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플라시보 > 비타민

얼마전 장을 보러 이마트에 갔었다. 평소 가던 이마트가 아닌. 좀 산다하는 동네에 있는 이마트였는데 (어쩐 일인지 지방 소도시인 이곳도 점점 고급 아파트가 들어섬에따라 서울처럼 사는동네 덜사는동네가 나뉘고 있다. 슬픈일이다.) 거기에는 이마트 안에 유기농 코너가 따로 있었다. 이름이 올가였던가? 아무튼 올 머시기 였는데 그 안에 들어가자 눈알 빠지게 비싼 야채와 온갖 건강보조 식품들이 즐비했다. 살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고, 그저 사는 사람들이 어떤거 먹고 사나 구경이나 해보자 싶어 들어갔는데 막상 들어가고 나니 생각이 달라진다. 무농약, 유기농. 이런거 먹으면 좀 더 낫지 않을까? 비싸면 비싼만큼 그 값을 하는게 아닐까? 하고 말이다. 허나 가격표를 보는 순간 저돈 주고 콩알만큼 무농약 유기농 방울토마토를 먹느니 몇걸음 걸어가면 쌓아놓고 한보따리 주는 방울토마토를 배불리 먹으리라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나는 질보다 양이다.

이리저리 구경하다가 약병들이 즐비한 코너로 들어섰다. 그때 내눈에 번쩍 뜨이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비타민 약병이었다. 순간 봄날에서 겁나게 뽀얗고 좋은 피부로 서른중반이라는 나이가 무색한 고현정이 피부관리를 위해 늘 비타민을 빠지지 않고 챙겨먹는다던 기사가 확 떠올랐다. 비타민의 가격은 무려 7만원이었고 3개월 분량의 90알이 들어있었다. 얼른 머릿속으로 계산을 한달에 2만3천원 이며, 약 한알은 무려 780꼴이었다. (실은 뒤에 알약은 방금 계산기로 계산했다.) 한달에 2만 3천원이면 적은돈은 아닌데 차라리 저 돈으로 비타민이 풍부한 오렌지며 브로콜리, 방울토마토 등을 푸지게 사먹는게 더 낫지 않을까? 아니다. 그건 귀찮고 또 매번 챙겨먹기도 힘드니까 약의 형태가 더 났겠지? 만약 과일로 충분하게 해결 가능하다면 고현정이 뭣하러 비타민제를 먹었겠어? 등등등. 내 머릿속은 순식간에 스파게티 접시를 쏟은것처럼 생각에 생각이 얽히고 꼬이기 시작했다.

알라딘에는 마태우스님이라고 의대 교수님이 계시는데 그 분께서 서재에다 비타민제를 먹어야 한다고 떠드는건 다 제약회사의 로비 때문이며 일정 이상의 비타민들은 어차피 소변으로 다 배출된다는 글을 여러번 쓰셨더랬다. 그래서 그때는 '그래, 제약회사의 농간에 넘어가지 말고 그저 먹던거나 잘 먹자' 했었는데 막상 갈색 약병을 앞에 두고 보니 또 그게 그렇지가 않았다. 어쩐지 저 비타민을 챙겨먹으면 나도 고현정처럼 뽀얗고 매끈한 피부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비타민은 피로회복에도 좋다던데 아님 피로라도 안쌓이겠지 하면서 계속 내 마음은 약병을 향해 달려갔다. 요즘 나는 멜라클리어를 먹고 있는데 그게 어느정도 효과가 있다. 어쩌면 내가 마음속으로 이 약을 먹으면 피부가 좋아질꺼라고 (즉 플라시보효과 되겠다.) 믿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효과가 있다. 그렇다면 저 비타민도 사서 먹으면 최소 플라시보 효과라도 볼 수 있지 않을까?

