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면서 걷다
한여울 지음 / 큐리어스(Qrious)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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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면서 걷다>는 제목에 마음을 뺏겨 읽게 된 책이다. 연달아 읽게 된 책들의 제목에 ‘울다’라는 동사가 들어간 것은 퍽 우연이었겠으나(서평책을 신청한다고 모두 선택되는 건 아니니 말이다) 뭔가 이런 종류의 책들을 읽어보고 싶었던 건, 요즘 내 마음 속 얼마쯤은 ‘울고 싶다’라는 생각을 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처음 받아본 책은 바다처럼 파랬다. 꼼꼼히 같은 톤으로 균일하게 칠해진 게 아닌, 누군가 손으로 칠한 듯 번진 것 같으면서 바랜 듯한 느낌이 드는 책의 첫 느낌이 좋았다. 책 표지에 적힌 '나 자신이 물고기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는 프롤로그의 첫 문장과 퍽 잘 어울리는 표지색이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울면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터득했다.
따뜻한 햇살만으로 꽃은 피어나지 않는다.
가끔은 몇 방울의 빗방울이, 바람이, 약간의 먼지가,
거친 흙이, 그를 더 단단하고 찬란하게 만든다.(4쪽)


프롤로그에 적힌 이 문단을 보며 생각했다. <울면서 걷다>는 정말 책 제목 그대로 울면서도 걸어갔던 작가의 이야기겠구나. 좋아도 울고 슬퍼도 울던 작가의 '길 위에서 울었던 시간들'이 담겼겠구나. 언뜻 예상되는 이야기들 말고 다른 이야기들도 나오려나. 뭐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책을 읽어나갔다.


'외면'은 '버림받다'의 다른 말이란 것을, 알았다. (10쪽) 
이런 종류의 가슴을 쿵, 때리는 문장도 있고,


세상에 있는 모든 책을 다 읽어버리고 싶은 욕망으로 그득하다. 예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다. 그렇지만 지독하게 게을러서 빌려온 책도 채 읽지 못한다. 투지는 있는데 의지가 없다. (31쪽)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시청각 거리를 둔다. 까칠해진 마음이 둥글게 다듬어질 때까지 몸을 웅크린다. 그리곤 잠을 청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괜찮은 방법이다. (39쪽)

어? 이거 난가? 싶을 정도로 닮은 모습도 책 속에 있었다.


또한 그림을 그리고, 영화를 찍고, 그리 화목하지 않은 가족들이 있고, 고양이와 함께 사는 작가의 모습이 책에 고스란히 등장한다. 각각의 이야기마다 자세한 설명보다는 감정들이 한가득 놓여 있어서 꽉 차지 않은 느낌도 있지만, 그 빈공간을 자그마하고 커다란 그림들이 채워주는 느낌도 들었다. 그림에세이답게 매번 등장하는 그림들은 그 당시의 작가를 상징하기도 하고, 뭔가 추상적인 이미지를 표현하기도 했다. 작가는 자신의 그림을 '못생긴 그림'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아기자기한 느낌이 드는 그림들이라 작가의 그 말에는 살짝 반기도 들어본다.


작가가 사랑이야기를 잘 쓰는 느낌은 아니어서, 개인적으로는 앞쪽 파트들이 더 좋았다. 울면서 앞으로 계속 나아가던 나날들의 이야기들 말이다. 상처에 다정하게 말을 걸고, 나의 아픔을 직시할 줄 알며, 그래도 어떻게든 해내는.


자주 이런 상황을 마주하는 내 모습을 살짝 옮겨보며 글을 마친다.


아, 하기 싫다.
아니야, 해야지.

