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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사적인 독서 - 욕망에 솔직해지는 고전읽기
이현우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3년 2월
평점 :
품절
아주 사적인 독서_이현우
이 책에서는 머릿말에 `남을 위한 독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한 독서`를 해보라고 합니다. 이 책의 제목처럼 `아주 사적인 독서`는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위한 독서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즉, 나의 관심과 열망, 그리고 성찰을 위한 독서를 하라고 합니다.
이 때 문득 내가 독서를 왜 하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대로 된 독서를 시작한지는 아직 몇 개월 안되었지만 처음에 내가 왜 책을 읽기 시작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처음에는 일년에 책 한권도 읽지 않는 나 자신에게 미안해서 시작했지만 한권, 두권 읽다보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조금씩 깨닫기 시작하면서 생각없이 살아왔던 지난 날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무작정 책을 읽기 시작했고, 나름 스스로 생각하는 방법에 대해서 알아가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 책 제목처럼 저 역시 지극히 제 자신만을 위해서 독서를 시작했네요.
이 책에서는 햄릿, 돈키호테, 파우스트, 석상손님, 마담 보바리, 주홍 글자, 채털리 부인의 연인 이렇게 일곱편의 고전 소설을 소개해줍니다. 모두 `욕망`의 문제를 다룬 작품들이라고 합니다. 이 작품들은 남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고뇌와 욕망과 광기의 탄식의 이야기며 작품 속의 주인공들의 물음에 나의 물음이 포개질 때, 고전 독서는 시간이 남아돌 때나 가능한 독서가 아니라 필수적인 독서로서 의의를 갖게 될 거라고 작가는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작가의 말처럼 주인공들의 물음에 나의 물음에 대답함으로써 지극히 나만을 위한 독서를 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보았습니다.
1. 내 욕망은 정말로 내 것인가. - [마담 보바리]를 잃어버렸다는 것에 대하여
`마담 보바리`는 책을 읽는 것이 얼마나 문제적인 것인지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합니다. 비록 드문 일일망정 독서는 우리를 변화시키며 특히 소설은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현실을 경험하게끔 해준다고 합니다. 그렇게 간접적으로 경험한 현실과 실제 현실이 언제나 분명히 구분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책의 주인공인 엠마 보바리의 경우가 책을 통한 현실과 실제 현실을 구분짓지 못한 인물이라고 합니다.
책이라는 것은 건성으로 읽으면 괜찮을지 몰라도, 진지하게 읽으면 여러 가지 의미에서 아주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그것이 그냥 책을 `읽는 것`과 `읽어 버리는 것`의 차이이기도 하구요. 그런 엠마가 결혼에 대한 지극히 낭만적인 공상으로 가득 차서 보바리와 결혼하게 됩니다. 그녀는 소설에 나오는 결혼 생활을 현실에서도 기대하죠.
독서를 통해 현실이 바뀌길 바라진 않는가.그리고 아직 무언가 꿈꾸고 있는 삶이 있는것인지...
현실이 바뀌길 바라진 않지만(바뀔리도 없고), 제 자신이 바뀌기를 희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이에서 어른으로 변해 간다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서두르진 않으려고 합니다. 천천히 바뀌길 기다리고 있으며 제 자신이 바뀌면 현실 역시 조금씩 긍정적으로 바뀌겠죠. 특히, 내 아이와 같이 독서를 하며 얘기를 나누고 싶은 꿈을 가지고 있는 것 같네요..즉, 엠마 보바리같이 진지하게 읽지만 한번에 바뀌리라는 생각을 안하려고 합니다.
이 작품은 권태라는 정서를 기본적인 모티브로 쓴 작품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권태는 엠마 보바리와 같이 중산층 부르주의의 정서라고 합니다. 즉, 엠마 보바리가 무도회를 경험함으로써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걸 보게 되고, 그 경험 때문에 다시금 꿈이 환기되고 일상은 그 무도회를 기준으로 평가됩니다. 화려한 삶과 자신의 삶이 너무 대조되니깐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죠.
중산층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이런 생각을 한번 이상씩을 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상류층의 삶을 부러워하거나 사람이란 동물은 항상 비교하면서 살기 때문에 내 자신은 한없이 초라해짐을 느끼죠. 하지만 현실을 바꿀 수는 없으니 그냥 자신의 위치에서 만족하면서 살라고 누구나 얘기합니다. 하지만 엠마 보바리는 그러지 못하고 우울증에 빠지죠. 즉, 엠마 같은 인물은 소설을 너무 읽는 바람에 공상에 빠져 현실 감각이 떨어지고, 결국 자기 감정에 빠져서 파멸하게 됩니다.
소설이란 세계에 대한 진실을 보여주기에 과학, 철학과 경쟁하는 장르라고 합니다. 철학은 진리를 다루고, 과학은 외부 세계의 법칙, 이론을 제시하죠. 그 둘이 현실은 어떻다는 걸 보여주는데, 소설은 그와 똑같이 소설적인 인식, 삶에 대한 인식을 제공해준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소설을 왜 읽는지 궁금해졌습니다. 과연 작가가 위에서 얘기한 것 처럼 사람에 대한 인식을 제공해 줄 정도록 대단한 것인지.. 아직 고전을 많이 읽어보진 않아 잘 모르겠습니다.
