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번역가인 천병희(80) 단국대 명예교수. 천교수는 최근 플라톤의 전집(전 7권·숲)을 완역(完譯)했다. 2012년 '소크라테스의 변론'과 '향연' '파이돈' 등을 묶어 첫 권을 펴낸 후 7년 만의 결실이다. 100세 시대, 나이를 묻는 것은 숙녀에게만 실례되는 일이 아닌 시대, 그럼에도 굳이 선생의 나이를 밝히는 것은 전집이 완간된 날은 천병희 선생이 팔십 세가 되는 생신 날이었기 때문,

천병희 선생의 모든 책은 도서출판 숲으로 모여 출간되었습니다. 출판사가 80세를 맞이하시는 선생에 대한 예우로 특별한 잔치 아닌 전집 출간으로 기념한 것으로 보임, 플라톤은 80세에 생을 마감합니다. 28세에 소크라테스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아 정치 입문의 뜻을 접고 철학의 길로 들어서지요. 천병희 선생은 만 28세에 동백림 사건으로 고초를 겪고 10년간 자격정지, 인생 일대 최대의 위기를 맞이합니다. 번역은 생계를 위한 하나의 길이기도 했지요.
플라톤은 이후 50년 동안 34편 가량의 대화편을 집필합니다. 이것들 모두와 위작논란까지 있는 작품들까지, 플라톤 전집을 천병희 선생이 완역했습니다. 사건이지요. 교수 생활을 병행하지만 정년퇴임 이후 박차를 가해 이번 전집만이 아니라 그리스 로마의 고전을 번역하신 세월이 50년, 전집 출간 의미를 담은 최근 인터뷰 세 꼭지를 소개합니다.(보도順)


 

"스무살에 처음 읽은 플라톤, 여든에도 여전히 그는 내 스승"
 [조선일보] 김성현 기자

입력 2019.05.11 03:01
http://news.chosun.com/…/html…/2019/05/11/2019051100082.html

 

 

 

 

 

 

 

 

 

 

 

 

플라톤 완역 천병희 교수 "고전 보면 시야가 넓어집니다"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송고시간 | 2019-05-12 12:50 
https://www.yna.co.kr/view/AKR20190512022600005?input=1179m

 

 

 

 

 

 

 

 

 

 

 

"끝까지 읽도록 쉽게 번역하는데 공을 많이 들였죠”
 [한겨레]강성만 선임기자

등록 :2019-05-12 18:19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893596.html#csidxc403d9416cc63278ece39f4ca1d46c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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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늦었지만 『그날이 우리의 창을 두드렸다』(세월호의 시간을 건너는 가족들의 육성기록)를 주문하다가 생각한 검색어는 '304명'이었다. 내가 스크랩한 글들을 내가 검색어로 찾게 될 줄은 몰랐다.  작년 여름 『곽재구의 신포구기행』이 출간되었다. 앞서 자료수집용 게시판에 농민신문사의 월간 <전원생활>에 연재된 기행수필을 모아놓은 것. 연재는 2016년 1월부터 2018년 12월까지 36회 진행되었다. 내용이야 훤하지만 책으로 해당 페이지를 찾기가 쉽지 않아, 게시판에서 가서 검색한다. eBOOK을 구매했다면 간단한 문제인 것을. 검색어는 '304명'. 글 네 개가 뜬다. 시간 순으로 살핀다.

 

신포구기행 텍스트를 '304명'으로 검색하다
첫 번째가 진도 팽목항을 찾았을 때다. "시인 나해철은 304명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시집 한 권을 냈다. 시 304편으로 이뤄진 시집. 절망 속에서도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았던 사람의 이야기 한 편을 옮긴다." 그리고 시집 속 단원고 2학년 2반 양온유(17) 양을 기리는 시를 소개한다.(<전원생활> 2017년 3월호, 책은 2부 네 번째)
두 번째는 '목 놓아 부르는 목포' 편이다. '2017년 4월 9일. 목포에 왔습니다.'로 시작되는 후반부에서, 목포 신항. 세월호 거치소를 찾아간다. '304명'은 사고 상황을 정리하는 동안 거론되지만, 한 유가족 어머니의 인터뷰 장면이 와 닿는다.
"정말 비참한 것은 아이 잃은 우리를 매일 누군가가 감시한다는 것이었지요. 그들은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지요. 아이를 잃은 우리를 범죄자 취급하는 것이었지요. 국가가 무엇인지, 국가 권력이 국민에게 이래도 되는지 가슴이 찢어졌지요. 그때부터 마음을 다 닫았어요." (2017년 5월호, 책은 2권 다섯 번째)

 

