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베라는 남자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최민우 옮김 / 다산책방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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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쓴다면 이런 소설을 쓰고 싶다.

표현이 유쾌하면서도 인문학적인 요소도 들어가 있고, 감동도 있는... 따뜻한 소설

그래서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너무나 이런 작품을 쓴 작가가 부러웠고 이런 소설을 쓰고 싶어 계속해서 내 나름대로의 스토리 구상과 재미진 표현을 머리속에 그려보았지만, 머리 속의 생각들을 글로 쓴다는 것은 역시나 어렵다. 아직 시작도 못하겠으니...

'창문을 넘어간 100세 노인...' 작가에 이어서 이 책의 작가 역시 스웨덴 사람이다. 북유럽처럼 복지도 잘 되있고, 노후도 걱정 없는, 살기 좋은 나라의 작가들이 계속해서 베스트셀러를 만들고 있다. 그래서 '생활이 여유롭고, 별다른 걱정 없는(나름 다들 고민, 걱정은 있겠지만) 곳에서 살면 이런 상상력과 표현들이 나올 수 있는 것일까?' 하는 내가 소설 쓰는 것을 시작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 핑계를 대기도 한다. 시작할 용기와 집중력이 약한 나를 생각하지 않고..

 

항상 소설책을 읽다보면 다른 분야의 책들과 다르게 소설책을 왜 읽을까 계속해서 고민하게 된다. 이 책 역시 그랬다. 이 이유에 대해서 확실한 결론을 내진 못했지만, 이제까지 내린 나만의 이유를 정리하자면, '소설 역시 사람이 말하는 이야기고, 등장 인물에 빗대어 작가의 생각들을 공감할 수 있기 때문에 소설책 역시 인문학 책이다.' 라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생각지 못한 다양한 사람들의 내면의 스토리, 느낌들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해준 다는 것이다. 사람을 보는 시야가 넓어진다고 할까나.

 

이 책 역시 오베라는 남자에 대해서 끊임없이 생각하게 해 주었다. 다소 심술궂고, 무뚝뚝하고, 소냐 외에는 다른 사람과 친해질 필요가 없다고 느끼는 남자. 얼마나 까칠하고, 유별스러우면 책 제목까지 '오베라는 남자'라고 적었을까.. 우리가 흔히 남자친구가 유별나고 독특할 때 '너란 남자, 에휴!' 라고  말하는 이유와 같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기 시작하고, 중간도 가기 전에 오베라는 남자한테 푹 빠지게 된다. 왜일까?  오베라는 남자는 자신의 인생에 충실하다. 그리고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관만 바라보며 산다. 오로지 사브만 사랑했고, 스마트폰, 스마트키 따위는 전혀 사용하지 않았으며, 누구보다도 먼저 일어나 마을을 순찰하며 돌아다녔다. 다른 사람이라면 왜 이렇게 살아라고 할지 모르지만 오베만큼은 자신의 이런 인생을 사랑했다. 즉, 자기자신을 사랑했다. 자존감! 현대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감정이라고 '여덟단어'의 작가 박웅현 작가님이 말한 이 자존감이 오베에겐 있었다.

그리고 한가지 특이한 점은 열등감이란 단어를 이 책에서는 전혀 볼 수 없었을 정도로 스토리 속의 분위기가 다른 사람과의 비교는 결코 용납할 수 없다는 듯이 자유로왔다. 스웨덴이란 나라의 특성을 잘 볼 수 있었던 느낌이었다. 오베 역시 자신이 살아온 인생, 환경을 다른 사람과 전혀 비교하지 않았으며, 다소 지루할 수 있는 톱니바퀴 같은 반복되는 일상을 당연시하게 생각했다. 오히려 이러한 오베가 자유롭게 느껴졌다. 자신의 죽음을 선택하는데 아무런 망설임이 없을 정도로...

오베라는 남자가 더욱 사랑스러웠던 것은 오베는 한여자만을 사랑했고, 한여자에게만 자신의 내면을 보여줬을 정도로 순정파였다. 마치 한명의 주인만 따르는 강아지처럼... 그래서 소냐를 만나고 싶어 매일 자살을 시도하고(결국엔 못했지만), 매일 소냐의 무덤을 찾아가 꽃을 심어준 오베가 너무 좋았다. 마지막에는 다른 사람에게도 사랑을 베풀면서 이웃과 같이 살아가는 행복을 누렸다.  이러한 삶에 자신도 행복을 느꼈겠지만 무엇보다 소냐가 바랬을 것이라는 것을 오베가 알았기 때문이다.


이 소설을 표현하자면 오베라는 남자가 가지고 있는 매력에 푹 빠질 수 있었고, 감동도 느낄 수 있고, 무엇보다 따뜻하다. 그래서 정말 이런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지금까지도 너무 간절하다. 어서 빨리 시작해야겠다. 조금 조금씩!! (역시 마무리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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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러 심리학을 읽는 밤 - <미움받을 용기> 기시미 이치로의 아들러 심리학 입문
기시미 이치로 지음, 박재현 옮김 / 살림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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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러 심리학을 읽는 밤_기시미 이치로

아들러는 심리학자이지만 육아와 교육에 관심이 많다. 개인 구원, 인류 구원을 위해서는 육아와 교육이 바로 서야 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육아를 심리학적으로 풀어 아이와 같은 동등한 입장에서 대화하고 아이를 힘으로 대하기보다는 전폭적인 신뢰로 아이들을 대하라 이야기한다. 그래서 아들러 책은 아이를 (뛰어나게 키우는 것이 아닌) 올바르게 키우고자 하는 부모들에게 매우 유익한 통찰을 주는 것 같다. 아이의 자립심을 키우고 자신감을 갖도록 하며 자기 나름 의미를 부여해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자 한다.
그러나 아들러가 말하는 것처럼 실천하기란 쉽지 않다. `미움받을 용기`를 읽고 나름 정리도 해가면서 머릿속에 담아두고자 했지만 머리로 익힌 내용을 가슴으로 실천한다는 건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이제까지 잘못 살아온 습관들 때문에 막상 아들러가 가르쳐준 내 자신을 위한 행동, 생각들이 자연스럽게 나오지 않는다. 한편으로는 `인간의 본성` 때문이라는 핑계를 대고 싶지만 이 생각 자체가 아들러가 말한 원인론에 의한 잘못된 발상이기 때문에 그냥 내 자신의 실천력이 부족하다 생각하는게 마음 편한 것 같다. 여튼 쉽지 않다. 그래서 아들러는 이 또한 훈련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현재 나의 모습을 이해하고 건강한 생각을 하며 이러한 상태를 목표로 스스로 성장해나가면 언젠가는 아들러가 이야기한 용기들을 낼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1. 미움받을 용기

우리 인생은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나간다고 아들러는 이야기한다. 당연한 이야기같지만 정작 많은 사람들이 어려운 일에 직면했을 때 이를 피하는 경우가 많으며 남의 시선을 신경쓰기 때문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용기를 내지 못한다. 그래서 늘 남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신경쓰고 미움받지 않고 사랑해주길 바라기만 하며 그로인해 불행한 삶을 산다. 이를 위해서는 인생의 의미는 스스로가 부여하는 것이며, 다른 사람한테 미움받을 용기를 가져야 자유롭게 살 수 있다고 얘기한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은 뭘 해도 나를 싫어하게 되어 있으며, 이런 사람을 위해 내가 고민하고 끙끙거리며 애쓸 필요가 없다. 내가 좋다고 판단하고 행한 행위에 대하여 다른 사람이 싫어하거나 좋아하는 판단은 그 사람의 과제일 뿐이다. 나와는 상관 없는 것이다. 따라서, 나의 주관과 판단대로 행동하면 된다. 즉, 우리는 우리 인생의 주인공으로 자유롭게 살아가며 되며 그 과정에서 우리의 자유에 대한 책임만 지면 된다.
자유에는 반드시 책임이 뒤따른다. 우리가 자유롭게 자기의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그것에 동반하는 책임까지 짊어진다는 것이기도 하다. 내가 하고 싶은 일! 하면 된다. 하지만 그렇게 살게 됨으로써 겪게 되는 일들을 감내해 나가면 된다. 그러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의 등장도 받아들여야만 하고, 위험을 끌어안을 용기도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는 인생의 과제 앞에서 우리들은 대부분 그 과제로부터 도망치고 싶어한다. 두렵기 때문이다. 우리의 `체면`이나 `자존심`에 상처를 입을까봐 두려워 인생의 부름에 응답하지 않으려 한다. 혹은 응답하더라도 `만일 ~ 라면`이라는 조건을 붙여 인생의 과제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구실들을 늘어놓는다. 이를 아들러는 `인생의 거짓말`이라 부른다. 인생의 과제에는 용기를 내어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려 나서야 한다. 한 사람의 능력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크다. 이렇게 믿고 무슨 일이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부터 무엇이든지 시작해보길 바라며, `살아가겠다`고 선택하고 실천해가면 우리의 인생은 틀림없이 바뀔 것이라고 아들러는 이야기한다.

2. 평범해질 용기

`행복이란 무엇인가`,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해서 모두가 고민한다. 그리고 아이를 적절하게 교육하기 위해서는 이런 생각이 분명해야 한다. 아들러의 심리학은 뚜렷한 목표를 세우고 끊임없이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게 아이를 지원하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아이가 자립해서 사회와 조화롭게 살아가게끔 하기 위해서는 아이에게 적절한 신념을 키워줘야 한다고 말한다.
아들러는 기본적으로 우리는 누구나 똑같은 경험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즉, 우리는 객관적인 세계에서 살고 있지 않으며 그로 인해 `나는 능력이 있다`고 믿는다면 얼마든지 자신감을 가질 수 있다. 인생의 문제를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나의 능력이 있다`는 신념의 의미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렇게 믿는 것이 자신감을 갖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한다.
아들러는 아이들의 부적절한 행동에 대하여 부모나 선생님은 꾸짖거나 벌을 줘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벌주거나 모욕을 주면 아이들이 분발한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아이에게 용기가 부족한 상태라면 그저 아이들을 주눅 들게 만들 따름이라고 말한다. 벌주거나 꾸짖거나 비판하면 무엇보다도 서로의 관계가 나빠진다. 벌을 받는 아이는 자신에게 능력이 없다고 생각한다. 또 학교나 가정에서 자신이 있을 곳은 없다고 생각한다. 이유는 조금 지나면 또 다시 동일한 행동을 반복하며 주목받기를 목적으로 행동하는 아이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방식으로 주목하면 당연히 아이는 그 행동을 멈추지 않는다. 아이들이 부적절한 행동을 하는 이유를 원인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목적에서 찾아야 한다고 한다. 이유는 인간은 특정한 원인에 의해 떠밀려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추구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아이의 목적에 관심을 더 가져야 한다. 그래야 적절한 대처법이 나온다고 아들러는 말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 현명할까? 아들러는 부적절한 행동을 주목하는 대신 적절한 행동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 차츰 부적절한 행동을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가 자신에게 과제를 달성한 능력이 있다는 자신감을 갖도록 돕는 것이다. 그럴 때 아이는 용기를 가질 수 있다. 칭찬하거나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을 공유하면 된다. 결국 나의 마음을 전하는 것이 상대에게 용기를 안겨준다. 당연하다는 생각에 자칫 놓치기 쉬운 행동에 대해서 `고맙다`거나 `기쁘다`또는, `힘이 되었다`고 말하면 된다. 고맙다 또는 기쁘다, 도움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아이 존재 자체를 기준으로 현실 속의 아이를 보면 그 아이가 내 옆에 있는 주는 것만으로도 이미 기쁨이다. 그 아이의 어떤 모습이라도 좋게 보인다. 바로 그런 느낌을 아이에게 말로 전해주는 것이 용기를 주는 것이다.
용기를 주는 말을 건넬 뿐 아니라 아이가 자신의 힘으로 인생의 과제와 맞서도록 도와야 한다. 인생의 과제는 원칙적으로 본인이 해결하지 않으면 안된다.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돕거나 참견하는 부모가 있으면 아이는 어느 틈에 의존적으로 되어버릴 우려가 있다. 아이는 언제든지 자신이 곤경에 빠지면 부모가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아이는 자신에게 능력이 있다는 생각을 갖기 어렵게 된다. 부모는 아이가 결말을 체험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하며, 결말을 체험할 때 아이는 자신에게 능력이 있고, 사람들은 자신의 친구라고 느끼게 된다.
온화하다는 것은 힘으로 누르지 않고 끈기 있게 대화를 나눈다는 걸 의미한다. 단호하다는 것은 아이와 부모의 과제를 분리한 뒤, 아이가 스스로의 힘으로 과제에 맞설 수 있다면 불필요하면 개입은 하지 안흔다는 뜻이다.

3. 행복해질 용기

아들러는 심리학은 수직적인 인간관계가 정신 건강을 해치는 가장 큰 용인이라 지적한다.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지내기 위해서는 평범해질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자면 먼저 자신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게 바로 자기수용이다. 아들러는 ˝중요한 것은 무엇이 주어졌는지가 아니라 주어진 것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이다˝라고 말한다. 우리가 행복해지는 것은 의외로 간단하다. 우리는 자신을 바꾸려고 하지 말고, 자신에 대한 시점을 바꿔야 한다. `지금 이곳에서 살고 있는 자기 자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좋아하지 않고서는 행복해질 수 없다. 또한 주위 사람들을 신뢰할 수 있지만 그들에게 자기 자신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누군가를 돕지 않는다면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친구를 인정하고 그들과 조화를 이루며 그들을 위해 공헌할 줄 아는 자세를 배워야 한다. 비록 눈에 보이는 형태로 공헌하지 않더라도, 현재 도움이 되지 않더라도, 자기 자신은 누군가에게 힘이 된다고 느끼는 것 자체가 중요한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타인에게 공헌하는 것이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여야 하고, 다른 사람들은 적이 아니라 친구라는 것을 믿어야 하며, 스스로의 존재만으로도 다른 사람에게 공헌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들러의 책을 읽다보면 우리 자신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기 위해 많이 노력한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리고 인생의 주인공은 나이며 자신의 자존감을 가지기 위한 행동, 생각을 심어주려 한다. 세계의 중심은 내가 아니지만, 내 인생의 중심은 내가 되야 행복해질 수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나 혼자만의 인생이 아닌 다른 사람들과 공정해가며 내가 세상에 소속되어있다는 소속감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위한 삶, 즉 공헌하며 사는 인생이 행복한 삶이 될 거라 믿으면서 지속적으로 이 책을 참고하면서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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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열린책들 세계문학 2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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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_니코스 카잔차키스

`고전이란 이런 것이구나` 라는 것을 느꼈다. 솔직히 재미는 딱히 모르겠다. 줄거리도 별거 없다.
하지만 빠져든다. 그리고 위대하다. 여덟단어에서 박웅현은 고전이란 전세계 다수의 인간이 느끼는 근본적인 무언가를 자극하고 있다고... 그렇기 때문에 오랜시간 세월을 이기고 살아남았고 아직까지 사랑받을 수 있다고 얘기했다. 그리고 나는 이 말의 의미를 이 책을 통해 조금은 알 것 같다.

이 책의 주된 내용은 그리스 크레타섬에서 나(두목)와 책 제목의 조르바가 같이 생활하면서 나눈 대화들 그리고 주로 주인공(두목)의 사색을 위주로 진행된다. 그중에서도 나(두목)의 사색이 50%다. 이 책을 100% 이해하고 작가와 같이 공감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 약 10% 이해했으려나?) 소설 속의 주인공들과 같은 생활을 하기 전까지는, 아니 한다고 해도 이들이 느낀 감정을 전부 이해한다는 것은 힘들것이다. 그리고 작가 자신이 겪고 느낀 점을 이렇게 소설로 표현한다는 것 자체가 카잔차키스는 전재였고, 엄청난 예술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책을 이렇게 서평한다는 것이 내키지는 않지만 나름 책의 여백을 끼적거린 노력을 해보았고 이 노력을 써보려고 한다.