이 책의 결말은 속물적인 인물들이 승리하게 됩니다. 사회가 굴러가는 어떤 법칙을 가감없이 보여주며 이런 것이 리얼리즘의 승리라고 표현합니다. 우리나라 , 대한민국이란 나라는 돈으로만 세상을 보는 보수주의가 항상 승리하고 있습니다. 승리하는 쪽이 진리인 것인지 생각도 가끔씩 들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마담 보바리`를 정리하려고 보니 다시 한번 독서를 왜 하는지 생각하게 되었네요.
누군가는 독서가 숨쉬듯이 기본적으로 필요한 양식같은 존재라고 말합니다. 독서를 하면 무언가 안심이 되는 느낌을 받았는데 이것도 시간이 지나면서 무덤덤해지는 것 같습니다. 더 열심히 읽어야 되는건지.. 계속 열심히 읽다보면 더 많은 깨달음이 읽을런지.. 하지만 제가 내린 결론은 독서는 인생에 있어서 좋은 것인 것만은 사살이다. 이거면 될 거 같기도 하고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도 없을 것 같기도 하고..
2. 용서받지 못할 죄란 무엇인가? - [주홍글자] 법과 정의를 되묻다.
주홍글자는 죄와 벌, 법과 정의를 문제를 다루는 이야기입니다. 여주인공인 헤스터프린은 간통죄로 감옥에 갇혀 있다가 평생 가슴에 간통(Adultery)을 뜻하는 주홍 글자 `A`를 새긴 채로 살아가라는 선고를 받고 나옵니다. 여기서 헤스터는 기한 없이 주홍 글자를 착용하여 그에 상응하는 결말과 응징을 일생 동안 받게 되는데, 이는 작가 호손이 어떤 목적을 위해 주홍 글자를 이 소설에 부합 하는 장치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일종의 상징이라고 하네요. 하지만 주인공 헤스터 프린은 들장미 덤불 같은 아름다움, 즉 문명사회, 청교도 사회의 어떤 낙인에도 꺽이지 않는 모습을 끝까지 보여줍니다.
간통죄는 혼자 짓는 것이 아니라 둘이 함께 저지른 죄입니다. 헤스터 프린의 경우는 죄는 없고, 벌만 보이지만 간통의 상대였던 딤스데일 목사는 죄만 보이죠. 그래서 목사는 자신의 죄로 인한 심한 고통을 받습니다. 오히려 헤스터는 주홍 글자라는 금지의 표시를 달고 있을 뿐이지, 그 안에서는 자유로운 인물이예요. 하지만 딤스데일은 오히려 자기 마음에 감옥을 만들고 점점 자기 생명을 죽여 나가요. 즉, 두 남녀 주인공에게 각기 다르게 기능하는 주홍 글자에 대한 소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역시 딤스데일처럼 무언가로부터 스스로 나를 옥죄고 있는건 아닌지 생각해보았습니다.
돈, 다른 사람으로부터의 인정, 비교, 권력 등 마음의 감옥을 스스로 만들고 있는건 아닌지..이런 마음의 감옥으로부터 나가는 사람이 행복하리라 생각들지만 쉽사리 용기있게 감옥을 탈출하는 사람을 보긴 힘듭니다.
헤스터 역시 가슴에서 주홍 글자를 떼어 개울가로 내던져버리면서 딤스데일에게 유럽으로 떠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자고 제안합니다. 딤스데일은 주류 사회에 속해서 편견의 구속을 받지만, 헤스터는 사회의 변방에 소외되어 있다 보니 문제를 전혀 다른 관점에서 보고 해결책을 제안한 것이죠.
헤스터가 지내던 숲이라는 대자연속에서는 두 사람이 아주 행복한 생명의 기쁨을 만끽합니다. 하지만 문명으로 돌아왔을 때, 사회 속에 다시 들어왔을 때는 `감옥`에 들어가야 돼요. 문명이란 기본적으로 욕망의 억압이고, 공동체와 문명이 존속하기 위해서는 이 억압을 수용해야 된다는 거죠. 공동체로 같이 살기 위해서는 감옥이 필요하다는 얘기입니다.
우리 역시 감옥에 살고 있지 않나 생각해봤습니다. 앞서 얘기했듯이 감옥으로부터 떠나면 자유롭고 행복하리라 알고 있음에도 돈, 문명, 인간관계와 같은 주홍글자가 나를 붙잡고 있기에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없는 것이죠. 사회에 길들여지다보니 딤스데일과 같이 죄악의 징표를 다시 달 수 밖에 없나 봅니다.
주홍 글자는 `A`가 무슨 뜻일지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결말에서도 그 질문을 계속 던지고 있습니다. 주홍 글자가 과연 그녀만의 것일까? 모든 사람들이 사실은 다 가슴속에 주홍 글자를 갖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자기 안에 어떤 금지된 욕망을 갖고 있지만 그것을 드러내지는 못합니다. 주홍 글자는 딤스데일과 헤스터 프린의 두 갈래 길을 통해 죄와 벌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사회의 규범이라는 것은 누가 만들었으며 합당한 것일지 생각하는 작품이며, 영화 `남쪽으로 튀어`에서 너무 애쓰지 않아도 남들과 달라도 잘 살 수 있다고 믿었던 김윤식이 말했던 대사가 떠올랐습니다.