일단 일어나서 책상 앞에 앉으면 반은 성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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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그저 사랑이라서
천성호 지음 / 넥서스BOOKS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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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순간 반짝 튀어 오르는 불꽃놀이가 아닌 은은하게 타오르는 벽난로 장작불처럼 서서히 더 좋아지고 따뜻해지는, 꾸준히 장작을 밀어 넣어 불꽃이 움츠러들지 않게, 은은하게 타오르는 장작불 앞에 나란히 발을 뻗고 앉아 오손도손 이 얘기 저 얘기 꺼내드는, 별다른 스토리 전개가 없는 밋밋한 로맨스 영화처럼 잔잔한 물결만 일렁이는 그런… 소란하지 않은 산문적 연애이길.(145쪽)


언뜻 스쳐간 글귀 하나가 마음에 들어와 자리잡는 일. 내게 <사라은 그저 사랑이라서>가 바로 그런 책이었다. 별 생각없이 책 소개를 보다 발견한 '소란하지 않은 산문적 연애이길.'이란 한 문장, 내가 가장 이상적으로 꼽는 연애의 형태를 글로써 마주한 기분이었다. 사실 책 소개는 대충 훑는 스타일이다. 책의 한 부분을 보고 책을 선택하는 일 같은 건 잘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니 이 문장을 스쳐보냈을 가능성도 충분했다. 하지만 난  책 소개에서 이 문장을 발견했고, 그래서 이 책을 선택하게 됐다. 꽤 운명적인 책과의 만남이었다.


이번에 처음 만나게 된 천성호 작가. 전작들을 보지 못했고, 단순히 한 문장에 이끌려 책을 선택했기에 아무런 정보도 없는 상태에서 책을 마주했다. <사랑은 그저 사랑이라서>는 절절한 슬픔과 불타오르는 사랑의 순간들 보다는, 그런 감정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 사랑을 이야기한다. 몽글몽글 사랑의 감정도 등장하고, 아픔을 간직한 헤어짐도 등장하지만 말이다. 책 속의 화자는 감정을 토해내지 않는다. 어찌보면 조금은 건조하다 할 만큼.


사랑은 결국 각자의 몫으로 각자의 길을 걸어간다. 사랑은 타인으로부터 동화되지 않는다. 다만 세상에는 여전히 사랑이 존재하는구나, 그걸 새삼 깨달을 뿐이다. (21쪽)


이별이란 게 접촉사고 같은 거더군요. 사고가 발생한 직후엔 잘 모르다가도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후유증이 밀려오는 것. 아프지 않았던 곳들이 하나둘 아려오는 것. 그러다 어느 날, 불쑥 주저앉고야 마는 것. (36쪽)


싫지 않은 찬 공기가 불어오는 이 계절, 쟁여둔 몇 벌의 마음을 꺼내놓고서 그 마음들을 한 벌씩 다려 갑니다. 당신의 계절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133쪽)


나는 그래서 이 책이 더 마음에 들었다. 사랑 에세이라면 응당 존재하는 폭발적인 감정들의 파편들이 보이지 않아서, 너무 아팠던 어떤 날을 떠올리지 않아도 되어서, 순간의 감정들을 옮기는 게 아니라 순간이 아닌 감정들을 옮겨 놓아서 말이다. 친구의 이야기를 전하기도 하고,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하기도 하고, 그저 사랑의 보편론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가끔은 술에 취하기도 하고, 누군가의 순간을 보며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기도 하고, 낯선 여행지에서 당신을 만나기도 한다. 하지만 그때의 괴로움까지 전하지는 않는다. 그저 지나간 사랑으로 얻은 깨달음들을 적어 두었을 뿐.


작가는 '나의 계절은 사랑입니다'라 소개하며 자신의 계절들을 책에 소개했다. 글 속의 섬세함이 그 당시의 계절에 얼마나 반영되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지나온 계절들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따뜻한 계절들을 지닌 작가기에 따뜻한 글을 쓰는 걸지도 모르겠고. 책의 처음에서 작가는 여전히 자신은 사랑으로 가는 계절 속 어딘가에 살고 있다고 전했다. 계절은 지나가는 것. 영원히 머무를 수도 있지만, 왔는지도 모르게 지나칠 수도 있다. 지나간 계절에 화를 내지 않듯, 다가올 계절에 미리 지레짐작하지 않듯, 그저 다가올 계절로 걸어갈 뿐이다.