두 사람의 사상은 다르다. 작가(나)는 햄릿과 같은 사색형이다. 예를 들어
˝다른 정열, 보다 고상한 정열에 사로잡히기 위해 쏟아 왔던 정열을 버리는 것. 그러나 그것 역시 일종의 노예근성이 아닐까? 이상이나 종족이나 하느님을 위해 자기를 희생시키는 것은? 따르는 전형이 고상하면 고상할수록 우리가 묶이는 노예의 사슬이 길어지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우리는 좀 더 넓은 경기장에서 찧고 까불다가 그 사슬을 벗어나 보지도 못하고 죽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가 자유라고 부르는 건 무엇일까?˝ - 38p
이런 식이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이걸 우리보고 어떻게 이해하라고.. 100번을 읽어봐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반면에 조르바는 돈키호테와 같은 행동형이다.
˝내가 인생과 맺은 계약에 시한 조건이 없다는 걸 확인하려고 나는 가장 위험한 경사 길에서 브레이크를 풀어봅니다. 인생이란, 가파른 경사도 있고 내리막길도 있는 법이지요. 잘난 놈들은 모두 자기 브레이크를 씁니다. 그러나 나는 브레이크를 버린지 오랩니다. 나는 꽈당 부딪히는 걸 두려워하지 않아요(...) 밤이고 낮이고 나는 전속력으로 내달으며 신명 꼴리는 대로 합니다. 부딪쳐 작살난다면 그뿐이죠. 그래 봐야 손해 갈 게 있을까요? 없어요. 천천히 가면 거기 안 가나요? 물론 가죠. 기와 갈 바에는 화끈하게 가자 이겁니다˝ - 215p
조르바와 돈키호테와의 차이라면 돈키호테는 책을 너무 많이 읽어 미쳐 행동형으로 바꼈다는 것이고 조르바는 경험으로 모든 이치를 깨달았기 때문에 생각하기 전에 행동하라고 권한다는 점이다.

이들의 대화는 조르바가 경험을 토대로 책벌레로서의 나(두목)라는 인물을 못마땅해하면서 경험을 우선해보라는 식의 반복이다. 그리고 나는 조르바를 부러워하고 자신의 인생을 후회한다. 즉, 작가 자신도 사색 위주의 나란 존재보다 조르바같이 행동파를 좋아했을 것이고 그리고 당시의 그리스도 행동가가 많이 부족했던 것 같다.

작가는 인간이라는 존재, 그리고 육체 안의 영혼에 대해서 심히 고민을 많이 한 흔적이 남아있다. 인간이란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인가이 믿는 것이 무엇이며 종교를 가지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왜 믿음을 필요로 하는지에 대해서 고민하지만 조르바는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한다.

˝인간이란 짐승이에요. 짐승이라도 엄청난 짐승이에요. 당신에게 이 인간이라는것, 세상사라는 것이 너무 어려웠던 모양인데.. 내게 물어봐요. 짐승이라고 대답할게요. 이 짐승을 사납게 대하면 당신을 존경하고 두려워해요. 친절하게 대하면 눈이라도 뽑아갈 거요. 우리는 평등하다. 우리에겐 똑같은 권리가 있다. 이 따위 소리는 하면 안돼요. 그러면 당신에게 달려들어 당신 권리까지 빼앗고 당신 빵을 훔치고 굶어 죽게 할 거요.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아요. 오직 조르바만 믿지. 조르바가 딴 것들보다 나아서가 아니요. 내가 조르바를 믿는건, 내가 아는 것 중에서 아직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게 조르바뿐이기 때문이오. 내가 죽으면 만사가 죽는거요. 조르바가 죽으면 세계 전부가 나락으로 떨어질게요.˝ (82p)

어떻게 보면 조르바의 생각이 이기적인 것 같이 느껴진다. 하지만 조르바는 인간이란 존재는 하찮은 존재이기 때문에 나란 존재를 자연의 하나로 생각하고 다른 것들을 다스린다는 오만함에 빠져 있는 인간이 되기 보다는 나 혼자 살다가 죽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는 것 같다. (역시 나조차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진짜 어렵다.)

주인공은 행복을 갈망한다. 자유를 만킥하며 모든 순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사소한 일에서부터 행복을 느끼려고 한다. 이 책 전반적으로 지겹도록 행복을 갈구하고 좋은 생각들만 하려고 애를 쓴다.
˝나는 행복했고,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행복을 체험하면서 그것을 의식하기란 쉽지 않다. 행복한 순간이 과거로 지나가고, 그것을 되돌아보면서 우리는 갑자기 (이따금 놀라면서) 그 순간이 얼마나 행복했떤가를 깨닫는 것이다. 그러나 그 크레타 해안에서 나는 행복을 경험하면서, 내가 행복하다는 걸 실감하고 있었다.˝ - 98p

하지만 행복이라는 것은 사소한 일에서부터 오지만 우리는 이러한 행복을 느끼기란 쉽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힘들어도 웃으면서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한다. 하지만 영혼이 말해줄 것이다. 내가 행복한지, 행복하지 않은지... 나도 요즘 행복하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내 안의 존재는 행복하지 않다 얘기한다. 그래서 작가 역시 행복하다고 얘기하면서도 조르바를 부러워하고 있다. 말로는 행복하다 하지만 영혼은 행복하지 않은 것이다.

˝내 인생은 한 갓 낭비에 지나지 않는다. 걸레를 찾아 내가 배운 것, 내가 보고 들은 것을 깡그리 지우고 조르바라는 학교에 들어가 저 위대한 진짜 알파벳을 배울 수 있다... 내 인생은 얼마나 다른 길로 들어설 것인가! 내 오관과 육신을 제대로 훈련시켜 인생을 즐기고 이해하게 된다면! (...) 내 정신을 육신으로 채워야 했다. 내 육신을 정신으로 채워야 했다. 그렇게 하자면 내 내부에 도사린 두 개의 위대한 적대자를 화해시켜야 한다. (...) 진리를 발견한 사람은 조르바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는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 111p

인생을 즐기고자 한다면 내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그걸 우선 알아야 한다. 과연 조르바처럼 산다고 행복해질 수 있을런지..그냥 그가 멋져보이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작가도 망설이고 있는 것이고 나 역시 망설이고 있다. 뭐가 정답일지는 나의 선택에 의해 좌우되지만, 선택할 수 있는 용기란 쉽게 오지 않는다.

주인공의 아프리카에서 사는 친구는 편지를 통해 자신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이야기해준다.
˝나는 내 운명을 데려왔네, 운명이 나를 데려온 것이 아니네, 인간은 자기가 선택한 대로만 행동하네, 나는 내 운명을 이곳으로 데려와 노예처럼 일해 왔고 지금도 노예처럼 일하고 있네. 나는 땀을 흘려 왔고 한 양동이씩 앞으로도 흘릴 터, 나는 땅과, 바람과, 비와, 인부들과, 붉고 검은 노예와 싸우고 있네..
재미는 없네. 그렇지 한가지가 있을 뿐... 노동, 노동에는 정신적 노동과 육체적 노동이 있겠는데 나는 육체쪽이네. (...) 내가 돈의 노예가 아니라 돈이 내 노예인 것. 나는 일의 노예이며 내가 처해 있는 노예 상태를 자랑으로 여기네˝
이 친구는 자신의 인생을 노동과 함께 살리라고 선택했다! 우리와 같은 선택인 것 같다 느꼈다. 하지만 이 친구는 자기가 선택한 대로 운명이 자신을 따라왔다고 얘기했다. 우리는 내 운명에 의해 내가 이렇게 살고 있다고 느끼지만 이 친구는 반대로 이야기한 것이다. 인간은 자기가 선택한 대로 운명이 정해지는 것인지.. 아님 운명대로 자신이 선택하는 것인지.. (닭이 먼지인지.. 달걀이 먼지인지... )
이것만큼은 분명하다. 돈에 의해서 내 가치를 떨어뜨리지 말자! 돈이 나의 노예이고 돈에 의해서 좌절하거나 굴복하지는 않으리.. 그냥 적당히 있을 때 가장 행복한 법이다!

종교, 믿음이란 무엇일까? 믿음 하나로 사람을 살리고(죽이기도 하지만), 강하게 만들며, 희망을 준다.
여기서 조르바는 이야기한다. ˝믿음이 있습니까? 그럼 낡은 문설주에서 떼어 낸 나뭇조각도 성물이 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나요? 그럼 거룩한 십자가도 그런 사람에겐 문설주나 다름이 없습니다.˝
만사는 마음먹기 나름이라는 말이다. 내가 믿고자 하면 그건 믿음이 되는 것이고, 믿지 않고자 한다면 아무리 대단한 것, 좋은 것이라도 한낮 부질 없는 존재일 뿐이다. 옳고 그름이라는 것은 없다. 나뭇조각을 십자가로 본다고 이것이 틀린 것은 아니란 말이다. 사람이 생각하는 것들에는 옳고, 그름이란 없으며 이분법으로 따지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하지만 요즘은 이분법으로 생각하는 것이 편하기 때문에 옳고 그름으로만 따지려고 하는 것이 문제다. 많이 배웠다고 하는 사람들이 더욱 이러한 편견을 가지고 있다. 머리보다는 가슴으로 생각하는 법이 중요하다.

마지막에는 자유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조르바가 두목(나)에게 이야기 한다.
˝아니요. 당신은 자유롭지 않아요. 당신이 묶인 줄은 다른 사람들이 묶인 줄과 다를지 모릅니다. 그것뿐이오. 두목, 당신은 긴 줄 끝에 있어요. 당신은 오고 가고, 그리고 그걸 자유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당신은 그 줄을 잘라버리지 못해요. 그런 줄은 자르지 않으면....(..) 줄을 자르는 것은 어렵습니다. 아주 어려워요. 그러려면 바보가 되어야 합니다. (..) 인간의 머리란 식료품 상점과 같은 거예요. 계속 계산합니다. 얼마를 지불했고 얼마를 벌었으니까 이익은 얼마고 손해는 얼마다! 머리란 좀상스러운 가게 주인이지요. 이러니 줄을 자를 수 없지요! 아니, 아니야! 더 붙잡아 멜 뿐이지... 잘라야 인생을 제대로 보게 되는데..˝ - 429p

내가 얼마전까지 생각했던 부분이다. 우리는 자유로운 것 같지만.. 자유롭지 않다는...
조르바 말대로 줄을 끊어버려야지 자유로워지지만 그러기 위해선 용기가 필요하고 용기를 내기 위해선 남들의 시선따위는 안중에도 없어야하는 나만의 주체적인 시선이 필요하다. 이 책을 잃으면서도 하던 일을 모두 그만두고 여행을 떠나고 싶은 충동을 여러번 느꼈다. 하지만 나에게는 가족이 있고, 직장이 있으며, 사회라는 (안전하다고 착각하고 있는) 울타리가 있다. 과연 이 울타리를 벗어나 조르바와 같이 자유를 만킥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언젠가는 조르바와 같은 인생을 꿈꾸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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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봤어? - 내일을 바꾸기 위해 오늘 꼭 알아야 할 우리 시대의 지식
노회찬.유시민.진중권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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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봤어? 노회찬+유시민+진중권


노회찬, 유시민, 진중권 이 세사람이 모여서 책을 냈다고 한다. 뻔한 진보정치 얘기겠구나 싶었다.

진보 입장에서 민주주의 얘기하면서 보수가 집권하고 있는 정치얘기, 그리고 이명박, 박근혜 정부로 이어지는 답답한 권력, 편법, 왜곡 얘기겠구나 생각했다. 그래도 항상 이런 책이 끌린다. 왜 끌릴까? 내가 생각해서 내린 결론은 나는 과연, 진정, 이 사람들과 같이 현 사회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을 해봤을까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막상 내 머리속을 들쳐보니 아는 것이 아니것도 없었다. 그냥 이명박, 박근혜, 새누리당에 대해서 비판만 그럴싸하게 할 줄 알았지 왜 그들이 비판받아 마땅한가, 무슨 점이 문제인지,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 스스로에게 물어봤지만 스스로 답을 내릴 수 없었다. 그래서 이런 의문을 해결하고자 계속해서 이런 진보 성향의 책을 찾게 되는 것 같다. 그래! 까더라도 조금이라도 알고 제대로 비판해보자 라는 심정이었다.

차례를 펴서 봤다. 대한민국 문제점 중 14건의 반찬이 놓여져 있는 느낌이었다. 아주 먹고 싶은 반찬만 제대로 차려놓은 듯한 진주성찬이다. 교황 방한, 안보, 갑을관계, 부의 불평등, 유전자 조작, 극우/일베, 삼성, 원자력 발전, 북한, 교육, 연금과 의료민영화, 인간의 본성, 정치(총 14가지 반찬) 中 뭐가 가장 맛있고 제대로 씹을 수 있을까 살펴보았다. 뭐든 맛없는 것이 있으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곰곰히 생각해 보니 대한민국에 이렇게 많은 문제가 많다는 건데 정말 재미로 읽어야 하는 책인가? 하는 씁쓸함도 느꼈다. 그래서 이들은 얘기한다. 불평등이 심해지고, 초고령화 사회로 넘어가고 있는 지금, 이제까지와는 다른 행동과 사고가 필요하며, 오늘 우리가 가장 고민해야 할 것, 우리 세대의 손으로 해결해야 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같이 생각해보고자 한다.


"듣는 것이 없으면 생각하던 대로 살게 되고, 말하지 않으면 함께 잘사는 방법을 찾을 수 없잔하요. 듣지도 말하지도 않으면 그게 바로 눈먼 자가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무엇보다 내가 아프고 다치게 되고, 또 남을 해칠 수도 있잖아요. 그러니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어떤 문제가 우리의 미래를 좌지우지할지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합니다."


1. 교황과 미래의 지도자 : 이 시대에 필요한 은총은 뭔가요?


먼저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한국 방문한 역대 세번째 교황으로서 교황 방한이라는 것은 사실 국가 정부에게 절혼의 찬스라고 한다. 정치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기회로서... 하지만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은 성과가 별로 없었다. 이유는 다른 교황과는 다르게 교황 스스로가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메시지를 전하려고 하였으며, 사회 속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도록 주문하는 진보성향의 교황이었기 때문이다. 실례로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 말 중에 "살인하지 말라"라는 내용은 단순히 살인만 하지 말라가 아니라 온갖 형태의 살인, 예컨대 경제적 살인, 노동력 착취, 소득 양극화 같은 것들을 하지 말라는 뜻으로 재해석하였고, "새로운 형태의 가난을 만들어내고 노동자드을 소외시키는 그런 비인간적인 경제모델을 거부하기 바란다"라고 이야기를 하셨다. 그리고 "우리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손과 보이지 않는 힘을 신뢰할 수 없다. 시장 만능에 맡길 수 없다." 시장이 모든 걸 다 조화롭게 해주지 못할 거라는 말을 하신 사례도 있다.


우리나라에는 왜 이런 교황같이 따끔한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까? 아닌가?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만큼 영향력이 없는걸까? 고 김수환 추기경, 법정스님, 법륜스님과 같이 훌륭한 사람들이 많지만, 영향력은 희미하다. 종교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부정적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종교단체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적 도구로 전략함으로 인해 가치가 떨어지고 그로인해 사람들의 신뢰가 많이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여기서 교황 방문으로 느낀 것에 대해서 얘길 하는데 그 중 하나가 왜 정치권이 해야 할 일을 교황이 대신하느냐이다. 그리고 과연 교황이 오기 전에 한국 천주교는 뭘 했고, 타 종교들은 뭘 했으며 프란치스코 교황이 간 뒤에 한국에는 뭐가 남느냐라고 질문을 하였다. 즉, 한국 천주교 지도부는 그동안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뭘 했느냐라는 질책이 남는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의미는 무엇인지 알아보았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물질적인 재산을 포기하고 평생 가난한 삶을 살겠다고 한 이탈리아의 성인이며,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출당시 교회를 가난하게 만들겠다, 전쟁에 반대하겠다, 이웃 종교와 화해하겠다라는 가치관으로 교황 266명 중 단 한명도 선택하지 않았던 '프란치스코'성인이름을 택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청와대 연설에서 이런 말씀을 전했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더욱 강화되기를 바란다" 이런 사실 아주 평이한 문장이지만, 정부 입장에서는 엄청 불쾌한 발언이라고 한다. 평범하면서도 폐부를 콕콕 찌르는 말이다. 대한민국이 민주주의이지만 현재 민주주의 정신이 보수진영에 의해 쇠퇴하였고, 세월호와 같이 학생뿐만 아니라 국민들까지 많은 피해를 보고 있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나 싶다. 교황이 아니면 이런 말을 대한민국에서 과연 누가 할 수 있으랴. 생각해볼만한 얘기이다.

