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Q84 3 - 10月-12月 ㅣ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7월
평점 :
환상과 몽환이 뒤섞이며, 안과 바깥의 구분이 없이 끝없이 이어지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이어지던, 1Q84의 마지막 남은 3달간의 이야기가 내 손에 들려졌다. 나는 오로지 궁금했었다. 이 이야기의 끝이 어떻게 마무리가 될지, 진실인지 거짓인지조차 가늠할 수 없는 1Q84의 남은 3개월이 어떤 과연 결론을 짓게 될지 말이다. 하지만 이어질 듯 이어지지 않고, 끊어진 듯 끊어지지 않았던 이야기들이 점점 형체를 이루어가고, 하나 둘 빠진 퍼즐들이 채워지며 알아볼 수 있는 그림이 완성되어 갈수록, 도대체 이 이야기가 그리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만 생각했던 지극히 단순한 나의 1차원적인 궁금증은, 오히려 이상하게도 점점 잊혀져만 갔다.
그저 활자화된 1Q84의 세상에, 어느 새 나 또한 들어간 것처럼.. 아오마메와 덴고가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며 헤메이고 있는 1Q84년의 마지막 3개월을 나 역시도 그들처럼 헤메이게 될 뿐이었다. 여름이 막 지나고, 쌀쌀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지금처럼, 책 속에서도 나는 그들과 함께 가을을 맞고 겨울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2010년의 9월을 살고 있지만, 어느 새 1Q84년의 10월과 11월을, 그리고 12월을 살고 있는 듯 했다. 이 이야기가 어떤 결말을 맺을지는 이미 나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행복한 삶을 꿈꾸는 것처럼 1Q84년의 아오마메와 덴고에게도 행복한 삶이 찾아와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모든 이들이 그렇듯, 삶이 끝내는 무엇을 만들어낼지 모르고, 그저 무엇인가를 간절히 바람하는 마음, 그 하나만으로 생을 한걸음 한걸음 걸어가듯, 그들도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것이 삶을 살아가는 모두의 유일한 이유일테니 말이다.
한 사람의 죽음으로 시작된 거대한 이야기. 1Q84라는 알 수 없는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그 세상의 이야기는 모든 것이 꽁꽁 얼어붙고, 차가운 바람을 피해 얼굴조차 들 수 없는 겨울을 지나, 만물이 소생한다는 봄에도, 뜨거운 태양이 작렬하는 여름에도, 그리고 다시 계절이 돌고돌아 가을을 넘어서는 이 이야기에서도 줄곧 얼어붙어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이야기를 이끄는 모든 인물들이 그 크기가 크던, 작던 자신만의 상처를 끌어안은채 꽁꽁 싸매고만 있다는 느낌. 그래서 앞으로 나서지도, 뒤로 물러서지도 않은채, 그저 1Q84라는 세상이 흘러가주기만을 바라는 것 같은 답답함을 끌어안고 모두들 버티고만 있는 것도 같았다. 결국에는 그런 그들의 그 두려움과 외로움들이 모여 1Q84라는 또 다른 거대한 세상을 만들어내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할만큼, 이 책의 주인공들은 세상으로 나오지 않은채 영원히 자신안으로만 침잠할것 같았다.
하지만 다시 싸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을때, 아오마메가 유일하게 빛으로 기억하고 있던 순간에서 덴고라는 이름을 끄집어내었다. 그녀가 그를 다시 기억해내었다. 그녀가 그녀의 인생을 스스로 맺음하고자 했던 바로 그 극적인 순간에, 그녀는 기적처럼 그의 이름으로 자신의 목숨에 유예를 주었고, 덴고가 자신의 평생을 옭아맨 과거인 아버지를 떠나면서 멈추었던 아오마메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고 그녀에 대한 그리움을 다시 정면으로 마주하기로 한 순간부터 비로소 1Q84의 세상도 움직이는 세상이 되는 듯 했다. 비록 아오마메에게는 그를 찾아나설만한 자유가 없고, 그녀는 우연히 그를 그림자로만 보았을 뿐이지만, 비록 덴고는 그녀를 찾아나설 자유가 있었지만, 자신이 우연히 들른 놀이터의 미끄럼틀 뒤 어딘가에 그녀가 있었음을 알아차릴 수 없어 그녀를 그리워만 하고 있었지만, 그들이 서로를 떠올렸을때, 그리고 서로를 원하고 그리워하기 시작했을때 1Q84의 세상도 천천히 움직여 하늘에 떠 있는 두개의 달 역시 천천히 하나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끝없이 서로를 그리고 원했던 사람들. 아오마메와 덴고는 12월의 마지막 자락에 다시 하늘의 달이 하나인 세상에 새롭게 들어선다. 어떤 위험도 감수할 수 있을만큼 덴고를 그리워했던 아오마메의 덴고를 향한 움직임이 시작이 되어, 그 어떤 것도 가지지 않았지만, 단지 그녀를 잡을 수 있는 두 손만이 자유로울 수 있다면 충분한 덴고의 그리움이 힘이 되어, 1Q84의 세상을 다리 밑 비상구 어딘가에 남겨둔채로 말이다. 과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기에 오랜 시간을 과거로부터 도망치는데에만 혼신의 힘을 쏟아왔던 두 사람.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던 그들이 비로소 단 하나를 원했을때, 그들이 속했던 세상도 그들에게 움직임을 허락했던 것이다.