책을 통틀어 사랑을 계절로 표현한 첫 부분이 가장 기억에 많이 남는, 군데군데 예쁜 문장들도 많이 있는, 내 마음과 퍽 많이 통하는 '산문적 연애'가 등장하는, 퍽 따뜻한 사랑 에세이 <사랑은 그저 사랑이라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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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니커 마니아를 사로잡은 스니커 100
고영대 외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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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니커 마니아를 사로잡은 스니커 100>이란 제목을 딱 봤을 때, 현재 힙한 스니커 트렌드를 보여주는 줄 알았다. 현재 어떤 브랜드의 스니커가 인기가 있고, 어떤 추세이며, 앞으로의 트렌드는 어떻게 흘러갈지를 스니커들의 변천사와 함께 정리하는 책. 하지만 제목만 보고 예상한 내 모든 생각들은 전부 틀렸다. <스니커 마니아를 사로잡은 스니커 100>은 스니커를 소개하는 책은 맞지만 현재의 트렌드나 트렌드 예측 같은 내용은 전혀 들어 있지 않다. 


어떤 것을 좋아한다는 건 어떤 행동을 하게 만들까? 관심이 계속되면 그와 관련된 정보를 찾으며 지식을 쌓게 만들고, 소유하기 위해 돈을 필요로 하며, 이것들은 내 시간과 노력까지도 많이 잡아먹는다. 여가시간을 좋아하는 것을 위해 쓰면서 충만한 만족감을 갖는 것- 좋아하기에 시간과 노력과 심지어는 돈까지 들여가며 전문가들 못지 않은 전문 지식까지 쌓는다. <스니커 마니아를 사로잡은 스니커 100> 속에 등장하는 10명의 마니아들도 전문 지식까지 술술 풀어놓는 자칭 타칭 스니커 전문가들이다. 


10명의 마니아들은 자신의 컬렉션 중 대중에게 소개하고 싶은 10켤레씩을 그리 길지 않은 코멘트들과 함께 소개하고 있다. 코멘트는 자신이 컬렉팅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는 스니커라든지, 현재의 트렌드를 바꿔놓은 획기적인 스니커라든지, 스니커의 판도를 뒤흔드는 센세이션을 일으킨 스니커 같은 이야기를 담았다. 스니커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거나 해당 스니커에 얽힌 자신의 개인적 이야기를 하거나 대개 이야기의 방향은 둘 중 하나지만, 그 어떤 스니커도 이야기가 겹치지 않는다. 완벽하게 똑같은 이유로 똑같은 물건을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는 게 가능하긴 할까 같은 엉뚱한 생각을 했을 정도로, 생각도 사연도 각각 다른 100개의 이야기를 읽는 건 흥미로웠다. 내가 보기엔 다 비슷비슷해 보이는데 그 스니커들마다 다 다른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어글리 슈즈'의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다는 발렌시아가 트리플 S의 이야기가 가장 즐거웠다. 다른 스니커들에 비해 이 이야기는 하나의 슈즈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트렌드를 이끈 슈즈에 대한 이야기였고, 지금 유행하고 있는 어글리 슈즈의 시작점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어글리 슈즈를 봤을 때와 많이 익숙해진 지금의 어글리 슈즈는 그 느낌부터가 많이 다른데,(사실 처음 어글리 슈즈를 보면서 '뭐 저런 신발을 신어?' 같은 생각을 했었으니 말이다. 지금은 외려 그 투박함이 예뻐 보일 때도 있어 가끔은 나도 당황스럽긴 하다.) 유행을 이끌기 위해 세상에 등장한 것은 아니었으나 유행을 선도하게 된 스니커를 보니 뭔가 신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책을 보면서 가장 눈길이 갔던 부분은 마니아들의 짧은 인터뷰다. 10켤레의 스니커를 소개하기 전, 스니커 컬렉터를 소개하는 간단한 인터뷰(질문 5개)가 있는데, 짧은 답변만으로도 이 사람은 스니커를 이런 마음으로 모으고 있구나 라는 걸 어느정도 느낄 수 있는 부분이었다. 또한 스니커를 같이 컬렉팅하고 있음에도 서로 매력이라 이야기하는 부분들도 모두 달랐던 것도 흥미로웠다. 내가 알지 못하는 세계지만 뭔가 깊게 파고드는 사람들의 일종의 자부심같은 것도 조금은 느꼈던 것 같고. 