하지만 교황이 방한했다고 해서 해결되는건 없다고 한다. 잠시 위로받을 수는 있겟지만 해결되는 문제는 없으며, 결국 우리 스스로 판단하고 필요한 행동을 하고 다른 사람 손을 잡고 문헤 해결을 위해 일어서야 한다고 한다. "한국인들은 슬픔으로 하나가 된다" 세월호 사건을 가리키는 발언인데 "이제 연대해라. 슬픔을 느끼는 사람끼리 손을 합쳐라. 그 무관심의 세계와 맞서서 연대의 세계화를 해라"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해줍니다. 결국 우리가 해결해야 합니다. 우리는 누군가가 짠 하고 나타나서 이러한 문제를 속시원하게 해결해주기를 마냥 기다리고만 있진 않은가? 스스로 직접 해결하려는 노력 없이 영웅만 기다리고 있진 않나 생각해본다. 교황 방문 역시 위로는 될 수 있지만 외로에 대한 해결은 직접해야 한다. 우리 나라 국민 모두가 세월호 가족의 아픔 등과 같이 슬픔을 서로 공유하고 우리 자신이 또 다른 교황이 돼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2. 구시대적 안보의 한계 : 전쟁 없는 70년, 끝까지 갈 수 있을까?


이번 장은 "지금 우리는 '우리나라'를 잘 지키고 있는 것일까요?"에 대한 질문이다. 한반도를 둘러싼 중국과 일본, 미국의 파워 게임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으며, 잊을 만하면 강력한 한 방을 선사하는 북한까지 샌드위치 신세의 한국이다. 공격 없이 당하기만 했던 옛날 시대와 별반 차이가 없어보이는 지금이다. 요즘 대한민국은 안보가 안보인다고 한다. GOP 총기 난사 사건부터 군 기강이 많이 해이해졌으며, 장병들 역시 자신의 역할에 대해 제대로 긍지와 사명을 가지고 훈련할 수 있는 병영문화가 조성돼어 있지 않다고 합니다. 또한 먹고, 입고, 자는 문제부터 개인 장구류까지 25년전하고 거의 변한게 없으며, 전방에서 근무하는 일선 전투원들의 생명 가치가 총체적으로 경시되어 있다고 합니다. 실제 전쟁이 일어나면, 제1방어선인 알파선 방어에 전방 병력의 40%가 괴멸되며, 30만명이 전방에 깔려 있고 15개 사단이 있는데, 제1방어 시에 대부붕니 희생됩니다. 이렇게 자신의 생명 가치가 경시되는데 당연히 고립감이나 반발심이 생기지 않겠냐는 거다. 그리고 철책선 부근에 과학 장비를 동원하는 전근대적인 경계방식을 개선하기로 했지만 전혀 진척되고 있지 않으며, 현재 경계방식은 한국전쟁 이래로 한 번도 변한적이 없다고 한다. 정해진 시간마다 초소를 이동하는 방식인데 이미 인민군들이 다 안다고 합니다. 그리고 현재 방식대로라면 전방의 초기 전투에서 40%가 손실된다고 한다. 이건 예측치고 전문가들은 70%까지 보며 거의 다 손실되는 수준이다. 왜 이렇게까지 전방에 많이 배치해서 많은 사상을 자초하느냐? 이게 이상하다는 거다. 하지만 부유층 권력을 자제는 전방으로 안보내는 문제에 대해서도 당연히 지적합니다.


우리나라 정전 협정은 세계적으로도 유일하게 성공한, 의미 있는 정전협정입니다. DMZ가 이렇게 유지, 관리되고 정착된 것은 성공적인 전쟁 예방 장치가 기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거죠. 그런데 정전 협정이 이뤄지지 않은 곳이 문제가 된다고 한다. 바로 NLL! 바다 위! 이런 곳은 도리어 분쟁적인 요인이나 성격이 점점 커졌으며, 해상 경계선을 정전 협정 체결 당시 합의하지 못했고, 아직 게임의 규칙이 정해지지 않은 곳입니다. 북한이 보기에는 우리나라 서북 해역의 5개 섬 일환을 감싸고 있는 NLL이 사실상 북한에 대한 봉쇄선일 뿐만 아니라, 유사시에 군사적으로 압박하기에 굉장히 유리한 공간이라고 합니다. 북한 입장에서는 성가신 지역인데 해주와 남포는 NLL 때문에 완전히 갇혀버렸으며, 이 지역이 장차 북한과 개혁 개방을 이끌고 변화시킬 때 관문을 담당하는 지역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NLL을 군사적으로 처리할 것이냐, 아니면 평화적이고 경제적으로 처리할 것이냐, 두 가지 관점이 있습니다.


 원래 NLL은 공동 어로 구역이었다고 합니다. 북한이 어업을 하던 곳으로서 NLL 자체는 암묵적으로 동제해온 선일 뿐이었는데 어느 날 이것이 남북 경계선이 됐다고 한다. NLL이라는 거 자체가 북방한계선이란 의미로 북방한계선은 북쪽으로 더 올라가지 말라는 선으로서 북방한계선의 의미는 우리 해군하게 어선 사이에 지킬 거냐 말거냐가 문제가 되는 선이지 북한보토 남쪽으로 더 내려오지 말라는 선이 아닙니다. 즉, 이 지역은 남북한 사이에 합의가 안된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남측에서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다고 합니다.


현재 남북한 평화 협력은 물 건너가서 사실은 동결된 상태로 자주 국방 문제, 전시작전권 회수는 계속 연기되고 있습니다. 보통 같으면 권하을 주겟다고 하면 받으면 되는데, 우리나라 군은 계속해서 거부하고 있습니다. 전시와 평시의 지휘권이 다르다는 건 세게적으로도 없는 사례입니다. 이건 독립국가로서의 명예와 자부심이 관련된 문제로서 만약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나서 전시작전통제권을 가진 미국 사령관이 일본 자위대 사령관한테 군대 좀 보내달라고 하면, 우리 정부나 국민의 의사와 상관없이 일본군이 한반도에 올 수 있다는 말이다. 이유인즉슨, 전쟁 수행 체제를 보면 일차적으로 한미 연합 사령관이 한반도 전구 사령관이 됩니다. 그러면서 유엔군 사령관을 겸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유엔의 권위로 전쟁을 하는 체제이다. 그런데 지금 하와이 뿐만 아니라 일본에 유엔의 후방 기지가 일곱 군데 있습니다. 모두 유엔 한미 연합 사령관이 통제하는 기지로 전쟁이 일어나면 이곳을 동원해서 작전을 지휘하는 것으로서 실제 한미 연합 사령관은 에윤군 사령관 권위 없이 한반도에서는 전쟁을 못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전쟁시 일본에서 지원군이 온다는 이야기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전쟁이 선포됐는데 그 급박한 순간에 한국 대통령 또는 우리 합참의장이 '일본은 못 오게 해'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작전권이 없는 나라는 지구상에 우리나라 밖에 없다고 합니다.


2014년 한중 정상회담때에는 중국에서 굉장히 큰 성과를 거뒀다고 좋아했습니다. 한반도에서의 지정학적 충돌 조짐으로서 한미일 군사동맹이 이렇게 강화되고, 일본이 이야기하는 집단 자위권인 '집단방위'가 용인되고 있는 걸로 봤을대는 이건 명백히 중국을 견제하는 것이라 합니다. 중국은 한미일 동맹 중에 제일 약한 고리가 한국이라고 보며 이왕이면 이탈해줬으면 좋겠다는 중국의 희망적 사고가 있는 것이죠. 이런 의도가 한국에게 매력적인 외교 공세로 나타난 겁니다. 외교 공세를 듬뿍 뿌려서 중국이 일본을 견제하는데 한국이 보조를 하게 되는 거죠. 이렇게 중국에서 한국을 위해 무엇이든지 다 해주는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시진핑 주석이 2014년 방한하면서 얻은 최대의 성과는 박근혜 대통령으로부터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에 대해 우려한다는 발언을 이끌어낸것이라고 합니다. 집단적 자위권이 동아시아 정세 변화의 핵심 의제인데, 이 부분에서 한국과 인식을 같이 했다고 볼 수 있죠. 그래서 미국이 굉장히 불편해했죠. 결국 동아시아 국제무대에서 대한민국의 몸값이 지금 굉장히 올라가고 있는 것 같은데 이건 정말 좋은 기회라고 합니다. 즉, 우리가 한반도 주변 정세를 주도하면서 우리 운명을 개척해 볼 수 있는 기회죠. 하지만 일본의 집단 자위권 행사를 묵인한다면 동북아의 신질서 구축은 퇴행적 방향으로 굳혀 나갈 것이고, 그러면 호기가 위기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3. 땅콩과 실세 : 왜 우리는 작은 권력에만 분노하는가


'갑을 관계' 대한민국 사회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모두 겪어봤을 권력자와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하는 말입니다. '갑'들에 의해서 '을'들이 당하는 내용을 얘기하고자 합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사건이 '십상시의 난'과 '땅콩 회항'인데 자기 손에 주어진 권력을 마구 휘두르려 했던 이들의 면모를 되짚어보면서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일명 '십상시의 난'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청와대 문건 유출사건으로 청와대 외부의 측근들이 국정에 개입했다는 의혹을 보도한 것입니다. (이사건은 읽어봐도 머릿속에 안박히더라구요. 관심이 없어서 그런가?) 이들이 하는 이야기를 정리하자면 유능한 리더십이 국민에게 더 확실한 책임을 지기 위해서는 다양한 비선조직들(외부 측근들)을 가동할 수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질문이 들어옵니다. 대통령에게 비선 조직이 있느냐 없느냐가 논란인데, 비선 조직이 있으면 안 되는 것인지. 또는 비선 조직을 원래 갖고 있어야 되는 것인지 묻습니다. 문제는 비선 존재 자체가 아니라, 비선이 단순히 한 개인이 아니라 팀까지 운영했고, 그 팀에서 주요한 결정들이 많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이중 권력처럼 이중 플레이를 한거죠. 여기서 중요한 것은 결정권자가 자문 그룹과 공식 그룹 사이에서 어떻게 행동하느냐이며 공적 권력을 가진 이가 공적 절차를 중시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이야기합니다. 공적으로 공표될 일은 공식 라인을 통해서 할 때, 그 결정이 힘이 생기고 이것이 권력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한가지 더 이야기 하는데 권력자의 측근 사이에 경쟁, 갈등, 암투가 있는건 당연하지만 문제는 뭘 가지고 싸우느냐입니다. 국민 행복도를 높이는 방법은 뭔지, 어떻게 하면 대통령을 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을지를 가지고 다투는 건 정말 바람직한 일이지만, 그런 국정 운영의 방향성 때문에 다툼이 생긴 게 아니라, 자신들의 자리다툼 때문이라면 문제가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비선 조직이 있어야 한다고 보며, 노무현 대통령도 같이 담배 피우는 비선 조직이 있었습니다. 리더란 측근들이 이야기하는 것 안에서만 뭔가를 결정하는게 아니라, 다양한 채널들의 입장을 폭넓게, 다양하게 검토하고 판단해야 하는거죠. 사적 라인이 공적 라인과 정상적인 시스템을 망가뜨리지 않는다는 가정하에서... 비선 조직에 대해서는 찬성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실세들이 권력자를 잘못된 방향으로 흔들고 있는게 문제인데, 문제는 대한민국에서 권력이 행사되는 방식을 보면 비밀주의 방식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대통령에게 몰려 있던 권력을 국무총리에게 배분해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대통령의 공약이기도 했죠.


둘째로는 조현아 대한항공 부사장의 땅콩회항사건입니다. 이 문제는 조현아씨가 회항시킨 것에 대한 잘못도 분명히 있지만, 그 후의 대한항공의 행동입니다. 대한항공에서는 이 시건을 완전히 은폐하려고 했습니다. 초기에 직원들을 단속해서 밖으로 사건이 새지 않도록 하려다 문제가 불거지고, 결국 국토부 조사까지 갔죠. 이후 검찰 압수수색, 구속으로 연결된 건데 국토부 직원이 옛날 한진지원이었다는 이유로 처음에는 국토부 조사도 우습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잘못은 조현아씨가 했는데 그 책임은 승부원들에게 맡겨놓고 발뺌하고, 사측에서는 사주 딸의 잘못을 덮기 위해서만 애썼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죠. 조현아씨의 생각은 이건 우리 비행기고, 나는 부사장이고, 여기 있는 승무원들은 우리 회사 종업원들, 머슴들이고, 그런데 나한테 충분히 굽신굽신하지 않았으니 욕도 좀 하고 책자로 꾹꾹 찌를 수도 있지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노동력을 샀다는 이유로 상대의 인격까지 산 것처럼 모독을 했습니다. 그런 의식은 전근적이고 헌법 이전의 현상입니다.


여기서 또 다른 문제에 대해서 이들은 이야기합니다. 쌍용차 해고 노동자 얘기인데요, 모두들 조현아 씨 사건을 보면서 분개하면서 수백 명의 가장들을 한꺼번에 해고한 이 사건에 대해서는 분개하지 않을까?라고 얘기합니다. 이 두사건은 다른 봉우리처럼 보이나 물 밑에서는 연결되어 있는 사건이라고 합니다. 일하는 사람이 제대로 대접 못 받고 차별받거나 인간 이하의 처분을 받는 것, 이게 두 사건을 관통하는 맥인거죠. 사람들의 인식은 정리해고와 같은 큰 문제는 이데올로기적으로 당연한 것으로 경제 성장을 위해서 감수해야 하는 일처럼 흘러가고 있습니다. 조현아씨 사건으로 흥분한 언론 중 적지 않은 매체에서 싸용차 정리해고는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는 것처럼 외쳤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사소한 일에만 분노하는가? 이게 이 문제의 핵심인데 우리 각자의 가치관, 마음, 감정이 무너지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크게 화내야 할 때는 화도 좀 내고 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말이죠. 우리는 왜 그런 갑을 관계에 대해서는 침묵하는가, 왜 분노하지 않는가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 각자의 가치관이 세워지고 할말을 한다고 해서 사회가 바뀔지 의문입니다. 솔직히 나 자신도 바꾸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물며 이 사회는 어떨까요? 한번에 많은 것을 바꾸려고 하는 것은 허황된 욕심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사람, 한사람이 생각하는 사회를 만들고 조금씩 천천히 바꿔나갈 때 더 좋은 세상이 될 거라 믿습니다. 갑을 관계에 대한 사회문제 역시 이러한 아픔과 고통으로 인해 조금씩 변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희망을 가져봅니다. 안아프면서 고쳐나가는 것이 제일 좋지만 그것 역시 쉽게 배부르자는 욕심인 것 같아요. 모두가 다 알지만 한강의 기적과 같이 대한민국 경제는 단시간에 많은 사람들의 노력에 의해 고속으로 성장해왔습니다. 하지만 경제와 다르게 사람들의 인식 가치관을 바꾼다는 것은 훨씬 어렵다고 봅니다. 특히, 배부르다고 너무 빨리 먹다가 체하듯이 너무 빠르게 올라왔기 때문에 현재 많은 문제점이 나오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앞으로는 한강의 기적같이 기적을 바랄 것이 아니라, 민주화 운동,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인식을 바꾸는 운동은 체하지 않도록 천천히 해결해야 한다고 봅니다.


4. 피케티와 부의 불평등 : 21세기 자본은 어디로 가는가


이번에는 경제와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21세기 자본'의 저자 피케티의 내용에 대해서 자주 나오는데 피케티의 주요 주제는 불평등 문제라고 합니다. 피케티 이야기로 넘어가기 전에 이들은 세금 얘기로 시작을 합니다. 정부가 세금을 올리는데 증세는 아니라고 말하고 있죠? 술마시고 운전은 했는데 음주운전은 아니다! 담배를 예로 들면 만약 8천원으로 올린다고 보면 사람들이 담배를 분명 끊을 것이고 조세 수입을 줄 것이다.라는게 정부의 계산이예요. 그래서 조세 수입이 최고가 되는 가격, 즉 올려도 끊지 않을 적정선을 계산한게 4,500원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정부는 국민 건강을 위해서 정한 가격이라고 말하고 있죠.


