뽀얀의 일러스트 하우스 by 포토샵 뽀얀의 포토샵 일러스트 하우스 1
김은혜 지음 / 한빛미디어 / 2007년 12월
절판


내가 포토샵이라는 프로그램을 처음으로 접한 것이 벌써 10년 가까이가 흘렀다. 물론 나는 포토샵을 주요 기능으로 삼는 전문가도 하니고, 포토샵을 심도 있고 집요하게 파고 들어본적도 없는 그저 취미삼아 사진이나 만들고 그래픽 작업이나 조금 할 줄 아는 딱 그 정도의 수준을 가지고 있지만, 공으로 먹는 시간은 없듯이 10년 가까이 포토샵이라는 하나의 프로그램을 만지다 보니 수 없이 많은 버전의 포토샵들을 다루어보았고, 나름대로는 중급 이상의 포토샵 이해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편이다. 포토샵. 그 명칭만으로는 단순히 사진작업만을 하는 프로그램처럼 보이는 이름. 게다가 개인 홈페이지가 귀하디 귀하고 특정 프로그램의 운용능력이 있어야만 자신의 인터넷 공간을 가질 수 있었던 예전에 비해 미니홈피와 블로그로 이어지는 개인 인터넷 공간이 흔하디 흔한 세상이 되다보니 이제는 이 복잡한 프로그램을 깊이 있게 배워야 할 필요도 없어지게 되었지만, 사실 포토샵이란 그렇게 간단한 프로그램은 아니다.



소소하게는 개인의 사진을 조금 더 아름답게 꾸미는 이름 그대로의 기능에서부터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하고 변형, 수정가능하게 하는 프로그램. 손으로만 그릴 수 있고, 한번 완성하면 완벽한 변화나 수정이 불가능했던 순수 회화들의 자리를 대체하는 새로운 영역의 혹은 새로운 방법의 예술적 기능까지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까? 포토샵을 어느 정도 만져본 이라면, 혹은 장시간 포토샵을 가까이에 두는 이라면 어느 정도는 자연스럽게 단순한 포토샵의 기능이 아닌 일러스트레이션 기법에도 관심을 가지게되는 이유 말이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사진을 예쁘게 꾸미고 누군가의 모습을 좀 더 빛나게 해주는 포토샵의 단순 기술만으로도 놀라웠던 처음이 지나자 자연스럽게 그래픽이라고 불리울만한 좀 더 다양하고 넓은 영역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고 후에는 완전히 새로운 것들을 이룩해내는 창조활동인 일러스트레이션까지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쯤의 단계에 오면 새로운 벽에 부딪히게 되는 것도 사실. 일러스트레이션은 일러스트라는 별도의 프로그램으로 해야한다는 바로 그 고정관념에 맞딱뜨리게 되는 것이다. 인터페이스도 명령어들도 포토샵과는 또 다른 체계를 가진 프로그램 일러스트레이터 말고, 포토샵으로 일러스트레이션을 구현할 수는 없을까? 이런 의문을 품었던 사람이라면 모두 반가워할만한 책이 바로 <뽀얀의 일러스트 하우스 by 포토샵>이다. 포토샵으로 구현하는 다양한 일러스트레이션의 기법들, 그리고 저자가 직접 구현해낸 기법들을 설명하고 따라할 수 있도록 유도한 것이 바로 <뽀얀의 일러스트 하우스 by 포토샵>의 전체적인 내용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한권의 책만으로 모든 일러스트레이션의 기법을 포토샵으로 구현할 수 있다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의 말처럼 포토샵이라는 프로그램의 기능은 무궁무진하여 개발자 자신도 모두 정확하게 구현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하고, 이 기능들을 기본으로 하여 어느 정도 일러스트레이션에 가까운 혹은 그 이상의 일러스트레이션을 해낼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뽀얀의 일러스트 하우스 by 포토샵>이 소개하는 다양한 방법들이 바로 그런 방법들의 일부이고 말이다. <뽀얀의 일러스트 하우스 by 포토샵>을 통해 그녀가 소개하는 다양한 방법의 포토샵 일러스트레이션 기법들을 익힌 다음, 그 이상의 일러스트레이션 기법들을 만들어가는 것. 바로 그 첫 단계가 <뽀얀의 일러스트 하우스 by 포토샵>가 제공하는 포토샵 일러스트레이션의 의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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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오바마 북클럽 1
조지프 오닐 지음, 임재서 옮김 / 올(사피엔스21) / 2009년 10월
품절


