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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잊은 그대에게 - 공대생의 가슴을 울린 시 강의
정재찬 지음 / 휴머니스트 / 2015년 6월
평점 :
품절
시를 잊은 그대에게_정재찬
시를 읽은 적이 언제였던가... 까마득하다. 이 책 부제목이 '공대생의 가슴을 울린 시 강의'처럼 나 역시 공대생이다. 시를 읽고자 이 책을 고랐던 건 아니다. 독서모임에서 모임원 중 한명이 이 책의 저자인 정재찬 교수가 자신의 은사라며 모임에 이 책을 추천해서 읽은거다. 어디선가 '시는 창의력의 보고다'라는 말을 했던 걸 본적이 있다. 여기서 '덧붙여 시는 감성을 살리는 도구일 뿐 아니라 상상력의 보고인데 이를 많은 사람들이 외면한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라는 말도 했었다. 나 역시 외면했던 사람들 중 한명인데 시를 읽어보자고 생각만 했었지 정작 실천에 옮기지는 못하고 있던 찰라 '시를 잊은 그대에게'라는 좋은 제목과 나에게 딱 맞는 부제목으로 지어진 시에 대한 감성을 일깨워 주는 책을 읽게 되서 기분이 좋았다.
너무나 주옥같은 시들이 많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시는 맨 처음장에서 나오는 신경림 작가의 '갈대'라는 시다.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흐느껴 울어 본 사람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몸이 흔들린다. 갈대의 울음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폭풍 같은 통곡이 아니라 벌판에 나부끼는 바람처럼 흐느낌의 형태로 지속된다. 이때 '조용한 울음'은 남이 알아차리지도 못할 만큼 조용한 정도가 아니라 때로는 너무 조용해서 자기 자신도 자기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조용한 울음이다. 실제로 우리는 삶이 비애라는 사실을 자주 잊고 산다. 그러나 '어느 밤'이 찾아오면, 비로소 고요한 침잠과 성찰의 시간이 오면, 그때야 깨닫게 된다. 산다는 것은 슬픈 것이다. 힘든 것이다. 허무한 것이다.
시란 분야는 파고 들면 파고들수록 점점 빠져드는 것 같다. 처음에는 아무렇지도 않다가도 두번, 세번 읽다보면 시의 분위기에 압도됨을 느낄 수 있다. 신경림의 '갈대'역시 이 책의 저자가 말한대로 조용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시를 읽고 나서 왠지 모르게 가슴을 파고드는 느낌이 있다면 그것을 나직이 흐느낄 때 가슴팍에서 느껴지는 그것과 비교해 보라. 그렇게 본다면 진정 시인이 주목하고 있는 것은 갈대의 흔들림, 그 외양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흐느끼는 듯한 소리와 느낌에 있는 것이 아닐까?'라고 말한다. 이런게 시만이 가지고 있는 매력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다음은 독서모임에서 이 책을 추천해준 모임원이 질문한 내용에 시를 통해 나의 과거의 기억이 되살아나는 듯한 경험을 느꼈다. 질문은 이랬다. '혹시 이 책에서 나온 시를 읽다가 갑자기 잊고 있던 옛 기억이 떠오르진 않았는지...'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이렇다.
'별이 빛나고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 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이런 시대에 있어서 모든 것은 새로우면서도 친숙하며, 또 모험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결국은 자신의 소유로 되는 것이다. 그리고 세계는 무한히 광대하지만 마치 자기 집에 있는 것처럼 아늑한데, 왜냐하면 영혼 속에서 타오르는 불꽃은 별들이 발하고 있는 빛과 본질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이다.' 루카치 [소설의 이론]중에서
소개해준 것은 시는 아니지만 요르단 사막 위에서 별을 봤던 옛기억이 떠올랐다. 별을 제대로 보려면 사막위에서 봐라. 라는 말을 들어본적이 있지만, 사막 위에 누워서 별을 봐본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100% 공감할 수 있는 말이다. 진정한 별은 사막위에서 보는 별이다. 그리고 그 어떤 야경을 따라올 수 없는 야경쇼다. 남산 타워에서 본 서울의 야경이나 파리에서 바토무슈를 타고 반짝 반짝 빛나는 에펠탑도 사막 위의 별 앞에서는 불장난일 뿐이다. 아무튼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진정 별을 바라보고 길을 찾아갔던 사람들은 행복했을 거라는 거다. 아무리 깜깜해도 별빛이 내가 가야할 길을 인도해주고, 아늑함을 느낄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그리고 저자가 말한 것처럼 어둠이 밝음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때론 밝음이 어둠을 가리는 것이란 생각을 깊이 공감했다.
다음은 아버지에 대한 시다. 아버지란 존재는 자식으로 특히 아들로서 산과 같은 존재다.
어렷을 적에는 우러러 봤던 산이며 굳건했으며 태풍이 와도 넘어지지 않을거라 생각했던 그런 존재였다. 그리고 언젠가는 넘어서고 싶은 산이기도 하다. 하지만 막상 커서 산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다보면 산이 그렇게 높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된다. 산이 낮아진건지 내가 큰건지는 모르겠지만...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어렸을 적 아버지란 존재가 산처럼 크진 않았을 수도 있다. 냉정하게 말해, 세상의 모든 부모가 다 훌륭하고 다 고마운 존재는 아니다. 소월(아래 시의 작가)의 아버지처럼 그의 의지와 무관하게 부모 구실을 못한 경우는 놔두더라도, 정말 부모답지 않은 아버지도 세상엔 적지 않다.