결국 7만원이라는 거금앞에서 굴복을 하고 (카트기 가득 장을 본게 7만원인데, 저 약병 하나를 7만원주고 사야하나 싶었음) 그냥 그 매장을 쓸쓸히 빠져나왔다. 그런데 집에와서 생각을 하고 회사에 앉아서 생각을 해도 하나 먹어줘야하나 싶은 마음이 떠나지를 않는다. 그래서 결국은 아는 친구에게 친분이 있는 피부과 의사에게 전화를 해서 제약회사와의 관계따위는 깨끗이 잊고 정말 솔직하게 필요가 있는지 없느지 말해달라고 부탁을 해 놓았다. 어느정도 효과가 있다면 사는거고 아님 마는거다. 그래 그렇게 결정하도록 하자. 가끔 난 왜 이렇게 인간이 우유부단할까 싶을 정도로 어떤 문제에 대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심하게 망설이는데 지금은 비타민 문제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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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플라시보 > 집에 일찍 들어가기 싫은 날

퇴근후 혼자 클로저를 보고 나니 9시였다. 집에가서 저녁을 해 먹을 생각을 하니 너무 귀찮아서 서브웨이에서 샌드위치를 하나 시켜서 우걱우걱 먹었다. 콜라를 마지막 한방울까지 빨아마셨으나 시간은 겨우 20분이 지나있었다.

영화를 본 후유증 때문일까? 어쩐지 집에 들어가고 싶지가 않았다. 어디가서 차가운 맥주 한병만 마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제일 만만한 박군에게 전화를 했다.

나 : 박군 뭐하나? 술사라

박군 : 타이밍 참 죽인다. 나 지금 미국에 서류보낼꺼 있어서 정신없어

나 : 언제쯤 끝나냐?

박군 : 내 영어 실력으로 봐서 오늘 잘 수 있으면 다행이다.

나 : 오냐. 열심히 해라.

박군 : 야... 이제 박양도 다 되었나보네 술마실 남자도 없는거 보면

나 : 그러게

박군 : 왜그러냐. 그렇게 순순히 말하니까 이상하다. 무슨일 있어?

나 : 일은 무슨... 일해라

박군 : 그럼 회사로 술사들고 오던가

나 : 됐다. 그 정성까지는 못 뻗치겠다.

박군 : 별수없지뭐. 담에 보자.

나 : 오냐.

박군과 전화를 끊고 전화기에 저장된 번호들을 뒤졌다. 부르면 나올 여자친구들이 몇명 물망에 오르긴 했지만 나는 전화를 하지 않았다. 그냥 오늘은 말수적고 속편한 이성친구랑 술을 마시고 싶은 날이랄까? 아무튼 그런 기분이었으니까.

서른이 되고 나니까 남자친구들을 만나는게 겁난다. '나 장가간다 축하해줘라' 혹은 '장가가게 여자 좀 소개시켜줄래?' 따위의 말을 들을까봐. 그들이 언제까지나 늙지 않고, 아니 늙더라도 마누라와 자식 같은건 만들지 말고 그냥 나랑 같이 술이나 마셔주면 안되는걸까? 안되겠지?

나에 대해 너무 디테일하게 알고 있지도 않으면서 알고 싶어하지도 않는 남자친구가 있으면 좋겠다. 가벼운 우정과 무시당하지 않을 정도의 관심. 딱 그정도만 있는 남자친구. 그래서 아주 가끔. 어제밤처럼 이유도 없이 약간 우울하면서 집에 일찍 들어가기 싫은날. 따끈하게 데워진 차를 몰고와서 나를 Bar로 싣고 가서는 같이 술을 마셔주면 좋겠다. 내 앞에서 남자로 보이고싶어 하지도 않고. 내가 여자로 보이길 바라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어이없이 귀여워하거나 떠받들지도 않으며 가르치려 들거나 어줍짢은 충고를 날리지 않는 남자친구가 있으면 정말좋겠네에 정말좋겠네.