한 권의 책을 읽고 나면, 대게는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하나쯤은 있게 마련이다. 그 책을 읽고 난 나의 개인적인 감정이나 소감일 경우도 있고, 그 책의 여운이 끌어당기는 개인적인 기억들인 경우도 있지만 어쨋든 거의 매번 한 권의 책을 읽고 나면 그 순간 떠오르는 느낌은 분명 늘 있어왔다. 그리고 나는 그런 느낌들을 되새기며 책의 이야기와 그 순간의 감정을 기억하곤 했다. 하지만 오늘 그렇지 못한 한 권의 책을 만난것 같다. 무엇인가 끝없이 말하고 있지만 무엇인지 모를, 그러나 알것도 같은 아리송한 무엇인가를 한껏 뭉쳐있는 잘 풀리지 않는 실타래처럼 얽힌 그대로 던져버리고 간 그 책의 제목은 바로 <네덜란드>이다.


희망과 위기를 동시에 준 곳, 뉴욕.

<네덜란드>에는 잘나가는 애널리스트 한스와 그의 아내, 그리고 아들이 이루고 있는 그의 가족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한스는 변호사인 아내가 미국으로 진출하기를 원하자 아내를 따라 뉴욕으로 이주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새로운 직장을 얻고 석유업 관련 애널리스트로 자리를 잡아 꽤 잘나가는 성공한 애널리스트로 나름의 삶을 유지한다. 그러나 9.11이후 그의 아내 레이철은 다시 그들이 왔던 영국으로 돌아가길 원하게 되고 그렇게 한스는 레이철과 그의 아들을 떠나보내고 홀로 뉴욕에 남는다. 물론 일정간격으로 가족들을 보기 위해 날아가지만 그에게 가족이 함께 하지 않는 뉴욕은 어딘지 안정감이 없고 소속감을 느낄 수 없는 불안한 곳으로 느껴지기 시작한다

영원한 이방인.

그는 흔들리는 뉴욕에서의 시간동안 끝없이 과거를 맴돌게 된다. 뉴욕이라는 땅에서 자기 분야의 다섯손가락 안에 드는 저명한 애널리스트가 되었지만 여전히 뉴욕은 임시운전면허 하나 발급하는데에도 끝없이 자신의 정체성을 되묻게 하는 발을 딛기엔 어렵고 난해한 땅인 것이다. 언제나 뉴욕이 멀게만 느껴지는 한스는 자연스레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며 위안을 얻게 되고 그 위안의 매개중 하나로 크리켓이라는 운동을 선택한다. 어린시절 어머니가 늘 동행하던 크리켓, 자신이 조금씩 발전하는 모습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아주던 그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기 위해 크리켓을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한스에게 크리켓은 승부가 중요한 운동이 아니다. 뉴욕스타일의 크리켓을 익혀 팀을 이기게 하는것 보다 중요한 것은 어린시절 그대로의 방식으로 그 기억으로 찾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크리켓과 현실.

한스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뉴욕에서의 소외감을 외면하는 방식을 선택했다면 그와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미국이라는 땅에, 그리고 뉴욕이라는 도시에 적응하고 있는 혹은 그곳을 자신에게 적응시키려 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네덜란드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또 다른 한 사람, 척 렘키순이다. 트리니다드 출신의 흑인 척 렘키순은 한스와 마찬가지로 검은 피부의 이방인이지만 그가 뉴욕을 대하는 방식은 사뭇다르다. 한스가 자신만의 기억을 더듬는 것으로 과거에서 현실의 위안을 찾는 소극적인 방법을 선택했다면 척은 자신이 좋아하는 이민자들의 운동 크리켓을 뉴욕의 중앙으로 끌어오려한다. 크리켓을 할 수 있는 대형 경기장을 건설하는 꿈을 꾸는 척은 그래서 과거의 기억으로 도망하기 보다는 현실로 자신의 과거를 이끌어오려한다. 스스로가 이민자라는 이름의 영원한 이방인임을 인정하고 그대로 현실에서 연명하려는 한스에 비해 척의 꿈은 그래서 때로는 황당하고 때로는 말도 안되어 보이기까지 한다. 이민자의 나라 미국에서 또 다시 만들어진 이민자들. 그들이 각자 미국이라는 땅에서 스스로를 찾아가는 방식을 <네덜란드>는 참으로 냉정하고 차갑게, 그러나 한켠의 희망을 품은채 보여준다


오바마가 읽었다던 그 소설.

