지나온 과거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인 현재만이 중요한 것 처럼...
 

 

 

 

1Q84의 모든 인물들은 모두가 혼자였다. 신앙과 함께 가족을 버리고 평생을 홀로 살아온 아오마메도, 어린 시절 특별한 재능을 가진 수재였지만, 자신과는 너무 다른 삶의 방식을 가진 아버지와 자신의 기억 속에 이해할 수 없는 모습으로 남겨진 어머니로 인해 온전히 세상속에 융화되지 못한채 인생을 흘려보냈던 덴고도, 평범하지 못한 외모로 언제나 다른 이들의 곱지 못한 시선을 받아야 했기에, 스스로도 평범함과 행복을 포기해버렸던 우시카와도, "선구"라는 단체에서 도망나와 '공기번데기'라는 기묘한 이야기를 들고 덴고를 찾아들었던 후카에리도, 경제적으로는 풍족하지만, 가정폭력으로 딸을 잃은 상처를 끌어안은채 살아가는 노부인도.. 1Q84의 그 누구도 온전히 세상과 섞이지 못한채 살아가는, 그 스스로가 세상으로부터 자신들을 격리하듯 살아온 사람들 뿐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외로웠고, 고독했지만, 그 조차도 느끼지 못할만큼 철저하게 혼자였던 사람들이었다.

마치, 바쁘게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도 가끔은 철저하게 혼자라고 느끼는, 바로 그 순간의 우리들의 분신들처럼 말이다.

그 어떤 것도 원하지 않고 가지지 않았던 사람들. 그렇지만 단 하나만은 지키고 싶었던 사람들의 이야기 1Q84는 아무것도 가질 수 없었거나 혹은 가지려 하지 않았던, 철저하게 외로웠던 누군가의 간절함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아무것도 가질 수 없었던 사람들의 단 한가닥 유일했던 간절함이 세상 어디엔가 존재하는 다섯가닥의 우연들을 불러보아, 그 소망을 이루어줄 공기번데기를 만들어내는 이야기. 1Q84라는 환상의 세상에서, 리틀피플들이 한가닥 간절함을 뽑아 공기번데기를 만들었듯이 1Q84의 세상은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을 간절함을 잊지 말아달라는, 그 간절함이 당신의 마지막 소원을 이루어주는 한가닥 희망이 된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건 아닐까. 1Q84는 어쩌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그 간절함이 가진 위대한 힘을 보여주는, 또 그 절실함이 만들어낸,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보여주는 거대한 세상의 공기번데기였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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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 시스테마 꿈을 연주하다>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엘 시스테마, 꿈을 연주하다 - 빈민가 아이들에게 미래를 약속한 베네수엘라 음악 혁명
체피 보르사치니 지음, 김희경 옮김 / 푸른숲 / 2010년 8월
절판


때로는 열장의 글보다 단 한 소절의 노래가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때가 있다. 또, 한시간 넘는 일장 연설보다 단 한장의 그림이 누군가의 의지를 변화하게 하는 순간도 존재한다. 사람들은 그래서 예술이 지니는 알 수 없는 힘을 열망하고, 그 힘을 존중한다. 예술가들을 향한 끝없는 찬양과 그들이 내어놓는 음악과 미술 혹은 예술작품들에게 시대와 사회를 초월한 찬사가 쏟아지는 것도, 아마 그런 예술만이 가지는 측정할 수 없는 거대한 영향력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마음을 움직이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고, 예술은 때로 기대하지 못한 곳에서 바로 그, 마음을 움직이는 힘을 발휘하기에 사람들은 예술을 믿고 때로는 의지하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예술이 가진 이런 거대한 힘을 그저 누군가가 우리를 향해 풀어주기를 바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이루고 활용하고자 한다면 어떤 변화가 올까? 한 소절의 음악이, 단 한장의 그림이, 그렇게 막연하고 특별한 것으로 갇혀 있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와 우리의 마음 하나하나를 모두 울린다면? 그 감동을 전해 의지를 변화시킨다면? 그렇다면 그 사회는 어떤 모습이 될까?

엘 시스테마는 바로 이런 질문에 가장 좋은 모범답안이 되어줄 베네수엘라의 음악혁명이다. 가끔 예술계 인사들의 대담이나 인터뷰에서 종종 언급되기도 하는 베네수엘라의 이 특별한 음악정책. 거리의 방황하는 아이들에게 음악이라는 거대한 예술의 감동을 선물하고, 더 방황하는 것 보다 스스로 음악을 통해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그리고 더 나아가 음악이라는 세상에서 자신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를 주도록 짜여진 거대한 프로젝트 엘 시스테마.