집에 가자마자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미니 초코바를 하나 먹으면서 핸드폰 전원을 껐다. 혹시 박군이 내가 불쌍해서 다시 전화할까봐. 아니 솔직하게 말하자면 내가 아무에게나 전화를 걸어서 술마시자고 할까봐 그랬다. 침대에 눕기전 서랍에서 테엽부분이 고장난 자명종을 꺼내서 오래 주물떡거린 끝에 겨우 알람시간을 맞췄다. 머리가 덜 말라서 찝찝했지만 그냥 누워서 불을 껐다. 이런날은 그저 빨리 잠이라도 자야 상책이란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면 나는 미친년처럼 벌떡 일어나서 슈퍼로 달려간다음 맥주를 사와서 혼자 홀짝홀짝 마신다음 취할지도 모른다. 술은 자고로 기분이 좋을때 마셔야지. 약간 우울할때 마셔버리면 뒷감당이 안된다. 슬프거나 힘들거나 아무튼 엿같을때 술에 의지하지 말자. 이게 내 생활 신조다.

빨리 7일이 와서 여동생이 내려오면 좋겠다. 작년 여름에 보고 처음 보는건데... 오면 둘이서 사진이나 한판 박아야겠다. 언니 서른 먹은 기념으로다 사진 한방만 박자고 하면 같이 찍어줄까? 내동생도 나 닮아서 사진찍는거 더럽게 싫어하는데... 어떻게든 꼬셔봐야지. 맞다. 사놓고 짧아서 못입는 청바지가 있구나. 그걸 주고 후려야지 후려서 사진을 찍어놓고 이런 기분이 드는 밤에 침대에 누워서 그 사진을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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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플라시보 > 머리하는 날

미용실을 안간다 안간다 해도 나처럼 안가면. 정말이지 미용실들은 다 문을 닫아야 할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미용실을 간 것이. 입원을 했다가 퇴원한지 얼마 안된 날이었으니까 작년 4월이었다. 내가 여기서 조금만 더 버티면 무려 1년1회 미용실 이용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달성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미용실을 자주 가지 않는 이유는 대략 이러하다. 현재 머리가 아주 긴 편인데 긴 머리는 별로 미용실을 갈 필요가 없다. 그저 집에서 떡지지 않게 잘 감아주고 머리끝이 상할것을 염려해서 트리트먼트를 해주거나 영양세럼을 발라주는 것. 그리고 드라이기를 사용하지 않고 자연바람으로 말리는 것. 이 정도면 사실 긴머리는 충분하게 관리가 가능하다. 스타일에 변화를 주려면 모를까 그냥 긴머리로 유지를 한다면 몇년이고 미용실을 가지 않아도 될 것이다. 또 나는 염색도 안하는 편이다. 왜냐면 원래 머리가 갈색이므로 굳이 갈색으로 염색을 할 필요성을 못 느낀다. 거기다 검은색 염색을 하면 머리 뿌리부분부터 갈색 머리가 자라나서 되게 이상하다. (남들은 검은색 염색을 하면 어차피 자기 머리가 검은색이니 경계가 지지 않고 자연스럽게 검은 머리가 된다.) 이런 이유들로 나는 미용실을 자주 가지 않는다. 하지만 머리가 길지 않았을때는 석달에 한번씩은 미용실에 가서 이리저리 머리를 바꿨었다.

세상에서 제일 멍청하게 느껴지는 시간은 바로 미용실에서 머리에 뭘 말고 앉아있을때다. 잡지책을 주긴 하지만 나는 이상하게 사진이 있는 컬러풀한 책을 오래보면 토할것 같으므로 그것도 임의롭지 않다. 예전에는 그냥 멍청하게 시간아 빨리가라 하고 입을 헤 벌리고 앉아 있었는데 요즘은 읽는 책을 가져간다. 허나 자꾸 머리를 만지고 이리저리 자리를 옮기라고 하는 통에 (제발 한자리에 앉아서 다 할 수 있는 미용실이 있으면 좋겠다.) 완전하게 집중하기가 어렵다.

