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를 고발한 자들이 도대체 어떤 논거를 제시했기에 소크라테스가 나라에 죽을죄를 지었다고 아테나이인들을 설득했는지 나는 가끔 이상하게 생각하곤 했다." 필자가 '소크라테스의 최후' 며칠을 영화로 만든다면 이 부분 크세노폰의 회상을 큰 고민없이 영화의 첫 부분에 자막이나 내레이션(narration)으로 사용할 것이다.
빵 터졌다. 인질이 생존본능이 작동하여 인질범을 옹호하고 그의 심기를 '케어'하게 된다. 이것은 단지 인질극만이 아니라 일상의 여남(女男) 관계에서 작동되고 있다. 심각한 주제를 다룬 책을 읽다가 말 그대로 '빵 터졌다!' 1973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일어난 인질극에서 유래하는 스톡홀름 증후군의 사례는 거의 인간의 역사와 함께 한 것이 아닌가, 필자는 그런 근거를 오래된 고전에서 찾고 있다. 어쨌든 『여자는 인질이다』 1장('네 원수를 사랑하라')에서는 '스톡홀름 증후군'을 보이는 인질극의 몇몇 사례를 소개한다. 그리고 후반부에서 '인질 생존을 위한 행동 원칙'을 다룬다.
심각한 주제를 다룬 책을 읽다가 말 그대로 '빵 터졌다!'
인질 석방을 위해 노력하는 협상팀에게 인질이 진실을 말하거나 도움이 되리라고 예단할 수 없다. 검찰까지도 (이후 재판정에서) 인질이 자신을 가해한 인질범이 합당한 처벌을 받는데 (검찰을) 협력할 것이라고 섣불리 기대할 수 없다는 것. 사정에 이러함에도 인질극이 진행되는 동안 (경찰의) 협상팀은 인질범·인질 간의 유대감을 키우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 둘 사이의 유대감이 인질의 생존 가능성을 높여준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앞의 책 74~75면). 실제로 스톡홀름 증후군을 연구한 전문가들은 인질의 생존 확률을 높이려면 인질범을 대할 때 지켜야 할 여러 행동 원칙 및 방침을 제시한 바 있다. 유사시의 재난을 대비해 매월 15일이면 민방위훈련을 하듯, '스톡홀름 증후군'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면, 혹시라도 그런 상황에 처했을 때(누가 알겠는가), (호신술처럼) 자신만이 아니라 함께 연루된 인질들을 구할 확률을 높아진다는 얘기다. 터너가 권하는 행동 원칙 중 첫째는 이렇다.
“희망을 유지하고, 인질범이 희망을 유지하도록 최대한 도와라. 희망이 없는 인질범은 다 포기하고 모든 인질을 살해한 후 자살할지 모른다.”
판도라의 상자에 끝내 남은 것 하나가 희망이었다는데 가혹하다. 한마디로 가해자든 피해자든 죽음을 눈앞에 맞이했다는 점에서 형성되는 동지적 연대감을 활용하시라는 말씀. 오로지 생존을 위해 인질은 그 상황에서 역지사지(易地思之), 인질의 입장에서 사고하고 협조하지 않을 수 없다. 가르치고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니라 동물적인 본능이 작동하는 것. (자세한 수칙은 책에서 확인하시고) 이런 상황을 다룬 영화에서 익히 보았을 법한 행동수칙이 제시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재난대비용 자기계발서의 일종이 된다.
판도라의 상자에 남은 것 하나가 희망이었듯, 가혹하다![](https://image.aladin.co.kr/product/18594/83/cover150/k212635061_1.jpg)
어쨌든, 이어서 인질 경험이 있는 메클루어는 납치·감금 상황에 놓인 인질에게 생존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행동할 것을 권한다.
"감금이 장기화될 시 인질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인질범의 적대감을 누그러뜨리고 인질범의 호감을 사는 일이다… 인질이 특정 계급이나 체계의 상징이 아니라, 개인이자 한 개인으로 보이도록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야 한다… 인질범과 대화할 기회가 있다면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소크라테스식으로 잘못을 깨우쳐주려는 시도는 일체 금하고, 인질범에게서 가족과 문화적·개인적 관심사, 목표, 동기 등을 끌어내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후략)"
이 심각한 조언을 읽는 동안 '빵 터진' 대목은 "소크라테스식으로 잘못을 깨우쳐주려는 시도는 일체 금하고"다(안주일절이 아니고 안주일체 여기서는 '일절'인 듯한데). 앞서 인용에 이어지는 터너가 제시하는 행동원칙3은 '다른 인질과 섞여들어 최대한 눈에 띄지 않도록 해라.’이다. 어쨌든 메클루어의 조언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소크라테스가 대체 어쨌기에, 플라톤의 대화편 중 주요한 것들 몇 편은 반드시 교양 차원이 아니라 생존 차원에서 읽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그런 생각이 든 것이다.
소크라테스식으로 잘못을 깨우쳐주려는 시도는 일절 금하고
필독해야 할 플라톤의 대화편 1번은 당연히 「소크라테스의 변론」이다. 자신에게 유죄로 투표하고(1차), 형량과 관련하여 '사형'에 투표할 아테나이 시민들(배심원들) 앞에서 소크라테스는 스스로 변론하면서(가급적 약은 약사에게, 진료는 의사에게, 변론은 변호사에게 맡겨야 한다, 그래야 고용대란도 해결되지 않겠는가), 배심원들의 자존심을 무참히 짓밟는다.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앎의 출발점이라는데(무지의 지), 이 말은 배심원들 입장에서 보자면, 너는 네가 무엇을 모르는지조차 모르는 그런 (비참한) 존재라는 것. 플라톤은 이날 스승 소크라테스가 행한 변론을 그럴듯하게 재구성했지만, 소크라테스의 또 다른 제자인 크세노폰은 상당히 다르다. 당시 재판정 상황을 전해 듣고 단도직입으로 진단하는데「소크라테스 회상록」 얘기다.