˝나 이제부터 국민 안해˝
3. 정신보다 육체가 더 중요하다 - [채털리 부인의 연인] 온전한 자기의 발견
이 책 속의 채털리 부인은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비극적 사건의 주인공입니다. 결혼 한달 만에 남편이 전쟁으로 끌려가고 귀대했을 때는 다리를 못 쓰는 불구가 되어 돌아옵니다. 그로인해 채털리 부인은 젊은 나이에 장애인인 클리퍼드와 평생을 살아야하는 과제를 떠안습니다. 하지만 작가 로렌스는 이 스토리가 한 여자의 비극 그 이상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그녀의 사랑을 다루고 있지만 이 책은 한 시대를 대표하는 이야기라고 구도를 잡습니다. 전쟁으로 불구가 된 남자와 그의 아내 이야기지만 코니 채털리만의 비극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비극이라는 거죠. 특히, 이 작품은 단순한 성애 문학의 차원을 넘어 시대적 상징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클리퍼드는 불구의 몸, 서양 문명 자체의 불구성을 상징합니다. 반면 나중에 등장하는 산지기 멜러즈는 회복되어야 하는 장연을 상징하죠. 그동안 문명에 의해서 억압되고 가치 절하된 자연을 대변한다고 할까요.
클리퍼드의 모습을 보면 육체와 정신이 분리되지 않는 것을 표현하고자 합니다. 육체가 불구화 되면 정신도 불구화된다는 겁니다. [오체 불만족]같이 불구지만 자신만의 정신세계로 많은 사람의 교감이 되는 사람이 있긴 하지만 작가인 로렌스의 관점에 의하면 신체적인 장애는 정신까지 갉아먹습니다. 또한 클리퍼드는 다른 사회계급과는 격리되어 광부들과 전혀 교류가 없습니다. 다른 계층끼리 서로 공유하거나 교류하는게 전혀 없다는 점이 로렌스가 지적하는 영국 사회의 문제점 가운데 하나입니다.
반면, 주인공 코니(채털리 부인)는 클리퍼드와는 다르게 긍정적인 시골 사람의 모습으로 나옵니다. 혈색이 좋고 시골 분위기 나는 여자라고 하죠. 그렇게 주인공 코니는 자유롭게 어울리며 자라다가, 결혼 이후에 완전히 일부일처제에 묶인 셈이죠. 그렇게 얽매인 관계에서, 사고 때문에 부부 사이의 육체적인 결합이 불가능한데도 `정신적인 삶만으로 충분히 결합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상황이 조성됩니다.
이 소설에서 나타나는 문제의식 중 하나는 주인공들이 지주 계급이라는 점입니다. 노동을 안하는 거죠. 코니는 이러한 하인을 부리며 집안일을 운영하는 것이 `유기적 무질서`(전체가 조화를 이루며 살아 있는 질서가 아니라 감정이 없는 차디찬 질서)처럼 보인다고 했으며, 여전히 남녀 간의 차별이 존재했던 당시 여성의 사회적 지위에 문제의식을 갖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상류계급, 유한계급은 지위를 원래부터 있던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신주의라고 하죠. 특히 클리퍼드는 그런 물신주의적 태도를 갖고 있습니다. `원래 주인은 주인인 거고 하인은 하인인 거다.`라는 겁니다. 정치권력이 가장 잘 써먹는 태도죠. 하지만 여기서 분명 집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과연 물신주의적 사고방식이 지배계급만 가지고 있냐는 것입니다. 작가는 피지배계급도 물신주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자신을 하인이라는 존재로 스스로 격하시킨다고 합니다. 오히려 피지배계층으로 살아가는게 편하다고 생각하고 개들처럼 밥주는대로 받아먹고 생각하는 걸 귀찮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보수 속물들이 계속해서 승리하고 진보는 영향력이 약해지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해봅니다.
여튼 이 책에서 가장 큰 문제는 클리퍼드는 자신과 아내가 정신적으로 잘 결합되어 있으니 육체적 불구라는게 문제가 되지 않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데 있습니다. 코니가 서로 정신적인 삶만으로 충분했던 적이 있지만, 그게 지속적이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된 것이죠. 정신적인 삶만으로는 살 수 없는 거예요. 그리고 자신이 여성적인 매력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는 걸 알게 되요. 자신의 늙어가는 몸을 본 코니는 정신적 삶을 사기라고 하며 그에 대해 증오심이 생겨납니다.
더욱이 클리퍼드와 코니 사이가 멀어지는 시점이 있습니다. 클리퍼드가 ˝아이 때문에 나에 대한 당신의 사랑이 손상되지만 않는다면 난 아주 기꺼이 찬성이야. 그렇지 않다면 완전히 반대고˝ 그러니깐 우리 사랑이 문제 되지 않는 상태에서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갖는 것은 얼마든지 찬성한다는 거죠. 이 장면에서 코니는 클리퍼드를 경멸합니다. 남편에게 자신이 아이를 낳기 위한 도구 정도로 간주되기 때문이죠. 클리퍼드가 직접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아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폭력에 의해서 코니의 삶이 점점 파괴되고, 압사직전까지 간다고 생각합니다.