미용실에 가기 전에는 언제나 가벼운 흥분이 느껴진다. 궁극적으로야 예뻐지고 싶다 단 한마디로 압축이 되겠지만. 그것 만으로는 부족하다. 뭔가 달라지고 바뀌길. 이전의 나와 결별을 하고 새로운 나와 만날것만 같은 기대감. 그래서 그런가? 여자들은 신상에 큰 변화가 있으면 주로 머리모양을 바꾼다. 옷을 사입는건 너무 약한 변화이고, 성형을 해서 바꾸기엔 너무 많은 비용과 시간과 고통이 따르기 때문에 그런지는 몰라도 아무튼 그렇다.

오늘 내가 하려고 하는건 앞머리를 내고 (이마를 훌러덩 까고 있는데 남들이야 그렇다 쳐도 거울볼때 내가 부담스러워 안되겠다.) 퍼머를 할꺼다. 긴 생머리를 하고 있기에는 이제 나이가 너무 많으므로. 물론 나이가 무슨 상관이냐 나는 내멋에 산다라고 말 하고 싶지만. 나이가 드니 어쩐지 조금은 나이에 맞는 무언가를 하면서 살아야 하는거 아닌가 싶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 긴 생머리는 너무 지겹다. 2002년 겨울 이후로 단 한차례도 길이를 줄이지 않았으니 2005년 2월인 지금 얼마나 지겹겠는가. 그렇다고 해서 자르려니 그동안 기른게 아까워서 확 볶아라도 보고 자르고 싶어서 나는 잠시 후 퍼머를 한다. 아주 긴 머리라 아줌마 퍼머가 되기는 되게 힘들겠지만 가끔은 기적적으로 그리되는 경우도 있기에 약간은 무섭다. 긴 머리는 펴는대도 장난 아니기 때문에 마음에 안들면 돈이 이중 삼중으로 든다.

설 연휴라서 다들 오늘부터 쉬는데 우리 회사는 악착같이 내일까지 출근을 시킨다. 그 보복으로 나는 잠시 후 5시면 내려가서 머리를 할꺼다. (퇴근시간은 7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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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플라시보 > 후회

작년 11월. 나는 절대로 돈관계는 하지 않는다는 룰을 깨고 아주 어려운 처지에 있는 친구에게 70만원을 빌려줬다. 남들에게는 70만원이 별거 아니겠지만. 10만원 통장 (용돈을 모아 10만원이 되면 저금하는 통장)에 오랜 기간동안 모아온 돈이라서 그런지 내게는 꽤나 각별했었다. 친구가 처한 처지는 카드 연체의 위기였다. 당시 카드사에 입사를 해 놓은 상태이고 교육생이었기에 카드로 문제를 일으키면 댐시 회사에서 탈락이 되기 때문에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 더구나 친구가 가지고 있던 카드가 하필이면 자기가 입사한 회사의 카드였으니 더 말하면 잔소리였다. 그래서 나는 알토란같이 모아둔 돈을 빌려줬다.

친구가 회사를 그만둔것은 9월 이었다. 2년 넘게 다닌 회사를 관뒀으니 퇴직금에 월급에 아무튼 나 같으면 8개월은 넉넉하게 먹고 살 수 있는 액수였다. 하지만 그 친구는 대책없이 그 돈을 여행이다 술이다 옷이다 하며 홀랑홀랑 쓰기 시작했다. 아무리 내가 옆에서 위험하다고 경고를 줬지만 소용없었다. 세상에 사랑문제만큼 남들 말 안듣는게 있다면 그건 돈문제가 아닐까 싶다. 아무튼 그 친구는 그렇게 있는돈 다 까먹고 나에게 돈을 빌려서 카드를 막고 회사에 입사를 했다. 하지만 그녀는 한달도 되지 않아서 때려치우고 이제는 백수가 되었다.