"국가가 무엇인지, 국가 권력이 국민에게 이래도 되는지"
세 번째는 태안 격렬비열도를 찾았을 때인데, 이번 여행에는 동행이 여럿이다. "신진도 여객선터미널(안흥 외항)로 향했다. 터미널에서 N과 C, Y, <전원생활>의 기자를 만났다. N과 C는 시를 쓰고, Y는 싱어송라이터(가수 겸 작곡가)다." 그들은 등대에 이르는데, 동행인 N시인이 시 한 편을 낭송한다. "국토의 한 끝. 망망대해. 수평선이 펼쳐진 등대 그늘에서 N이 시 한 편을 읽었다. 그는 세월호에서 숨진 304명을 위로하기 위해 304편의 시를 써 『영원한 죄, 영원한 슬픔』이라는 시집을 냈다." N은 나해철 시인이다. 그날 밤 세월호가 이 섬 부근을 지날 때, 모두 살아있었고, 이튿날 아침의 참사를 상상할 수 없었다. (2017년 9월호, 책은 1부 세 번째)
네 번째는, 보성 장도를 찾았을 때다. 이번 여행에서 '중공군 모자'로 거론되는 이가 나해철 시인인데, 여기서는 의사 나해철이다. 고교 시절부터 친한 친구였던 두 시인이 장도에 지난해(2017년)에 새로 생긴 13km의 산책로를 걷는다. 이번에 친구를 소개하는 내용은 좀 남다르다. "중공군 모자는 지난해 아름답고 슬픈 시집 한 권을 냈다. 세월호 희생자 304명을 위로한 시집 '영원한 죄 영원한 슬픔'이 그것이다. 304일 동안 매일 한 편의 시를 쓰며 많이 울었고 많이 아팠고 더 많이 그리웠다고 한다. 지난 한 해 나의 큰 자랑은 내 친구가 낸 이 시집이다."(2018년 2월호, 책은 3부 여섯 번째)

 

지난 한 해 나의 큰 자랑은 내 친구가 낸 이 시집
인세의 대부분을 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활동비로 기부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세월호 5주기 행사가 전국 곳곳에서 열렸다. 그렇게 4월이 갔다. 4월 12일, 목포 신항, 거치된 녹슨 세월호 앞에서 진행된 음악회(전남 20개 시군 드림오케스트라 추모음악회)에 다녀오는 것이 올해 나의 추모 행동이었다. 전남 20개 시군 학생들로 구성된 꿈키움 드림오케스트라 단원 1천여 명이 무대에 섰다. 관객들보다 출연자가 더 많은(?) 해서 특별한 공연이었달까? 굳이 하나를 더 거론한다면 영화 <생일>을 본 것. 음악회에 다녀와서 마음이 편치 않던 참에, 개봉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 영화를 보았다. 불편함이 있었는데 그것을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다. 흔히 말하는 피로도와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다. 아직 해결되지 못한 문제들이 산적한데, 이렇게 다큐도 아니고 정극(형식)으로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이 좀 비현실적이었다고 할까? 영화가 끝나고 엘리베이터를 탈 때였다. 화장실에서 좀 전에 마주친 중년의 사내가 탑승한다. 좀 전의 그는 세수하고 1회용 타올로 얼굴과 손의 물기를 닦고 있었다. 용기를 내어 그에게 물었다. 영화 어땠어요, 힘들었어요, 였던가 정확한 대답(멘트)을  기억은 못하는데 내가 가지는 감정과 유사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생일>이 끝나고, 영화 어땠어요, "힘들었어요!"
절반쯤 읽다가 멈춘 나해철의 『영원한 죄, 영원한 슬픔』 후반부를 읽기 시작한다. 페이스북을 통해 대부분을 읽었기에 익숙하지만 아직 다 읽지를 못하였다. 지난 주 토요일 광화문에서는 집회를 한 모양이다. 유투브에 집회 실황을 다룬 동영상을 보았다.‘다시 촛불, 자한당해산 촛불집회’다.
https://youtu.be/UrfOsjvzHOw
유가족인 어머니 한 분이 무대에 오른다. 호성이 엄마다. 분노와 절규다. 세월호참사 희생자와 유가족들에 대한 제1야당의 막말, 광화문 광장에 천막당사를 설치하겠다는 막무가내, 오죽 하면 ‘다시 촛불’이겠나! 동영상 24분에서 34분까지 10분 동안의 발언은 가슴을 후빈다. "이것이 나라냐!" "국가는 없다" 2014년 4월 이구동성으로 던진 질문이 계속되고 있다.
"나라가 뭔가. 대한민국 이 나라는 대체 뭐하는 곳인가, 이 부모가 가만히 집에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알면 알수록(똑바로 들어~) 이건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평범한 대한민국의 시민들이 살고 있는 이 나라가, 아니었어요. 1%의 저들의 나라." (위 호성 엄마의 연설 중)

