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플레져 > 일상에 스며든 사랑
호박과 마요네즈
나나난 키리코 지음, 문미영 옮김 / 하이북스 / 2000년 11월
평점 :
절판


 일상에 들어오면 사랑은 그냥 일상이 되고 만다. 나긋나긋한 빨간 하트의 모양이 둥글둥글해지고 색깔도 조금 바래지는 것,  그것이 일상이다. 숨막히도록 조여오는 궁핍한 일상에서 사랑은 사치가 되버린다. 사랑을 앞서나가는 것은 세상에 널렸다. 내 마음의 평화가 다가온 후에 벌일 수 있는 일이 사랑일 수도 있다. 사랑이 우선이라고? 누가? 선뜻 대답하지 못 할 거다. 누가 그렇더라고 말 못 할 거다. 무엇이 우위여서가 아니다. 사랑이 문열고 들어오고 문닫고 나가는 게 선명한 존재여서도 아니다.  사랑에 앞서 나는 살아가고 있으니까.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양품점 판매원인 미호는 음악을 하는 세이와 동거하는 사이. 어쩌다 사랑하게 되고 편한 사이가 됐다. 세이는 팀원들과의 불화로 홀로 곡을 쓰며 지낸다. 미호가 버는 돈만으로 생활하기에는 벅차다. 세이 몰래 양품점 외에 술집엘 나가면서 사랑은 걷히고 일상의 이면, 괴로움이 진을 친다. 미호는 전 애인이었던 하기오를 그리워한다. 무능력한 세이를 볼 때 마다 하기오라면 그러지 않을거라는 망상에 사로잡힌다.

체험해보지 않은 것,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호기심은 제어할 수 없다. 짚을 들고 불더미에 뛰어드는 짓이라고 설명해줘도 이미 어떤 존재로 인해 생겨난 불만의 해소는 직접 겪어 보지 않으면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경험은 꼭 내가 겪어야만 한다. 사랑은 겪어봐야 안다. 다른사람의 경험이나 조언은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주위에서 뜯어말리는 연애에 휘말려 있어도 내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면 어떻게든 그 연애에서 빠져 나오려 하지 않는다. 연애는, 내가 직접 겪어야 하는 지독한 일상이다.

미호를 보고 안타까웠던 건 하기오의 진심을 알게 된 후다. 그녀는 세이를 어떻게 대할까. 통로가 되어줄거라 믿었던 곳에서, 세이보다 훨씬 우월해 보였던 하기오를 다시 만났지만 씁쓸함만을 얻게 된 미호. 미안한 마음때문에 세이에게 더 잘해 줄 것이며 일상을 대하는 태도도 다부져질 것이다. 그러다 또 공허해질 것이고... 그러니 이 만화는 아주 지독한 일상을 다루고 있다.

일상에 이미 스며든 사랑은 사랑으로서 발현되지 못한다. 그건 아주 가끔씩 나와 청량제 역할을 할 뿐이다. 사랑하여 시작했다고 해서 사랑으로 일관되는 삶은 별로 없다. 사랑은 그런거다. 겉은 화려하나 아주 작은 알맹이를 품고 있는 것. 그 작은 열매를 발견하더라도 너무 놀라지는 말자. 다 그런거다. 내가 너무 회의주의자 같나? 그런데, 정말 그렇다. 그런 줄 알면서도 또 하고 싶은 게 사랑이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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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플레져 > 묻지마, 이유는.
뱀에게 피어싱
가네하라 히토미 지음, 정유리 옮김 / 문학동네 / 200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정상적인 것, 평범한 것에 반대하는 말은, 반항이었다. 오래전에. 어른 흉내를 내는 아이들이라고 하지만, 이젠 그 말도 옛스럽다. 하고싶은 대로, 내키는 대로 사는 삶이 있을 뿐이다. 그런 삶에 대해 손가락하지 말기, 아예 관심도 두지 않기. 각자 알아서 잘 살기. 그렇게 그렇게... 