그녀가 내게 돈을 갚기로 한 날은 바로 오늘이었다. 70만원 다가 아니라 그중 10만원. 11월에 빌려줬으니 무려 4개월의 시간이 있었지만 그녀는 내 돈을 갚을 준비를 전혀 하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 급기야 돈을 못 갚겠다고 좀 더 기다려 달라고 했다. 나는 화가났다. 그녀는 그동안 내가 1년에 한번 갈 미용실을 무려 3번이나 가고 매일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밥을 사먹고 옷을 사입었다. 저축은 남아도는 돈으로 하는게 아니듯 빌린 돈도 남아도는 돈으로 갚으려면 절대로 갚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3개월이나 기다렸으니 약속을 지키라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끝내 지키지 않았다. 5만원 보낼께 6만원 보낼께 어쩌고 하더니 아까 미용실에서 머리를 한참 하고 있는 9시에 전화를 해서는 내 계좌번호를 몰라서 못했다는 것이었다. 어제밤 나는 핸드폰 문자로 보냈으나 그녀는 문자가 하도 많이 들어와서 다 밀렸다고 했다. 나도 가방을 사무실에 두고 와서 계좌번호를 기억하지 못했고 또 잘 쓰지 않는 통장이라 번호를 외우지 못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나중에 갚으라고 했다. 그 와중에 서로 서운한 소리가 오가고 그녀는 말했다. '내 사정 다 아는 니가 그렇게 말하니 서운하다' 나는 물론 그녀의 사정을 다 알고 있다. 그리고 하나 더 알고 있다면 그녀가 정신을 차리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내가 어렵사리 빌려준 70만원을 받으며 말했었다. '널 봐서라도 내가 꼭 정신차릴께' 나 역시 바라는 바였다. 당장에 카드값을 막는 70만원이 아닌. 이제 70만원도 융통할 곳이 없는 자신의 처지를 깨닳고 개선해 가기를 바랬다. 하지만 지금은 후회된다. 그 70만원은 그녀의 막사는 인생을 조금 더 연장시켜줬을 뿐이었다.

역시 정신은 스스로 차린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녀에게 돈을 빌려준 것을 후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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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플라시보 > 유부남과의 연애

행인지 불행인지 몰라도 나는 아직까지 한번도 결혼을 한 남자에게 이성적으로 끌려본적이 없다. 하지만 내가 아는 주변인들 중에서는 저런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참으로 이상한것은 유부남과 연애를 하는 그녀들이 굳이 그 유부남이 아니라도 얼마든지 남자를 사귈 수 있는 꽤 괜찮은 여자들이었다는 것이다. 언뜻 생각하기에 유부남과 사귀는 미혼 여성들은 어딘가 조금 모자라거나 떨어진다는 싶겠지만 실상은 다르다. 즉 유부남을 사귈 수 밖에 없는 상황과 처지때문이 아니라 그냥 자신들의 선택에 의한 것이었다.