다음은 확장 정책에 대한 내용입니다. 경제가 굉장히 나빠진다고 판단하고 확정 정책을 쓰고 있는데 자세히 보면 건설과 관련된 예산이 많이 늘고 복지 예산은 그리 크게 늘지 않았습니다. 2015년 총예산이 376조인데 이 예산에는 4대 연기금 지출(국민연금, 공무원연금, 우체국보험, 사학연금) 117조가 포함되어 있는 금액이기 때문에 순수하게 정부가 쓰는 예산은 약 260조 정도밖에 안된다고 합니다. 여기서 적자가 25조원 그리고 세계 경제가 나빠지고 있어서 재정 적자가 더 심해질 것으로 예상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지출을 줄여야 합니다. 세월호 사고 이후에 안전에 관한 지출을 늘려야 한다는 이야기가 많았는데, 지금 예산안에는 그런 내용이 거의 없습니다. 문제는 경제가 나쁘면 정부가 지출을 늘리는게 맞다고 합니다. 경제가 나쁜데 재정 균형을 맞춰야 한다고 오히려 지출을 줄이다보면 경제 전체가 정체되는 상황도 벌어집니다. 오바마 정부가 그랬죠. 문제는 세금 인상으로 늘어난 세수가 어디로 가느냐입니다. 저소득층의 소비가 늘어나도록 하기 위해서는 이들에게 세수가 가야 경기가 살아나는데 오히려 주식 배당에 대한 세금도 분리과세를 해서 부자들의 세금은 줄여주고, 담뱃값, 지방세, 인두세 같은 걸 늘려서 세수를 메우려다 보니 문제가 된다고 합니다.


본격적으로 피케티의 대한 내용으로 들어가면 피케티가 말하는 불평등 구조를 결정하는 요인을 세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합니다. 첫째, 소득과 부의 불평등에 대해서 그 시대 사람들, 오늘날의 사람들이 어떤 인식과 태도를 가지고 있느냐, 둘째,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집단 중 어느 쪽이 힘을 가지게 되느냐, 셋째, 사회제도가 어떤 역할을 하느냐 입니다. 이말은 결국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에 정치가 매우 큰 역할을 한다는 겁니다. 피케티는 부동산 뿐만 아니라 금융자산을 비롯하여 모든 자산에 1%씩 전 세계가 똑같이 세금을 물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피케티의 연구에서 중요한 점은 바로 세금 자료를 이용했다는 겁니다. 대부분의 조사는 센서스 자료(표본을 정하고 그 표본에 등러가 있는 사람들에게 직접 상세하게 모든 걸 물어보는 조사)를 바탕으로 함으로써 보통 상위권을 과소평가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세금 자료를 바탕으로 하면 상당히 정확한 데이터가 나오죠. 가령 영국의 센서스 자료에 의하면 영국의 상위 10%의 자산이 전체 자산의 44%를 차지합니다. 그런데 피케티의 자료에 의하면 상위 10%가 점하는 자산이 전체 자산의 71%입니다.


그리고 피케티는 이런 배경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세가지 정도로 요약했습니다. 첫째로, 세습자본주의가 다시 시작될 가능성이 있다. 부는 아래 세대로 물려주게 되는데 부가 상위 1%, 10%에 심하게 집중돼 있으면, 각 개인의 출발점의 차이가 너무 커진다는 겁니다. 또한 자본주의를 유지하는 건 민주주의라는 정치제도인데, 이 민주주의가 약화됩니다. 돈이 집중되면, 그에 따라 권력도 집중되죠. 그러면 돈을 가진 이들이 의회를 장악하고, 자신들을 위한 법을 통과시키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민주주의는 형식적으로 유지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나라도 이미 TV드라마나 문화현상 속에 이런 세습자본주의, 상속자본주의 증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집 한채 사려면 평생 일해야 하는 시대에 더 나은 생활수준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이 상속밖에 없는거죠.


두번째로는 부의 집중 문제인데 '자본수익률 r(부자들이 얻는 이익이 늘어나는 속도)과 성장률 g(국민이 얻는 소득이 늘어나는 속도)의 격차가 커질 수록 부의 불평등이 심화된다'라고 했습니다. 이 격차가 줄어들어야 좋은 것이고, 이 격차가 벌어지면 벌어질수록 자산 집중, 소득 집중이 심해집니다. 주목해야 할 점은 인구가 줄고 있다는 거예요. 잘못하면 인구 증가율이 마이너스로 갈 수 있는데 그렇게 되면 g가 점점 낮아지게 된다는 거죠. 그런데 자산수익률은 역사적으로 보면 5~6%정도로 일정했습니다. 이유는 식민지를 통한 부의 축적, 현대로 보면 금융업에서 파생상품 등을 통해 돈을 버는 것등이 이유입니다. 사실 이건 가난한 이들의 돈을 뺏어가는 일로 이렇게 r은 일정하게 유지되는데 g는 떨어지면 부의 집중이 더 심해질 것입니다. 부와 소득의 불평등을 확대시키는 힘이 기본적으로 자산수익률이라면, 국가적으로 이 동력을 약화시키지 않을 경우 사회적 불균형을 막기 힘들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갖가지 복지 정책이 있을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자산에 대한 과세를 높여야 실효적으로 격차가 줄어든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피케티는 글로벌 자산세를 도입하자는 말까지 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시장조정에 대한  얘기인데 시장 조정은 임금 소득이 시장에서 분배된 다음에, 세금을 물리자는 내용입니다. 우선 노동자들의 임금이 올라가면 격차가 훨씬 줄어들 것이고, 그 후에 세금을 높에 매기자는 거죠. 사회적 불균형이 적었을 때를 보면, 역사적으로 노동조합 조직률이 확대되는 등 노동 쪽의 힘이 강했거든요. 이를 달리 말하면 소득주도성장이라고 합니다. 우선 시장에서 노동자들의 몫이 늘어나고, 이미 생겨난 불평등을 그 후 세금으로 다시 교정하자는 겁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엄청난 격차가 순식간에 일어날 수 있죠. 한국은 임금이 올라가야 성장하는 나라라는 객관적이 결과가 나왔듯이 이런 내용을 주류경제학자들이 알아야 한다고 얘기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 나라에서는 어떤 식으로 이 기획을 실현해나갈 수 있을까요? 이들이 얘기하기로는 먼저 재산세 자료를 통해서 우리가 어떤 상황인지를 먼저 밝혀야 한다고 얘기합니다. 심각한 불평등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국민들이 의견을 주고 받게 되고 그것이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선택과 행위들을 결정하게 되죠. 이 불평등이 노력으로 극복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하면 생각이 바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현재 우리나라는 거꾸로 가고 있습니다. 부동산 가격을 높이겠다고 한다는 것이 불평등이 심화되는 쪽으로 가고 있다는 겁니다. 자본주의 붕괴론에 초점을 맞추면 일상의 정치적 행위가 의미가 없게 됩니다. 붕괴를 기다리지 말고 민주주의를 통해서, 정치적 행위를 통해서 자본주의를 수정해나가야 한다는 것이 서유럽 사민주의 정치운동을 방향이었습니다. 피케티처럼 데이터의 힘을 믿고 우리나라 경제학자들과 경제 정책을 만드는 이들이 이런 태도를 가졌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7. 포스트 스마트 시대와 삼성 : 우리 모두 국민 기업 지킴이가 됩시다 


삼성은 우리나라의 최대 기업 중 하나이자, 경제에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최근 이건희 회장이 쓰러진 이후 많은 분들이 삼성의 위기론이 얘기하고 있으며, '삼성 우위'가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고 하는 시각도 많습니다. 그래서 대변혁 없이는 살아남기 힘든 위기까지 왔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고, '삼성이 망하면 대한민국이 망한다'고 하면서 삼성이 잘돼야 한국 경제도 살아날 수 있다는 얘기가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현실적으로도 2013년 삼성그룹 계역사가 올린 단기 순이익의 합이 재계 2위부터 9위까지의 기업이 올린 단기 순위익의 합보다 클 정도로 삼성의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비중이 큰 기억이기 때문에 이 기업이 장기적인 전망을 가지고 발전을 할 수 있느냐가 우리 국민경제 전체로 봐도 매우 중요합니다. 특히, 경영권 교체 과정에 있기 때문에 국민들의 관심이 집중될 수 밖에 없는 현재입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정경유착의 우산 아래 누적된 나쁜 관행을 혁신시키는 것이 주용하며, 사회적 책임을 다하도록 해서 국민에게 사랑받는 기업으로 만들어가도록 이끌어야 한다고 이들은 이야기합니다. 누군가는 일관성 있게 집요하게 쓴소리르 해줘야 하고, 쓴소리가 약이 될 수 있도록 애정과 관심을 집중해야 합니다 . 현재 아무도 상황을 모르기때문에 삼성의 미래에 대해서 우리가 지나치게 낙관하거나 비관하는 건 좋지 않습니다. 단, 굉장한 불확실성 속에서 3대 세습 체레로 넘어가고 있기 때문에 이럴 때일수록 더욱 기업 내외의 시장 조건이나 국제 경제 환경의 변화, 국내의 정치 질서나 사회 문화의 변화까지 받아들이면서 발전해야 합니다.


현재 삼성이 처한 중요한 세가지 문제가 바로 승계문제, 노사관계 문제, 그리고 하도급 간의 문제입니다. 승계문제에 대해서는 보험업법에 대한 얘기가 먼저 나옵니다. 현재 보험업법 감독 규정을 보면, 모든 금융기업이 계열사 지분을 가질 시 모두 시장가격으로 하고 있지만 이 보험업법에 대해서는 시장가격이 아닌 취득원가로 계산되도록 돼 있습니다. 이러한 규정으로 인해 삼성은 약 15조원에 대한 지분을 팔아야 하는데 보험업법에 대해서 취득원가로 하도록 되어있다보니 유지되고 있습니다. 즉, 삼성을 위한 특별 맞춤 제작된 법이라는 거죠. 그래서 현재 국회에 보험업법 개정안이 제출된 상태라고 합니다. 국회가 이 버험업법 개정을 좀 서두르면서, 이재용 회장 체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정경유착의 나쁜 관행들을 개선하도록 압박해야 한다고 합니다. 문제는 이병철, 이건희  회장 체제까지는 자본 소유자로서의 의만 행사하는 게 아니고 사실상 모든 계열사의 경영을 지배해왔습니다. GDP의 18%나 차지하고 있는 삼성 같은 기업이 가족 경영의 개념을 벗어나지 못하는 건 위험한 일입니다.


스웨덴의 발레베리 기업의 경우 5대째 이어지고 있는데, 이들은 노동조합부터 인정하고 노동조합 대표를 이사회에 참여시키고 있습니다. 즉, 가족들 마음대로 움직여온 기업이 아니라고 합니다. 발렌베리 가에서는 "소유는 특권이 아니고 책임이다"라는 철학이 있습니다. 삼성이 우리나라 기업 총 매출의 5분의 1을 차지하는데, 이게 잘못됐을 때 국민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엄청 크죠. 그러니깐 우리가 개입해야할 권리가 있는 책임이 있는 겁니다. 삼성이 발렌베리를 벤치마킹하려면 우선 노동조합을 인정해야 합니다. 발렌베리가 소유를 사회에 환원하고 노조의 참여를 통한 투명 경영을 약속하는 대신, 경영권을 보장해주겠다는 사회적인 합의가 성사되었고 스웨덴은 이를 계기로 복지국가로 나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습니다. 따라서 지금 삼성의 노조 탄압이 주는 주요한 사회적, 국가적 이슈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라고 봅니다.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려면 효율적인 전략적 투자를 담보하는 구조로서 보호될 필요가 있다는 경제학자 장하준씨의 주장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꼭 세습 경영 체제를 인정해야만 가능한 것일까 의문이 듭니다. 그보다 경영의 안정성과 집중투자를 보장하는 지배 구조 변화도 충분히 고민할 수 있다고 봅니다. 국민경제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큰 기업이라면 국민경제의 지속적 발전을 위해 정부가 일정한 역햘을 해야 합니다. 민간 기업에 국민연금을 투자하자고 하면 시장주의를 거스르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이런 인식을 바꿔야 합니다. 삼성처럼 글로벌 첨단 경쟁을 하는 기업의 경우에 미래기술 투자나 업종 전환, 신산업 개발 등 전략적 투자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는 점에는 공감합니다. 다만, 삼성의 앞으로의 태도가 중요하죠. 노조 탄압이나 하청 불공정거래, 불법 정치자금 제공 등을 다 합리화하거나 덮어버리면 안되죠. 제대로 된 기업이라면 법 아래 떳떳하게 경영할 때만 지원하자는 겁니다. 순환출자와 같은 아주 위험한 승계방식을 개선하려면 전략적 투자가 가능한 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입니다. 전략적 투자가 가능할 수 있는 조건은, 무엇보다 경영의 투명성을 담보한다는 전제하에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노조를 인정하고 노조의 경영 참가를 보장하는 것도 전략적 투자에 대한 승인을 수월하게 할 수 있죠. 그러면 진짜 경영을 잘 할 수 있는 사람인지 확실히 검증해야 합니다. 그래야 투자에 대한 신뢰가 생기는 거죠. 이런 점들에 대해서 투명하게 국민들과 나눈다면 바람직한 타협안이 나올 수 있을 것이라 봅니다. 현재 삼성은 어용 노조를 만들어서 노동자들의 자주적 결사체를 방해하고 있습니다. 삼성의 무노조 경영은 사실 무노조 경영이 아닙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무노조를 지향했지만 무노조를 실현하지는 못했고, 노조 탄압 경을 했다고 봐야합니다.


이들은 헌법과 법류을 무시하고 재력을 바탕으로 원하는 바를 관철시켜왔습니다. 필요한 법은 다 만들고, 법을 고치기도 하고, 판결도 입맛에 맞게 집어넣을 것은 넣고, 뺄 것은 빼고, 이런 식으로 국가 자체를 농락하면서 기업을 유지한 어두운 역사는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해서도 더 이상 용납해서는 안됩니다. 이러한 문제 의식을 바탕으로 경영권 교체를 기회로 삼아 삼성도 달려져야 하지 않느냐는 인식이 있는 것 같습니다. 도대체 대한민국에 정의라는 건 뭘까요? 대한 민국 대통령도 헌법에 의거해서, 헌법이 보장하는 범위 안에서만 자기 권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돈 많은 특정 기업이 헌법을 무력화시키면서 치외법권 지대처럼 존재하고 있다면, 도대체 우리의 인간적 자부심이나 민주공화국 시민으로서 갖는 긍지는 다 어디로 가느냐는 겁니다.


하도급 문제에 대해서는 하도급의 공정거래를 어떻게 솔선수범해서 실현하느냐가 관건입니다. 사실 공정 거래법이나 관련법도 다 그 기준에 삼성이 걸려 있습니다. 삼성 스스로 법 위에서 법 아래로 내려오겠다는 경영 철학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정치권에서도 삼성이 그렇게 하도록 도와줘야 하지만 하도급 거래와 관련해서 불공정 행위가 있을 때, 징벌적 손해배상을 청구하겠다는게 지난 2012년 박근혜 대통령의 선거 공약이었습니다. 하청업체의 말이 곡 먹고살 만큼만 준다고 합니다. 나머지는 원청에서 다 뺏어가거요. 불공정거래죠. 법보다 주먹이 가까우니까, 당장 주문이 떨어지고 업계에서 퇴출되니깐 그렇게 못하는 겁니다. 그러니깐 법과 제도만으로 되는 건 아니고, 이윤 공유제를 비롯해서 근본적으로 불공정거래가 시정될 수 있는 사회적 합의가 있어야죠. 마지막으로 이들은 이야기합니다. 삼성그룹이 무엇보다도 대한민국의 법과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에 순응할 것을, 이제 한국 사회로 귀순할 것을 강력히 요청합니다.


8. 핵사고와 전기요금 : 스리마일 체르노빌 후쿠시마 그다음은 어디?


"세월호 참사가 있던 그날 정부는 고리원전 1호기의 재가동을 승인했다. 어쩌면 세월호 참사는 핵 발전사고라는 대재앙의 예고일지도 모른다" 역사학자 한공구 교수의 말입니다. 일본 쓰나미와 원전 사고에서 보았듯 대한민국을 단 한번에 침몰시킬 수 있는 문제, 명백한 위험으로 우리 앞에 다가온 원전 안전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일본의 경우에도 후쿠시마 핵 사고 이후 바로 이행하는 것은 경제적으로 쉽지 않겠지만 점차 원전을 줄이는 쪽으로 갈 것이라고 합니다. 현재 일본 후쿠시마 핵 사고로 인한 오염도를 보면 방사는 오염지도에서 일본 땅의 70%가 오염됐습니다. 후쿠시마 핵 사고 이후 몇 달 만에 일본 인구 80만명이 줄었구요. 아마 300년 정도 흘러야 방사능 오염에서 회복될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하지만 우리 나라는 2024년까지 원전을 20개 더 짓는다고 하는데 그렇게 되면 세계 2위의 원전 보유 개수 나라가 됩니다. (현재 5위) 후쿠시마 핵 사고 이후 전 세계가 탈핵 방향으로 가고 있는데 우리 나라는 원전 수출까지 하고 있으니 정반대로 가고 있는 것이지요. 유럽은 지난 25년간 원전 50개를 줄였습니다. 미국도 30년간 원전을 안 지었구요. 대신 한국, 중국, 인도가 감소한 원전 50개를 채우고 있는 실정입니다.