정확한 이름도 모르고, 정확한 나이도 모르는 남자 아마와 여자 루이가 함께 산다. 아마는 루이를 사랑하고, 루이는 아마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하는 것 같지는 않지만. 그들 사이에 문신과 피어싱을 하는 시바가 있다. 어느날 아마는 루이를 희롱하는 사람을 죽도록 두들겨 팬다. 루이는 아마를 닮은 "빨간 머리" 를 살인범으로 지목한 기사를 보게된다. 루이는 아마의 머리를 염색해주고, 아마의 차림새를 바꾸려 한다. 아마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아마가 행방불명 되었다가 변사체로 발견되었을 때 그제야 루이는 아마를 사랑했었던 것 같다며 아마의 부재를 실감한다. 심적, 물질적으로 시바가 범인일지도 모른다는 모호한 결말로 소설은 끝난다.

세사람에게는 피어싱과 문신이 공통점이다. 스플릿 텅 (신체개조, 혀에 피어싱을 하고 구멍을 점차 확장시켜 뱀처럼 끝을 둘로 나눈 혀)을 한 아마. 아마처럼 점점 구멍을 확장시키는 루이. 피어싱을 해주는 시바. 시바와 루이는 아마 몰래 가학적 성행위를 한다. 아마 앞에서는 시치미를 떼지만.   

아마의 말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분위기는 금방 원래대로 돌아갔다. 나를 위해 다른 남자를 죽일 듯 패준 남자와 나에게 강한 살의를 지닌 남자. 언젠가 이 두 사람 중 누군가에게 죽을 날이 있을까.

그들이 왜 그렇게 사는 거냐고 물음표를 달 필요는 없다. 그들은 지금 놓여 있는 곳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갈 뿐이다. 내가 그들에게 연민을 느끼기 시작한 건 루이가 결혼을 생각할 때 였다. 결혼이란 그렇지 않은가. 제도권 속으로 쑥 들어가버리는 터널인데, 아마의 사랑 때문이었는지 결혼하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하는 루이. 그들이 기성 사회에 대한 반항을 한다거나 반대하는 건 아니지만, 남달라 보이기 때문에 혹시 그럴지도 모른다는 편견이 생기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냥 그렇게 산다. 스플릿 텅이 좋고, 기린과 용문신이 좋고, 그걸 몸에 뚫고, 새기고 신체개조를 하고 싶다.

모든 인간은 M과 S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 내 등 뒤에서 춤추는 용과 기린은 이제 나를 떠나지 않는다. 서로 배신할 수도, 배신당할 수도 없는 관계. 거울에 비친 그들의 눈동자 없는 얼굴을 보고 있으니 안심이 되었다. 이 녀석들은 눈동자가 없으니 날아가지도 못한다.

<M은 Maria의 M / S는 Savage의 S 혹은 Saddist다. >

결혼과 소유의 관계망을 생각하던 루이의 독백은 루이가 그렇게 '날것'은 아니라는 걸 알려주긴 하지만,  충고나 의식의 전환이 필요한 것 같지는 않다. 자신의 등에 새기는 문신을 떠올리는 루이는 그렇게 사는 것이 싫지 않고, 나쁘지도 않은거다. 부정과 긍정의 틈에 끼어있다고 할까. 물에도 기름에도 섞일 수 없는, 섞이기 귀찮은 부유하는 인생.

초등학교때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한 작가의 역량이 그대로 드러나있다. 간결한 문장, 마냥 가볍지만은 않은 서사, 무라카미 류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을 만 하다. 무라카미 류의 "한없이 투명이 가까운 블루"가 간간이 떠오른다. 연애소설은 나이가 든 다음에 쓰는 거라는데, 연애를 하는 중에도 쓰는 건 나쁘지 않은 것 같다.