사실 콜렉터들도 그들의 시작은 그냥 스니커가 좋아서였을 거다. 하나 둘 스니커를 사게 되고, 정보를 모으면서 지식을 쌓다보니 그 분야에서 전문가의 뺨을 칠 정도가 되었을 뿐이다. 책에 등장한 10명의 프로필을 보면 스니커와 관련된 일을 하고 있는 사람도 있지만 아닌 사람도 있으니 말이다. 무언가를 좋아해 그 분야에 자타공인 전문가가 되어 정보를 나누는 위치에 서는 것. 얼만큼의 노력으로 이루어졌는지 상상도 되지 않는다. 다만, 그렇게 자신의 정보를 나누며 더 나은 문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의 모습은 참 좋아보였다. 무엇보다 무언가에 푹 빠져있을 만큼의 열정이 아직까지 나에겐 없는 것이라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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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따위 레시피라니 - 줄리언 반스의 부엌 사색
줄리언 반스 지음, 공진호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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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유명한 작가 '줄리언 반스'. 줄리언 반스라는 이름은 모르더라도, 영화로까지 만들어진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라는 책 제목은 한 번쯤은 들어봤을 거다. 우리나라에선 맨부커상 때문에 한동안 온라인 서점 메인에 걸려있기도 했고 말이다. (내가 읽은 책이 상을 받았다 해서 괜스레 뿌듯했었다.) '예측할 수 없었던 소설만큼이나 돋보였던 유려한 글.' 나는 줄리언 반스를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그런 그가 쓴 음식 에세이가 발매된단다. 줄리언 반스라는 네임벨류만으로도 읽어야겠단 생각을 했을 텐데 그가 쓴 음식 에세이라니. 이건 꼭 읽어야 하는 거다. 앞뒤 재지 않고 읽기로 했다. 


<또 이따위 레시피라니>라는 독특한(?) 제목을 갖고 있는 이 책은, 마크 힉스라는 영국의 유명한 셰프의 추천사로 시작한다. 요리사들이 간과하는 독자의 심정, 어렸을 때부터 따로 요리를 가르치지 않는 문화 등을 성토하며, 마지막에 '내가 지금까지 말한 사항들의 많은 부분을 논한다.'라는 말을 추가하며 추천사를 끝맺었다. 추천사에서부터 흥미가 돋아났다. 제목에서 이미 나타내고 있다시피 레시피에 유감이 아주 많았나?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 책은 레시피에 유감이 아주 많은 줄리언 반스의 조목조목 레시피 해부기다. 필요해서 샀는데 정작 쓸데 없는 요리책에 관한 부엌 현학자의 성토이자, 겁 많은 부엌 초보의 요리(대체로 망하는) 경험기다. 엉망진창 부엌에서의 좌충우돌하는 요리사의 멘붕기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아주 빵빵 터지는 건 아니지만 소소한 공감과 생각들이 절로 웃음짓게 만드는 기분 좋은 책이기도 하다.


줄리언 반스의 요리 경험치는 다음의 몇 구절로 설명 가능하다.

나는 장을 보러 갈 때 정확한 목록과 친절한 요리책이 있어야 한다. 가벼운 마음으로 장을 보는 이상적인 일, 즉 장바구니를 팔에 걸고 경쾌하게 걸어가며 편안한 마음으로 당일 최상의 식재료를 사 가지고 와서 전에 만들어본 것이든 아니든 무언가를 임의로 요리해내는 그런 일은 영원히 내 능력 밖의 일일 것이다.(22쪽)

나 자신보다는 주방 기구를 신뢰한다. 손가락으로 고깃덩어리를 찔러 익은 정도를 알아보는 일은 아마 영원히 없을 것이다. 나는 또한 요리할 때 맛보기를 꺼린다. 다시 말해서 나중에 음식을 내놓았을 때 다른 맛이 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 두렵다는 말이다. (23쪽)

요리를 시작한 지 꽤 시간이 흘렀으나 여전히 요리에는 자신이 없고, 레시피 없이 자신있게 만들 수 있는 요리는 한정적인, 도전의지는 충만해서 레시피를 보며 여러가지 음식을 만들어보긴 하지만 높은 확률로 실패하고 마는 여전히 초보 요리사. 자꾸만 불명예를 떠안는 줄리언 반스. (46년생. 유명한 소설가. 부엌 현학자)