국내에 잠재된 위험 정도는 어느정도인지 얘기합니다. 우리나라에는 노후 원전이 많습니다. 30년이 넘은 원전이 3개나 되죠. 부산시 기장군의 고리 1호기가 수명을 연정한지 7년째인데 이번에 한 번 더 연장하려 하고 있습니다. 경주에 있는 월성1호기가 재작년에 수명이 끝나서 수명 연장을 심사 중이라고 합니다. 원래 수명이 40년이라서 조용히 30세를 넘긴 고리 2호기가 있습니다. 30년 수명이 중요한 이유가 후쿠시마 핵 원전 이 열렬회대로 10개가 있었는데, 지진과 쓰나미가 원전을 덮쳤을 때 30세 넘은 건 다 터졌고, 30세 미만인 건 하나도 안 터졌다고 합니다. 즉, 30년 넘게 운전되고 있는 건 위험하죠. 그리고 나라별로 땅 넓이당 원전 개수를 산출한, 국가별 원전 밀집도 자료가 있는데 세계 1위가 대한민국입니다. 현재 23개 운영 중이고 5개를 건설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2024년까지 모두 42개를 운영할 계획이며, 세계 3위 원자력 대국이 목표라고 밝혔습니다. 원전 밀집도 2위가 벨기에인데 후쿠시마 핵 사고 이후 탈핵을 결정했고, 3위가 대만인데 대만도 역시 사실상 탈핵 결정을 했다고 합니다. 프랑스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리원전 이야기를 더 하자면, 블랙 아웃이라고 하는 정전 발생사태가 있었는데 이 사고가 은폐됐었습니다. 원전이 전문가 영역이다 보니 사고를 숨기기 굉장히 쉬운 구조이죠. 이런 사고를 은폐했다가 드러난게 10차례가 넘습니다. 이걸 보면 성공적으로 은폐된 사고가 얼마나 많을까요? 그리고 고리원전 사고가 나면 해우대 포함 울산까지도 사고 범위에 들어갑니다. 반경 30km 정도는 사고 나면 완전히 비워야 하는데 고리원전의 경우 인구 300만명이 넘고, 월성 1호기 기준으로는 100만명이 넘습니다. (서울에서는 다 머네요.)


이렇게 위험한건데도 사람들이 경각심을 덜 가지는 이유는 경제성 때문이라고 사람들이 생각하는데 이것도 잘못된 상식이라고 합니다. 원자력 에너지가 결코 싸지 않습니다. 원자로 건설 비용, 유지 비용, 운영 비용, 인건비, 우리늄 값과 같은 생산비만 반영돼 있고, 10만년 동안 고준위 핵폐기물을 보관하는 비용, 사고가 났을 때 대응하는 비용이 제대로 반영돼 있지 않습니다. 이 비용까지 따지면 화력발전보다 훨씬 비싸죠. 그리고 원자력에 지원하는 정부 비용이 굉장히 많습니다. 정부 돈으로 지원한다는 이야기는 국민들 세금으로 한다는 거죠. (미국에서는 원자력이 태양광보다 더 비쌉니다.) 하지만 원전 전문가들은 원자력이 싸고 청정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계 시장에서 이 태양광 발전이 엄청난 속도로 성장 중이고, 값싼 원자력은 줄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양광이나 풍력 같은 재생가능에너지는 환경적인 특성에 많이 좌우되지 않은지 궁금한데 우리 나라 자연 조건에는 재생가능에너지가 맞지 않는다고 사람들이 많이 이야기 합니다. 예를 들면 원자력이 만드는 전기를 태양광으로 만들려면 집광판으로 국토를 3번 덮어야 된다고 하지만 전문가는 남한의 2%만 덮으면 원전이 만드는 전기를 다 만들 수 있다고 합니다. 재생가능에너지 사업은 신사업이고, 에너지 효율화도 큽니다. 이미 독일은 재생가능에너지로 많은 돈을 벌고 있습니다. 교용 효과 역시 크죠. 원자력에 비해 같은 양의 전기를 생산할 때 고용 효과가 독일에서는 10배정도 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 생산되는 에너지중 재생가능에너지 생산 비율은 몇 %일까요? 세계 꼴찌죠. 전체 전기 중 1%도 안됩니다. 예전에는 발전차액 지원제도라고 해서 아파트 옥상에 태양광 발전 설치를 해서 전기를 생산하면 한국 전력에서 발전 사업자에게 지원을 해줬거든요. 그런데 이명박 정부 들어서면서 이 제도가 없어졌다고 합니다.


탈핵으로 가려면 반드시 에너지를 절약해야 합니다. 선진국은 전력 소비량이 증가하지 않지만 경제성장을 합니다. 반면 우리나라는 1인당 전력 소비량이 급격하게 상승해 웬만한 선진국보다 더 많이 씁니다. 선진국에 비해 경제 상황은 못한데, 전기만 많이 쓰는 이상한 나라가 됐죠. 여기서 전기를 많이 쓰는 곳은 산업계입니다. 산업용 전기가 가장 큰 문제입니다. 한전이 기업에 전기를 원가 이하로 공급하니깐 전기를 많이 쓰는 외국 기업이 한국에 많이 들어옵니다. 이렇게 기업이 한번 들어오면 전기 사용량이 눈에 띄게 증가하지만 고용 효과는 없습니다. 산업용 전기요금을 정상화하는데 시급하다고 합니다. 비정상적인 전기요금을 현실화하려고 해도 재벌들은 경제성장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거죠. 그래서 대한민국은 가정용 전기요금에는 누진제를 적용하지만 공장에는 누진제가 아닌 역누진제를 적용하고 있습니다. 가격도 원가 이하이고, 많이 쓸 수록 싸게 줍니다. 한전이 누자 적자 상태인데, 이 한전 적자는 국민 세금으로 메우게 돼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가 공장 전기세를 내주는 거죠. 그렇다면 전기요금을 올리면, 기업들이 어려워지는게 아니냐? 궁금증이 생길텐데 제조업 사장님들의 말씀은 다 괜찮다고 합니다.


이번 이야기를 정리하자면 첫번째는 탈핵이 매우 시급하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재생에너지로 빨라 나가야 한다는 것, 마지막은 전기요금 현실화 문제를 이야기했습니다.


10. 시험, 학교, 교육은 어디로 : 스무 살 넘어도 공부만 하는 인생은 언제까지 


이번 세월호 참사를 겪고 난 다음 있었던 교육감 선거 결과는 거의 모든 지역에서 진보 성향의 교육감들이 당선됐습니다. 그만큼 우리 교육이 달라지기를 원하는 열망이 있다는 것이죠. 특히 학부형들은 우리 아이에게 어떤 교육을 시키는 게 더 좋은가라는 기준을 가지고 교육감 후보들을 본 것 같습니다. 더 좋은 교육이 보장되겠따라는 생각을 가지고 현실적인 판단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세월호 참사가 영향을 많이 끼쳤던 것은 우리가 그 동안 아이들에게 너무했다는 마음이 모두에게 있었던 것이죠. 그 사건으로 좋은 삶, 좋은 교육에 대한 우리들의 잃어버린 기억, 감수성을 재발견 한게 아닌 가 싶고, 그것이 투표로 이어졌습니다.


일반고가 특목고, 자사고 때문에 이류학교, 삼류 학교가 돼버린 요즘입니다. 일반고가 마치 선발대에 끼지 못한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인 것처럼 잘못 인식되고 있는게 문제죠. 고등학교 체제를 보면 맨 위에 특목고가 있고, 과학고와 예술고, 외국어고등학교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 들어선 게 자율형사립고등학교(자사고)입니다. 자사고들이 성적이 우수한 학생을 빨아들이니 일반고에는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이 적어지죠. 그래서 제2의 고교 평준화가 필요하다고 표현할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사실 시험 잘 치는 학생과 못 치는 학생을 섞어 놓았을 때 교육적 효과가 더 크다는 것은 다른 나라 실험에서도 많이 확인된 바 있습니다. 무엇보다 성적 잘 나오는 사람만 솎아내고 나머지를 포기하는 건 공교육이 할 바가 아니거니와, 공부 잘하는 사람에게 꼭 좋지도 않다는 것이죠.


자사고는 이명박 정부 때 고교 다양화 정책의 일환으로 도입됐습니다. 정부의 재정 지원을 받지 않는 대신에 교육과정 편성의 자율권과 학생 선발권을 가지는 것이죠. 정부의 재정 지원이 줄어드니 수업료를 3배로 올리고 교육과정 자율 편성 권한이 크다는 점을 이용해 국영수를 늘리고 입시 중심의 교육에 집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문제는 이런 자사고의 수가 너무 많다는 거예요. 게다가 한국은 교육 평등에 대한 욕구가 굉장히 강하기 때문에 자사고에 대한 불만이 많아졌습니다. 자사고가 미워서 폐지하는 게 아니고, 일반고를 회생시키기 위해서는 자사고에 대한 재정비가 불가피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원래의 취지와 다르게 높은 등록금을 받으면서 일반 서민들은 접근할 수 없는 고급 학교가 된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영재학교나 특목고 문제는 설립 목적대로 외국어나 예술, 체육 등 특정 분야에 대한 심화된 교육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단지 입시 명문으로 변질됐는지에 대해 엄정히 평가하고 지도,감독을 강화해야 합니다. 하지만 자사고는 5년여밖에 안 됐고, 교육 평등을 원하는 국민적 요구에 완전히 반하기 때문에 대대적 정비가 필요한 것입니다.


혁신고는 일반고를 혁신하는 것입니다. 학교 자율권의 활성화, 교사의 자발적이고 창의적인 교육 등의 노력을 통해 학교를 되살리는 거죠. 혁신학교는 지금 한국 사회에서 굉장히 중요한 교육 민주주의 프로젝트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교육계는 굉장히 권위적입니다. 그래서 혁신학교의 경우, 교장과 교사의 관계에서 교사에게 자율성을 많이 부여합니다. 혁신학교에서는 학생을 존중할 대상으로, 창의적 학습의 주체로 세우고자 노력하는 겁니다. 이게 선진화된 교육이며, 자기주도적인 학습 능력, 자발적인 학습 능력을 고양하고 교사가 학생을 자발적이고 창의적으로 교육하려고 노력하는 구조를 만드는 겁니다. 혁신학교의 성과는 이미 학부모들로부터 검증되고 있습니다.


보수쪽에서 공격할 때, 일반고 전성전성시대라는 건 결국 하향평준화가 되는 거라고 말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우리의 교육 철학에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30~40년 전의 교육은 선진국을 따라잡는게 목표였지만 지금은 그런 시대는 지났습니다. 얼마나 창의적이고 자발적인 교육을 할 것인가라는 문제게 직면해 있죠. 리더십 활동, 협동 능력 등 현대사회에 필요한 다면적인 능력을 키우고 평가해야합니다. 평가의 기준, 재능의 기준에 대한 사고를 바꿔야 하는 시점입니다. 핀란드도 1970년대에 우열반을 도입해보는 등 노력해봤지만, 최종 결론은 잘하는 아이와 못하는 아이를 섞어서 교육해야 한다는 거라고 합니다. 그안에 발생하는 학력의 차이는 수준에 맞게끔 따로 가르치는 거죠. 그러려면 선생님이 할 일이 아주 많아집니다. 그래서 핀란드에서는 선생님에 대한 지원이 엄청납니다. 선생님이 대부분 석사 학위를 가지고 있고, 선생님이 자신의 능력을 더 키우기 위해 휴직을 하거나, 부수적인 교육을 받는 것에 대한 지원도 잘 돼 있습니다. 무엇보다 학급 수를 줄이고, 개인별 성적을 매기는 시스템을 없애버렸죠.


하지만 우리나라는 살인적인 대학 입시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힘듭니다. 한국의 노동시간이 전 세계 일위죠. 그런데 노동시간보다 수업시간이 더 길어요. 문제는 대학입니다. 대학 입시 개혁, 학벌 체제 개혁이 필요합니다. 기본적으로 대학 학번 체제의 문제는 학벌에 따른 불평등 문제죠. 프랑스처럼 통합 국립 대학을 만들자, 국립대학을 중심으로 사립대학까지 아우르는 인적, 물적 자원을 공유하는 대학 통합 시스템을 만들어보자 등이 있는데 아마 독일의 대학 제도와 비슷할 겁니다. 이렇게 되면 지금처럼 확연한 대학 서열화를 좀 완화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교육의 질이 높은 대학이라서 사람들이 들어가려는게 아닙니다. 졸업생들이 사회에서 가지고 있는 권력이 너무 크기 때문에, 그 권력의 네트워크 안에 들어가고 싶어서 사람들이 그 대학에 들어가는 겁니다. 사람의 운명이 평생에 걸친 동안의 자기 노력에 따라 달라지고 결정돼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열아홉살에 운명이 결정되는 나라죠.


하지만 희망적인 부분도 있다고 합니다. 2018년에는 고등학교 졸업생 수와 대학 입학 정원이 같습니다. 우리 나라 평균 대학 진학률이 70~80%사이엔데 일단 대학수를 현격하게 줄여가야 되고, 2030년까지는 현존하는 대학을 절반으로 줄여나가야 되는데, 이 줄이는 과정을 대학 교육의 혁신 프로그램으로 활용하면 연착륙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정말 전환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방법중의 하나가 국립대학을 하나로 묶어서, 공동학점제를 포함해서 교수들도 인사이동을 시키는 겁니다. 학생들이 국립대학 통합 네트워크 안에서 취득하는 학점은 서로 인정하고, 졸업장도 국가가 인정하는 하나를 받는거죠. 서울대의 경우 학부는 폐지하고 대학원만 남기는 겁니다. 그것도 기초 학문이나 공공성이 강한 분야를 중심으로요. 교수들은 통합 네트워크 안에서 일부 학부 강의는 살려서 전국에 있는 국립대학 학생들이 한 학기씩 서로 바꿔가며 수업을 들어요. 그럼 고려대나 연세대가 그 자리를 차지할 거다? 상관없습니다. 사립대학교는 등록금이 비싸잖아요. 대신 국립대학은 연간 100만원 정도의 등록금만 받고, 무상교육으로 가자는 겁니다. 이걸 대학 하향평준화라고 비난하는데 그게 아니고 서울대를 70개로 늘리는 방안입니다. 재정 지원등을 통해 지방의 어려운 학교에 훌륭한 교수들이 더 오게끔해서 교욱의 질을 높이는 겁니다.


한국의 입시경쟁은 아동학개, 청소년 학대 수준입니다. 그래서 선행학습금지법을 만들었는데, 이건 고육지책입니다. 공부를 법으로 금지하는건 뭔가 잘못됐습니다. 중요한 건 이런 고육지책을 안 써도 되는 상태를 만들자는 겁니다. 사교육을 줄여야 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사회적인 상황 때문이고, 따라서 전체 사회 개혁의 방향에서 접근해야합니다. 세월호 참사는 우리가 어떻게 살고있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주었죠. 참혹한 현실을 고스란이 아이들이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희생양으로 우리는 살고 있는 겁니다. 어른들은 그걸 모른척하고 있었고, 그게 그 많은 죽음으로 드러난 거죠. 다른 세상에 대한 열망이, 또 다른 교육에 대한 열망으로 강하게 표현되고 있는 겁니다.


12. 안준 게 아니라 줄 것처럼 이야기한건 어떻게 하지? 


이번에는 연금과 관련된 복지 이야기입니다. 대통령 후보 시절 '허위 사실 공표'로 대통령 선거운동에서 공약을 허위로 알리로 당신된 사례가 있다고 합니다. 기초연금을 예로 들었을 때 어른신들은 모두에게 20만원을 주는 것으로 한 대통령이 공약을 내세웠지만 공약이 애초에 모두 20만원을 주는게 아니었다고 판명났습니다. 국민연금과 연계해서 감액해 지급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게 바로 허위 사실 공표입니다. 주겠다고 하고 안 준게 아니라, 안 줄걸 줄 것처럼 이야기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기초노령연금을 약 10만원 받던 분들이 기초연금제도가 바뀌면서 2배로 올라서 20만원을 받게 됩니다. 현행 기초노령연금법에 의거하면 2028년에 20만원을 오르도록 정해져 있었는데 박근혜 대통령이 인상 시기를 2014년 앞당긴 겁니다. 그 다음 받을 사람한테 영향이 가죠. 정부가 수정한 기초연금제도에 따르면 앞으로 가입자가 받는 금액이 가입자 평균 소득의 10% 수준보다 낮아져요. 2025년쯤 되면 기초연금은 현행보다 오히려 줄어듭니다. 2028년엔 가입자 평균 소득의 10%에도 못 미칩니다. 현행 기초노령연금보다 못한 연금으로 전락하죠.


