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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인질이다 ㅣ 열다 페미니즘 총서 3
디 그레이엄.에드나 롤링스.로버타 릭스비 지음, 유혜담 옮김 / 열다북스 / 2019년 3월
평점 :
품절
슬픔. 논문 형식이라 잘 읽히지는 않는데, 그래도 다루는 내용이 놀랍다. 제시하는 사례 말고도 살면서, 꼭 <그것이 알고 싶다>(SBS)를 즐겨 시청하지 않아도 주변 혹은 의외로 가까운 데서 독자들이 경험하고 있는, 그때마다 왜 그럴까, 던진 질문에 대한 일련의 대답을 담고 있다. 정확히는 ‘이거 뭐지?’ 하면서도 질문으로 생성되지 않았던 것이 생성되는 경험일 것이다. 머리말 첫머리에
"첫 번째로 우리는 여기서 여남 관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할 것이다. 여러분은 다시는 이전 같은 방식으로 여자, 또는 남자, 또는 여남 관계를 바라볼 수 없을 것이다. 두 번째로 이 책을 읽는 건 감정적으로 힘겨운 여정이 될 것이다."
라고 밝히고 있다.
‘이거 뭐지?’ 질문으로 생성되지 않았던 것이 생성되는 경험
맞는 얘기인데, 이처럼 책을 읽는(이론을 확인하는) 과정이 힘겨운 여정이 된다는 것. '어렵다‘는 난해함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연구 논문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 흔히 철학서적 읽기에서 겪는 어려움과 다른 어려움이 있기는 하다. 문제는 '다시는 이전 같은 방식으로' 이하다. 고정관념이 한 방에 깨질 것이며, 그럴 내용을 함유하고 있으며, 그렇다는 자신감의 표출이다. 독서를 통해 기존의 고정관념을 깰 수 있다면 이 얼마나 훌륭한 과정이며 기다리는 순간인가? 또 하나 여성들을 지칭할 때 '그들'이라 하지 않고 '우리'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로 한 것에 대한 배경설명이다.
"'우리'를 쓰기로 한 건 이 책이 여자들에 의해, 여자들을 위해, 여자들을 대상 독자로 쓰인 여자들에 대한 책이라는 점을 모든 독자가 확실히 알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43면)
라고. 그렇다면 남자 독자인 나(필자)는 봐서는 안 되는 책을 '훔쳐보고' 있는 것인가? 호기심을 자극하는데 이보다 더 그럴듯한 설정이 또 있겠나 싶다. 그 진의를 몰라서 하는 얘기는 아니다. 그만큼 '우리'가 처한 문제를 우리가 자각하고 우리가 먼저 해결하기 위한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 누군가가 특히 남자들일 수도 없고 그들이 '해주는' 것어서는 안 되며, 그럴 수도 없더라는 사실 확인으로 읽는다.
누군가 특히 남자들이 '해주는' 것어서는 안 되며, 그럴 수도 없더라
페이퍼로 이 책을 다룬 바 있거니와, 이 책의 근간(출발점)이 되는 여남 간 유대감을 다룬 그레이엄의 논문이 발표된 해는 1991년이란다. 이 논문은 발표되자마자 전국적으로 언론의 뜨거운 관심을 모았는데, 그만큼 논문의 결론은 충격적이며 도발적이었다. 필자는 페이퍼에서 양귀자의 개정판 소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과 연동하여 다뤘는데, 양귀자 작가가 이 논문을 읽고 이 작품을 썼는지 여부가 궁금해진다. 그만큼 이 책이 다루는 사례들과 소설 속 상황은 다른 듯하면서도 의외로 깊이 있고 복합적인 사례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소설 속 상황은 그 인질이 여자가 아닌 남자라는 점, 그리고 제기하는 문제점을 폭로하고 사회문제로 등재하기 위한 방편으로 인질극을 행한다는 차이점이 있다.
출판사 제공 책소개의 헤드라인은 「여자의 삶을 보는 방식을 완전히 바꿔 놓을 것이다! 지난 25년간 상담가, 심리학자, 페미니스트에게 강력한 영감을 준 책!」이다. 첫 문장을 이미 얘기했다. 25년이란 아마도 이 책의 원전 초판 시점(1994)을 기점으로 하는 듯하다. 4반세기가 흘렀음에도 나는 책을 읽으면서 <그것이 알고 싶다> 등에서 이 책의 추천사를 쓴 이수정 교수 등 범죄심리 전문가들의 멘트를(최근의 사건을 다룬 콘텐츠까지)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몇 회인지 기억할 수는 없지만 스톨홀름 증후군에 대한 언급이 숱하게 나왔을 것이다.
25년간 상담가, 심리학자, 페미니스트에게 강력한 영감을 준 책, 25년이라니..
1973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는 벌어진 인질극을 취재하던 기자 대니얼 랭은 인질범과 인질 사이에 싹튼 '일종의 공동체 의식'에 흥미가 생겨 당사자들을 인터뷰한다. 이 책 2장에서는 1974년 미국 잡지 「뉴요커」에 실린 랭의 기사를 바탕으로 사례를 소개한다. 이 시건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이 책의 주저자인 그레이엄은 논문을 통해 스톡홀름 증후군 이론을 발표한다. 그리고 이어 이 이론에서 가지를 친 사회적 스톡홀름 증후군을 서술한다. 여남 관계에서 발생하는 인질극은 우리의 너무도 가까운 일상 속에서 지금도 현재진행형으로 행해지고 있다는 것.
필자가 흥미롭게 읽은 한 대목을 고르라면 1장(네 원수를 사랑하라)의 스웨덴 스톡홀름을 포함한 실제 인질극의 사례와 74면에서 시작되는 '인질 생존을 위한 행동 원칙'이다. 인질극이 벌어졌을 때 협상팀은 인질의 안전을 위해서 웬만하면 인질점-인질 간의 유대감을 키우려고 노력한다는 것. 스톡홀름 증후군을 역이용하여 인질의 안전을 기한다는 얘기다. 이는 별도의 글에서 다루기로 하자. 어쨌든 저자도 머리말에서 '경고'했지만 단숨에 읽기에는 벅찬 내용을 담고 있다.