엘리자베스 데이비드는 이렇게 말한다. “요리를 그르칠 가능성은 우리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그걸 따돌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래도 그녀는 다음과 같은 리처드 올니의 말에 동의하리라. “실패는 창피한 게 아니며, 보통은 성공보다 더 도움이 될 수 있다.”
아무렴, 나도 이상적인 이론으로는 그게 맞는 말임을 안다. 그러나 실제로 대부분의 가정 요리사들에게 실패는 실로 불명예다. (150쪽)


요리를 하나 만드는데도 온갖 생각을 하는 이 소설가는 음식의 이름에서 부역자를 생각한다거나(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협력했던 프랑스 정권의 주석을 생각했다는데, 마치 도리뱅뱅이란 음식을 보면서 청바지를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사고방식이었던 듯 싶다), 책을 쓰려는 요리사는 쇠사슬에 꽁꽁 묶어두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하고(어느정도 나도 동의하는 바다), 요리책을 보지 않는 요리사를 법규를 대충 훑어보는 변호사에 비유하기도 한다. 재료를 부르는 단어의 어원에 대해서 따져보기도 하고, (내가 보기엔 장황한 핑계 같다만) 정확하지 않은 레시피로 실패한 요리에 대한 경험을 늘어놓기도 한다. 레시피를 따라하다 열받은 내용은 기본, 독자에 대한 배려가 없는 (하지만 책을 쓴 요리사로서는 전혀 이상한 걸 느낄 수 없는) 레시피에 대한 분노는 옵션이다. 


무엇보다 요리책 레시피 속 계량 방법에 맹렬하게 이의를 제기할 때는 나도 속이 시원했다.

나는 내가 상당 부분 의존하는 요리책들에 분노하는 일 또한 잦다. 왜 요리책은 수술 지침서처럼 정밀하지 않을까? 레시피에 쓰이는 단어는 왜 소설에 쓰이는 단어만큼도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 걸까? 전자는 몸에, 후자는 머리에 소화불량을 일으킬 수 있는데 말이다. (26쪽)

이 레시피는 설명이 애매한데, 그러면 적절한(아니 그보다는, 겁나는) 해석의 자유가 있다는 건가? 아니면 저자가 더 정확한 언어를 구사할 수 없어서 그런 건가? 한 덩어리(lump), 한 모금(slug), 한 덩이(gout)는 얼만큼이지? 언제를 이슬비라고 하고 또 언제를 그냥 비라고 하느냐 하는 문제와 다를 게 없다. (41쪽)

“두 손을 합쳐 최대한 덜어낼 수 있을 만큼의 딸기를 넣으시오.”라는 리처드 올니의 레시피는 어떤가? 정말 이러긴가?(42쪽)
‘썰다’라는 말은 다섯 갈래로 나뉘는데, 어느 쪽을 택할까 고민하느라 곧바로 작업에 들어가지 못한다. (44쪽)


우리나라 레시피도 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다. 다른 나라 언어보다 부사나 형용사 갯수가 많은 우리나라 특성상 엄마나 할머니가 설명해주는 레시피는 딴 나라 말인 듯 아득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대파 한 줌, 아니다. 대파 한 움큼이랑 새우젓국을 자분자분하게 넣고 한소끔 끓여." tvN 프로그램 <수미네 반찬>에서 김수미가 이야기하는 '엄마표 레시피'를 잘 이해하지 못해 셰프들이 당황하는 모습, 우리네 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라 낯설지가 않다. 줄리언 반스가 한국사람이었다면 부엌 현학자의 투덜거림이 곱절은 늘어났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줄리언 반스가 시종일관 책 속에서 불평불만만 늘어놓는 건 아니다. 요리책을 100권 정도 소장하고 있는 자신의 경험을 살려 '실패하지 않는 요리책을 고르는 노하우'를 전수한다거나, 에두아르 드 포미안이란 요리사의 조언에 따라 지치지 않고 디너파티를 현명하게 준비하는 방법을 일러준다거나 하는 유용한 경험도 얻을 수 있다. 내가 좋아하는 쪽은 전자였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줄리언 반스는 요리에 굉장히 유감이 있는 걸까? 단연코 줄리언 반스는 누구보다 요리를 사랑한다. 요리에 시간을 쏟고, 더 나은 것을 위해 고민하고, 여러 권의 요리책 속 같은 레시피를 비교해보고. 애정이 없다면 일어나지 않을 일들이다. 관심이 없다면 요리에 대한 이러한 깊은 생각들은 태어나지도 않았다. 그러니 책 속 분노들은 줄리언 반스가 자신의 애정을 드러내는 또 다른 방법이지 않을까. "그냥 좋아한다고 말하긴 부끄러우니 이렇게라도 내 애정을 드러내야겠어!" 만화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흔한 츤데레 타입.