이 상태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이 옵니다. 코니가 산지기 멜러즈를 만나게 되는 거죠. 즉 서로의 짝을 만나게 되고 계급차이, 언어, 등 불가능 할 것 같은 일들을 극복해 나가며 사랑에 빠집니다. 이제 코니는 자기 안의 또 다른 자신을 발견해나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둘이 만나는 시점에 작가 로렌스의 세계관이라 할 수 있는 질문이 등장합니다. ˝한 여자와 제대로 관계를 맺느냐?˝ 이게 인생의 핵심이라고 합니다. 젊은 남자들이 욕구를 풀지 못해서 그게 공격적 본능으로 발산되고 심지어 전쟁을 일으킨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로렌스의 성에 대한 생각은 핵심은 진정한 만족은 어느 한쪽만의 만족으로 얻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 만족이란 상대방의 만족에서 얻을 수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죠.
마지막에 클리퍼드는 말합니다. ˝육체적 삶이라는 것은 그저, 동물적 삶에 불과한거야˝
그리고 코니가 말하죠. ˝하지만 지성만 고도로 발달하는 몸뚱이는 죽은 시체인 삶보다는 훨씬 나아요.게다가 당신 말은 틀렸어요.˝
저 역시 진정한 사랑은 정신적+육체적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섹스를 육체적으로만 보는 사람이 많은데 성 행위도 정신적으로 얼마든지 아름다울 수 있으며, 정신적인 부분과 합쳐질 때 최고로 멋진 행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요즘 남자들은 섹스를 육체적인 행위로만 보는 경향이 많습니다. 야동을 쉽게 접할 수 있으며, 부부관계도 상대방을 위한 것이 아닌 순전히 자기자신만을 위해 관계를 원하는, 순전히 쾌락만을 위한 만족을 원하는 경우가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살과 살이 맞대는 씨름 경기 경우 선수들은 살 접촉을 통해 상대방의 심리, 의도, 기술적인 측면까지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씨름도 그러한데 부부끼리의 관계는 더 확실히 상대방의 느낌을 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4. 너는 누구인가,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 - [햄림] 긴 망설임은 어디에서 오는가
˝거기 누구냐˝ 라는 대사로 시작합니다. 작가는 이 대사를 햄릿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이라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고 합니다. `너 누구냐?`라는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 왜 문제적인지 알려면 개성이라는 개념의 등장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하죠. 햄릿의 배경이 되는 시대가 중세에서 근대로의 전환기이고 각자의 개별성에 주목하게 되는 시기입니다. 개성, 혹은 개별성은 항상 전체로부터 일탈할 때 발견되고 자각됩니다. 우리가 개인임을 자각한다는 것은 일단 분리와 소외의 체험을 전제로 합니다. 하지만 배제된 자가 느끼는 소외감과 좌절감을 극복할 수 있다면, 즉 이 조건을 긍정할 수 있다면 그는 `영웅`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인 대 만인`, `나 대 세계;의 관계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는 굉장히 큰 의미를 갖는 존재로 커진 거죠. 그런 것이 낭만주의에서 개인에 대한 자각이고 자의식입니다. 개인의 자각이란 개인의 자유를 뜻합니다. 전체와 분리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재발견이지요.
하지만 막상 독립한다는 것은 자기의 존재 가치와 의미를 고양시켜주는 경험이지만 동시에 불안하고 두려운 이중적 경험입니다. 과연 이러한 자유로부터 자신을 잘 컨트롤 할 수 있을까. 이런 느낌이겠죠.
사회 공동체 속에는 전통 혹은 규범의 무게라는 게 있습니다. 한 쪽 끝에 그런 규범과 전통이 있다면 다른 쪽 끝에는 개인의 극대화된 자아가 있습니다. 이걸 가장 크게 확장시키면 `나=세계` 혹은 `나=신`이 됩니다. 이때 신은 보통 악마의 형상입니다. 악마란 신이라는 전통과 규범의 세게에서 분리되어 나온 존재이니까요. 천사가 타락하면 악마가 된다고 얘기하죠. 하지만 사탄은 저쪽에서 보면 반란자의 형상이지만, 이쪽에서 긍정하게 되면 기존의 질서에 굴복하거나 예속되지 않은 자유로운 정신이라고 양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햄릿 역시 자신이 지켜야 할 규범이 있으니 그걸 준수하기만 하면 되는데 반대편에는 `내가 곧 신`인 세계, 자기 자신이 가치의 창조자이고 입법자인 세계가 있습니다.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의 주인공인 햄릿은 결국 그 사이에서 고투하는 인물입니다. 어쩌면 현대인들도 여전히 그와 같은 상황에 놓여 있을지 모릅니다.
햄릿은 복수극이지만 정확히 얘기하면 복수 `지연`극이라고 합니다. 이 작품은 부왕에 대한 복수가 왜 지연되는가에 대한 드라마이고 이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풀어야 할 수수께끼라고 합니다. 만약 햄릿을 이해하려고 하면, 그가 왜 복수를 지연시키는지 알아야겠죠.