 

해철은 304편의 추모시편들의 맨 앞에 '서문'을 앞세웠는데, 일종의 서시다.
"우리 국가를 믿고 있다가,/ 우리 사회를 믿고 있다가,/ 우리를 믿고 있다가,// 가만 있으라는/ 지도자의 말을 따르다가,// 산 채로 수장되신 분들에게,/ 세상에 남겨진 그분들의 가족들에게,// 국가는 없었다./ 우리 사회는 산산이 깨져 있었고, /우리는 없었다.// 그분들과 함께 하고자,/ 그분들이 되어 보고자,/ 울고, 외치고, 몸부림한 일 년 동안의 기록을 그분들께 바친다. // 영원한 죄와 / 영원한 슬픔을 / 벗어날 수 없을 것이나/ 더 나은 우리 민족공동체를 꿈꾼다.” (서문 전문)

 

"알면 알수록 이건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2017년 1월, 『천만 촛불바다-촛불혁명기념시집』(실천문학사, 2017-01-25)이란 시집이 나온 모양이다. 신경림, 강은교, 박노해 등 '블랙리스트' 시인 61명 참여했다. '2016년 겨울 천만 촛불집회에 대한 시인들의 서정적 응답'이라는데, 거기 수록된 박노해의 시가 제목부터 예사롭지 않다. 「이게 나라다」전문이다.
"눈발을 뚫고 왔다/ 추위에 떨며 왔다/ 촛불의 함성은 멈추지 않는다/ 100만 촛불은 꺼지지 않는다// 어둠의 세력은 포위됐다/ 불의와 거짓은 포위됐다/ 국민의 명령이다/ 범죄자를 구속하라// 눈보라도 겨울바람도/ 우리들 분노와 슬픔으로 타오르는/ 마음속의 촛불은 끄지 못한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우리는 멈춰서지 않는다// 나라를 구출하자/ 정의를 지켜내자/ 공정을 쟁취하자/ 희망을 살려내자// 눈에 띄지도 않는 작은 나는/ 백만 촛불 중의 하나가 아니라/ 백만 촛불의 함성과 한몸이 된/ 크나큰 빛이 되어 나 여기 살아있다// 이게 나라다/ 이게 민주다/ 이게 역사다/ 촛불아 모여라/ 될 때까지 모여라" 
 

박노해의 「이게 나라다」, '다시 촛불' 국면에 새로워    
최근에 완간된 번역가 천병희의 플라톤전집 전7권 중 4권이 『국가』다. 첫 번역판은 2013년 2월에 나왔다. 한 고전모임에서 간사 역할을 할 때 얘기다. 교사들 모임과 엄마들(학부모) 모임의 토론회가 주1회씩 진행되었는데,  2014년 1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1년에 걸쳐서 읽고 토론했다. 필자는 각각 다른 날 진행된 두 모임에 다 참석했는데, 바로 그 시기에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것이다. 텍스트는 천병희 선생의 번역이었다, 어쩌다 그렇게 된 것인데, 특히 뒷풀이(3교시)에서 벌인 열띤 그리고 격앙된 토론을 기록해놓았으면(녹화)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이 든다.
2015년에는 플라톤의 주요 대화편 중 중요 대목들을 필사하는 고전 필사다이러리북이 같은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플라톤의 대화』다. 이 책에는 「향연」,「프로타고라스」, 「소크라테스의 변론」, 「파이돈」, 「파이드로스」 그리고  「국가」에 수록된 천병희의 번역 중 중요 대목들을 필사하게 해놓았다. 이 책에 수록된 「국가」는 509d~521c로, 『국가』의 제6권 후반부에서 제7권 전반부에 해당한다. 구매만 해놓고 '활용'하지는 않았는데, 며칠 전에야 「국가」부분부터 필사하기 시작했다.

 

2014년 1년동안 『국가』토론하는 동안 참사 일어나
철학자가 통치자이거나 통치자가 철학자가 되어야 한다. 플라톤이 주창한 『국가』의 핵심이다. 플라톤전집 7권에 수록된 <서한집>을 보면, 플라톤이 시칠리아 시라쿠사이 시를 두 차례 더 방문하여 이론을 실천하려 했던 과정을 엿볼 수 있다. 특히, 플라톤이 쓴 것으로 인정되는 일곱 번째 편지에 주목한다. 그러나 「국가」에서 이 주장은 철학에서 최고 경지에 이른 이가 곧 통치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교육받은 적이 없어서 진리를 모르는 자들이야 말할 나위도 없지만 교양 쌓는 일에만 일생을 바치는 것이 허용되어 있는 자들 역시 국가를 능히 통치할 수 없다는 것은 '그럴 것 같은' 것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 아닐까? 전자들의 경우는 공과 사를 불문하고 모든 행동의 지침이 될 수 있는 생활의 유일한 목적이 없기 때문에 그렇고, 후자들의 경우는 자신들은 살아 있는 동안 이미 '축복 받은 자들의 섬들'에 가서 살고 있다고 믿으므로 자진해서 일을 떠맡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네.” (『국가』519d)