더불어 이렇게나 유명하고 명망있는 사람조차 부엌에서는 나와 별 다를 것 없다는 묘한 위안도 얻을 수 있다. 나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 뿐인데, 줄리언 반스가 옆집 투덜이 할아버지쯤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확 가까워진 내적 친분만큼이나 글도 가까워진 느낌이 든다. 유쾌한 투덜이 할아버지가 또 다른 음식 에세이는 언제쯤 내줄는지. 

이론적으론 다 알아. 레시피란 모두 근사치라는 걸, 창의적인 요리사는 그때그때 구할 수 있는 재료와 품질에 맞춰 요리하리란 걸, 불변하는 것은 없다는 걸, 그 밖에 이런저런 걸 다 안다고. 난 그저 한창 요리하는 중에 이런 현실을 맞닥뜨리고 싶지 않은 거라고.(1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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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고치질 않니? - 38만 명을 진단한 전문의가 알려주는 스스로 치질을 고치는 법
히라타 마사히코 지음, 김은하 옮김 / 토마토출판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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잦은 다이어트와 불규칙한 식습관 등으로 당연하게도 나한테는 변비가 있었다. 그래도 변비라는 것에 딱히 불편을 느낀 적은 없었는데, 언젠가부터 화장실을 갈 때마다 변을 밀어내기가 힘들어졌다. 딱딱하게 굳은 변을 밀어내는 건 생각보다 너무너무너무 힘이 들고 아팠다. '아, 똥 안 싸고 살고 싶다!' 이 당시에는 그런 생각까지 하면서 화장실 가는 게 싫어지기도 했었다. 그렇게 호되게 당하고 난 뒤부터는 건강기능식품인 유산균을 챙겨먹게 됐다. 유산균이 배변활동에 도움을 준다는 건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이니까. 또한 레몬밤이나 새싹보리 분말도 챙겨먹고 있다. 그냥 채소를 섭취하는 것보다 몇 십배나 많은 식이섬유를 함유하고 있다고 해서다. 매일 무언가를 챙겨서 먹어야 한다는 게 퍽 귀찮은 일이지만, 그래도 1년 가까이 꾸준히 노력하고 있다. 덕분에 변비에서 많이 자유로워졌고 딱딱한 변을 마주하는 일이 크게 줄었다. (노력이 빛을 발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변비는 치질과 떼놓기 힘들다. 이 사실을 변비가 심했던 그 당시에 알게 됐다. 변비에 대해서 검색해 보던 도중 연관검색어에서 치질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변비가 치질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에 얼마나 놀랐던지. <무한도전>에서 노홍철이 한동안 개그소재로 써먹어 익숙한 그 치질이라면 수술까지 해야 하는 질환이 아니던가. 치질은 곧 수술이라는 자체 결론을 내렸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치질을 꽤 편파적으로 인식하고 살아왔다. (유산균을 들인 시점이 이 때가 아닌가 싶다.) 그러다 치질 관련 책을 읽게 됐다. <왜 고치질 않니?>라는 중의적 제목을 가진 책이다.


'나 치질 있소!'라고 당당히 외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항문외과에 방문하는 것을 당연하게 쉬쉬하는 대한민국에서 말이다. 그래서 검색해봐도 단편적인 이야기들 밖에는 발견할 수 없다. 당연하게 어떤 치료 방법이 있는지 제대로 알 수 있는 방법도 없다. 그저 치질은 수술이라는, 내가 잘못 도출한 결과만을 맞닥뜨릴 뿐이다. 그래서 <왜 고치질 않니?>의 이야기는 퍽 새로울 수 밖에 없다.