<엘 시스테마, 꿈을 연주하다>는 바로 이 베네수엘라의 방황하는 아이들에게 희망과 함께 미래까지 약속한 베네수엘라의 음악혁명에 대해 다루고 있는 책이다. 누군가의 궁금증처럼, 예술이라는 막연하고 경계없는 또 하나의 세상이, 특별함이라는 울타리에 갇혀 소수를 위한 특권으로 남아있기 보다는, 우리 생활 곳곳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예술이 곧 생활이 되고, 그 자체가 세상을 살아가는 하나의 길이 될 수 있도록 배려한 국가적 차원의 프로젝트에 대해 시작부터 끝까지, 그리고 현재에는 어떤 모습인지를 그 과정에 있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들어본 책이기도 하다.

1970년대 부터 30년을 넘는 시간동안 진행된 엘 시스테마의 시작과 진행은, 사실 그 이야기를 듣는 것 만으로도 엄청난 상상을 하게 하는 거대한 이야기였던 것이 사실이다. 주축이 된 호세 안토니오 아브레우 박사의 인생 전체를 건 희생과 봉사를 시작으로, 베네수엘라가 아닌 다른 어떤 나라에서 태어났다면 방황하고 갈등하며 인생을 허비하는 것으로 자신을 진흙속에 버렸을지 모르는 많은 사람들에게 음악이라는 새로운 세상을 주고, 그 안에서 노력과 사랑과 미래라는 감히 꿈도 꾸지 못할 거대한 행복들을 얻을 수 있도록 한 이야기 엘 시스테마. 이 이야기가 감동적인 것은, 그 오랜 시간을 하나의 목표를 위해 때로는 느리게, 때로는 맹렬히 달려온 누군가의 희생이 뒷받침 되었기 때문이고, 또 그 이야기를 통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개척했기 때문이며, 이제 그들이 다시 누군가의 인생을 도와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현재 진행형의 이야기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엘 시스테마, 꿈을 연주하다>는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우리에게는 한 없이 부러운 이야기이다. 또, 동시에 과연 우리나라에서도 저렇게 오랜 시간을 투자하여 언제 결과물이 나올지 모르는 하나의 프로젝트를 위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희생하고 봉사함은 물론, 믿고 기다려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하기도 한다. 5년마다 바뀌는 정권에 따라 국가의 모든 정책방향과 목적들이 춤을 추기를 반복하는 현재의 상황을 볼때, 또 그렇기에 정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 단기적으로 효과를 보이는 계획이 아니면 감히 계획조차도 내어놓을 수 없는 우리의 상황들을 볼때, 30년이 넘는 시간을 투자하며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그리고 투자하고 인내하는 계획을 수립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 시스테마는 분명 존재하는 프로젝트이고, 또 이제 오랜 시간을 거쳐오며 그 결과를 세상에 내어놓아 모든 나라들이 부러워하는 청소년 선도의 바른 정책의 모델로 언제나 언급되고 있다. 엘 시스테마가 성공했듯, 그들의 성공을 부러워하는 어느 나라에서는 또 하나의 엘 시스테마를 준비중에 있는지도 모른다. 엘 시스테마가 감동적인 이유는, 엘 시스테마가 성공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로 인해 다른 이들을 자극하고 또다른 엘 시스테마의 기적이 가능하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인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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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말엔 무슨 영화를 볼까?> 9월 2주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소재를 가지고 다른 결말을 가져오는 작품들을 만나게 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게다가 이 두 작품이 모두 재미까지 갖추고 있기는 더더욱이 힘들고 말이다. 추석을 얼마 앞두지 않고 개봉한 두 영화, 해결사와 골든 슬럼버는 한명의 주인공을 두고 치밀하게 짜여진 "누명씌우기"라는 공통의 소재를 다룬 작품이다. 자신과는 사실 크게 상관없는 자신보다 거대한 집단 혹은 인물에 의해 쓰고 버려지는 일회용 소모품으로 타켓이 되어버린 두 주인공. 이 두 주인공이 어떻게 위기를 벗어나는지, 그리고 두 영화가 어떤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지를 비교하는 것은, 두 영화를 모두 본 관객에게만 주어지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 될 듯 하다.

해결사는 설경구 주연의 영화로 코믹과 액션이 절적하게 섞인 작품이다. 사이코패스에 의해 아내를 잃고 친족사건은 직접 수사할 수 없다는 경찰내규를 어기면서까지 범인을 잡아넣은 후 경찰을 그만두고 현재는 일명 심부름센터라 불리우는 일을 하고 있는 강태식. 어린 딸과 함께 살며, 매일매일 남의 뒤를 밟고 불륜현장 급습하느라 바쁜 이 남자가 어느날 잘 짜여진 시나리오 속에 자신도 모르게 주인공으로 참여하게 된다. 정치권의 완력다툼에 결정적인 키가 되어줄 전직 변호사의 양심선언을 앞두고, 이 증인을 검찰에 출두하지 못하게 하라는 조건을 붙여 살인사건에 엮이게 된것. 증인의 검찰출두를 막으면 살인사건의 진짜 범인이 촬영된 테입을 넘겨받을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꼼짝없이 자신이 모든 죄를 뒤집어써야 하는 상황에서, 강태식이 홀로 고분분투를 벌이는 내용을 담고 있다.




