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전자책] 면도날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4
서머싯 몸 지음, 안진환 옮김 / 민음사 / 2012년 7월
평점 :
매우 잘 읽히는 소설이었다. 흡입력 있는 드라마가 그러하듯, 이 이야기는 독자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인물들에 몰입하게 만든다. 작가이자 화자인 ‘몸’은 파리에서 만난 미국인 앨리엇을 통해, 그의 가족이 있는 시카고로 향한다. 그곳에서 만난 젊은이들과의 인연은 계속 이어지며, 그들의 삶의 궤적이 한 겹씩 펼쳐진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네 명의 인물이 있다. 앨리엇의 조카 이사벨, 그녀와 약혼한 래리, 래리의 절친이자 이사벨을 사랑하는 그레이, 그리고 모두의 친구인 소피. 이들은 신생 강국 미국의 전형적인 이상과 성향을 반영하는 인물들이다.
이사벨은 현실주의자다. 그녀는 이상주의자 래리를 사랑하지만, 그가 선택한 길을 끝내 함께 걸을 수 없음을 안다. 결국 그녀는 자신을 사랑하는 그레이와 결혼해 두 딸을 낳고, 안정된 삶을 택한다. 소피는 사랑하는 남편을 잃은 뒤 술과 마약, 방탕에 빠지며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 래리는 끝끝내 자신의 이상, 즉 자기 완성의 길을 걷는다. 그레이는 대공황으로 몰락했지만, 이사벨의 외삼촌이 남긴 유산 덕분에 다시 일어선다.
이들의 삶은 미국의 미래를 암시하는 듯하다. 래리와 소피처럼 내면의 진실과 열정을 좇는 이는 소수에 불과하고, 이사벨과 그레이처럼 부와 안정, 명예를 추구하는 이들이 다수다. 그렇다면 그런 미국의 미래는 과연 희망적인가?
화자인 몸은 이 이야기 속 인물들이 결국 각자의 욕망을 실현했기에, 이 이야기는 하나의 성공담이라고 말한다. 대중은 늘 성공담을 좋아하니, 그는 이 결론에 나름의 만족을 표한다. 그러나 존경받는 원로 작가로서, 그의 이러한 태도는 무책임하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그 젊은이들이 그토록 신뢰하고 따랐던 작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들에게 분명한 지침이나 충고를 주지 않았다. 이미 저물어가는 대영제국의 작가로서, 미국이 영국의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된다고 일깨웠어야 하지 않았을까.
래리는 자신의 바람대로 떠들썩하고 소란스러운 인간 집단에 흡수되었다. 이해관계의 상충으로 괴로워하고 세상의 혼란 속에서 방황하며, 선(善)을 강렬히 소망하면서도 외부에 대해서는 독단적이고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매우 소심한 인간들, 친절하지만 까다롭고, 남을 잘 믿으면서도 의심이 강하며, 야비하면서도 너그러운 미국인들 속에 흡수되어 버렸다. 내가 그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정도가 전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