햄릿이 폴로니어스를 죽이고 친구들을 죽게 만들 때 전혀 주저하지 않았던 인물이 클로디어스(숙부)를 죽이는 일에서는 왜 그렇게 주저할까요? 클로디어스가 햄림에세 뭔가 틀별한 의미를 갖는 인물일까요? 왜 못하는지에 대한 프로이트 식 해석은 이렇습니다. 햄릿도 어릴 적 어머니와의 관계를 독점하기 위해 아버지 살해를 소망했다고 합니다. 어머니에 대한 애정 때문에 햄릿도 아버지와 라이벌 관계가 되고, 살부 욕망을 갖게 되죠. 그런데 클로디어스가 아버지를 죽였으니, 클로디어스는 햄릿 자신이기도 합니다. 자기가 지녔던 욕망, 그러나 억압되어 있던 욕망을 성취한 인물인 겁니다. 즉, 아버지의 원수이면서 자기 자신의 대변자이기도 합니다. 만약에 클로디어스를 죽이려고 한다면 그 자신도 징벌해야 하는 것이죠.
하지만 작가가 생각하는 복수의 지연 이유는 햄릿이 아버지 햄릿을 자기의 모범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오이디푸스 콜플렉스 단계로 보면 `경쟁자`관계에서 `전범`으로 옮겨갔다는 거죠. 어머니를 독차지하기 위해서는 아버지를 제거해야 하는데, 아버지는 그러기엔 너무 강하니까 현실 원칙을 수용하는 것이죠. 내가 아버지처럼 되면 엄마를 차지할 수 있으니, 아버지 같은 남자가 되려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햄릿의 문제는 모델이 갑자기 클로디어스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아버지 햄릿과 같은 남자를 욕망한다. 나도 그런 남자가 되어야지˝ 여기까지는 괜찮았는데 어머니가 클로디어스 같은 남자도 원합니다. 그러니 어머니의 욕망이 수수께끼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수수께끼도 해소되어야먄 햄릿이 행동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원래 아버지와 같은 인물이 되면 됐는데, 갑자기 어머니가 클로디어스 같은 인물을 욕망의 대상으로 만듦으로써 햄릿에게는 혼란이 발생합니다. 햄릿의 많은 말, 많은 독백이란 사실 행동의 결여를 감추는 연막같은 겁니다. 말로 행동을 대신하는 것이죠. 그럼으로써 행동을 계속 지연시키는 것이고요.
햄릿의 가장 결정적인 변신의 계기라고 보는 장면은 햄릿이 무덤지기를 만나서 궁정의 과대 요릭의 해골을 보는 대목입니다. 이것이 이후 햄릿의 행동이나 성격을 바꾸는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햄릿이 얻은 깨달음은 ˝참새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데도 다 하늘의 섭리가 있다˝로 압축됩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일종의 숙명론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이후 햄릿은 행위의 주체가 아니라 에이전트(수행자)가 됩니다. 북수의 주체가 아니라 복수의 수단이 되지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이미 결정되어 있고, 나는 그것을 따르기만 하는 거죠. 미션을 부여받은 햄릿이었습니다. 그 간극 때문에 행동이 지체되다가, 그걸 포기하고 순리를 따를 때, 즉 `let be`를 따를 때 비로소 행동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만 순리로 맡기는 변신에 따라, 햄릿이 가진 고민은 깨달음으로 바뀝니다.
햄릿은 `복수`라는 텍스트 안에서 여러가지 상황(아버지와 아들 관계, 운명론, 행동론 등)을 만들어 복수라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 물어보는 것 같습니다. 특히 운명론의 경우 자신의 정체성과 결부시켜 자신의 인생, 복수에 대한 선택까지 모든 것은 처음부터 결정되어 있진 않았나 하는 결정장애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고 하죠. 하지만 인간은 이 선택해야 한다는 운명 앞에서 두려워하고 피하려고 하며, 선택했다면 잘한 선택인지, 잘못된 선택인지 결정하는 것조차 버거워합니다. 이것이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고 하는 것인지도 모르겟습니다. 그래서 햄릿처럼 운명이나 믿으며 목수에 대한 답안지를 편하게 풀고자 했던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봤습니다.
5. 멀쩡한 정신만으로 살 수 있을까? - [돈키호테] 그 숭고한 광기에 대하여
돈키호테는 가장 많이 알려진 소설이지만 자세한 내용을 묻는다면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작품인 것 같습니다. 미치광이 기사라는 인물 성격에 대해서만 알고 있었지 자세한 내용은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이라면 대부분 모를 것입니다. 저 역시 2권짜리의 많은 양이라는 사실조차 몰랐으니깐요. 돈키호테라는 인물은 기사도 소설을 밤낮으로 읽어낸 나머지 소설 이야기들과 현실이 더 이상 구분되지 않는 주인공이 방랑기사의 여정에 오르는 이야기라고 합니다. 특히, 주인공의 광기와 함께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이 광기의 의미에 대해서 소설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무엇이 광기이며, 그것은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같은 질문을 던져볼 수 있는 거지요.