갈수록 태산이라는 표현이 딱 맞을만큼 점점 덩치가 불어나는 살인사건과 모든 정황이 자신을 범인이라 지목하는 상황에서 맞딱드리는 위기탈출의 순간들이 바로 이 영화의 매력. 또 하나를 살짝 언급하자면, 이 영화에서는 상당히 반가운 얼굴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는 점도 영화의 즐거움으로 꼽을 수 있다. 방자전에서 어딘지 오묘한 말투로 시종일관 관객들을 웃겼던 변사또 송새벽이 해결사에서도 역시나 그 특유의 말투로 어리버리함을 보여주는 형사로 출연하고, 서양골동양제과점 엔티크에서 게이 파티쉐 민선우에게 폭 빠져 정신못차리는 보디가드 역을 맡았던 최지호역시 다시 만날 수 있기 때문. 


 

해결사보다 살짝 앞서 개봉한 일본 영화 골든슬럼버는 조금 다른 듯 비슷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2년전 여자 아이돌을 구해 유명해진 택배기사 아오야기는 평소에도 타인을 의심할 줄 모르고 마냥 착하기만한 속 좋은 남자이다. 어느날 자신에게 낚시나 가자며 연락한 옛 친구 모리타를 만난 남자는 그에게서 "너는 오스왈드가 될거야"란 말을 듣게 되고, 바로 그 자리에서 일본의 총리가 퍼레이드 중에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자신도 모르게 총리의 살해범으로 지목되고, 자신이 하지도 않았던 일들이 영상으로 남아있는 상황. 모든 증거들이 자신이 총리의 살해범이라 확신하게 되는 상황에서 아오야기는 도망치는 일 밖에는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게 된다. 끝없이 도망만 칠 수 밖에 없는 상황. 자신이 범인이라도 모두가 말하는 세상에서 그가 계속 도망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오로지 그가 믿어왔던 누군가에 대한 신뢰에서 오는 가느다란 한 줄기 희망 뿐이다.




골든 슬럼버는 원작인 소설이 이미 있는 리메이크 작품이다. 때문에 이미 작품을 읽은 이들에게는 이 영화가 어떤 모습으로 세상에 나타날지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작품. 개인적으로는 아직 골든 슬럼버라는 작품을 읽지 못했기 때문에 원작이 어떤 느낌인지는 모르지만 나에게는 영화 자체만으로도 굉장한 재미와 뭔가 생각할만한 거리를 주었던 작품이기도 하다. 자신보다 거대한 하지만 구체적인 정체를 알 수 없는 집단 혹은 인물에 의해 만들어진 누명을 홀로 뒤집어쓴 가운데에서도 아오야기가 끝까지 기억해내고 믿음을 쏟는 인간에 대한 신뢰를 감동의 매개로 하여, 가장 위급한 순간에 적절한 위트를 이용할 줄 아는 일본영화 특유의 특징이 그대로 살아있는 작품이기도 하기 때문.



 해결사 VS 골든 슬럼버

누군가에 의해 뒤집어 쓴 누명을 벗기 위해 고분분투 한다는 기본적인 이야기의 시작점은 비슷하지만, 해결사와 골든 슬럼버는 이야기의 전개와 결말에서 상당히 다른 방법으로 영화를 풀어간다. 해결사는 이야기가 진행되며 드러나는 사건의 실체 곳곳에 거대한 정권 유력인사의 개입은 물론, 주인공인 강태식과 오랜 연을 맺어온 지인들이 개입되어 있음을 보여주며, 마지막으로 믿었던 그 누군가조차도 믿을 수 없는 인간에 대한 불신과 타락을 보여주며 속칭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를 처절하게 보여주지만 골든 슬럼버는 이와 반대로 인생의 어느 순간을 나눈 진실한 마음은, 나에게 남은 것처럼 상대에게도 남아 전해진다는 "그럼에도 믿을 건 인간에 대한 신뢰"라는 어쩌면 지극히 순진하고 이상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또, 결국에는 그 어떤 인간도 믿을 수 없다고 판단한 태식이, 결국에는 인간을 포기하고 시나리오를 구성했던 자신의 오랜 동료를 직접 잡아 누명을 벗는 해결사와는 다르게, 골든 슬럼버는 자신보다 거대한 힘에 의해 짜여진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시나리오에서 주인공이 되어버린 아오야기가 마지막까지 인간에 대한 신뢰를 통해 목숨을 구할 수 있었지만, 최종적으로 자신이 쓴 누명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음을 보여주며 끝을 맺는다. 두 작품 모두 비슷한 소재로 다른 결론을 내리며, 어떤 의미에서는 해피앤딩도 새드앤딩도 아닌 끝맺음을 맺는다는 또 하나의 공통점도 가지고 있는 것.

하지만 두 작품 모두 재미라는 면에서는 어느 정도 보장할 수 있고, 심각한 순간에도 순간순간 유쾌함을 주는 위트를 잊지 않는다는 점에서 직접 극장을 찾아 만날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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