기초연금법을 보면 70%의 노인에게 주게 되는데 이 돈이 가장 절실히 필요한 사람이 기초생활보장 수급 노인분들입니다. 현재 40만명 정도 되는데요. 이분들도 2014년 7월 25일부터 기초연금 20만원을 통장으로 받게 되어있습니다. 문제는 이 분들이 지금 받고 있는 기초생활보장 생계급여가 있는데, 여기에서 20만원이 까여요. 그래서 결국 같죠. 2014년 7월을 기준으로 대한민국의 70%의 노인들이 현금 소득이 기초노령연금 10만원에서 기초연금 20만원으로 10만원씩 올랐는데 맨 아래 있는 40만명의 어르신들만 그 혜택을 못받습니다.


유시민씨가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계실 때 기초노령연금을 도입했습니다. 그 때 이미 저소득계층 노인에게는 경로연금이라는 게 있었습니다. 이명박 정부가 기초노령연금을 2008년 시행하면서 기존 경로연금을 폐기했어요. 그렇지만 취약계층 노인의 경우 월 5만원 정도의 경로연금이 사라진 대신 기초노령연금 약 10만원이 생겼으니 그대로 넘어갔습니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가 기초생활보장 생계급여에서 기초노령연금만큼 공제했어요. 독거노인의 경우 생계급여로 월 48만원을 받다가 기초노령연금 10만원을 공제해 38만원을만 받게 된 거죠. 이전에는 생계급여 48만원+경로연금 5만원+총 53만원을 받았따면, 제도가 바뀌어 생계급여 38만원 + 기초노령연금 10만원, 총 48만원만 받게 된 겁니다.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면서 기초연금 20만원이 도입됐는데, 이번에는 20만원을 생계급여에서 공제합니다. 결국 이전에 기초노령연금 10만원 을 받고 생계급여 10만원을 공제했는데, 이제 기초연금 20만원을 받고 생계급여에서 20만원을 공제합니다. 이걸 우리는 '줬다 뺐는 기초연금'이라고 부릅니다.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는 동전의 양면, 수레의 두 바퀴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보편복지 담론은 독일, 스웨덴 등의 서구 복지국가를 따라가는건데, 노동시장이 불안정한 우리나라에서 서구적 복지국가 모델이 과연 지속 가능한 모델이 될 수 있을까, 라는 근복적인 질문도 있죠. 지금 유럽연합에서는 독일이 고용안정성, 경제성장, 분배 등 모든 지표가 가장 좋습니다. 독일은 전후 복구 과정에서 경제 분야의 리더들이 사회적 시장주의를 구척해뒀기 때문입니다. 가장 좋은 복지 정책은 제일 좋은 경제 정책이고, 경제 정책의 핵심에 고용에 있다. 즉, 복지 정책의 부담을 최소화하는 좋은 경제가 만들어질 때, 복지 정책도 제대로 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경제 성장률이 낮아지고 경쟁을 더 심화시키고 사람들을 몰아대고 있죠.  OECD 국가 중에서 한국이 제일 많이 일하는데도 살기가 너무 힘들어요. 즉 경제 정책이나 노사관계 정책, 노동 시장 정책 전반의 전환 없이는 증세를 통한 복지 확대조차도 굉장히 어려운 국면에 와 있는 겁니다.  복지 재정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증세 장벽을 넘어서기 위한 시민들의 운동도 필요합니다. '복지에만 쓰는 세금, 사회 복지세'도입을 주창합니다.


13. 진화심리학과 생존 본능 : 인간이 이기적인 건 당연한 건가


흔히 약육강식, 유승연패라는 말을 씁니다. 강한 사람들이 살아 남고 번영하는 게 자연의 섭리이고, 약한 사람들은 도태되는게 진리이지만,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힘든게 사실입니다. 보통 크고 강하고 힘센 개체가 살아남는 것, 즉 약육강식이 적자생존의 의미라고 많이들 오해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적자생존에서 '적'은 ''핏(fit)'을 뜻합니다. 생물체가 자신이 처한 생태적인 환경에 그야말로 딱 들어맞는다는 의미입니다. 진화생물학자들이 강조하는 것은 크고 강하고 힘센 자가 살아남는다가 아닙니다. 지금 당장 처한 환경에서 생존과 번식에 유리한 효과를 주는 형질을 소유한 개체가 상대적으로 생존과 번식에 도움을 덜 주는 현질을 지닌 개체들보다 결과적으로 유리하다는 거죠.


진화심리학에서 말하는 인간의 마음이란 수렵, 채집 생활에서 생존과 번식에 유리하게 작용했던 심리적 적응들의 집합입니다. 투표의 경우, 진화심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도덕적인 동기에서 투표가 이루어집니다. 나의 경제적 이득을 높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비도덕적인 후보를 심판하기 위해서 투표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익을 얻기 위해서 투표하기도 하지만 싫은 사람을 혼내주기 위해 투표하기도 한다는 겁니다. 사실 투표는 그야말로 비용만 들고 이득은 거의 없는 행동이잖아요? 이득은 사실상 제로에 가까운 행위죠.


여론 조사 결과를 보면 학력이 낮을수록, 월 평균 가구 소득이 낮을수록, 나이가 많을수록 새누리당을 압도적으로 지지해요. 우리나라가 이상한 겁니다. 때문에 계층, 계급적인 이해가 투표에 반영되기 힘들고, 그에  따른 정치 지형이 만들어지기 매우 어렵습니다.


투표는 '개인적 이익'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너무 못살 경우에는 혁명에 관심이 없다는 겁니다.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조차, 미래를 위한 꿈을 키울 여지도 없는, 하루하루 생존 그 자체가 급급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반면, 자신의 이성적 판단으로 수준 높은 행위를 하는 층도 있는 거예요. 하지만 대부분은 '나에게 도움이 되느냐, 안되느냐'를 우선 따집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가난한 사람들이 새누리당을 찍는 건 당연한 거예요. 경제 문제를 더 잘 해결하는 집단으로요. 한국의 고도 성장기 대부분은 보수 정권이 집권했을 때죠. 우리는 개혁적인 세력의 집권을 10년밖에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진보가 밥 먹여준다는 인식이 별로 없습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활동했던 미국의 경제학자인 소스타인 베블런은 "모든 사회제도는 그 제도가 만들어지던 시기, 그 사회의 지배적 사고방식의 산물, 표현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즉, 지배적 사고방식은 계속 변한다는 겁니다. 요약하자면 인간은 원래 관성의 법칙에 지배받기 때문에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 혁신을 한다는 것은 사고방식과 생활태도를 바꾸는 것이라서 에너지가 많이 소모된다. 특히, 정신적인 에너지가. 고로 오늘을 살기가 벅찬 사람들은 그 변화에 필요한 에너지를 확보할 수가 없기 때문에 계속 보수로 남는다. 그리고 마오쩌둥 스스로가 인간의 본성에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욕망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즉, 이기적인 유전자가 더 지배적이라는 뜻입니다.


배블런의 말을 다시 인용하면, 기존의 지배적인 사고방식과 행동 양식을 바꾸지 않고서는 도전히 생존할 수 없다는 압박을 받을 때 사람들이 비로소 변화를 받아들인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유층은 바뀌지 않습니다. 돈이 많아서 생활의 압박을 받지 않기 때문이죠. 그럼 또 언제가 될까요? 지금보다 훨씬 더 심각해져야 변화된다는 말입니다. 진화심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자신의 진화적인 이득에 도움이 되는 사람에게 투표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보수적인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어떤 특정한 자원에 대해 노력이 더 많이 좌우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노력을 하지 않는 사람한테 나눠 줄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겁니다. 과잉 복지는 국민을 나태하게 만든다는 생각도 이런 관점에서 나오는 거고요.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사람들은 열심히 노력했는데 운이 안 좋아서 혹은 자기가 어찌할 수 없는 사회 구조 때문에 빈곤층으로 떨어질 경우도 많으니까 우리는 어떤 자원을 가지 못한 사람이랑 기꺼이 나눠야 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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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사적인 독서 - 욕망에 솔직해지는 고전읽기
이현우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3년 2월
평점 :
품절



아주 사적인 독서_이현우

이 책에서는 머릿말에 `남을 위한 독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한 독서`를 해보라고 합니다. 이 책의 제목처럼 `아주 사적인 독서`는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위한 독서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즉, 나의 관심과 열망, 그리고 성찰을 위한 독서를 하라고 합니다.
이 때 문득 내가 독서를 왜 하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대로 된 독서를 시작한지는 아직 몇 개월 안되었지만 처음에 내가 왜 책을 읽기 시작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처음에는 일년에 책 한권도 읽지 않는 나 자신에게 미안해서 시작했지만 한권, 두권 읽다보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조금씩 깨닫기 시작하면서 생각없이 살아왔던 지난 날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무작정 책을 읽기 시작했고, 나름 스스로 생각하는 방법에 대해서 알아가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 책 제목처럼 저 역시 지극히 제 자신만을 위해서 독서를 시작했네요.
이 책에서는 햄릿, 돈키호테, 파우스트, 석상손님, 마담 보바리, 주홍 글자, 채털리 부인의 연인 이렇게 일곱편의 고전 소설을 소개해줍니다. 모두 `욕망`의 문제를 다룬 작품들이라고 합니다. 이 작품들은 남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고뇌와 욕망과 광기의 탄식의 이야기며 작품 속의 주인공들의 물음에 나의 물음이 포개질 때, 고전 독서는 시간이 남아돌 때나 가능한 독서가 아니라 필수적인 독서로서 의의를 갖게 될 거라고 작가는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작가의 말처럼 주인공들의 물음에 나의 물음에 대답함으로써 지극히 나만을 위한 독서를 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보았습니다.

1. 내 욕망은 정말로 내 것인가. - [마담 보바리]를 잃어버렸다는 것에 대하여

`마담 보바리`는 책을 읽는 것이 얼마나 문제적인 것인지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합니다. 비록 드문 일일망정 독서는 우리를 변화시키며 특히 소설은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현실을 경험하게끔 해준다고 합니다. 그렇게 간접적으로 경험한 현실과 실제 현실이 언제나 분명히 구분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책의 주인공인 엠마 보바리의 경우가 책을 통한 현실과 실제 현실을 구분짓지 못한 인물이라고 합니다.
책이라는 것은 건성으로 읽으면 괜찮을지 몰라도, 진지하게 읽으면 여러 가지 의미에서 아주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그것이 그냥 책을 `읽는 것`과 `읽어 버리는 것`의 차이이기도 하구요. 그런 엠마가 결혼에 대한 지극히 낭만적인 공상으로 가득 차서 보바리와 결혼하게 됩니다. 그녀는 소설에 나오는 결혼 생활을 현실에서도 기대하죠.

독서를 통해 현실이 바뀌길 바라진 않는가.그리고 아직 무언가 꿈꾸고 있는 삶이 있는것인지...
현실이 바뀌길 바라진 않지만(바뀔리도 없고), 제 자신이 바뀌기를 희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이에서 어른으로 변해 간다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서두르진 않으려고 합니다. 천천히 바뀌길 기다리고 있으며 제 자신이 바뀌면 현실 역시 조금씩 긍정적으로 바뀌겠죠. 특히, 내 아이와 같이 독서를 하며 얘기를 나누고 싶은 꿈을 가지고 있는 것 같네요..즉, 엠마 보바리같이 진지하게 읽지만 한번에 바뀌리라는 생각을 안하려고 합니다.

이 작품은 권태라는 정서를 기본적인 모티브로 쓴 작품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권태는 엠마 보바리와 같이 중산층 부르주의의 정서라고 합니다. 즉, 엠마 보바리가 무도회를 경험함으로써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걸 보게 되고, 그 경험 때문에 다시금 꿈이 환기되고 일상은 그 무도회를 기준으로 평가됩니다. 화려한 삶과 자신의 삶이 너무 대조되니깐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죠.

중산층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이런 생각을 한번 이상씩을 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상류층의 삶을 부러워하거나 사람이란 동물은 항상 비교하면서 살기 때문에 내 자신은 한없이 초라해짐을 느끼죠. 하지만 현실을 바꿀 수는 없으니 그냥 자신의 위치에서 만족하면서 살라고 누구나 얘기합니다. 하지만 엠마 보바리는 그러지 못하고 우울증에 빠지죠. 즉, 엠마 같은 인물은 소설을 너무 읽는 바람에 공상에 빠져 현실 감각이 떨어지고, 결국 자기 감정에 빠져서 파멸하게 됩니다.

소설이란 세계에 대한 진실을 보여주기에 과학, 철학과 경쟁하는 장르라고 합니다. 철학은 진리를 다루고, 과학은 외부 세계의 법칙, 이론을 제시하죠. 그 둘이 현실은 어떻다는 걸 보여주는데, 소설은 그와 똑같이 소설적인 인식, 삶에 대한 인식을 제공해준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소설을 왜 읽는지 궁금해졌습니다. 과연 작가가 위에서 얘기한 것 처럼 사람에 대한 인식을 제공해 줄 정도록 대단한 것인지.. 아직 고전을 많이 읽어보진 않아 잘 모르겠습니다.

이 책의 결말은 속물적인 인물들이 승리하게 됩니다. 사회가 굴러가는 어떤 법칙을 가감없이 보여주며 이런 것이 리얼리즘의 승리라고 표현합니다. 우리나라 , 대한민국이란 나라는 돈으로만 세상을 보는 보수주의가 항상 승리하고 있습니다. 승리하는 쪽이 진리인 것인지 생각도 가끔씩 들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마담 보바리`를 정리하려고 보니 다시 한번 독서를 왜 하는지 생각하게 되었네요.
누군가는 독서가 숨쉬듯이 기본적으로 필요한 양식같은 존재라고 말합니다. 독서를 하면 무언가 안심이 되는 느낌을 받았는데 이것도 시간이 지나면서 무덤덤해지는 것 같습니다. 더 열심히 읽어야 되는건지.. 계속 열심히 읽다보면 더 많은 깨달음이 읽을런지.. 하지만 제가 내린 결론은 독서는 인생에 있어서 좋은 것인 것만은 사살이다. 이거면 될 거 같기도 하고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도 없을 것 같기도 하고..

2. 용서받지 못할 죄란 무엇인가? - [주홍글자] 법과 정의를 되묻다.

주홍글자는 죄와 벌, 법과 정의를 문제를 다루는 이야기입니다. 여주인공인 헤스터프린은 간통죄로 감옥에 갇혀 있다가 평생 가슴에 간통(Adultery)을 뜻하는 주홍 글자 `A`를 새긴 채로 살아가라는 선고를 받고 나옵니다. 여기서 헤스터는 기한 없이 주홍 글자를 착용하여 그에 상응하는 결말과 응징을 일생 동안 받게 되는데, 이는 작가 호손이 어떤 목적을 위해 주홍 글자를 이 소설에 부합 하는 장치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일종의 상징이라고 하네요. 하지만 주인공 헤스터 프린은 들장미 덤불 같은 아름다움, 즉 문명사회, 청교도 사회의 어떤 낙인에도 꺽이지 않는 모습을 끝까지 보여줍니다.
간통죄는 혼자 짓는 것이 아니라 둘이 함께 저지른 죄입니다. 헤스터 프린의 경우는 죄는 없고, 벌만 보이지만 간통의 상대였던 딤스데일 목사는 죄만 보이죠. 그래서 목사는 자신의 죄로 인한 심한 고통을 받습니다. 오히려 헤스터는 주홍 글자라는 금지의 표시를 달고 있을 뿐이지, 그 안에서는 자유로운 인물이예요. 하지만 딤스데일은 오히려 자기 마음에 감옥을 만들고 점점 자기 생명을 죽여 나가요. 즉, 두 남녀 주인공에게 각기 다르게 기능하는 주홍 글자에 대한 소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역시 딤스데일처럼 무언가로부터 스스로 나를 옥죄고 있는건 아닌지 생각해보았습니다.
돈, 다른 사람으로부터의 인정, 비교, 권력 등 마음의 감옥을 스스로 만들고 있는건 아닌지..이런 마음의 감옥으로부터 나가는 사람이 행복하리라 생각들지만 쉽사리 용기있게 감옥을 탈출하는 사람을 보긴 힘듭니다.
헤스터 역시 가슴에서 주홍 글자를 떼어 개울가로 내던져버리면서 딤스데일에게 유럽으로 떠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자고 제안합니다. 딤스데일은 주류 사회에 속해서 편견의 구속을 받지만, 헤스터는 사회의 변방에 소외되어 있다 보니 문제를 전혀 다른 관점에서 보고 해결책을 제안한 것이죠.
헤스터가 지내던 숲이라는 대자연속에서는 두 사람이 아주 행복한 생명의 기쁨을 만끽합니다. 하지만 문명으로 돌아왔을 때, 사회 속에 다시 들어왔을 때는 `감옥`에 들어가야 돼요. 문명이란 기본적으로 욕망의 억압이고, 공동체와 문명이 존속하기 위해서는 이 억압을 수용해야 된다는 거죠. 공동체로 같이 살기 위해서는 감옥이 필요하다는 얘기입니다.