햄릿의 저자 셰익스피어와 이 책의 저자 세르반테스가 동시대 작가이며, 특히, 같은 날 죽었다는게 흥미롭습니다. 4월 23일인데 이 날을 기념하는 것이 1995년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 책의 날`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어느 작가가 사람의 유형을 햄릿형고 돈키호테형으로 구분을 했는데 재미있습니다. 햄릿은 사색가형, 돈키호테는 행동가형이라고 하죠. 당시 러시아에 사회적 의미를 부여하고자 이렇게 구분을 했다고 합니다. 러시아에는 햄릿형 사색가만 너무 많고, 돈키호테형 행동가가 더 많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을 얘기하고자 두 인물을 비교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나라에는 어떤 타입의 인물이 더 필요할지 생각해봤습니다. 계속 되풀이되는 이야기지만 요즘 사람들은 사색이라는 단어가 생소할 정도로 독서나 주체적인 사상같은 것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행동을 하느냐, 그것도 아니죠. 그럼 무슨형일까? 그래도 나름 열심히 일하면서 어떻게든 잘 살려고 노력하고 있으니 노력형이라고 하는게 맞겠네요. 아무튼 당시 러시아에서는 햄릿과 같이 생각은 많지만 행동은 결여된 지식인 쪽으로만 편중되어 있으니까 돈키호테와 같은 행동가를 더 원했습니다.
돈키호테는 분량이 방대하지만 대단히 모던한 작품이라고 합니다. 어떤 `자의식`이 있다는 얘기인데 즉 `이건 이야기이고 소설이다`라는 자의식을 말하죠. 돈키호테란 작품이 그런 자기 참조성, 자기 반영성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자기 반영성이란 것은 모더니즘 영화의 주된 특징이기도 합니다.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보다 먼저 발표했던 작품이 라 갈라테아인데 소설속 돈키호테의 서재에 꽂혀 있는 책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책입니다. 자기가 자기 소설속에 나오는 것, 이게 자기 반영성입니다. 이 방랑기사 돈키호테의 본질적 성격은 무엇일까요? 중년에 접어둔 카스티야의 하급 귀족, 가난하지만 자존심 강한 시골 신사인데, 기사소설만 잔뜩 읽었다는게 특징입니다. 완전히 정신이 돌아버릴 정도로 읽은거죠. 요즘 시대를 예로 들자면 게임하면서 게임 속 가상과 현실을 구분 못하는 사람정도 되겠네요. 소설을 보면 1부는 돈키호테의 착각 때문에 빚어지는 에피소드들이고, 2부는 돈키호테의 착각이 아니라 공작 부분가 돈키호테를 놀림감으로 삼으려고 연구하고 연극을 꾸미는 식의 에피소드들로 구성돼 에피소드의 성격이 달라집니다. 어찌 보면 2부가 더 짖궂고 잔인합니다. 그래서 2부 정도 되면, 독자들의 태도와 정서도 좀 달라집니다. 1부에서는 희화화된 돈키호테를 우습게 받아들이지만, 2부에서는 유일하게 진정성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 돈키호테가 되고, 주변 인물들은 허위와 위선에 빠져 있고 더 사악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때부터 독자는 돈키호테에게 좀 더 공감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불쌍한 몰골의 기사는 그저 황금시대를 꿈꾸는 시대착오적인 미치광이일까요? 주변에서는 다들 미친 짓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미친 짓이 아니라면 돈키호테에게 어떤 삶이 남이 있었을지도 의문입니다. 자기 삶의 의미나 사명을 다른 일에서 찾을 수 있었을지 모르겟습니다. 그리고 돈키호테가 정말 미친 것인지, 아니면 미친 척한 것인지 헷갈릴때가 많습니다. 일반적으로 미친 사람은 끝까지 자기 생각을 우기는 법이죠. 보통 미쳤다고 하면 ˝저게 왜 세숫대야냐? 맘브리노의 투구지˝라고 말하지만 하지만 돈키호테는 ˝너한테는 세숫대야일지는 몰라도, 나한테는 투구다`라고 말합니다. 자신과 다른 사람의 시각 차이를 인정하고 있죠.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도 그렇습니다. 자기가 늙은 시골 귀족이지만, 동시에 라만차의 돈키호테라고 생각합니다. 동시에 다른 사람으로 존재하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명명하고 창조하죠. 진실은 시각차이에 있습니다. 돈키호테가 말하는 것들이 `시차적 진리`라고 이름 붙일 만한게 아닐까 싶어요. 돈키호테의 태도는 `이상이라는 게 이미 사라진 시대착오적인 것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나는 이걸 고수하겠다`라는 쪽에 가까운데, 이건 그 이상이 진실이라고 믿는 태도와는 좀 다릅니다. 그게 진짜라고 믿는 것과, 그게 허상이고 이미 현실성이 없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고집하는 것, 즉 현실과 이상 사이의 긴장을 계속 유지하는 것은 별개의 태도죠.