도대체 나를 두고 어떻게, 어떻게 나를 두고 갈 수 있어? 눈물이 멈추자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턱이 아파오도록 이를 악물었다. 갑자기 뚝, 하고 입 안에서 기분 나쁜 소리가 났다. 혀로 입 안을 더듬어보니 충치였던 어금니가 빠져 있었다. 나는 빠진 이빨을 씹어 으깨 그대로 삼켰따. 내 피와 살이 돼줘. 뭐든 전부, 내가 되면 돼. 뭐든 전부, 내 속에 녹아버리면 돼. 아마 너도, 내 속에 녹아버리면 좋았잖아. 내 속에 들어가 날 사랑하면 좋았잖아. 내 앞에서 사라져 버릴 바에야 내가 되어버리면 좋았잖아. 그랬으면 나는 이렇게 외롭지 않았을 텐데.

루이의 독백은 아름답다. 그녀의 젊은 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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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플레져 >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양골동양과자점 1
요시나가 후미 지음, 장수연 옮김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02년 3월
평점 :
품절


바깥쪽은 부드러운 초콜릿 케이크지만, 한 입 먹어보면 입안에서 퍼지는 새콤함!! 레몬과 초콜릿의 멋진 조화에 손님들도 놀라실 겁니다. 화이트 초콜릿과 피스타치오 페이스트의 그린 데코레이션도. 저희 가게만의 여름 특별 상품이랍니다.

여름은 위대했다고 장미의 시인 릴케는 말했다. 케이크 전문점 앤티크에는 위대했던 여름을 보낸 네 남자가 운영하는 가게다. 여기서 여름이란 그들의 특별한 인생체험기다. 그들에게는 모두 벗어날 수 없는 아픈 과거가 들어있다. 공간 설정부터 뭔가 좀 특별해보인다. 상권, 유동인구등을 따져서 잘 나가는 가게가 되기 위한 몸부림을 치는 사람들과 그들은 좀 다른 것이다.  앤티크는 한적한 주택가에 위치해 있다. 남녀노소 구분없이 오다가다 한 번씩 들러 단골이 되고야 마는 특별한 가게 가족들의 "체험 -극복하는 삶" 스토리라고나 할까...

앤티크의 주인 타치바나 부터 살펴보자. 그는 재벌가의 외손주로 어린 시절에 유괴당한 적이 있다. 유괴범은 그에게 달콤한 케이크만 먹였다. 우여곡절 끝에 도망쳐 온 그는 유괴범을 스스로 잡으려는 움직임을 보이지만, 표면적으로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의 친구, 천재 파티셰 오노 유우스케는 "마성의 게이"라고 불리는 호모다. 타치바나와는 고교동창생. 이미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여자보단 남자가 좋았던 그는 자신이 처음 사랑했던 남자, 중학교때 담임선생님과 엄마의 정사 장면을 목격하고 엄마를 증오한다. 역시 표면적으로는 드러나지 않는다. 오노를 사부로 떠받드는 칸다 에이지는  전직 복싱선수다. 이기기만 하면 되는 복싱에 도전하였으나 망막바리 (망막이 그 아래층의 맥락막에서 떨어져 시력 장애를 일으키는 병) 때문에 포기한다. 치카게는 타치바나를 도련님으로 모시는 충복.

그들이 만들어내는 현란한 케이크는 차마 듣도 보도 못한 것들이 많지만, 늘씬하게 상품 설명을 하는 타치바나를 보노라면 아몬드가, 레몬이, 아이스크림이 눈앞에 보이는 듯 하다. 꺼내놓게 되면 절절하게 아플 꾸러미를 하나씩 갖고 있는 사람들이지만,  어떤 한 순간을 사로잡고 있기도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케이크를 만들면서 조금씩 그때의 일을 이해하게 된다. 