그들이 비상구를 통해 나온 세상이 1984년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두 개의 달이 떠 있는 1Q84의 세상은 아니지만, 하나의 달이 떠 있는 1Q84도 아니고, 1984도 아닌 또 다른 세상일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두 주인공인 아오마메와 덴고에게는 그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는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그들은 그들을 끝없이 쫓아오는 1Q84과 그들을 어둠 속으로 밀어넣었던 과거를 품은 세상에서 빠져나와 그들이 그토록 원하고 그리워했던 단 하나를 얻은채 겨울을 나고 새로운 시간과 새로운 세상을 허락받았으니 말이다.
1Q84는 그래서 그들이 남겨둔 비상구 아래의 1Q84에 남겨진 이야기들을 더 이상 하지 않는다. 지도자가 살해된 "선구"가 그 일들을 어떻게 마무리 했는지, '공기번데기'라는 이야기를 들고 왔던 후카에리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이었는지, 1Q84에 존재했던 리틀피플과 공기번데기가 어떤 존재였는지, 그 어떤 것도 더 이상 풀어주지 않는다. 마치 비상구 아래 1Q84의 세상은 이제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듯이 말이다. 아오마메와 덴고가 비상구 아래 1Q84의 세상을 벗어나 새로운 세상으로 건너왔으니 이제 그들에게 의미가 있는 것은 지금 그들의 머리에 단 하나의 달빛을 보내어 주고 있는 바로 그 세상일 뿐인 것이다. 마치 우리에게 지나온 과거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인 현재만이 중요한 것 처럼...
1Q84의 모든 인물들은 모두가 혼자였다. 신앙과 함께 가족을 버리고 평생을 홀로 살아온 아오마메도, 어린 시절 특별한 재능을 가진 수재였지만, 자신과는 너무 다른 삶의 방식을 가진 아버지와 자신의 기억 속에 이해할 수 없는 모습으로 남겨진 어머니로 인해 온전히 세상속에 융화되지 못한채 인생을 흘려보냈던 덴고도, 평범하지 못한 외모로 언제나 다른 이들의 곱지 못한 시선을 받아야 했기에, 스스로도 평범함과 행복을 포기해버렸던 우시카와도, "선구"라는 단체에서 도망나와 '공기번데기'라는 기묘한 이야기를 들고 덴고를 찾아들었던 후카에리도, 경제적으로는 풍족하지만, 가정폭력으로 딸을 잃은 상처를 끌어안은채 살아가는 노부인도.. 1Q84의 그 누구도 온전히 세상과 섞이지 못한채 살아가는, 그 스스로가 세상으로부터 자신들을 격리하듯 살아온 사람들 뿐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외로웠고, 고독했지만, 그 조차도 느끼지 못할만큼 철저하게 혼자였던 사람들이었다.
마치, 바쁘게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도 가끔은 철저하게 혼자라고 느끼는, 바로 그 순간의 우리들의 분신들처럼 말이다.
그 어떤 것도 원하지 않고 가지지 않았던 사람들. 그렇지만 단 하나만은 지키고 싶었던 사람들의 이야기 1Q84는 아무것도 가질 수 없었거나 혹은 가지려 하지 않았던, 철저하게 외로웠던 누군가의 간절함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아무것도 가질 수 없었던 사람들의 단 한가닥 유일했던 간절함이 세상 어디엔가 존재하는 다섯가닥의 우연들을 불러보아, 그 소망을 이루어줄 공기번데기를 만들어내는 이야기. 1Q84라는 환상의 세상에서, 리틀피플들이 한가닥 간절함을 뽑아 공기번데기를 만들었듯이 1Q84의 세상은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을 간절함을 잊지 말아달라는, 그 간절함이 당신의 마지막 소원을 이루어주는 한가닥 희망이 된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건 아닐까. 1Q84는 어쩌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그 간절함이 가진 위대한 힘을 보여주는, 또 그 절실함이 만들어낸,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보여주는 거대한 세상의 공기번데기였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