 

「국가」의 이론을 실현하려 했던 플라톤의 실험
그만큼 교육을 통해(곧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은 지도자(오피니언) 그룹이 기반이 되고 제 역할을 할 때 철인 통치는 가능하다. 그러나 일정한 반열에 오른 철학자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통치권을 맡지 않으려고 애를 쓴단다. 인생 도처에 상수(上手)가 있다지만 그들이 적재적소에서 제 역할을 맡기란 쉽지 않다, 그런 얘기로 들린다. 그러므로 아래 인용한 것과 같은 기이한 일이 발생하는데, 이를 오늘날 우리나라에 적용해서 살펴보면 와 닿는 것이 많다. "이게 나라냐?" 우리는 세월호 참사를 통해 국가가 없음을 알게 되었고, 동시에 국가를 발견하기 시작했다. 호성이 엄마의 절규가 귓전에서 쩌렁쩌렁 울린다.

"그리하여 우리 것이자 여러분의 것이기도 한 이 국가는, 오늘날 그림자를 둘러싸고 서로 싸우는가 하면 정권이 무슨 대단한 선이라고 되는 듯이 정권을 둘러싸고 당파싸움을 일삼는 자들이 다스리는 많은 국가들처럼 꿈속에서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눈을 뜨고 제정신으로 통치하는 국가가 될 것이오. 그러나 사실은 다음과 같소, 통치할 사람들이 통치하는 일에 가장 열의가 적은 나라는 가장 훌륭하고 가장 조용하게 통치되지만, 그와 반대되는 치자들을 둔 나라는 그와 반대로 통치될 것이오,” (『국가』520c~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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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를 고발한 자들이 도대체 어떤 논거를 제시했기에 소크라테스가 나라에 죽을죄를 지었다고 아테나이인들을 설득했는지 나는 가끔 이상하게 생각하곤 했다." 필자가 '소크라테스의 최후' 며칠을 영화로 만든다면 이 부분 크세노폰의 회상을 큰 고민없이 영화의 첫 부분에 자막이나 내레이션(narration)으로 사용할 것이다.
 

빵 터졌다. 인질이 생존본능이 작동하여 인질범을 옹호하고 그의 심기를 '케어'하게 된다. 이것은 단지 인질극만이 아니라 일상의 여남(女男) 관계에서 작동되고 있다. 심각한 주제를 다룬 책을 읽다가 말 그대로 '빵 터졌다!' 1973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일어난 인질극에서 유래하는 스톡홀름 증후군의 사례는 거의 인간의 역사와 함께 한 것이 아닌가, 필자는 그런 근거를 오래된 고전에서 찾고 있다. 어쨌든 『여자는 인질이다』 1장('네 원수를 사랑하라')에서는 '스톡홀름 증후군'을 보이는 인질극의 몇몇 사례를 소개한다. 그리고 후반부에서  '인질 생존을 위한 행동 원칙'을 다룬다.

 

심각한 주제를 다룬 책을 읽다가 말 그대로 '빵 터졌다!'
인질 석방을 위해 노력하는 협상팀에게 인질이 진실을 말하거나 도움이 되리라고 예단할 수 없다. 검찰까지도 (이후 재판정에서) 인질이 자신을 가해한 인질범이 합당한 처벌을 받는데 (검찰을) 협력할 것이라고 섣불리 기대할 수 없다는 것. 사정에 이러함에도 인질극이 진행되는 동안 (경찰의) 협상팀은 인질범·인질 간의 유대감을 키우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 둘 사이의 유대감이 인질의 생존 가능성을 높여준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앞의 책 74~75면). 실제로 스톡홀름 증후군을 연구한 전문가들은 인질의 생존 확률을 높이려면 인질범을 대할 때 지켜야 할 여러 행동 원칙 및 방침을 제시한 바 있다. 유사시의 재난을 대비해 매월 15일이면 민방위훈련을 하듯, '스톡홀름 증후군'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면, 혹시라도 그런 상황에 처했을 때(누가 알겠는가), (호신술처럼) 자신만이 아니라 함께 연루된 인질들을 구할 확률을 높아진다는 얘기다. 터너가 권하는 행동 원칙 중 첫째는 이렇다.
“희망을 유지하고, 인질범이 희망을 유지하도록 최대한 도와라. 희망이 없는 인질범은 다 포기하고 모든 인질을 살해한 후 자살할지 모른다.”
판도라의 상자에 끝내 남은 것 하나가 희망이었다는데 가혹하다. 한마디로 가해자든 피해자든 죽음을 눈앞에 맞이했다는 점에서 형성되는 동지적 연대감을 활용하시라는 말씀. 오로지 생존을 위해 인질은 그 상황에서 역지사지(易地思之), 인질의 입장에서 사고하고 협조하지 않을 수 없다. 가르치고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니라 동물적인 본능이 작동하는 것. (자세한 수칙은 책에서 확인하시고) 이런 상황을 다룬 영화에서 익히 보았을 법한 행동수칙이 제시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재난대비용 자기계발서의 일종이 된다.