<네덜란드>라는 이름의 이 책이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미국의 첫 흑인대통령인 버락 오바마가 읽고 있다는 한줄의 소식때문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무엇이 한나라의 대통령. 그것도 그 존재만으로 참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상징처럼 느껴지는 그 대통령의 눈을 끌었던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미국이 아직도 온전히 끌어안고 있지 못하는 이민자라는 존재에 대해 사실적이고도 잔혹하게 그 현실을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이민자의 나라라는 이름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열린 곳처럼 보이는 미국의 거대한 땅, 그곳에서 부유하는 이민자라는 같은 이름의 새로운 이방인들은 미국이 놓인 현실이고 동시에 풀어야할 과제이기 때문이니 말이다. 물론 <네덜란드>라는 이름의 이 소설은 그저 그들의 현실과 그들의 좌절, 그리고 그들이 한 때 꿈꾸었던 꿈에 대한 것들을 그리고 있을 뿐이지만 그 이야기가 잔인하리만큼 사실적이고 현실 그대로이기 때문에 그곳의 지도자인 한 사람의 눈을 끌었던 것은 아닐까? 이민자들이 꿈을 안고 어딘가를 향할때 그들은 그저 물질적인 안정이나 사회적인 지위만을 그들의 최종목표로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속했떤 땅을 떠나 새로운 곳에서 그들이 속할 곳을 찾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이 더이상 이민자가 아닌 그곳의 사람이기를 바란다. <네덜란드>가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바로 그들을 받아들여줄 완전한 포용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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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현대문화센터 세계명작시리즈 26
오스카 와일드 지음, 하윤숙 옮김 / 현대문화센터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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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시절 방 바닥에 누워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어대던 세계명작동화 중 특히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한 동화는 바로 행복한 왕자였다. 온 몸이 금박으로 뒤덮혀 있고 눈과 칼에는 보석이 박혀 수 많은 사람들이 우러러 보며 행복을 소원했던 행복한 왕자라는 이름의 거대한 동상, 높은 동상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며 지내던 행복한 왕자는 그 자신은 화려한 금과 보석으로 뒤덮여 있지만 그가 내려다보고 있는 마을에서는 끝없이 불행한 이들의 힘겨운 한숨이 들린다는것을 알게 되고, 그들의 한숨이 가난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행복한 왕자는 자신의 발에서 하룻밤을 보낸 제비에게 부탁해 자신이 가진것들을 하나씩 나누어주기 시작한다. 칼에 박힌 보석과 자신의 눈, 그리고 다신을 둘러싼 금박들까지.. 그리고 행복한 왕자와 제비는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죽게 된다. 물론 그들의 영혼은 영원한 천국으로 가지만 말이다. 어린 아이가 읽기에는 다소 많다 싶을 정도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던 행복한 왕자,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저 단순히 착한일 하면 죽어서라도 천국에 간다는 식의 단순한 의미를 가진 동화는 아니었지만 그 의미를 모두 알지 못했음에도 무슨 이유에선지 그 당시에도 내게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동화였다. 그리고 그 동화의 작가가 바로 이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의 작가 오스카 와일드이다.