일반 사람(현실주의자)는 오직 하나의 현실만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돈키호테가 경험하는 현실이란 양면적입니다. 평범하지만 나에겐 특별하다. 다른 사람과 조금 보는 것, 생각하는 것이 틀릴 뿐이지 미친 것은 아니다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돈키호테가 죽을 때의 유언의 내용은 자신이 미치광이였다는 걸 인정하고 용서를 비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광기가 돈키호테의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정작 광기에서 빠져나오자 돈키호테는 죽어버립니다. 즉 하나의 현실만 갖게 되었을 때 죽게 된 것이죠. 현실과 이상 사이의 긴장을 견지할 때 다른 사람들은 그가 미쳤다고 하지만 그 자신은 삶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습니다. 달리 생각하면 돈키호테는 숭고한 이상을 위해 돌진하는 모든 이들의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두에 당시 러시아에서는 자기가 가진 이상을 향해 돌진하는 행동가 타입의인물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다른 맥락에서도 이런 인물이 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상과 현실의 간극을 알고 있지만 그 간극을 무화시키지 않고, 억지로 제거하지 않고 받아들이며 끝까지 밀고 나가는 그런 인물. 돈키호테는 세계 문학사에서 가장 유명한 주인공의 하나이며 광기의 대명사지만 돈키호테를 읽은 독자에게 그는 단순히 우스꽝스러운 미치광이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흔히 곱게 `곱게 미치라`고 충고하지만 돈키호테는 `숭고하게 미친`사례라고 할 수 있을까요. 돈키호테의 모험담을 마주하게 되면 광기 없는 삶이란 무난한 공허에 불과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일상의 안락에 파묻혀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이 문득 `불쌍한 몰골`로 비칠 때 우리는 다시금 돈키호테를 떠올리게 될지도 모르겟습니다.
무슨 일을 할 때 `제대로 하려면 미쳐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정신은 미칠때까지는 하지 않도록 셋팅되어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무슨 일이든 미칠정도로 하진 않으니까요. 미칠정도로 하는 것 보다야 즐기면서 하는게 더 좋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요즘같은 세상에서는 행복을 우선시 하기 때문에 쉽게 미치려고 하지 않죠. 하지만 스티브 잡스, 에디슨, 아인슈타인과 같이 세계적인 위인들을 보면 다른 사람보다 뇌의 3~5%정도를 더 쓴다고 합니다. 이런 것이 미친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지만 돈키호테처럼 숭고하게 미친 사람이 일반사람들보다 더 뛰어날 수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한편으로는 이들이 우리의 재미없고 평범한 삶을 사는 걸 보면 `미친 것들 왜 저렇게 재미없게 살아?`라고 생각하며 우리를 미친사람으로 보진 않을까요?
6. 사람은 무한한 꿈을 가져야만 하는가 - [파우스트]의 구원을 비딱하게 바라보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의 대표작 `파우스트`는 중년을 위한 작품입니다. 놀기만 하기엔 너무 늙었고, 소망 없이 살기엔 너무 젊은 나이가 중년이라면요. 이대로 늘기엔 뭔가 억울하고 다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기엔 좀 늦은 듯싶은 나이가 `파우스트`를 일기에 딱 좋은 나이입니다. 그럼 파우스트라고 하면 떠오르는 인간형이 무엇인가요? `파우스트적 인간`은 어떤 인간을 말하는 건가요? 가장 대표적인 것은 그가 무한한 욕망의 표상이라는 것입니다. 무한한 욕망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무엇에도 만족할 줄 몰라야 하죠. 인간에게 무한한 욕망이라고 하면 지식욕, 성욕, 권력욕을 들 수 있습니다. 물론 다른 욕구도 있을 수 있겠지만, 파우스트는 이 세가지 욕망에서 모두 끝까지 가보는 인물입니다. 그리고 그 결론은 `도달할 수 없다`는 겁니다. 무한한 욕망이란 결코 달성될 수 없고 그 끝은 부질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말에서 파우스트는 구원받습니다. 인간이 방황하더라도 노력하려고 앴는 한 구원받는다는 것이 괴테가 남긴 메시지인데, `타협하지 않는 것, 끝가지 가보는것` 혹은 `갈 데까지 가보는것`이것이 파우스트의 스타일이라고 합니다.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파우스트의 모험과 편력, 욕망의 끝은 보여주는 식으로 전개됩니다. 그리고 결말에 이르러서는 두 가지 메시지를 던지는데 `방황해도 노력하는 자도 구원받을 수 있다`와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구원한다`입니다. 욕망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메피스토펠레스는 파우스트에게 ˝삶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건 다 얻었는데 행복한가?라며 그레트헨과의 관계를 더올려줍니다. 파우스트는 그레트헨을 보고 몸이 달아서 메피스토펠레스를 닦달하기도 하며 결국 욕망을 채웁니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이 문제입니다. 파우스트가 그레트헨에게서 가장 강렬하게 원했던 걸 갖게 된 그 수간에 `딴 생각`을 하게 됩니다. 생각이라는 건 만족감이 다 채우지 못한 빈틈 같은 겁니다. 그 틈새를 생각이 지비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게 점점 커지고 권태를 유발하게 됩니다. 이게 파우스트의 병입니다. 푸슈킨은 문학작품을 통해 학습한 `권태`를 파우스트라는 희곡을 통해 보여줍니다. 만약 이런 `생각의 과잉`, `의식의 과잉`에 의한 권태가 근대적 인간의 공통적 특징이라고 한다면 파우스트는 우리 모두의 모델이 될 수 있습니다. 욕망역시 그렇습니다. `무한한 욕망`이라는 것도 우울증이나 권태처럼 학습된 것, 즉 발명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욕망이란 학습되고 부추겨지는 것입니다.