우리 역시 감옥에 살고 있지 않나 생각해봤습니다. 앞서 얘기했듯이 감옥으로부터 떠나면 자유롭고 행복하리라 알고 있음에도 돈, 문명, 인간관계와 같은 주홍글자가 나를 붙잡고 있기에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없는 것이죠. 사회에 길들여지다보니 딤스데일과 같이 죄악의 징표를 다시 달 수 밖에 없나 봅니다.

주홍 글자는 `A`가 무슨 뜻일지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결말에서도 그 질문을 계속 던지고 있습니다. 주홍 글자가 과연 그녀만의 것일까? 모든 사람들이 사실은 다 가슴속에 주홍 글자를 갖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자기 안에 어떤 금지된 욕망을 갖고 있지만 그것을 드러내지는 못합니다. 주홍 글자는 딤스데일과 헤스터 프린의 두 갈래 길을 통해 죄와 벌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사회의 규범이라는 것은 누가 만들었으며 합당한 것일지 생각하는 작품이며, 영화 `남쪽으로 튀어`에서 너무 애쓰지 않아도 남들과 달라도 잘 살 수 있다고 믿었던 김윤식이 말했던 대사가 떠올랐습니다.
˝나 이제부터 국민 안해˝

3. 정신보다 육체가 더 중요하다 - [채털리 부인의 연인] 온전한 자기의 발견

이 책 속의 채털리 부인은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비극적 사건의 주인공입니다. 결혼 한달 만에 남편이 전쟁으로 끌려가고 귀대했을 때는 다리를 못 쓰는 불구가 되어 돌아옵니다. 그로인해 채털리 부인은 젊은 나이에 장애인인 클리퍼드와 평생을 살아야하는 과제를 떠안습니다. 하지만 작가 로렌스는 이 스토리가 한 여자의 비극 그 이상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그녀의 사랑을 다루고 있지만 이 책은 한 시대를 대표하는 이야기라고 구도를 잡습니다. 전쟁으로 불구가 된 남자와 그의 아내 이야기지만 코니 채털리만의 비극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비극이라는 거죠. 특히, 이 작품은 단순한 성애 문학의 차원을 넘어 시대적 상징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클리퍼드는 불구의 몸, 서양 문명 자체의 불구성을 상징합니다. 반면 나중에 등장하는 산지기 멜러즈는 회복되어야 하는 장연을 상징하죠. 그동안 문명에 의해서 억압되고 가치 절하된 자연을 대변한다고 할까요.

클리퍼드의 모습을 보면 육체와 정신이 분리되지 않는 것을 표현하고자 합니다. 육체가 불구화 되면 정신도 불구화된다는 겁니다. [오체 불만족]같이 불구지만 자신만의 정신세계로 많은 사람의 교감이 되는 사람이 있긴 하지만 작가인 로렌스의 관점에 의하면 신체적인 장애는 정신까지 갉아먹습니다. 또한 클리퍼드는 다른 사회계급과는 격리되어 광부들과 전혀 교류가 없습니다. 다른 계층끼리 서로 공유하거나 교류하는게 전혀 없다는 점이 로렌스가 지적하는 영국 사회의 문제점 가운데 하나입니다.
반면, 주인공 코니(채털리 부인)는 클리퍼드와는 다르게 긍정적인 시골 사람의 모습으로 나옵니다. 혈색이 좋고 시골 분위기 나는 여자라고 하죠. 그렇게 주인공 코니는 자유롭게 어울리며 자라다가, 결혼 이후에 완전히 일부일처제에 묶인 셈이죠. 그렇게 얽매인 관계에서, 사고 때문에 부부 사이의 육체적인 결합이 불가능한데도 `정신적인 삶만으로 충분히 결합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상황이 조성됩니다.

이 소설에서 나타나는 문제의식 중 하나는 주인공들이 지주 계급이라는 점입니다. 노동을 안하는 거죠. 코니는 이러한 하인을 부리며 집안일을 운영하는 것이 `유기적 무질서`(전체가 조화를 이루며 살아 있는 질서가 아니라 감정이 없는 차디찬 질서)처럼 보인다고 했으며, 여전히 남녀 간의 차별이 존재했던 당시 여성의 사회적 지위에 문제의식을 갖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상류계급, 유한계급은 지위를 원래부터 있던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신주의라고 하죠. 특히 클리퍼드는 그런 물신주의적 태도를 갖고 있습니다. `원래 주인은 주인인 거고 하인은 하인인 거다.`라는 겁니다. 정치권력이 가장 잘 써먹는 태도죠. 하지만 여기서 분명 집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과연 물신주의적 사고방식이 지배계급만 가지고 있냐는 것입니다. 작가는 피지배계급도 물신주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자신을 하인이라는 존재로 스스로 격하시킨다고 합니다. 오히려 피지배계층으로 살아가는게 편하다고 생각하고 개들처럼 밥주는대로 받아먹고 생각하는 걸 귀찮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보수 속물들이 계속해서 승리하고 진보는 영향력이 약해지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해봅니다.

여튼 이 책에서 가장 큰 문제는 클리퍼드는 자신과 아내가 정신적으로 잘 결합되어 있으니 육체적 불구라는게 문제가 되지 않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데 있습니다. 코니가 서로 정신적인 삶만으로 충분했던 적이 있지만, 그게 지속적이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된 것이죠. 정신적인 삶만으로는 살 수 없는 거예요. 그리고 자신이 여성적인 매력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는 걸 알게 되요. 자신의 늙어가는 몸을 본 코니는 정신적 삶을 사기라고 하며 그에 대해 증오심이 생겨납니다.
더욱이 클리퍼드와 코니 사이가 멀어지는 시점이 있습니다. 클리퍼드가 ˝아이 때문에 나에 대한 당신의 사랑이 손상되지만 않는다면 난 아주 기꺼이 찬성이야. 그렇지 않다면 완전히 반대고˝ 그러니깐 우리 사랑이 문제 되지 않는 상태에서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갖는 것은 얼마든지 찬성한다는 거죠. 이 장면에서 코니는 클리퍼드를 경멸합니다. 남편에게 자신이 아이를 낳기 위한 도구 정도로 간주되기 때문이죠. 클리퍼드가 직접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아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폭력에 의해서 코니의 삶이 점점 파괴되고, 압사직전까지 간다고 생각합니다.

이 상태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이 옵니다. 코니가 산지기 멜러즈를 만나게 되는 거죠. 즉 서로의 짝을 만나게 되고 계급차이, 언어, 등 불가능 할 것 같은 일들을 극복해 나가며 사랑에 빠집니다. 이제 코니는 자기 안의 또 다른 자신을 발견해나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둘이 만나는 시점에 작가 로렌스의 세계관이라 할 수 있는 질문이 등장합니다. ˝한 여자와 제대로 관계를 맺느냐?˝ 이게 인생의 핵심이라고 합니다. 젊은 남자들이 욕구를 풀지 못해서 그게 공격적 본능으로 발산되고 심지어 전쟁을 일으킨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로렌스의 성에 대한 생각은 핵심은 진정한 만족은 어느 한쪽만의 만족으로 얻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 만족이란 상대방의 만족에서 얻을 수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죠.

마지막에 클리퍼드는 말합니다. ˝육체적 삶이라는 것은 그저, 동물적 삶에 불과한거야˝
그리고 코니가 말하죠. ˝하지만 지성만 고도로 발달하는 몸뚱이는 죽은 시체인 삶보다는 훨씬 나아요.게다가 당신 말은 틀렸어요.˝

저 역시 진정한 사랑은 정신적+육체적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섹스를 육체적으로만 보는 사람이 많은데 성 행위도 정신적으로 얼마든지 아름다울 수 있으며, 정신적인 부분과 합쳐질 때 최고로 멋진 행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요즘 남자들은 섹스를 육체적인 행위로만 보는 경향이 많습니다. 야동을 쉽게 접할 수 있으며, 부부관계도 상대방을 위한 것이 아닌 순전히 자기자신만을 위해 관계를 원하는, 순전히 쾌락만을 위한 만족을 원하는 경우가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살과 살이 맞대는 씨름 경기 경우 선수들은 살 접촉을 통해 상대방의 심리, 의도, 기술적인 측면까지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씨름도 그러한데 부부끼리의 관계는 더 확실히 상대방의 느낌을 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4. 너는 누구인가,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 - [햄림] 긴 망설임은 어디에서 오는가

˝거기 누구냐˝ 라는 대사로 시작합니다. 작가는 이 대사를 햄릿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이라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고 합니다. `너 누구냐?`라는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 왜 문제적인지 알려면 개성이라는 개념의 등장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하죠. 햄릿의 배경이 되는 시대가 중세에서 근대로의 전환기이고 각자의 개별성에 주목하게 되는 시기입니다. 개성, 혹은 개별성은 항상 전체로부터 일탈할 때 발견되고 자각됩니다. 우리가 개인임을 자각한다는 것은 일단 분리와 소외의 체험을 전제로 합니다. 하지만 배제된 자가 느끼는 소외감과 좌절감을 극복할 수 있다면, 즉 이 조건을 긍정할 수 있다면 그는 `영웅`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인 대 만인`, `나 대 세계;의 관계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는 굉장히 큰 의미를 갖는 존재로 커진 거죠. 그런 것이 낭만주의에서 개인에 대한 자각이고 자의식입니다. 개인의 자각이란 개인의 자유를 뜻합니다. 전체와 분리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재발견이지요.
하지만 막상 독립한다는 것은 자기의 존재 가치와 의미를 고양시켜주는 경험이지만 동시에 불안하고 두려운 이중적 경험입니다. 과연 이러한 자유로부터 자신을 잘 컨트롤 할 수 있을까. 이런 느낌이겠죠.
사회 공동체 속에는 전통 혹은 규범의 무게라는 게 있습니다. 한 쪽 끝에 그런 규범과 전통이 있다면 다른 쪽 끝에는 개인의 극대화된 자아가 있습니다. 이걸 가장 크게 확장시키면 `나=세계` 혹은 `나=신`이 됩니다. 이때 신은 보통 악마의 형상입니다. 악마란 신이라는 전통과 규범의 세게에서 분리되어 나온 존재이니까요. 천사가 타락하면 악마가 된다고 얘기하죠. 하지만 사탄은 저쪽에서 보면 반란자의 형상이지만, 이쪽에서 긍정하게 되면 기존의 질서에 굴복하거나 예속되지 않은 자유로운 정신이라고 양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햄릿 역시 자신이 지켜야 할 규범이 있으니 그걸 준수하기만 하면 되는데 반대편에는 `내가 곧 신`인 세계, 자기 자신이 가치의 창조자이고 입법자인 세계가 있습니다.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의 주인공인 햄릿은 결국 그 사이에서 고투하는 인물입니다. 어쩌면 현대인들도 여전히 그와 같은 상황에 놓여 있을지 모릅니다.

햄릿은 복수극이지만 정확히 얘기하면 복수 `지연`극이라고 합니다. 이 작품은 부왕에 대한 복수가 왜 지연되는가에 대한 드라마이고 이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풀어야 할 수수께끼라고 합니다. 만약 햄릿을 이해하려고 하면, 그가 왜 복수를 지연시키는지 알아야겠죠.
햄릿이 폴로니어스를 죽이고 친구들을 죽게 만들 때 전혀 주저하지 않았던 인물이 클로디어스(숙부)를 죽이는 일에서는 왜 그렇게 주저할까요? 클로디어스가 햄림에세 뭔가 틀별한 의미를 갖는 인물일까요? 왜 못하는지에 대한 프로이트 식 해석은 이렇습니다. 햄릿도 어릴 적 어머니와의 관계를 독점하기 위해 아버지 살해를 소망했다고 합니다. 어머니에 대한 애정 때문에 햄릿도 아버지와 라이벌 관계가 되고, 살부 욕망을 갖게 되죠. 그런데 클로디어스가 아버지를 죽였으니, 클로디어스는 햄릿 자신이기도 합니다. 자기가 지녔던 욕망, 그러나 억압되어 있던 욕망을 성취한 인물인 겁니다. 즉, 아버지의 원수이면서 자기 자신의 대변자이기도 합니다. 만약에 클로디어스를 죽이려고 한다면 그 자신도 징벌해야 하는 것이죠.
하지만 작가가 생각하는 복수의 지연 이유는 햄릿이 아버지 햄릿을 자기의 모범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오이디푸스 콜플렉스 단계로 보면 `경쟁자`관계에서 `전범`으로 옮겨갔다는 거죠. 어머니를 독차지하기 위해서는 아버지를 제거해야 하는데, 아버지는 그러기엔 너무 강하니까 현실 원칙을 수용하는 것이죠. 내가 아버지처럼 되면 엄마를 차지할 수 있으니, 아버지 같은 남자가 되려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햄릿의 문제는 모델이 갑자기 클로디어스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아버지 햄릿과 같은 남자를 욕망한다. 나도 그런 남자가 되어야지˝ 여기까지는 괜찮았는데 어머니가 클로디어스 같은 남자도 원합니다. 그러니 어머니의 욕망이 수수께끼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수수께끼도 해소되어야먄 햄릿이 행동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원래 아버지와 같은 인물이 되면 됐는데, 갑자기 어머니가 클로디어스 같은 인물을 욕망의 대상으로 만듦으로써 햄릿에게는 혼란이 발생합니다. 햄릿의 많은 말, 많은 독백이란 사실 행동의 결여를 감추는 연막같은 겁니다. 말로 행동을 대신하는 것이죠. 그럼으로써 행동을 계속 지연시키는 것이고요.

햄릿의 가장 결정적인 변신의 계기라고 보는 장면은 햄릿이 무덤지기를 만나서 궁정의 과대 요릭의 해골을 보는 대목입니다. 이것이 이후 햄릿의 행동이나 성격을 바꾸는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햄릿이 얻은 깨달음은 ˝참새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데도 다 하늘의 섭리가 있다˝로 압축됩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일종의 숙명론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이후 햄릿은 행위의 주체가 아니라 에이전트(수행자)가 됩니다. 북수의 주체가 아니라 복수의 수단이 되지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이미 결정되어 있고, 나는 그것을 따르기만 하는 거죠. 미션을 부여받은 햄릿이었습니다. 그 간극 때문에 행동이 지체되다가, 그걸 포기하고 순리를 따를 때, 즉 `let be`를 따를 때 비로소 행동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만 순리로 맡기는 변신에 따라, 햄릿이 가진 고민은 깨달음으로 바뀝니다.

햄릿은 `복수`라는 텍스트 안에서 여러가지 상황(아버지와 아들 관계, 운명론, 행동론 등)을 만들어 복수라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 물어보는 것 같습니다. 특히 운명론의 경우 자신의 정체성과 결부시켜 자신의 인생, 복수에 대한 선택까지 모든 것은 처음부터 결정되어 있진 않았나 하는 결정장애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고 하죠. 하지만 인간은 이 선택해야 한다는 운명 앞에서 두려워하고 피하려고 하며, 선택했다면 잘한 선택인지, 잘못된 선택인지 결정하는 것조차 버거워합니다. 이것이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고 하는 것인지도 모르겟습니다. 그래서 햄릿처럼 운명이나 믿으며 목수에 대한 답안지를 편하게 풀고자 했던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봤습니다.