세 사람의 미묘한 관계, 그 안의 불안감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이끄는 등장인물은 크게 세 사람을 들 수 있다. 도리언 그레이의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긴 나머지 자신의 모든 열정을 그의 초상에 투영하여 그의 초상을 그린 화가 바질 홀워드, 그리고 냉정하고 잔인할만큼 세상을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헨리 경, 마지막으로 이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초상화의 주인공 도리언 그레이가 바로 그들이다. 화가인 바질은 자신에게 미적 영감을 주고 자신의 작품에 모든 열정을 쏟아붇게 만드는 도리언의 매력에 빠져 그의 초상을 그리기 시작한다. 온전히 순수한 자신의 열정과 현실에서 살아가고 있는 도리언 그 자체의 모습을 표현해내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며 말이다. 그리고 그 그림이 완성되는 그 순간 그를 찾아온 그의 친구가 있다. 모든 세상의 존재하는 것들을 피상적이고 외면적으로만 파악하고 바로 그것이 진리라는 신념을 가진 귀족 헨리 경이 바로 그이다. 친구인 바질이 그린 도리언의 초상화를 보고 도리언이라는 인물에 관심을 가지게 된 그는 바질을 통해 도리언을 만나게 되고 도리언은 그만의 확고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헨리에게 매력을 느낀다. 아직 어린 소년기의 도리언은 자아를 만들어가는 그 순간 헨리의 사고방식에 강한 이끌림을 느끼게 되고 그의 신념을 마치 자신의 신념인듯 흡수하기 시작한다. 세상을 헨리의 방식으로 보기 시작한 도리언, 바로 여기에서 도리언의 불행이 시작한다.


그림 속에 나타나는 잔인한 흔적, 스스로에게서 도망가는 도리언

도리언에게 도리언 자신의 아름다움에 대한 절대성을 주장한 헨리에 의해 도리언은 자신이 가진 가장 값진 것은 그가 가진 외모라는 믿음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이 믿음은 바질이 도리언을 그린 초상화에 대한 질투와 두려움으로 이어진다. 하루가 지나면 하루만큼 자신은 늙어가고, 초상화 속 자신은 그대로 젊은 모습을 유지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도리언은 자신이 가진 가장 큰 힘이 자신에게서 초상화로 옮겨간다고 믿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도리언은 기도하기 시작한다. 초상화의 자신이 현실의 자신을 대신해서 늙어가고 자신은 그 아름다움을 영원히 간직하게 해달라고 말이다. 그리고 소원은 이루어진다. 도리언은 늙지 않고 초상화가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퇴폐와 향락에 물들어 추하게 변하는 도리언의 영혼은 그가 소원한대로 현실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영혼이 변화할수록 그 대신 늙어가는 도리언의 초상속 도리언은 그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기 시작한다. 도리언은 초상화를 마주 볼 수 없게 되고 추악하게 변해가는 자신의 내면을 보여주는 초상화를 오래된 공부방에 가두어놓기에 이른다.


동화처럼 돌아오는 내면과 외면의 자리.

이야기가 끝으로 갈수록 도리언은 나락으로 떨어진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그래서 읽는 과정에서 그 끝을 쉽게 예측할 수 있기도 하다. 하지만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 주는 의미는 단순히 정해진 순서에 따라 펼쳐지는 이야기의 전개방식에 있지는 않다. 어린시절 적어도 한 사람 이상의 눈길을 끌었던 그 동화 <행복한 왕자>를 지은 바로 그 오스카 와일드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서 나는 잠시 스스로의 오점을 바로 보지 못하는 사람들의 공포를 보았던것 같다. 어떤 두려움도 나 스스로의 잘못을 마주보는 것에 비하지는 못한다는 사실 말이다. 게다가 그것이 스스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가장 피하고 싶었던 스스로의 모습이라면 그 공포는 아마도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싶을 정도가 아닐까? 도리언 그레이가 자신의 실제를 대신에 변하는 초상화를 마주 보지 못했던 것은 아마도 그 공포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누구에게나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자신만의 치명적인 오점이 한두가지쯤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오점을 극복하는 가장 중요한 시작이 어쩌면 그것을 마주하는 것이라는 가장 간단한 진리가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 그려진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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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장으로의 초대 을유세계문학전집 23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박혜경 옮김 / 을유문화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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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생소한 이름의 작가, 그리고 처음 들어보는 제목의 책을 만나게 되면 가끔은 나도 모르게 위축되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비교적 익숙한 문화권의 책이거나 혹은 잘 알려진 작가의 책이라면 느끼지 않아도 될법한 이런 무게감들은 뭔가 책 안에 담겨 있는 내용이 아닌 그 이외의 것들이 책의 내용에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을 것 같은 소위말해 배경지식이 딸리는 현상에 대한 두려움이 아닐까? 물론 익숙하지 않은 문화권의 이야기라고 할지라도 온전히 그 안의 내용만으로 이야기를 완성하고 있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아마도 이런 공포는 잘 모르는 어떤 것에서 오는 자연스러운 두려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사형장으로의 초대>는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원인 모를 두려움을 한껏 업고 다가온 책 중 한 권이었다고 기억될 것이다

