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플라시보 > 집에 일찍 들어가기 싫은 날
퇴근후 혼자 클로저를 보고 나니 9시였다. 집에가서 저녁을 해 먹을 생각을 하니 너무 귀찮아서 서브웨이에서 샌드위치를 하나 시켜서 우걱우걱 먹었다. 콜라를 마지막 한방울까지 빨아마셨으나 시간은 겨우 20분이 지나있었다.
영화를 본 후유증 때문일까? 어쩐지 집에 들어가고 싶지가 않았다. 어디가서 차가운 맥주 한병만 마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제일 만만한 박군에게 전화를 했다.
나 : 박군 뭐하나? 술사라
박군 : 타이밍 참 죽인다. 나 지금 미국에 서류보낼꺼 있어서 정신없어
나 : 언제쯤 끝나냐?
박군 : 내 영어 실력으로 봐서 오늘 잘 수 있으면 다행이다.
나 : 오냐. 열심히 해라.
박군 : 야... 이제 박양도 다 되었나보네 술마실 남자도 없는거 보면
나 : 그러게
박군 : 왜그러냐. 그렇게 순순히 말하니까 이상하다. 무슨일 있어?
나 : 일은 무슨... 일해라
박군 : 그럼 회사로 술사들고 오던가
나 : 됐다. 그 정성까지는 못 뻗치겠다.
박군 : 별수없지뭐. 담에 보자.
나 : 오냐.
박군과 전화를 끊고 전화기에 저장된 번호들을 뒤졌다. 부르면 나올 여자친구들이 몇명 물망에 오르긴 했지만 나는 전화를 하지 않았다. 그냥 오늘은 말수적고 속편한 이성친구랑 술을 마시고 싶은 날이랄까? 아무튼 그런 기분이었으니까.
서른이 되고 나니까 남자친구들을 만나는게 겁난다. '나 장가간다 축하해줘라' 혹은 '장가가게 여자 좀 소개시켜줄래?' 따위의 말을 들을까봐. 그들이 언제까지나 늙지 않고, 아니 늙더라도 마누라와 자식 같은건 만들지 말고 그냥 나랑 같이 술이나 마셔주면 안되는걸까? 안되겠지?
나에 대해 너무 디테일하게 알고 있지도 않으면서 알고 싶어하지도 않는 남자친구가 있으면 좋겠다. 가벼운 우정과 무시당하지 않을 정도의 관심. 딱 그정도만 있는 남자친구. 그래서 아주 가끔. 어제밤처럼 이유도 없이 약간 우울하면서 집에 일찍 들어가기 싫은날. 따끈하게 데워진 차를 몰고와서 나를 Bar로 싣고 가서는 같이 술을 마셔주면 좋겠다. 내 앞에서 남자로 보이고싶어 하지도 않고. 내가 여자로 보이길 바라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어이없이 귀여워하거나 떠받들지도 않으며 가르치려 들거나 어줍짢은 충고를 날리지 않는 남자친구가 있으면 정말좋겠네에 정말좋겠네.
집에 가자마자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미니 초코바를 하나 먹으면서 핸드폰 전원을 껐다. 혹시 박군이 내가 불쌍해서 다시 전화할까봐. 아니 솔직하게 말하자면 내가 아무에게나 전화를 걸어서 술마시자고 할까봐 그랬다. 침대에 눕기전 서랍에서 테엽부분이 고장난 자명종을 꺼내서 오래 주물떡거린 끝에 겨우 알람시간을 맞췄다. 머리가 덜 말라서 찝찝했지만 그냥 누워서 불을 껐다. 이런날은 그저 빨리 잠이라도 자야 상책이란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면 나는 미친년처럼 벌떡 일어나서 슈퍼로 달려간다음 맥주를 사와서 혼자 홀짝홀짝 마신다음 취할지도 모른다. 술은 자고로 기분이 좋을때 마셔야지. 약간 우울할때 마셔버리면 뒷감당이 안된다. 슬프거나 힘들거나 아무튼 엿같을때 술에 의지하지 말자. 이게 내 생활 신조다.
빨리 7일이 와서 여동생이 내려오면 좋겠다. 작년 여름에 보고 처음 보는건데... 오면 둘이서 사진이나 한판 박아야겠다. 언니 서른 먹은 기념으로다 사진 한방만 박자고 하면 같이 찍어줄까? 내동생도 나 닮아서 사진찍는거 더럽게 싫어하는데... 어떻게든 꼬셔봐야지. 맞다. 사놓고 짧아서 못입는 청바지가 있구나. 그걸 주고 후려야지 후려서 사진을 찍어놓고 이런 기분이 드는 밤에 침대에 누워서 그 사진을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