그것에서 벗어날 수도, 잊을 수도 없다.  여전히 무섭지만 이미 달콤한 케잌을 만드는 일처럼 상처도 내 생에 자리를 잡고 말았다. 잊는다는 말 처럼 무모한 말은 없다. 나에게 특별한 기억을 안겨준 것이라면 더더욱 그 말은 무용지물. 마음의 상처가 된 것을 잊을 수는 없지만, 그것을 곱씹어 되뇌이고 나를 괴롭히는 건 능사가 아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거다. 그런거다, 라고. 또 악몽을 꿨네. 그렇네. 라고. 물론, 말은 쉽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자꾸 떨궈내려 하면 할수록 더 괴로운 것을. 피할 수 없을 바에는 부딪치라고 했던가. 앤티크 케이크전문점의 남자들도 그렇게 잘 살고 있는데... 

요시나가 후미의 노력이 돋보이는 4권의 마지막 페이지!  만화를 보는 내내 어떻게 이런 요리법을 알게 되었을까 싶었는데, 아주 많은 요리 자료집들이 나열되있었다. 굉장한 노력파이며 야무진 만화가라는 걸 단번에 깨닫는 순간, 그녀의 다른 만화도 보고 싶어지는 걸... 만화도 따뜻하고, 인물의 대사도 따뜻한 건 모두 작가의 기질에서 나온 것이라는 걸... 작가는 작품에서 자신의 성향을 속일 수 없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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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플레져 > 모두 사라지고 말
1973년의 핀볼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윤성원 옮김 / 문학사상사 / 200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아주 쓸쓸한 버스 한 대가 시간을 항해한다. 회색 스웨터, 재즈가 흐르는 LP, 커피, 맥주, 담배, 고양이가 버스 주위를 맴돈다. 버스는 그것들을 취하다가 언젠가는 자신도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뿐이다. 그뿐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버스는 지나온 날의 흔적에 입구와 출구는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덫에 걸리면 끝장이다.

청춘의 한 때를 기억하는 일이 달콤하지 않으리란 건 이미 자취를 남긴 사람들에 의해 알고 있다. 무료함, 무기력, 쓸데없는, 분위기만 잡는, 허황된 것들과 그것들의 원천인 것 같은 허무가 배어 있는 것, 청춘. 누구나 그 시기를 레떼의 강을 건너듯 건너야 하고, 건넜으면 떠나야 한다. 발길 닿는 곳에서 또 반복될지도 모르는 내 짙은 허무. 그것을 떨쳐버리고 살 수 있을까. 끈질긴 세포처럼 달라붙고야 마는 허무의 잔상을...

내가 처음으로 쓴 386컴퓨터에 핀볼 게임이 깔려 있었다. 공을 스타트 지점에 놓아두고, 스페이바를 힘줬다 놓으면  초록색 공이 튕겨 나간다. 현란한 음악소리와 함께 공이 구르는 효과음이 어수선하게 들리는 동안 공은 제 갈길을 찾아간다. 같은 힘을 주었다고 생각하지만, 점수는 늘 달랐다. 더 잘해보려고 하면 점수는 형편없었고, 기대없이 손을 움직이면 점수가 높았다. 가끔 그 아이러니를 인생에 대입해 볼 때가 있다.  기대없이 살자, 라고.

핀볼 판이 붉은색과 검은색이 섞여 있었던 어렴풋한 기억만 남았다. 한밤중에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먹기도 귀찮을 때, 뭔가를 해야 하는데 어떤 무력감이 점점 염세주의자의 시선처럼 변할 때 말이다. 점수를 따는 것도 목적이 아니었다. 그저 그 시간을 보낼 방법이란 그것 뿐이었다. 어쩌다 완벽한 게임을 치뤘을 때 핀볼 게임의 나레이터는 열광했다. 퍼펙트와 엑셀런트를 외친다고 해서 나는 웃지 않았다. 웃음이란 아무때나 나오는 게 아니었다. 그건 상대 없이 나 혼자 치루는 시간 죽이기 게임이었으니까.