 

판도라의 상자에 남은 것 하나가 희망이었듯, 가혹하다

어쨌든, 이어서 인질 경험이 있는 메클루어는 납치·감금 상황에 놓인 인질에게 생존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행동할 것을 권한다.
"감금이 장기화될 시 인질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인질범의 적대감을 누그러뜨리고 인질범의 호감을 사는 일이다… 인질이 특정 계급이나 체계의 상징이 아니라, 개인이자 한 개인으로 보이도록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야 한다… 인질범과 대화할 기회가 있다면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소크라테스식으로 잘못을 깨우쳐주려는 시도는 일체 금하고, 인질범에게서 가족과 문화적·개인적 관심사, 목표, 동기 등을 끌어내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후략)"
이 심각한 조언을 읽는 동안 '빵 터진' 대목은 "소크라테스식으로 잘못을 깨우쳐주려는 시도는 일체 금하고"다(안주일절이 아니고 안주일체 여기서는 '일절'인 듯한데). 앞서 인용에 이어지는 터너가 제시하는 행동원칙3은 '다른 인질과 섞여들어 최대한 눈에 띄지 않도록 해라.’이다. 어쨌든 메클루어의 조언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소크라테스가 대체 어쨌기에, 플라톤의 대화편 중 주요한 것들 몇 편은 반드시 교양 차원이 아니라 생존 차원에서 읽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그런 생각이 든 것이다.

 

소크라테스식으로 잘못을 깨우쳐주려는 시도는 일절 금하고
필독해야 할 플라톤의 대화편 1번은 당연히 「소크라테스의 변론」이다. 자신에게 유죄로 투표하고(1차), 형량과 관련하여 '사형'에 투표할 아테나이 시민들(배심원들) 앞에서 소크라테스는 스스로 변론하면서(가급적 약은 약사에게, 진료는 의사에게, 변론은 변호사에게 맡겨야 한다, 그래야 고용대란도 해결되지 않겠는가), 배심원들의 자존심을 무참히 짓밟는다.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앎의 출발점이라는데(무지의 지), 이 말은 배심원들 입장에서 보자면, 너는 네가 무엇을 모르는지조차 모르는 그런 (비참한) 존재라는 것. 플라톤은 이날 스승 소크라테스가 행한 변론을 그럴듯하게 재구성했지만, 소크라테스의 또 다른 제자인 크세노폰은 상당히 다르다. 당시 재판정 상황을 전해 듣고 단도직입으로 진단하는데「소크라테스 회상록」 얘기다. 
"소크라테스를 고발한 자들이 도대체 어떤 논거를 제시했기에 소크라테스가 나라에 죽을죄를 지었다고 아테나이인들을 설득했는지 나는 가끔 이상하게 생각하곤 했다."
「소크라테스 회상록」의 첫 문장이다. 만약 필자가 감독이 되어 ‘소크라테스의 최후의 며칠을’ 영화로 만든다면 이 대목의 크세노폰을 특별히 고민하지 않고 영화의 첫 부분에 자막이나 내레이션(narration)으로 사용할 것이다.

 

약은 약사에게 진료는 의사에게, 변론은? 변호사에게
『소크라테스 회상록』에 수록된 크세노폰의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살핀다. 역시 첫대목이다.
"소크라테스가 법정 출두 명령을 받았을 때 자신의 변론과 삶의 종말에 관해 어떻게 생각했느냐 하는 것도 내 생각에는 회고해볼만한 가치가 있는 것 같다."
앞서 인용에 대응하는 새 글의 첫 문장이다. 이에 관해서는 다른 사람들도 글을 썼는데, 그들은 모두 그(소크라테스)의 잘난 체하는 말투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천병희의 주석은 그 대표적인 필자와 저작으로 「소크라테스의 변론」35c~38b를 제시한다). 크세노폰에 얘기를 이어 살피자.
"하지만 그들이 밝히지 않은 것이 있으니, 그것은 그가 이미 자신에게는 삶보다 죽음을 더 바람직하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것을 밝히지 않으면 그의 잘난 체하는 말투는 어리석어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소크라테스의 제자 헤르모게네스가 누설했다는 비밀을 소개한다, 그(소크라테스)는 다른 모든 것에 관해 논의하면서도(재판에 앞서 굵직한 대화편의 대화를 바쁘게도 수행한다. 「테아이테토스」부터 「정치가」에 이르기까지) 재판에 관해서는 일정 언급하지 않는 것을 보고 물었다는 것,