내가 제일 처음 유부남과 사귀는 것을 본 사람은 디자이너 K였다. 그녀와 나는 일때문에 만났고 (당시 나는 신문기자였는데 나와 같이 일하는 디자이너랑 손발이 안맞아서 내 코너만 따로 디자이너를 고용해야 했다.) 그녀의 능력은 그쪽의 또래중 최고라는 평을 듣고 있었다. 나보다 나이는 세살이 많았지만. 우리는 곧 친구가 되었고 일로나 일이 아닌 일로도 자주 만나서 밥을 먹고 술을 마셨다. 그러던 어느날 내가 방송국으로 일자리를 옮기게 되었고 거기서 나는 유부남 디제이 M을 알게 되었다. M은 예전부터도 안면이 있는 사이였는데 어느날 M의 코너에 내가 투입되었고 우리팀은 자주 회식을 했다. 그날도 팀회식이 있었는데 그날따라 유난히 취한 M은 전화로 애인을 불러내는 눈치였다. M이 이미 결혼을 해서 아이까지 있다는걸 알지만 방송국 사람들은 그의 사생활을 그냥 모른척 했다. 잠시 후 우리가 술을 마시는 장소로 한 여자가 들어섰는데 나는 그녀가 한눈에 K임을 알아봤다. 나는 K가 들어오는 순간 일어서서 화장실로 갔다. 인사를 할수도 없고 그렇다고 모른척을 하기도 그렇고. 아무튼 당황해서 순간적으로 취한 행동이었다. 화장실에서 어쩔까 망설이고 있는데 K가 전화를 했다. 자기땜에 많이 놀랐냐고. 그리고 아는척을 하건 모르는척을 하건 내가 결정하라고 했다. 자기는 아무 상관없다고. 나는 화장실에서 그녀를 아는척을 할 것인지 아니면 그날 처음 본 척을 할건지 몹시 망설였다. 그 망설임의 이유는 사실 그녀를 위한 배려라기 보다는 내 이미지 관리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유부남과 사귀는 여자와 친구라는 선입견이 생길것이 걱정되었다. 결국 나는 그 자리에서 인사만 하고 급한일이 있는 것 처럼 빠져 나와버렸다. 비록 아는척은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자리에서 끝까지 초면인척 하면서 연기를 할 자신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도 나는 내 주변의 멀쩡한 여자들이 유부남을 사귀는 것을 자주 목격했다. 남자들이 무지하게 매달리고 애원해서 사귈꺼라는 내 생각과는 달리. 그들의 대부분은 그렇지 않았다. 처음 시작이야 유부남쪽에서 숙이고 들어가지만. 일단 사귀기만 하면 상황은 금방 역전이 되어서 여자들이 매달리고 난리였다. 가끔 남자들이 그녀들에게 하는 얘기를 들어보면. 전부 이해해라. 다 알고 시작했지 않느냐 따위의 일방적인 희생을 요구하는 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녀들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작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둘의 관계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이해하고 넘어가야 했다. 보통 여자들이 남자를 사귀면서 할 수 있는 것들도. 유부남을 사귀는 그녀들에게는 너무나 애를 쓰거나 아니면 운이 좋아야 할 수 있는 일들 천지다. 그런데 참 이상한것은 상황이 그렇게 지랄스러우면 지랄스러울수록 그녀들은 자기의 사랑을 더 애틋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타인의 눈으로는 아무리 좋게 봐줘도. 남자는 챙길꺼 다 챙겨가면서 (가정) 재미까지 보는데 (그녀들과의 연애) 그녀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그들이 늦게 만나서 이렇게밖에 사랑할수 없을 뿐이지 그의 와이프보다 자기를 먼저 만났다면 와이프의 자리에 자기가 있을 것이라고 철썩같이 믿는다. 하지만. 내가 바람을 피우는 남자들을 보면 백이면 백 다들 상대방 여자가 특별해서, 혹은 그녀이기 때문에 바람을 피우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단지 바람을 피울 뿐이고 그 상대가 그녀들일 뿐이다. 그녀가 아내가 되면. 역활만 바뀔뿐 상황은 똑같다. 그들은 또 다른 누군가와 바람을 필 것이고 그 상대는 그녀들이 아니다.

미혼인 애인을 사귀는 유부남들은 절대로 자기 가정이 깨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언뜻보면 어떤 상황에서도 가정만큼은 지켜야한다는, 도덕적으로 참 바른것 같이 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기의 이기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애낳고 빨래하고 밥해주고 돌아올때까지 집을 지킬 아내도 필요하고 가끔 만나서 짜릿함을 즐길 수 있는 여자도 필요할 뿐이다. 자기와 함께 살고 자신과 함께 만든 애를 낳느라 이제는 더이상 여자이기 보다는 엄마와 아내로 변해버린 여자를 최대한으로 짓밟는거다. 단지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고 생각 할 뿐. 나는 그들에게 과연 죄책감이란게 있는지 궁금하다.