툭하면 아버지는 오밤중에
취해서 널부러진 색시를 업고 들어왔다.
(...)
아버지를 증오하면서 나는 자랐다.
아버지가 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겠노라.
이것이 내 평생의 좌우명이 되었다.
나는 빚을 질 일을 하지 않았다.
취한 색새를 업고 다니지 않았고,
노름으로 밤을 지새지 않았다.
아버지는 이런 아들이 오히려 장하다 했고
나는 기고만장했다. 그리고 이제 나도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진 나이를 넘었지만
나는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한 일이 없다.
일생을 아들의 반면교사로 산 아버지를
가엾다고 생각한 일도 없다, 그래서
나는 늘 당당하고 떳떳했는데 문득
거울을 보다가 놀란다, 나는 간 곳이 없고
나약하고 소심해진 아버지만이 있어서.
취한 색시를 안고 대낮에 거리를 활보하고,
호기있게 광산에서 돈을 뿌리던 아버지 대신,
그 거울 속에는 인사동에서도 종로에서도
제대로 기 한번 못 펴고 큰소리 한번 못 치는
늙고 초라한 아버지만이 있다.
- 신령림 [아버지의 그늘] -
아버지를 반면교사로서 삼아 다르게 살았다고 하지만 막상 거울을 봤을 때 내 모습이 아닌 아버지가 보였다고 한다. 주변을 보면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노라 하던 친구들이 많다. 나 역시 그랬다. 하지만 아버지를 닮지 않으려 해도 결국 닮고 만다. 닮지 않는데 성공했으나 그 역시 성공이 아닌 삶임을 인정하는 사람, 스스로는 성공이라 생각했지만 이번엔 그의 자식이 또 그렇게 살지는 않겠노라며 곁을 떠나간 경우 들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그러나 아버지를 닮고 마는 것도 이 시의 제목처럼 아버지의 그늘 탓이지만, 아버지에게 벗어나려 한 것도 결국 아버지의 그늘 탓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살면서 억울하고 답답하고 허무함을 느낄 때가 많다. 그래서 작가는 이 시를 추천해주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 및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 천상병, [귀천] -
인생에 있어서 간직하고픈 시가 있었냐 물었다. 그래서 나는 이 시를 품고 살고 싶다 말했다.
이 시인은 불행한 인생을 살았다. '동백림 간첩단 사건'에 무고하게 연루되면서 중앙정보부에서 석달, 교도소에서 석 달씩 갇힌 채 모진 고문을 받고 집행유예로 풀려났지만, 그의 심신은 이미 정상 상태가 아니었다. 고문의 휴유증으로 인해 그의 정신은 날로 황폐해져 과대망상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시인은 노래한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하긴 '죽다'의 높임말이 '돌아가다'인 것을 보면 예부터 죽음이란 원래 있던 자리라 돌아감을 의미했나 보다. 죽는다는 것이 썩어빠진 육체로부터 영혼이 자유롭게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거라 주장했던 소크라테스의 말처럼 돌아가는 곳이 '하늘'이라면, 죽음도 나름 괜찮을 성싶어지지 않을까? 귀천이란 말 그대로 하늘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하늘로 돌아간다는 것은 자신이 본래 하늘에서 왔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만 성립되는 말이다. 그러니 이는 인간을 존귀하게 여기지 않으면 아예 성립조차 될 수 없는 말이다.
불행한 사실은 현실을 살기 위해서는 육체도 영혼도 모두 고생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악다구니같이 변해야만 한다고 작가는 말한다. 인간의 세계는 삶을 위한 투쟁과 갈등이 벌어지는 장소다. 이러다 보니 돈, 명예, 권력 등과 같은 세속적 조건들이 인생에 있어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육망의 동물인 인간으로서 당연할 수밖에 없다. 세속적 가치를 획득하면 행복함을 느끼고, 그렇지 않으면 불행함을 느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가치 속에서 바라보면 '죽음'은 정말이지 가슴 아픈 일이다.
하지만 이 시의 마지막처럼 인생을 잠시 놀다 가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어떨까? 시인은 그래서 인생을 소풍 나온다고 생각하라고 우리에게 말한다. 자기 삶의 근원은 다른 곳에 존재하고 자신은 단지 이 세상에 잠시 놀러 나왔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승에서의 삶은 소풍이기에 아름답고, 소풍에서 돌아가는 천상은 천상이기에 아름다울 터이니, 우리의 생을 이승과 저승의 연속성으로 이해할 경우, 인생 전체가 진정 아름답지 아니하겠는가? 그러려면 무엇보다 우리가 삶을 소풍처럼 살아야 한다. 따라서, 죽는 것 역시 기분 좋은 일로 받아들일만 하지 않을까?
시는 이렇게 읽어야된다는 것을 느꼈다. 학창 시절에 수험 공부를 위해 읽었던 시는 지금 머릿속에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시를 이해하기 위한 인생의 경험도 지식도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이해를 하기 위해 선생님들이 수험 공부를 위한 설명이 아닌 진정한 시의 의미를 알려주는 수업을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고 경험이 필요하다. 만약 정재찬 교수님의 시에 대한 설명이 없었다면 책 안의 시 중 반 이상은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시가 진정한 상상력의 보고라는 말이 조금은 이해가 간다. 그래서 가끔 시를 몇편 써보자는 나름의 다짐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