 

「변론」35c~38b, 플라톤도 잘난 체 하는 말투 담아
"소크라테스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변론해야 할지도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나요?" 돌아온 대답이 가관이다. "자네는 내 인생 전체가 변론을 위한 준비였다고 생각지 않나?" 「소크라테스 회상록」을 마무리하면서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대해 진단한다. 역시 헤르모게네스로부터 당시 상황을 듣고 내리는 진단이다. 한마디로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죽음(사형)을 자초했다는 것. 일종의 자살, 아테나이 시민들에게 죄책감을 남기는 죽음이다.
플라톤의 대화편들에서 소크라테스가 대화 곳곳에서 상대방을 조롱하는 대목들이 등장하지만, '변론'에서는 대놓고 아테나이 시민들에게 거침없이 얘기한다. 그들에게 해야 할 얘기를 해야 할 순간에 하는 것이지만, 자신에게 불리한 표결 결과가 나오는 것을, 어쩌면 그러기를 바라고 그리 했다는 식으로 진단하는 것. 이유는 이렇다. 1)소크라테스는 곧 죽을 나이였다. 2)누구나 사고력이 쇠퇴하여 살아가기 힘겨운 인생의 시기를 피하고자 했다. 해서 정직하고 솔직하고 고결하게 자기 변론을 (속 시원히) 하고 사형선고를 더없이 태연하게 받아들이는 길을 스스로 선택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죽음을 자초했다
플라톤이 정리한「소크라테스의 변론」이나 크세노폰의 회상 속에서만 '소크라테스식으로 잘못을 깨우쳐주려는' 태도가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소크라테스의 이른바 '산파술'에 걸려들어 비참함을 맛보는 대담자가 한둘이 아니다. 그의 표적이 된 사람은 어느 누구도 논쟁에서 ‘살아남지’ 못한다. 플라톤-소크라테스는 그렇게 기획되었다. 재판정에서 스스로의 변론 이전에, 소크라테스는 (적어도 플라톤의 대화편에 따르자면) 아테나이 시민들 다수, 충분할 정도로 많은 잠재적인 적들을 양산해온 셈이다. 자업자득이다. 예나 지금이나 철학은 철학이고 정치는 정치인 인 것을……. 거침없이 스스로를 죽음으로 내모는 ‘변론’ 중 해당 부분(앞서 언급한) 일부와 이 대화편의 유명한 끝부분을 인용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끝까지 소크라테스는 아테나이 시민들을 불편하게 한다. 마지막 선물이다.
"또한 내가 미덕과 그밖에 대화를 통해 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캐묻곤 하던, 여러분이 들었던 그런 주제들에 관해 날마다 대화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에게 최고선이며, 캐묻지 않는 삶은 인간에게 살 가치가 없다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내 말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소크라테스의 변론」38a)
"하지만 이제 떠날 시간이 되었습니다. 나는 죽으러 가고, 여러분은 살러 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에서 어느 쪽이 더 나은 운명을 향해 가는지는 신 말고는 아무도 모릅니다." (같은 대화편 42a, 마지막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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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인질이다 열다 페미니즘 총서 3
디 그레이엄.에드나 롤링스.로버타 릭스비 지음, 유혜담 옮김 / 열다북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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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 논문 형식이라 잘 읽히지는 않는데, 그래도 다루는 내용이 놀랍다. 제시하는 사례 말고도 살면서, 꼭 <그것이 알고 싶다>(SBS)를 즐겨 시청하지 않아도 주변 혹은 의외로 가까운 데서 독자들이 경험하고 있는, 그때마다 왜 그럴까, 던진 질문에 대한 일련의 대답을 담고 있다. 정확히는 ‘이거 뭐지?’ 하면서도 질문으로 생성되지 않았던 것이 생성되는 경험일 것이다. 머리말 첫머리에
"첫 번째로 우리는 여기서 여남 관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할 것이다. 여러분은 다시는 이전 같은 방식으로 여자, 또는 남자, 또는 여남 관계를 바라볼 수 없을 것이다. 두 번째로 이 책을 읽는 건 감정적으로 힘겨운 여정이 될 것이다."
라고 밝히고 있다. 
 