"소크라테스를 고발한 자들이 도대체 어떤 논거를 제시했기에 소크라테스가 나라에 죽을죄를 지었다고 아테나이인들을 설득했는지 나는 가끔 이상하게 생각하곤 했다."
「소크라테스 회상록」의 첫 문장이다. 만약 필자가 감독이 되어 ‘소크라테스의 최후의 며칠을’ 영화로 만든다면 이 대목의 크세노폰을 특별히 고민하지 않고 영화의 첫 부분에 자막이나 내레이션(narration)으로 사용할 것이다.
약은 약사에게 진료는 의사에게, 변론은? 변호사에게
『소크라테스 회상록』에 수록된 크세노폰의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살핀다. 역시 첫대목이다.
"소크라테스가 법정 출두 명령을 받았을 때 자신의 변론과 삶의 종말에 관해 어떻게 생각했느냐 하는 것도 내 생각에는 회고해볼만한 가치가 있는 것 같다."
앞서 인용에 대응하는 새 글의 첫 문장이다. 이에 관해서는 다른 사람들도 글을 썼는데, 그들은 모두 그(소크라테스)의 잘난 체하는 말투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천병희의 주석은 그 대표적인 필자와 저작으로 「소크라테스의 변론」35c~38b를 제시한다). 크세노폰에 얘기를 이어 살피자.
"하지만 그들이 밝히지 않은 것이 있으니, 그것은 그가 이미 자신에게는 삶보다 죽음을 더 바람직하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것을 밝히지 않으면 그의 잘난 체하는 말투는 어리석어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소크라테스의 제자 헤르모게네스가 누설했다는 비밀을 소개한다, 그(소크라테스)는 다른 모든 것에 관해 논의하면서도(재판에 앞서 굵직한 대화편의 대화를 바쁘게도 수행한다. 「테아이테토스」부터 「정치가」에 이르기까지) 재판에 관해서는 일정 언급하지 않는 것을 보고 물었다는 것,
「변론」35c~38b, 플라톤도 잘난 체 하는 말투 담아
"소크라테스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변론해야 할지도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나요?" 돌아온 대답이 가관이다. "자네는 내 인생 전체가 변론을 위한 준비였다고 생각지 않나?" 「소크라테스 회상록」을 마무리하면서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대해 진단한다. 역시 헤르모게네스로부터 당시 상황을 듣고 내리는 진단이다. 한마디로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죽음(사형)을 자초했다는 것. 일종의 자살, 아테나이 시민들에게 죄책감을 남기는 죽음이다.
플라톤의 대화편들에서 소크라테스가 대화 곳곳에서 상대방을 조롱하는 대목들이 등장하지만, '변론'에서는 대놓고 아테나이 시민들에게 거침없이 얘기한다. 그들에게 해야 할 얘기를 해야 할 순간에 하는 것이지만, 자신에게 불리한 표결 결과가 나오는 것을, 어쩌면 그러기를 바라고 그리 했다는 식으로 진단하는 것. 이유는 이렇다. 1)소크라테스는 곧 죽을 나이였다. 2)누구나 사고력이 쇠퇴하여 살아가기 힘겨운 인생의 시기를 피하고자 했다. 해서 정직하고 솔직하고 고결하게 자기 변론을 (속 시원히) 하고 사형선고를 더없이 태연하게 받아들이는 길을 스스로 선택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죽음을 자초했다
플라톤이 정리한「소크라테스의 변론」이나 크세노폰의 회상 속에서만 '소크라테스식으로 잘못을 깨우쳐주려는' 태도가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소크라테스의 이른바 '산파술'에 걸려들어 비참함을 맛보는 대담자가 한둘이 아니다. 그의 표적이 된 사람은 어느 누구도 논쟁에서 ‘살아남지’ 못한다. 플라톤-소크라테스는 그렇게 기획되었다. 재판정에서 스스로의 변론 이전에, 소크라테스는 (적어도 플라톤의 대화편에 따르자면) 아테나이 시민들 다수, 충분할 정도로 많은 잠재적인 적들을 양산해온 셈이다. 자업자득이다. 예나 지금이나 철학은 철학이고 정치는 정치인 인 것을……. 거침없이 스스로를 죽음으로 내모는 ‘변론’ 중 해당 부분(앞서 언급한) 일부와 이 대화편의 유명한 끝부분을 인용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끝까지 소크라테스는 아테나이 시민들을 불편하게 한다. 마지막 선물이다.
"또한 내가 미덕과 그밖에 대화를 통해 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캐묻곤 하던, 여러분이 들었던 그런 주제들에 관해 날마다 대화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에게 최고선이며, 캐묻지 않는 삶은 인간에게 살 가치가 없다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내 말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소크라테스의 변론」38a)
"하지만 이제 떠날 시간이 되었습니다. 나는 죽으러 가고, 여러분은 살러 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에서 어느 쪽이 더 나은 운명을 향해 가는지는 신 말고는 아무도 모릅니다." (같은 대화편 42a, 마지막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