치질은 성인의 70퍼센트가 앓는 '국민병'이라는 점, 환부의 특성상 치료를 미루거나 병을 방치하거나 혹은 미처 자각하지 못하는 '숨은 환자'가 많은 점, 오늘날 치질은 '수술없이 치료하는 것'이 세계적인 진료 지침입니다.(68쪽), 치질이라는 질환은 당장 수술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위급한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70쪽) 등등 등장하는 내용들 모두 전혀 알지 못했던 사실들이었다. 내가 알고 있던 사실들이 깡그리 무너져내렸다. 저자는 87년부터 항문외과 의사를 하고 있는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다. 그의 말이 거짓일리 없으니, 내가 치질에 대해 알고 있다 생각했던 것들은 완전히 편향되고 잘못된 정보였다. 저자는 치질에 대한 정확한 용어와 시술과 수술 방법, 치질과 비슷하지만 다른 병의 종류, 치질을 스스로 고치는 방법, 치질에 대한 잘못된 정보 등을 전달한다. 특히나 치질의 원인을 8가지로 나누고 사례들을 만화로 설명한 부분은 정보를 쉽게 전달받을 수 있어 유익했다.


저자는 "인간의 몸은 3개월 주기로 세포가 새롭게 바뀐다. 의지를 품고 3개월간 노력하면 자가 치유력이 발휘되어 몸을 구성하는 세포가 건강한 세포로 다시 태어난다. 이에 치질 뿐만 아니라 신체 건강이 전반적으로 향상된다. (123쪽)" 인간의 세포 재생주기를 치질 치료시기로 상정한다.(기본이 3개월이다.) 비수술적 흐름에 맞춰 원인에 따른 해법을 3개월간 꾸준히 노력하게 함으로써 자가 치유력으로 치질을 치료하게끔 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그 방법이라는 것들은 특별하지 않다. 치질의 원인이라는 것이 어쨌든 일상생활 속 잘못된 습관들에서 비롯되는 것이니 그것들을 바로 잡는 방법이다. 아주 기본적인 방법들이 소개되어 있어 '이런 것 가지고 되겠어?' 싶지만, 병의 치료는 역시나 백 투 베이직,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인가 싶다.


내가 가장 관심있게 본 부분은 역시나 변비에 관한 부분이다. 치질 관련 책을 봤는데 신기하게도 내 관심사인 변비를 해소시킬 방법들이 자세히 실려 있었다. 9가지의 솔루션 중에 실행하고 있었던 게 3~4개 정도였다. 그래도 내가 변비를 해소하기 위해 잘 걸어왔구나 싶어서 내심 읽으면서 뿌듯하기도 했다. 새로 알게 된 부분들은 시도해 봄직하게끔 간단하니 기존의 솔루션과 함께 병행해보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변비도 나아지고 더불어 치질의 위험도 줄일 수 있으면 일석 이조 아니겠나. (식이섬유가 수용성과 불용성으로 나뉜다는 것도, 어떤 종류건 변비해소에 좋다는 것도, 해조류나 콩가루, 푸룬 등에도 풍부하다는 것도 새로 알게 됐다.)


조금이라도 꺼림칙하면 바로 전문의에게 진단을 받아보시기 바랍니다. (167쪽)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이 문장이 답이다. 병을 키우지 말고 조금이라도 꺼림칙하다면 바로 진단을 받아 보는 것. 아무리 자가 치유력을 바탕으로 수술을 하지 않는다 해도, 전문의의 도움 없이 임의로 행동을 하는 것은 병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꽤 작고 얇은 책인데 그 속에 담겨 있는 내용은 알차디 알찬 <왜 고치질 않니?>. 치질을 갖고 있는 환자도, 잠재적 발병 가능 환자도, 치질에 대해 제대로 알아 보려면 이 책이 답인 듯 싶다. 어렵지 않으면서도 자세히 설명되어 있고, 다른건 차치하더라도 잘못된 선입견을 없앨 수 있다는 점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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