명절날 놀러온 어린 조카에게 그 게임을 가르쳐 주었다. 조카는 그 게임 때문에 집에 가지 않겠다고 까지 했다. 눈에 불을 켜고 핀볼 게임에 달려든 조카. 겨우 조카를 보내고 난 후 핀볼 게임을 마치 재발견 한 것 처럼 해보았지만, 역시 내가 하는 핀볼 게임은 재미없었다. 내게 핀볼에 대한 기억은 그렇다.

내 청춘이 무던히 재미없던 만화책 인 줄 알았지만,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들 중에는 배를 잡고 웃을 만한, 누구도 경험하지 못했을 기억들도 들어있다. 그러나 왜 그 거리를 지날 때, 그 시간을 항해할 때 나는 왜 늘 불편해했던 것일까. 늘 지금과 달라야 한다고 나를 재촉했던 것일까. 청춘에 흐르는 그 특별한 기류는 아직도 남아있는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나는 내 삶이 불편하고 나를 변화시키려고만 한다.

30년전에 씌여진 이 소설은 내게도 비슷한 느낌과 체온의 공감대가 있다. 나 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겪는 알러지 같은 어느날들.  가을이 싫다고 했던 소설속의 나를 닮을 것만 같다. 가을은 푸르렀던 한 때를 접어두고 초원으로 변해갈 길목에 우뚝 서있다. 잔인한 봄 보다 더 잔혹할 가을. 어느 곳으로 나아가든 지나치지 못하는 길이 있다. 우리의 생에서는 그것이 청춘이고, 계절중에는 가을일 것이다.

정말로 일어난 일이다. 다만 사라졌을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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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플레져 > 내것 같지 않은 장면
버스, 지나가다
함정임 지음 / 민음사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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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것 같지 않은 장면, 내 인생에 온전히 달라붙어도, 떨려나가지도 못한 채 예기치 않게 불쑥 떠오르다 마는 장면들.

먼지가 묻어났다. 행간 사이에서, 풍경 속에서. 버스는 지나간다. 그냥 지나간다. 버스가 잠시 멈춘 사이에 이야기가 피어난다. 그들은 각자의 기억만을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늘 동시에 어떤 일이 생긴다. 내 방을 갖던 날, 아버지가 숨을 멈춘다. 왕고모가 계단에서 구르던 날, 아버지는 권고 사직을 당한다. 동시에, 공교롭게도 벌어지는 일들. 그 모두가 내것 같지 않은 장면이다. 상실의 시대는 내 주위를 맴돈다.

건조하고, 건조하다. 습기가 배는가 싶다가도 금세 아버지에게 존대말을 해야 하는 나의 규칙처럼 다시 건조해진다. 마침표와 마침표 사이에 있던 소품들은 금세 마른다. 그녀는 이전에 너무 많이 울었거나 너무 많이 울어야할 일을 앞두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함정임, 그녀는.

카나리아가 목소리를 잃은 것처럼 목소리를 잃은 여자는 페인트공과 관계한다. 페인트공은 여자에게 묻지만 보라색 반팔 니트를 입은 여자는 아무 말도 않는다. 그 일은 여자에게도 페인트공에게도 "내 생의 한 켠을 채울" 장면이었다. "꿈이 생겼다는 것이 얼마나 큰 희망인가를" 깨닫지 못한다면 바보.

소풍. 내가 늘 머무는 곳이 아닌 곳에서 잠시 머무는 것. 그곳에서  내가 품고 있던 욕망을 꺼내볼 수 있다면 그걸로 된거지... 

단편영화를 편집해놓은 것처럼 상징과 암시, 묘사로 채색된 문장들. 고요하게 나와 나와 관계된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들. 버스가 잠시 머물렀다 지나가는 것처럼 함정임의 소설이 지금 내 앞에 멈췄다. 내것 같지 않은 장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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