생소한 러시아의 문학, 그러나 그 안의 내용만으로 충분한 이야기를 전하는 소설.

<사형장으로의 초대>는 다행스럽게도 우리에게는 조금 어렵게 생각되는 러시아의 역사나 사회적 분위기를 이야기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요소로 포함하지 않는 소설이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러시아라는 단어에서 느끼는 조금은 몽환적이고 조금은 어리둥절한 그 느낌을 한껏 담고 있는 소설이기도 하다. 전혀 러시아스럽지 않지만 완벽하게 러시아스러운(물론 전적으로 개인적인 느낌이긴 하지만.) 이야기 <사형장으로의 초대>. 나보코프라는 작가의 가장 환상적인 소설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는 <사형장으로의 초대>는 과연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일까? 사형장이라는 사뭇 공포스럽고 두렵기만한 소재를 가지고 말이다


불투명한 죄인 친친나트

<사형장으로의 초대>는 친친나트라는 이 소설의 주인공이 사형을 선고받는 것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친친나트가 사형을 선고 받은 이유는 다소 당황스럽다. 현재의 법체계에서는 있을법하지 않은 죄. 바로 불투명한 존재라는 것이 이유가 된다. 불투명한 존재라니.. 도대체 그게 어떤 의미를 지닌 죄란 말인가? 친친나트가 살아가고 있는 곳은 모두가 투명한 존재로 규정되어진다. 모든것이 속이 환히 들여다 보이는 투명 유리관처럼 뻔하디 뻔한 것. 그래서 사람들의 생활과 사람들의 사고, 그리고 그들의 태도와 행동하나가 모두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같은 것을 투명하다고 규정하고 이러한 투명한 사람의 규정에 벗어나는 생각과 행동을 하는, 소위 창의적이거나 독창적이라 말하는 그들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일들을 하는 친친나트를 상대적으로 불투명하다고 규정해버린 것이다. 모두가 투명한 사람들로만 이루어진 마을에서 친친나트의 불투명함은 참아줄 수 없는 죄악이 되고, 이 죄가 친친나트를 참수형이라는 벌과 함께 죄수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완벽하게 비극적인 배경을 완벽하게 희극적으로 표현해낸 이야기.

<사형장으로의 초대>의 가장 주요한 무대는 사형을 언도 받은 친친나트가 사형이 집행되기를 기다리는 감옥이다. 그가 불투명함의 죄목으로 투옥되고 사형이 집행되기를 기다리며 감옥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지극히 비현실적이며 동시에 현실적인 모습들이 어지럽게 뒤섞여 보여지는데 여기서 비현실적인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과 현실적인 모습을 보이는 사람은 이상하게도 그 입장이 바뀌어 보인다. 우스꽝스럽고 말도 안되는 듯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죄인이 아닌 투명한 사람들이고, 언제 사형이 집행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런 상황들을 보며 나름의 평정을 유지하는 것은 사형집행일을 기다리는 사형수 친친나트인 것이다. 독창성이 결여된 투명한 사람들은 이제 곧 사형집행을 기다리는 사형수 친친나트를 향해 조롱과 비난을 멈추지 않고 친친나트는 자신의 사형집행일을 알려달라는 마지막 부탁까지도 외면당한채 환상과 현실, 거짓과 진실 그리고 투명함과 불투명함이 뒤섞인 어지러운 나날들을 유지한다

자유로운 인생을 그리는 친친나트의 마지막 탈출구.