5. 멀쩡한 정신만으로 살 수 있을까? - [돈키호테] 그 숭고한 광기에 대하여

돈키호테는 가장 많이 알려진 소설이지만 자세한 내용을 묻는다면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작품인 것 같습니다. 미치광이 기사라는 인물 성격에 대해서만 알고 있었지 자세한 내용은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이라면 대부분 모를 것입니다. 저 역시 2권짜리의 많은 양이라는 사실조차 몰랐으니깐요. 돈키호테라는 인물은 기사도 소설을 밤낮으로 읽어낸 나머지 소설 이야기들과 현실이 더 이상 구분되지 않는 주인공이 방랑기사의 여정에 오르는 이야기라고 합니다. 특히, 주인공의 광기와 함께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이 광기의 의미에 대해서 소설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무엇이 광기이며, 그것은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같은 질문을 던져볼 수 있는 거지요.
햄릿의 저자 셰익스피어와 이 책의 저자 세르반테스가 동시대 작가이며, 특히, 같은 날 죽었다는게 흥미롭습니다. 4월 23일인데 이 날을 기념하는 것이 1995년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 책의 날`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어느 작가가 사람의 유형을 햄릿형고 돈키호테형으로 구분을 했는데 재미있습니다. 햄릿은 사색가형, 돈키호테는 행동가형이라고 하죠. 당시 러시아에 사회적 의미를 부여하고자 이렇게 구분을 했다고 합니다. 러시아에는 햄릿형 사색가만 너무 많고, 돈키호테형 행동가가 더 많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을 얘기하고자 두 인물을 비교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나라에는 어떤 타입의 인물이 더 필요할지 생각해봤습니다. 계속 되풀이되는 이야기지만 요즘 사람들은 사색이라는 단어가 생소할 정도로 독서나 주체적인 사상같은 것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행동을 하느냐, 그것도 아니죠. 그럼 무슨형일까? 그래도 나름 열심히 일하면서 어떻게든 잘 살려고 노력하고 있으니 노력형이라고 하는게 맞겠네요. 아무튼 당시 러시아에서는 햄릿과 같이 생각은 많지만 행동은 결여된 지식인 쪽으로만 편중되어 있으니까 돈키호테와 같은 행동가를 더 원했습니다.

돈키호테는 분량이 방대하지만 대단히 모던한 작품이라고 합니다. 어떤 `자의식`이 있다는 얘기인데 즉 `이건 이야기이고 소설이다`라는 자의식을 말하죠. 돈키호테란 작품이 그런 자기 참조성, 자기 반영성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자기 반영성이란 것은 모더니즘 영화의 주된 특징이기도 합니다.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보다 먼저 발표했던 작품이 라 갈라테아인데 소설속 돈키호테의 서재에 꽂혀 있는 책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책입니다. 자기가 자기 소설속에 나오는 것, 이게 자기 반영성입니다. 이 방랑기사 돈키호테의 본질적 성격은 무엇일까요? 중년에 접어둔 카스티야의 하급 귀족, 가난하지만 자존심 강한 시골 신사인데, 기사소설만 잔뜩 읽었다는게 특징입니다. 완전히 정신이 돌아버릴 정도로 읽은거죠. 요즘 시대를 예로 들자면 게임하면서 게임 속 가상과 현실을 구분 못하는 사람정도 되겠네요. 소설을 보면 1부는 돈키호테의 착각 때문에 빚어지는 에피소드들이고, 2부는 돈키호테의 착각이 아니라 공작 부분가 돈키호테를 놀림감으로 삼으려고 연구하고 연극을 꾸미는 식의 에피소드들로 구성돼 에피소드의 성격이 달라집니다. 어찌 보면 2부가 더 짖궂고 잔인합니다. 그래서 2부 정도 되면, 독자들의 태도와 정서도 좀 달라집니다. 1부에서는 희화화된 돈키호테를 우습게 받아들이지만, 2부에서는 유일하게 진정성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 돈키호테가 되고, 주변 인물들은 허위와 위선에 빠져 있고 더 사악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때부터 독자는 돈키호테에게 좀 더 공감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불쌍한 몰골의 기사는 그저 황금시대를 꿈꾸는 시대착오적인 미치광이일까요? 주변에서는 다들 미친 짓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미친 짓이 아니라면 돈키호테에게 어떤 삶이 남이 있었을지도 의문입니다. 자기 삶의 의미나 사명을 다른 일에서 찾을 수 있었을지 모르겟습니다. 그리고 돈키호테가 정말 미친 것인지, 아니면 미친 척한 것인지 헷갈릴때가 많습니다. 일반적으로 미친 사람은 끝까지 자기 생각을 우기는 법이죠. 보통 미쳤다고 하면 ˝저게 왜 세숫대야냐? 맘브리노의 투구지˝라고 말하지만 하지만 돈키호테는 ˝너한테는 세숫대야일지는 몰라도, 나한테는 투구다`라고 말합니다. 자신과 다른 사람의 시각 차이를 인정하고 있죠.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도 그렇습니다. 자기가 늙은 시골 귀족이지만, 동시에 라만차의 돈키호테라고 생각합니다. 동시에 다른 사람으로 존재하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명명하고 창조하죠. 진실은 시각차이에 있습니다. 돈키호테가 말하는 것들이 `시차적 진리`라고 이름 붙일 만한게 아닐까 싶어요. 돈키호테의 태도는 `이상이라는 게 이미 사라진 시대착오적인 것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나는 이걸 고수하겠다`라는 쪽에 가까운데, 이건 그 이상이 진실이라고 믿는 태도와는 좀 다릅니다. 그게 진짜라고 믿는 것과, 그게 허상이고 이미 현실성이 없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고집하는 것, 즉 현실과 이상 사이의 긴장을 계속 유지하는 것은 별개의 태도죠.
일반 사람(현실주의자)는 오직 하나의 현실만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돈키호테가 경험하는 현실이란 양면적입니다. 평범하지만 나에겐 특별하다. 다른 사람과 조금 보는 것, 생각하는 것이 틀릴 뿐이지 미친 것은 아니다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돈키호테가 죽을 때의 유언의 내용은 자신이 미치광이였다는 걸 인정하고 용서를 비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광기가 돈키호테의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정작 광기에서 빠져나오자 돈키호테는 죽어버립니다. 즉 하나의 현실만 갖게 되었을 때 죽게 된 것이죠. 현실과 이상 사이의 긴장을 견지할 때 다른 사람들은 그가 미쳤다고 하지만 그 자신은 삶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습니다. 달리 생각하면 돈키호테는 숭고한 이상을 위해 돌진하는 모든 이들의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두에 당시 러시아에서는 자기가 가진 이상을 향해 돌진하는 행동가 타입의인물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다른 맥락에서도 이런 인물이 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상과 현실의 간극을 알고 있지만 그 간극을 무화시키지 않고, 억지로 제거하지 않고 받아들이며 끝까지 밀고 나가는 그런 인물. 돈키호테는 세계 문학사에서 가장 유명한 주인공의 하나이며 광기의 대명사지만 돈키호테를 읽은 독자에게 그는 단순히 우스꽝스러운 미치광이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흔히 곱게 `곱게 미치라`고 충고하지만 돈키호테는 `숭고하게 미친`사례라고 할 수 있을까요. 돈키호테의 모험담을 마주하게 되면 광기 없는 삶이란 무난한 공허에 불과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일상의 안락에 파묻혀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이 문득 `불쌍한 몰골`로 비칠 때 우리는 다시금 돈키호테를 떠올리게 될지도 모르겟습니다.

무슨 일을 할 때 `제대로 하려면 미쳐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정신은 미칠때까지는 하지 않도록 셋팅되어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무슨 일이든 미칠정도로 하진 않으니까요. 미칠정도로 하는 것 보다야 즐기면서 하는게 더 좋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요즘같은 세상에서는 행복을 우선시 하기 때문에 쉽게 미치려고 하지 않죠. 하지만 스티브 잡스, 에디슨, 아인슈타인과 같이 세계적인 위인들을 보면 다른 사람보다 뇌의 3~5%정도를 더 쓴다고 합니다. 이런 것이 미친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지만 돈키호테처럼 숭고하게 미친 사람이 일반사람들보다 더 뛰어날 수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한편으로는 이들이 우리의 재미없고 평범한 삶을 사는 걸 보면 `미친 것들 왜 저렇게 재미없게 살아?`라고 생각하며 우리를 미친사람으로 보진 않을까요?

6. 사람은 무한한 꿈을 가져야만 하는가 - [파우스트]의 구원을 비딱하게 바라보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의 대표작 `파우스트`는 중년을 위한 작품입니다. 놀기만 하기엔 너무 늙었고, 소망 없이 살기엔 너무 젊은 나이가 중년이라면요. 이대로 늘기엔 뭔가 억울하고 다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기엔 좀 늦은 듯싶은 나이가 `파우스트`를 일기에 딱 좋은 나이입니다. 그럼 파우스트라고 하면 떠오르는 인간형이 무엇인가요? `파우스트적 인간`은 어떤 인간을 말하는 건가요? 가장 대표적인 것은 그가 무한한 욕망의 표상이라는 것입니다. 무한한 욕망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무엇에도 만족할 줄 몰라야 하죠. 인간에게 무한한 욕망이라고 하면 지식욕, 성욕, 권력욕을 들 수 있습니다. 물론 다른 욕구도 있을 수 있겠지만, 파우스트는 이 세가지 욕망에서 모두 끝까지 가보는 인물입니다. 그리고 그 결론은 `도달할 수 없다`는 겁니다. 무한한 욕망이란 결코 달성될 수 없고 그 끝은 부질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말에서 파우스트는 구원받습니다. 인간이 방황하더라도 노력하려고 앴는 한 구원받는다는 것이 괴테가 남긴 메시지인데, `타협하지 않는 것, 끝가지 가보는것` 혹은 `갈 데까지 가보는것`이것이 파우스트의 스타일이라고 합니다.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파우스트의 모험과 편력, 욕망의 끝은 보여주는 식으로 전개됩니다. 그리고 결말에 이르러서는 두 가지 메시지를 던지는데 `방황해도 노력하는 자도 구원받을 수 있다`와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구원한다`입니다. 욕망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메피스토펠레스는 파우스트에게 ˝삶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건 다 얻었는데 행복한가?라며 그레트헨과의 관계를 더올려줍니다. 파우스트는 그레트헨을 보고 몸이 달아서 메피스토펠레스를 닦달하기도 하며 결국 욕망을 채웁니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이 문제입니다. 파우스트가 그레트헨에게서 가장 강렬하게 원했던 걸 갖게 된 그 수간에 `딴 생각`을 하게 됩니다. 생각이라는 건 만족감이 다 채우지 못한 빈틈 같은 겁니다. 그 틈새를 생각이 지비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게 점점 커지고 권태를 유발하게 됩니다. 이게 파우스트의 병입니다. 푸슈킨은 문학작품을 통해 학습한 `권태`를 파우스트라는 희곡을 통해 보여줍니다. 만약 이런 `생각의 과잉`, `의식의 과잉`에 의한 권태가 근대적 인간의 공통적 특징이라고 한다면 파우스트는 우리 모두의 모델이 될 수 있습니다. 욕망역시 그렇습니다. `무한한 욕망`이라는 것도 우울증이나 권태처럼 학습된 것, 즉 발명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욕망이란 학습되고 부추겨지는 것입니다.

파우스트는 인식을 위해서 삶을 희생합니다. 삶을 산게 아니라 삶을 투자해서 인식을 얻으려고 합니다. 파우스트가 기대하는 것은 신적인 앎입니다. 은밀한 곳에서 세계를 통제하는 힘을 깨닫고자 합니다.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욕망입니다. 그렇듯 파우스트는 이 세계를 관장하는 진리와 법칙을 알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능력과 유한성에 좌절하고 절망합니다. 그러던 파우스트가 메피스토펠레스의 제안에 따라 계약을 맺습니다. 계약 조건은 지상의 삶에서 만족감을 느끼게 되면 영혼을 내주겠다는 조건입니다. 자신이 지극히 만족하는 한순간의 희열을 맛볼 수 있다면 그때는 인생이 바로 끝나버려도 좋다는게 파우스트의 생각입니다. 파우스트는 어째서 그토록 만족을 원할까요? 그만큼 쌓인게 많아서입니다. ˝세상이 내게 무엇을 줄 수 있단 말인가? 부족해도 참아라! 부족해도 참아라! 이것이 영원한 노래다. 하지만 나는 더 참지 못하겠다˝ 이게 파우스트의 불만입니다. 아무튼 파우스트는 이제까지 앎을 위해 욕망을 억제해왔지만 `인생의 황금나무`는 다 지나가버렸고, 허망함을 참지 못해 아무런 망설임 없이 악마와 계약을 하게 됩니다. 이제껏 세상은 인식의 대상이었지만, 이제 그는 세상을 경험해보려고 합니다.

파우스트의 형상이 `영원히 남성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영원히 여성적인 것`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을 이 작품의 여성들, 즉 그레트헨과 헬란, 말미에 등장하는 성모마리아에게서 찾기도 합니다.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는데 일단 `주체`가 아니라 `객체`이고 또 헌신적이면서 수동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레트헨은 신앙심이 깊습니다. `한계에 순응하고 적당히 멈출 줄 아는 태도`가 영원히 여성적인 말이라는 것 같습니다. `갈 데까지 가보려는 태도`와는 반대로 말이죠.

마지막 파우스트는 아직 해봐야할 게 남았습니다. 권력이죠. 그의 욕망의 마지막은 `지배자 비극`입니다. 파우스트의 무모한 욕망은 인간들만 지배하는 게 아니라 자연도 지배하려고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평범한 백성드을 수족처럼 부리고 노동력을 쥐어짜게 됩니다. 과연 그가 이루려는 유토피아는 무엇일까요? 아무리 방황한다고 해도, 선의에 의한 것이라면 용서된다는 게 이 작품의 전제였죠. 이게 바로 그의 선의입니다. 대규모 간척 사업을 통해서 혼자만의 부귀영화를 누리려던 게 아니라 모두가 잘 사는 공동체, 국가를 이우려고 했죠. 하지만 이 선의를 위해서 많은 사람이 희생됩니다. 과연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많은 이들의 희생은 감수되어야만 하는가? 때론 개인적 욕망을 감추기 위해 ˝더 나은 미래`라는 구실을 만든 것은 아닐까요? 전쟁, 공사, 철거 등 이런 것들은 진정 누구를 위한 것인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십니다. 버려진 땅을 모든 사람을 위한 낙원으로 만드는 것이 목적이라지만, 파우스트의 방식은 윤리적이지도 민주적이지도 않습니다. 지금 관점에서 보면 이 `개발지상주의자`파우스트는 근대의 기획자이자 근대성의 화신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렇다면 악마에게 영혼을 팔고 살인도 마다하지 않으면서까지 자신의 욕망을 추구한 파우스트는 결국 무엇을 얻게 되었을까요? 그의 방황과 편력이 영혼에 대한 구원을 정당화할 수 있을지 질문해볼 수 있습니다. 괴테가 사적인 자리에서도 밝힌 적이 있는데 `파우스트가 구원을 받게 된 열쇠가 뭐냐`라고 묻자, `언제나 갈망하면서 애쓰는 것에 구원의 열쇠가 있다`라고 합니다. 하지만 방황이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삶까지 파괴하더라도 `노력`으로 간주될 수 있을까요? 자신의 청춘의 한 시절을 대가로 지불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다른 사람까지 희생시킨다면 문제가 있다고 봐야하지 않을까요? 파우스트는 `수천의 `손드을 조정하고 희생시켰습니다. 지배자 비극은 퍽 현실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개발독재를 비판하는 여러 작품들의 원 모델이 되어주는게 이 지배자 비극입니다. 파우스트적 지배자 형상이 20세기 나치 동일에서는 영우적 지도자의 모델이 됩니다. 나치는 많은 작품을 금서로 지정했는데 파우스트는 유독 열광적으로 수용합니다.

파우스트는 뭔가를 이루고 욕망을 충적해서 행복해진 것이 아니라 드높은 행복을 예감하면서 최후의 순간을 맛봅니다. 여기서 파우스트는 현실에 만족하는 게 아니라, 미래의 예감에 만족합니다. 과연 파우스트는 구원받아도 되는 인물이었을까요? 파우스트적 욕망이 일반화된 사회에서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라고 부추기는 사회에서, 무한한 욕망이 사회의 동력으로 간주되는 이 `가차 없는 자본주의`사회에서 파우스트가 보여주는 욕망의 끝은 재 평가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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