 ‘이거 뭐지?’  질문으로 생성되지 않았던 것이 생성되는 경험

맞는 얘기인데, 이처럼 책을 읽는(이론을 확인하는) 과정이 힘겨운 여정이 된다는 것. '어렵다‘는 난해함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연구 논문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 흔히 철학서적 읽기에서 겪는 어려움과 다른 어려움이 있기는 하다. 문제는 '다시는 이전 같은 방식으로' 이하다. 고정관념이 한 방에 깨질 것이며, 그럴 내용을 함유하고 있으며, 그렇다는 자신감의 표출이다. 독서를 통해 기존의 고정관념을 깰 수 있다면 이 얼마나 훌륭한 과정이며 기다리는 순간인가? 또 하나 여성들을 지칭할 때 '그들'이라 하지 않고 '우리'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로 한 것에 대한 배경설명이다.

"'우리'를 쓰기로 한 건 이 책이 여자들에 의해, 여자들을 위해, 여자들을 대상 독자로 쓰인 여자들에 대한 책이라는 점을 모든 독자가 확실히 알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43면)

라고. 그렇다면 남자 독자인 나(필자)는 봐서는 안 되는 책을 '훔쳐보고' 있는 것인가? 호기심을 자극하는데 이보다 더 그럴듯한 설정이 또 있겠나 싶다. 그 진의를 몰라서 하는 얘기는 아니다. 그만큼 '우리'가 처한 문제를 우리가 자각하고 우리가 먼저 해결하기 위한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 누군가가 특히 남자들일 수도 없고 그들이 '해주는' 것어서는 안 되며, 그럴 수도 없더라는 사실 확인으로 읽는다.

 

누군가 특히 남자들이 '해주는' 것어서는 안 되며, 그럴 수도 없더라

페이퍼로 이 책을 다룬 바 있거니와, 이 책의 근간(출발점)이 되는 여남 간 유대감을 다룬 그레이엄의 논문이 발표된 해는 1991년이란다. 이 논문은 발표되자마자 전국적으로 언론의 뜨거운 관심을 모았는데, 그만큼 논문의 결론은 충격적이며 도발적이었다. 필자는 페이퍼에서 양귀자의 개정판 소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과 연동하여 다뤘는데, 양귀자 작가가 이 논문을 읽고 이 작품을 썼는지 여부가 궁금해진다. 그만큼 이 책이 다루는 사례들과 소설 속 상황은 다른 듯하면서도 의외로 깊이 있고 복합적인 사례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소설 속 상황은 그 인질이 여자가 아닌 남자라는 점, 그리고 제기하는 문제점을 폭로하고 사회문제로 등재하기 위한 방편으로 인질극을 행한다는 차이점이 있다.
출판사 제공 책소개의 헤드라인은 「여자의 삶을 보는 방식을 완전히 바꿔 놓을 것이다! 지난 25년간 상담가, 심리학자, 페미니스트에게 강력한 영감을 준 책!」이다. 첫 문장을 이미 얘기했다. 25년이란 아마도 이 책의 원전 초판 시점(1994)을 기점으로 하는 듯하다. 4반세기가 흘렀음에도 나는 책을 읽으면서 <그것이 알고 싶다> 등에서 이 책의 추천사를 쓴 이수정 교수 등 범죄심리 전문가들의 멘트를(최근의 사건을 다룬 콘텐츠까지)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몇 회인지 기억할 수는 없지만 스톨홀름 증후군에 대한 언급이 숱하게 나왔을 것이다. 
 

25년간 상담가, 심리학자, 페미니스트에게 강력한 영감을 준 책, 25년이라니..

1973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는 벌어진 인질극을 취재하던 기자 대니얼 랭은 인질범과 인질 사이에 싹튼 '일종의 공동체 의식'에 흥미가 생겨 당사자들을 인터뷰한다. 이 책 2장에서는 1974년 미국 잡지 「뉴요커」에 실린 랭의 기사를 바탕으로 사례를 소개한다. 이 시건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이 책의 주저자인 그레이엄은 논문을 통해 스톡홀름 증후군 이론을 발표한다. 그리고 이어 이 이론에서 가지를 친 사회적 스톡홀름 증후군을 서술한다. 여남 관계에서 발생하는 인질극은 우리의 너무도 가까운 일상 속에서 지금도 현재진행형으로 행해지고 있다는 것.