<사형장으로의 초대>의 마지막은 친친나트의 사형집행으로 끝을 맺는다. 시종일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을만큼 어지러운 상황을 연출하던 이야기는 그 희극적인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정해진 시간을 따라 친친나트의 사형집행을 그려내고 친친나트는 그렇게 목숨을 잃는다. 일반적인 이야기라면 주인공의 이야기로 비극을 맞이하여야 하는 <사형장으로의 초대>은 그러나 이 비극이 친친나트 개인에게는 그만의 삶을 추구할 수 있는 탈출구라고 말한다. 불투명함을 죄로 치부하고 그만의 사고와 행동을 차단당한 곳에서 탈출해 불투명함을 투명함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자유의 그곳. 그곳으로 향하는 마지막 탈출구를 사형집행이라는 죽음의 단어로 알려주는 것이다. <사형장으로의 초대>을 읽는 동안 나는 이 독특한 이야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해 내내 고민했던 것 같다. 눈으로 보이는 환상과 사실의 어지러운 교차 뒤에 작가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라는 생각이 내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사형장으로의 초대> 마지막 줄을 읽자마자 책의 뒤에 첨부된 책의 해설을 꼼꼼히 읽어보았더랬다. 내가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 마치 모의고사를 본 고등학색이 답안을 맞춰보는 심정이었달까?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는 동안 이 책만이 가지는 환상적이고 다채롭지만 그래서 어지럽기까지한 복잡한 분위기로 인해 나와 같은 느낌을 받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점은 <사형장으로의 초대>안에 담긴 이야기는 죽음을 그린 것이 아니라 죽음 이상의 것을 그린것이라는 사실이다. 서로 투명하다 외치는 불투명한 세상에서 자신만의 불투명함을 투명함으로 받아들여주는 그곳. 그곳을 향하기 위해 죽음을 받아들여야 했던 친친나트의 물리적인 죽음이 그에게는 한편으로 새로운 탄생이 되었음을 그리는 소설. <사형장으로의 초대>는 그래서 해설의 어느 말처럼 형이상학적인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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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하는 사람
텐도 아라타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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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의 존재를 잊는 다는 것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나와 과거의 어느 한때를 나누어 가지고, 함께 웃고 울었으며, 때로는 신뢰하고 사랑했던 사람들.
오랜 시간을 살아온 것은 아니지만, 결코 짧다고도 할 수 없는 시간동안, 수 없이 나의 곁에 존재했다 사라진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애도를 해야 하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누군가가 죽은 것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이미 내 기억 속에 사라진 존재라면, 그들은 나에게 죽은 존재는 아닐까?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죽은 사람과, 그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도 남질 못하고 살아있는 사람 중 어떤 사람이 존재하는 것일까...

<애도하는 사람>을 읽어내려가며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다시 한번 곱씹어 보았다.
나도 모르게 잊어버린, 그리고 단 한번도 미안한 마음을 품지 않았던 내 기억 속에서 존재하지 않게 되어 버린 어떤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담았고 다시 한번 나에게 존재하는 이들을 떠올렸다. 내가 사랑한 사람들,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 그리고 내가 감사하고, 나에게 그런 마음을 품어주었을지 모르는 사람들에 대해서... 훗날, 그들을 영원히 존재하게 해줄 애도의 마음을 준비하기 위해.. 내가 그들을 애도하는 사람이 되어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애도하는 사람>에는 죽음에 대한 다른 시선을 가진 여러 인물들이 있다. 누군가의 죽음은 더욱 가치있는 것으로, 누군가의 죽음은 큰 의미가 없는 것으로 여기며 무심결에 죽음의 경중을 가늠하는 우리들처럼 어떤 죽음은 신문의 메인을 장식할만한 큰 뉴스거리로, 그리고 어떤 죽음은 그저 한토막 짧은 이야기거리로 나누어 버리는 주간지의 기자 마키노와 누군가의 사랑을 확인받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사랑을 소유하기 위해 사랑하는 이를 죽이고 그 자신도 죽음을 선택하려 하는 유키요, 그리고 누군가에 의해 의도된 것이 아닌 병마로 인해 이제 죽음을 맞이해야하는 준코,<애도하는 사람>의 모든 인물들은 죽음의 곁에서 죽음을 끝없이 맞딱드리고 지나치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들 중간에 단 한명의 사람, 누군가의 죽음을 끝없이 애도하며 그들을 기억하기 위해 끝도 보이지 않는 여행을 계속하는 한 사람. 시즈토가 있다.