파우스트는 인식을 위해서 삶을 희생합니다. 삶을 산게 아니라 삶을 투자해서 인식을 얻으려고 합니다. 파우스트가 기대하는 것은 신적인 앎입니다. 은밀한 곳에서 세계를 통제하는 힘을 깨닫고자 합니다.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욕망입니다. 그렇듯 파우스트는 이 세계를 관장하는 진리와 법칙을 알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능력과 유한성에 좌절하고 절망합니다. 그러던 파우스트가 메피스토펠레스의 제안에 따라 계약을 맺습니다. 계약 조건은 지상의 삶에서 만족감을 느끼게 되면 영혼을 내주겠다는 조건입니다. 자신이 지극히 만족하는 한순간의 희열을 맛볼 수 있다면 그때는 인생이 바로 끝나버려도 좋다는게 파우스트의 생각입니다. 파우스트는 어째서 그토록 만족을 원할까요? 그만큼 쌓인게 많아서입니다. ˝세상이 내게 무엇을 줄 수 있단 말인가? 부족해도 참아라! 부족해도 참아라! 이것이 영원한 노래다. 하지만 나는 더 참지 못하겠다˝ 이게 파우스트의 불만입니다. 아무튼 파우스트는 이제까지 앎을 위해 욕망을 억제해왔지만 `인생의 황금나무`는 다 지나가버렸고, 허망함을 참지 못해 아무런 망설임 없이 악마와 계약을 하게 됩니다. 이제껏 세상은 인식의 대상이었지만, 이제 그는 세상을 경험해보려고 합니다.
파우스트의 형상이 `영원히 남성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영원히 여성적인 것`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을 이 작품의 여성들, 즉 그레트헨과 헬란, 말미에 등장하는 성모마리아에게서 찾기도 합니다.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는데 일단 `주체`가 아니라 `객체`이고 또 헌신적이면서 수동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레트헨은 신앙심이 깊습니다. `한계에 순응하고 적당히 멈출 줄 아는 태도`가 영원히 여성적인 말이라는 것 같습니다. `갈 데까지 가보려는 태도`와는 반대로 말이죠.
마지막 파우스트는 아직 해봐야할 게 남았습니다. 권력이죠. 그의 욕망의 마지막은 `지배자 비극`입니다. 파우스트의 무모한 욕망은 인간들만 지배하는 게 아니라 자연도 지배하려고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평범한 백성드을 수족처럼 부리고 노동력을 쥐어짜게 됩니다. 과연 그가 이루려는 유토피아는 무엇일까요? 아무리 방황한다고 해도, 선의에 의한 것이라면 용서된다는 게 이 작품의 전제였죠. 이게 바로 그의 선의입니다. 대규모 간척 사업을 통해서 혼자만의 부귀영화를 누리려던 게 아니라 모두가 잘 사는 공동체, 국가를 이우려고 했죠. 하지만 이 선의를 위해서 많은 사람이 희생됩니다. 과연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많은 이들의 희생은 감수되어야만 하는가? 때론 개인적 욕망을 감추기 위해 ˝더 나은 미래`라는 구실을 만든 것은 아닐까요? 전쟁, 공사, 철거 등 이런 것들은 진정 누구를 위한 것인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십니다. 버려진 땅을 모든 사람을 위한 낙원으로 만드는 것이 목적이라지만, 파우스트의 방식은 윤리적이지도 민주적이지도 않습니다. 지금 관점에서 보면 이 `개발지상주의자`파우스트는 근대의 기획자이자 근대성의 화신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렇다면 악마에게 영혼을 팔고 살인도 마다하지 않으면서까지 자신의 욕망을 추구한 파우스트는 결국 무엇을 얻게 되었을까요? 그의 방황과 편력이 영혼에 대한 구원을 정당화할 수 있을지 질문해볼 수 있습니다. 괴테가 사적인 자리에서도 밝힌 적이 있는데 `파우스트가 구원을 받게 된 열쇠가 뭐냐`라고 묻자, `언제나 갈망하면서 애쓰는 것에 구원의 열쇠가 있다`라고 합니다. 하지만 방황이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삶까지 파괴하더라도 `노력`으로 간주될 수 있을까요? 자신의 청춘의 한 시절을 대가로 지불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다른 사람까지 희생시킨다면 문제가 있다고 봐야하지 않을까요? 파우스트는 `수천의 `손드을 조정하고 희생시켰습니다. 지배자 비극은 퍽 현실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개발독재를 비판하는 여러 작품들의 원 모델이 되어주는게 이 지배자 비극입니다. 파우스트적 지배자 형상이 20세기 나치 동일에서는 영우적 지도자의 모델이 됩니다. 나치는 많은 작품을 금서로 지정했는데 파우스트는 유독 열광적으로 수용합니다.
파우스트는 뭔가를 이루고 욕망을 충적해서 행복해진 것이 아니라 드높은 행복을 예감하면서 최후의 순간을 맛봅니다. 여기서 파우스트는 현실에 만족하는 게 아니라, 미래의 예감에 만족합니다. 과연 파우스트는 구원받아도 되는 인물이었을까요? 파우스트적 욕망이 일반화된 사회에서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라고 부추기는 사회에서, 무한한 욕망이 사회의 동력으로 간주되는 이 `가차 없는 자본주의`사회에서 파우스트가 보여주는 욕망의 끝은 재 평가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