필자가 흥미롭게 읽은 한 대목을 고르라면 1장(네 원수를 사랑하라)의 스웨덴 스톡홀름을 포함한 실제 인질극의 사례와 74면에서 시작되는 '인질 생존을 위한 행동 원칙'이다. 인질극이 벌어졌을 때 협상팀은 인질의 안전을 위해서 웬만하면 인질점-인질 간의 유대감을 키우려고 노력한다는 것. 스톡홀름 증후군을 역이용하여 인질의 안전을 기한다는 얘기다. 이는 별도의 글에서 다루기로 하자. 어쨌든 저자도 머리말에서 '경고'했지만 단숨에 읽기에는 벅찬 내용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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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양귀자 지음 / 쓰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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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다섯 시면 어김없이 수협공판장에서는 왁자지껄 경매시장이 펼쳐진다고 한다. 그렇고 그런 항구가 아니니까, 볼만할 것이다. 가까이에 있지만 아직 가보지는 못하였다. 후미진 어디쯤에서 소매도 가능은 하다는데, 낮에 지나다보니 소매를 금하는 문구가 있다. 그래도 '야매' 구입은 가능하다는 얘기다. 어쨌든 그러므로, 보다 가까이에 있는 □□시장에서 반(半)건조 생선을 비롯해 필요한 것은 구할 수 있다.
 

‘가격차이야 좀 있겠지, 그러니까 도매고 소매지’ 그런데 도·소매 시장이 너무 가까이에 있어 문제라면 문제이겠지‘
이사를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것도 있고, 마땅히 밥을 해먹을 상황도 아니라서 한두 개씩 삶의 소품들을 사서 배치하는 동안 매식을 했다. 혼밥이 얼마나 어려운지, 가격도 그렇거니와, 아예 문전박대. 외로움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 그런데 이름이 중하(중간 크기의 새우)라던가, 가는 식당다 간장에 절인 그 반찬이 나오는 것이다. 수염과 머리를 뚝 떼어버리고 양념된 간장(게장 양념과 별 차이는 없는 듯)에 빠뜨리는 그런 반찬.
 

‘왜 가는 집마다 이것이 있지요,’ 하니 ‘얼마 전에 많이 잡혀서’,

싼값에 공급되었다는 얘기다. 사실 백반 하면 전라도 백반인데, 깔리는 반찬이 많기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 단가를 생각하면 고민이 깊어진다. 많이 잡혀서 쌀 때 다량을 확보해서 말리거나(반건조) 절일 수 있다면, 그렇게 가격 저항을 이겨내면서 다양한 찬거리를 확보하는 것. 해서 나는 내가 만드는 첫 반찬으로 간장에 절이는 중하(간장새우)에 도전했다.

깐 바지락도 사가고, 가끔 반건조 생선도 한 묶음씩 사가는 나를 시장 입구의 할머니가 눈여겨보신 모양이다. 마침 중하가 적잖게 잡혔나 보다. 가는 집마다 특유의 플라스틱 바구니에 쌓여 있다. 기회다. 해서 그동안 간장게장(꽃게장은 아니다)을 서너 차례 사먹으면서 비축해준 게장국물을 떠올리고는 만 원어치 중하를 샀다. 하루 전 5천원어치를 사다가 삶아먹은 적이 있는데, 씻어서 데쳤더니 새우 수엽들이 엮어서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아, 그렇구나, 그래서 간장새우는 반 토막인 것이 밥상에 올랐던 것이구나. 해서 문득 사장 할머니에게 문의했다.

 

"요것들, 머리랑 수염 떼고 간장에 담가야지요,"

했더니 할머니 말씀, “아이고 잘도 해묵소, 어지간한 여자들보다 낫소! 요새 젊은 것들은 뭣이 뭔지도 모르고…….” 그나마 '주부'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까? 칭찬으로 느꼈는데(사실 나는 어지간한 식재료에 대해서는 고급정보를 확보하고 있는, 이 분야의 일을 좀 했던 사람이다) 생각할수록 집이 가까이올수록, 이상한 생각이 드는 것이다. □□시장 사장 할머니에게 이런 느낌을 얘기하면 이해하실까, 요리는 여자가 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그분에게…….”

 

주문한 책이 왔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1992년에 첫 발간된 양귀자의 개정판 소설이다. 읽다보니 책으로는 처음 읽는 것임을 알았다. 아마도 영화로 본 모양이다. 그때는 샐러리맨으로 정신없을 때이기도 했다. 어쨌든 나는 중하 1만원어치를 구매하면서 받은 이상한 느낌을 사장 할머니에게 설명할 수 없을 것 같다. 이것이 나의 리뷰다.

 

"나는 많은 것을 원하지 않는다. 나는 단지 하나의 시작을 보여주고 싶을 뿐이다. 그래서 시작했다. 그러므로 나는 반을 이루었다." -강민주의 노트에서(책 269면)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적용되지 않은 경우도 있다는, 사례가 될 수 있는 간단치 않은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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