누군가의 죽음을 잊어버렸다는 죄책감에 누군가의 죽음을 기억하기 위해, 그들을 애도하기 위한 여행을 시작하는 시즈토.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들의 존재가 스스로의 기억에서 사라져가고 있음을 고통스러워하고 그들을 잊지 않기 위해 시작한 그의 애도는 책을 읽는 내내 나에게도 의문을 가지게 했다. 누군가의 삶을 자세히 알지 못하는 이가, 그저 자의적으로 해석한 단편적인 이야기들만을 가지고 하는 애도가 죽은 이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으니까.. 누군가를 진심으로 애도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삶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누군가의 죽음을 진심으로 고통스러워 해야 비로소 자격이 생기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을 떨쳐 버릴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시즈토 스스로도 끝없이 했을 그 질문, 누군가가 애도하는 시즈토를 향해 비꼬는 듯 내뱉는 그 질문을 나도 끝없이 해대야 했다. 마치 시즈토의 애도는 실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말하듯 말이다.

<애도하는 사람>을 길에서 만난 수 없이 많은 사람들도 그에게 그런 말을 했을 것이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그리고 그런 이들에게 시즈토는 그저 병이라고 생각해달라 한다. 누군가를 애도하지 않을 수 없는 병.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해야마 하는 병. 죽음을 그저 기사거리로만 보아왔던 마키노에게, 스스로의 손으로 사랑하는 이를 죽였던 유키노에게 시즈토의 그 병은 같잖아 보였을 것이다. 하잖은 인생을 살다간 누군가를 애도한답시고 길을 걷는 시즈토의 모습은, 죽음의 무게를 달아 가치를 정하고 그 가치를 이용해 자신의 삶을 이어가는 마키노의 인생 전체를 조롱하는 모습이었을테니까.. 또 스스로 사랑하는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에 자신을 한 없이 끌어내리며 죽음만을 생각하던 유키노에게 생으로 돌아가라 말하는 단 하나의 몸짓이었을테니까..

시즈토는 그렇게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하며 걸어가지만 사실은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삶의 이유를 말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에게 기억되라고, 누군가를 사랑하라고, 누군가의 사랑을 받으라고.. 그리고 그것이 살아있는 것이라고, 그것이 존재의 진정한 의미가 아니겠냐고 말이다.

죽음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마키노와 죽음앞에 자신을 내어놓은 유키노의 변화는, 그래서 <애도하는 사람>안에서 준코를 통해 완성을 이루는 듯 하다. 제3자도, 상대방도 아닌 죽음 앞에서 당사자가 되어 죽음을 기다리는 준코. 병마 앞에 고통스러워하며 이제 죽음을 기다리고 있을만 누군가의 사랑을 받았고, 누군가를 사랑했으며, 누군가의 소중한 존재로 기억될 것이기에 죽음을 애도받고, 그 애도안에서 기억으로 영원히 살아있을 준코로서 말이다.


<애도하는 사람>의 모든 이들은 그렇게 죽음 앞에서 한번쯤은 제3자였거나, 상대자이거나, 당사자가 될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무심히 누군가의 죽음을 흘려버리고, 죽음의 경중을 달아 애도할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나누어 버렸던 모습도, 소중했던 누군가의 죽음으로 고통스러워하며 그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해 오랜 시간을 아파했던 모습도, 그리고 언젠가는 닥칠 스스로의 죽음까지도..

<애도하는 사람>을 읽어내려가며 그들의 이야기와 모습 속에서 때로는 누군가에게 잊혀진다는 공포를, 때로는 누군가에게 사랑받고자 했던 마음을, 때로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을 기억해 낼 수 있었다. 마치 길을 걷고 있던 시즈토가 누군가에게 나에 대해 물었을때, 그 누군가가 저 사람은 누구를 사랑했고, 누구에게 사랑받았던 사람이라고 대답해줄 답을 준비하듯이 말이다.

어쩌면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것은, 그래서 그 죽음을 슬퍼하고 죽음과 함께 그의 인생을 기억한다는 것은, 비로소 그 사람을 존재하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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