유부남과 사귀는 그녀들은 희생적이다 못해 착한여자 컴플렉스까지 있다. 물론 제대로 착하다면 아내를 둔 남자를 사귀어서 그 아내를 슬프게하는 일 같은건 안하겠지만. 그들의 착한여자 컴플렉스는 오직 그 남자에게만 향해있기에 가능하다. 그녀들은 어찌나 말도 잘 듣는지 남자가 집에 귀가하고 나면 절대 전화하지 않고 전화를 하더라도 번호가 남지 않도록 전화를 한다. 거기다 그 남자의 주변인들. 특히 직장 동료나 친구들과 함께 있는 자리에 불려나가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남자가 가정에 돌아간 이후 전화하지 않는것을 남의 가정을 지키는 일이라 스스로 미화할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에 그건 단지 그 남자가 바람을 쉽게 그리고 들키지 않게 피울 수 있도록 완벽한 보조를 맞춰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게 남의 가정이 지켜지길 바란다면 그의 옆에 그녀는 없어야 한다. 그러니까, 그게 안되니 이거라도 라고 말하지 마라. 직장동료나 친구들이 있을때 부르는 것을 그 남자가 자기의 존재를 인정하고 남에게도 역시 알리고 싶어서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런 모습을 여러번 목격한 나로써는 그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그녀들을 부르는 이유는. 내 진짜 사랑은 이것 이라며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 바람피는 능력있는 남자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그 주변인이라는 인간들은 전부 그들의 집에 가서는 그의 아내에게 형수님 형수님 하면서 또 그녀들 앞에서도 똑같은 짓을 한다. 아무도 그녀들을 힘겹지만 진정한 사랑을 하고 있는 여자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녀들이 돌아가고 나면 그는 능력있는 남자가 되고 그녀들은 유부남을 사귀는 골빈여자가 될 뿐이다.

그들에게 밥이 아내라면 그녀들은 빵이나 라면이다.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하겠지만. 난 대부분의 경우 그녀들은 빵이나 라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정말로 그녀들이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면 남자는 분명 밥과 헤어지기를 시도할 것이다. 물론 그들이 헤어짐을 시도하지 않는 이유를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말을 하겠지만. 들여다보면 결국은 복잡해지고 싶지 않고 비난받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서이다. 정말 사랑에 미처버린다면 그들은 그렇게 가정적이지 못하다. 그들이 가정적일 수 있는 것은 그녀들에게 미치지 않았고, 그녀들에게 미치지도 않았으면서도 만나는 것은 가끔 빵이나 라면을 먹고 싶은 욕심 때문이다. 어쩌다 유부남을 사귀는 여자들과 얘기를 하다 보면. 그녀들은 그들이 굉장히 가정적인 남자임을 강요한다. 그건 곧 자신과의 연애가 사랑이지 바람은 아니라는 얘길 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그녀들이 그의 가정에 대해 과연 뭘 알고 있을까? 와이프가 어떻게 생겼고 어떤일을 하는지, 애들은 몇살이고 성별은 뭔지 그리고 어디에 살고 있는지 그런것만 알고 있을 뿐이지 정말 그 가정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을까? 안다고 해도 그건 남자의 입을 통해서 전해지는 일방적인 얘기이며 그건 남자만의 진실이지 그 사실에 대한 진실은 아니다. 가끔 진실은 사실과 다르다.

나는 도덕적인 얘기를 하고 싶은건 아니다. 다만 그녀들이 불쌍하다. 어쩌면 그렇게 철저하게 어리석을 수 있는 건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렇게 누군가에게 이용되는 자신이 정말로 보이지 않는 것인지 안타깝다. 바람은 바람일 뿐이다. 그 안에 사랑이 자리잡는다고 하더라도 그건 정말이지 극소수에 불과하다. 어떤 남자도 너 말고도 바람피운 경력이 숱하게 많다고 말하지 않는다. 모두 처음이라고 한다. 너이기 때문에 바람을 피우는 것이지 너 이전과 이후는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말을 어떻게 그렇게 쉽게 믿을 수 있는가? 그에게 가정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 간절함에도 불구하고 나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바람을 피우는 거라고 생각하고 싶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그저 바람을 피울 뿐이고 그 상대가 그녀들일 뿐이다. 거기에는 그 이상 아무것도 없다.

나는 그녀들에게 단 한번도 여기에 쓴 것처럼 말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들의 얘기를 들어줄 뿐이다. 어차피 사랑이란게 그렇듯 이성적인 판단이 끼어들 자리는 없다. 그러므로 괜히 입아프게 충고랍시고 주절주절 말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가끔은 그녀들이 제발 스스로 좀 알았으면 좋겠다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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